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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4.11.06. 10:36 (2024.11.03. 13:30)

1855년 미 청년 4명 동해안 구조...레이건 대통령, 한국 국회TV연설에서 한국민에 감사

 
제17회 동해왕 이사부 항로 탐사(19) - 고래 포경선과 독도
조선 정부는 이양선(異樣船)이 조선 연안에 표류하여 도착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면 우호적인 정책으로 식량을 제공하고,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돌아갈 수 있도록 온갖 도움을 주었다.
제17회 동해왕 이사부 항로 탐사(19)
- 고래 포경선과 독도
 
 
조선 정부는 이양선(異樣船)이 조선 연안에 표류하여 도착하거나 어려움을 당하면 우호적인 정책으로 식량을 제공하고, 부서진 배를 수리하여 돌아갈 수 있도록 온갖 도움을 주었다.
 
1983년 11월 12일 미국 제40대 레이건 대통령은 대한민국 국회를 방문해 국회 생중계 TV 연설에서 백여 년 전 조선 강원도 통천 바닷가에 상륙한 4명의 미국 청년 이야기를 꺼냈다. 미국 대통령은 한국 국민에게 거듭 감사의 말씀을 전했다.
 
 
▲ 미국 레이건 대통령 대한민국 국회 TV 연설 (사진;대한민국 국회 기록보존소)
 
 
“지금부터 백여 년 전 미국의 배가 한국에 접근했을 당시에는 한국과 미국 양국의 국민은 상대방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것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미국의 사절에 대한 조선 왕국의 첫인사말은 환영과 희망의 말이었습니다. 미국인에 대한 첫인사말은 한국 국민의 특성을 많이 나타내 주는 것이기 때문에 본인은 그 일부분을 읽어보고자 합니다.
 
”그대들은 어느 나라 사람들이시오? 수만 리 만경창파 여로에 편안들 하시오? 상품을 교환할 계획이시오? 아니면 이곳을 지나 다른 곳으로 갔다가 고국으로 돌아가기를 원하시오? 하늘 아래 모든 사람이 근본은 같지만, 의관(衣冠)이 매우 다르고, 언어 또한 같지 않소이다. 하나 모두 서로 우정으로 대할 수 있소. 그대들의 소원이 무엇인지 알려 주시오.”
 
미국 대통령 로널드 레이건
 
대한민국 국회의사당 연설문 중 일부 인용
 
 
▲ 미 동부 포경기지 뉴 베드포드 항(사진:미국 뉴 베드포드 고래박물관)
 
 
1854년 6월 14일, 존 D. 차일즈(John D. Childs) 선장이 지휘하는 포경선인 스쿠너 투 브라더스(Two Brothers)호는 모항인 미국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포드 항을 떠나 북태평양의 풍부한 포경지로 향했다.
 
포경선에는 행운과 모험을 추구하는 젊은 선원이 많았다. 그들은 바닷일에 미숙했지만, 용기는 정말 대단했다. 그러나 젊은 선원은 바다 생활에 미숙하여 어려움이 많았다. 조업 중에 실종되거나 힘든 생활에 지쳐서 스스로 배에서 내렸다.
 
1855년(철종 6년) 7월 2일 노랑머리의 젊은 청년 4명이 강원도 통천군 임도면(臨道面) 남애진(南涯津) 해안에 나타났다. 그들은 20대 전후의 단단한 청년이었다. 그들을 구조한 조선 사람들은 여러 날 굶어 배고파하는 청년들에게 따뜻한 죽을 주면서 천천히 먹으라고 권했다.
 
며칠 후 청년들은 기력을 상당히 회복하고 해변을 걸었다. 그러나 바닷가 사람들은 그들이 말하는 것을 전혀 알 수가 없고 도움을 주기 위해 관아에 신고했다. 관에서는 밥과 국과 고기를 실컷 먹도록 해주고 한성으로 보냈다.
 
조정에서는 이들을 중국 베이징으로 호송했다. 당시 호송관 역관 이윤익(李閏益)은 청나라에 도착하여 젊은 선원들이 미국인임을 처음 알았다. 그들은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갔다.
 
당시 나이 23세의 멜빌 켓시는 포경선에 처음 승선했는데 선장의 비인간적인 처우에 불만이 많았다. 포경선에 오르면 돈도 많이 벌고 좋은 음식을 즐길 줄 알았는데 그렇지 못해 항상 침울했다.
 
포경선은 바다에 나가면 오랜 기간 육지에 갈 수 없고 신선한 채소와 식량을 보급받지 못해 선원들은 매일 똑같은 음식에 금방 질려버렸다. 포경선의 선장은 가까운 항구가 있으면 물도 공급받고 신선한 가축을 구하지만 그렇게 할 수 없어 출항할 때 가져온 음식을 주었다. 대부분