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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고재완의 지식창고 2024.10.28. 11:00 (2024.10.28. 10:36)

조선의 교육기관(서울의 4부 학당과 향교)

 
오늘은 지난번 서당에 이어 4부 학당과 향교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사부 학당(4部學堂) - 나라에서 서울의 동쪽·서쪽·남쪽·중앙에 설치한 학교로, 현재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
향교(鄕校) - 지방의 관립 교육 기관이다.
오늘은 지난번 서당에 이어 4부 학당과 향교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 사부 학당(4部學堂)
 
나라에서 서울의 동쪽·서쪽·남쪽·중앙에 설치한 학교로, 현재 중·고등학교에 해당한다.
 
① 한성(漢城)의 동부(東學), 서부(西學), 남부(南學), 중부(中學)에 세워진 관립 교육 기관이다.
 
 
② 4부 학당은 1261년(고려 원종 2)에 세워진 동서 학당(東西學堂)에서 기원하였다. 고려 말 성리학의 전래로 유학 교육에 대한 수요가 높아지자 고등 교육 기관인 국자감(國子監) 외에 동서 학당을 설치하여 중등 교육 기관으로 삼았다.
 
조선은 건국 이후 수도인 한성을 5개의 지역인 부(部)로 편성하면서 각각의 부에 학당을 설치하여 5부 학당을 두었고, 이들 학당은 기존의 사찰 건물 등을 빌려 쓰면서 운영되다가 세종(世宗, 재위 1418~1450) 대가 되어서야 독립된 건물을 갖추게 되었으나 세종 때 북부 학당이 폐지되어 4부 학당만 남게 되었다.
 
③ 서울의 4부 학당은 지방의 향교(鄕校)와 같은 급의 교육 기관으로 주로 소학(小學)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강독하였다.
 
☞ 『소학』은 일상생활에서의 예의범절과 충신과 효자의 도리를 담은 도덕 교과서이고, 사서는 『논어』, 『맹자』, 『중용』, 『대학』의 기본 유학 경전과 오경은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의 유학 책을 말한다.
 
 
④ 각 학당에는 교수관 2명과 훈도 5명을 두었는데 모두 성균관(成均館) 관원이 겸임하도록 하였다. 각 학당의 학생 정원은 100명이었으며, 정기적으로 시험을 쳐서 우수한 성적을 거둔 자에게는 성균관 입학 자격이나 진사시, 생원시 시험에 직접 응시할 자격을 부여했다. 임진왜란을 겪으며 학당 건물이 불에 타 없어졌고 조선 후기에 다시 재건되었으나 관학(官學)이 쇠퇴하면서 학생 수가 줄어들어 사실상 교육 기관으로서의 기능을 상실한 채 명맥만 유지하였다.
 
 
▼ 향교(鄕校)
 
① 지방의 관립 교육 기관이다.
 
② 조선은 교육을 통해 유교 이념을 확산시키고 통치 질서를 유지하려고 하였다. 조선 시대의 교육 기관은 크게 관학(官學. 현재 공교육)과 사학(私學. 현재 사교육)으로 구분되는데, 관학에는 서울의 성균관(成均館)과 4부 학당(四部學堂), 지방의 향교가 있었고, 사학으로는 서당(書堂)· 서원(書院)이 있었다.
 
③ 유학을 향촌 사회에 보급하여 백성을 교화하려는 목적이 있었기에, 세종 때에 이르면 전국 대부분의 군현에 설립된 향교가 329개에 달했다.
 
④ 향교마다 토지와 노비를 지급했을 뿐만 아니라 공부에 필요한 책인 『소학』을 주고, 교관(敎官)을 파견하여 교육을 담당하게 하였으며, 향교에 입학한 16세 이상의 교생(校生)에게는 군역(군대)을 면제하는 특권을 주었다.
 
☞ 대학(大學)·중용(中庸)·논어(論語)·맹자(孟子)·시경(詩經)·서경(書經)·예기(禮記)·역경(易經)·춘추(春秋)·성리대전(性理大全) 각 2질(帙)과 소학(小學) 10질을 제주의 향교(鄕校)에 내렸다.-세종실록 (1435년, 세종 17년 9월 21일)-
 
⑤ 향교의 운영은 그 고을의 수령(守令)이 맡았기 때문에 대부분 수령이 통치하는 관아(官衙)와 가까이 있었다.
 
 
⑥ 향교 입학 정원은 고을의 위상과 크기에 따라 차이가 났는데, 대략 부(府)⋅대도호부(大都護府)⋅목(牧)의 경우는 90명, 도호부(都護府)는 70명, 군(郡)은 50명, 현(縣)은 30명의 학생을 수용하도록 하였다.
 
☞ 경기 광주군 문묘(文廟) 【광주(廣州) 북쪽에 있다. 나라에서 각도 주(州)·부(府)·군(郡)·현(縣)에 모두 문묘를 두고 향교(鄕校)라 한다. 그 생도(生徒)의 수(數)는, 유수관(留守官)에는 50명, 목(牧)과 도호부(都護府)에는 40명, 군(郡)에는 30명, 현(縣)에는 15명으로 하며, 제전(祭田)·학전(學田)과 노비(奴婢)를 주는데, 각기 차이를 둔다. 도호부(都護府) 이상은 모두 교수관(敎授官)을 두고, 군과 현에는 혹은 교수관, 혹은 교도(敎導)를 두며, 만일 민호(民戶)가 5백 호가 차지 못하면 학장(學長)을 두어 생도들을 가르치게 한다. 뒤에는 각 고을[邑]에 다시 문묘를 적지 아니한다. 】 - 세종실록 지리지, 경기 광주목-
 
⑦ 학생은 소학(小學)과 사서오경(四書五經)을 주로 배웠는데, 배운 내용에 대하여 매일[일강(日講)], 매월[월과(月課)], 매년[도회(都會)] 등 다양한 방법으로 평가받았다.
 
⑧ 향교는 크게 문묘(文廟)와 학교(講學)의 두 공간으로 나누어지며, 그 사이에 담을 쌓아 구분하였다. 문묘에는 중앙에 공자의 위패(位牌)를 모신 대성전이 있고, 양옆으로는 선현(先賢)들의 위패를 모신 동무(東廡)와 서무(西廡)가 있었다. 학교의 중앙에 강당인 명륜당(明倫堂)을 두고, 교생들이 기숙하는 동재(東齋)와 서재(西齋)를 좌우에 설치하였다.
 
⑨ 조선 후기에 각 지방에 서원이 건립되는 등 사학이 발달하면서 향교가 가진 교육적 기능은 다소 약화되었다. 그러나 향교에 소속되는 것은 양반 신분을 보증해 주고 군역을 피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으므로, 유생들은 향교에 소속되기를 희망하였다. 또한 향교의 제향 기능은 지속적으로 유지됨에 따라 향교는 서원과 더불어 해당 지역 사족들의 결집 장소가 되기도 하였다.
 
 
▼ 비교표
 

구 분

4부 학당(4部學堂)

향교(鄕校)

과정

관립 중등과정(현재 공교육인 중·고교)으로 무료 교육

성균관 입학 자격이나 진사시, 생원시 시험에 직접 응시할 수 있는 자격을 부여

교재

소학과 사서오경(논어, 맹자, 중용, 대학과 시경, 서경, 역경, 예기, 춘추)

장소

서울

지방(鄕)

정원

학당마다 100여 명

고을의 위상과 크기에 따라 다름

문묘

없음(성균관 대성전))

있음

제사

없음(성균관 대성전에서 지냄)

공자, 여러 성현들 위패를 모신 대성전에서 제사 지냄

배움터

명륜당

기숙사

동재와 서재

 
▣ 양천 향교
 
① 조선시대에 양천은 서울이 아닌 곳으로 향교가 있었다. (현재는 복원한 것)
 
② 양천 향교는 홍살문, 외삼문, 중앙에 명륜당, 명륜당 좌우에 동재와 서재를 지나 내삼문, 대성전, 대성전 옆의 전사청이 있다.(전학 후묘 前學後廟 형태)
 
 
③ 대성전(大聖賢)에 모시는 27 위패
 

5성(五聖)

공자, 안자, 증자, 자사, 맹자

송조 4현(宋朝四賢)

주돈이, 정호, 정이, 주희

우리나라 18현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혼,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

 
 
▼ 외삼문(外三門)
 
▼ 명륜당과 동재와 서재(기숙사)
 
▼내삼문
 
▼대성전 현판
 
 
▣ 강화 교동 향교
우리나라에서 제일 오래된(고려 때 세움) 향교란다.
 
 
 
 
 
 
출처 : 우리 역사 넷, 강서구청, 민족문화 대백과, 규장각, 네이버,향교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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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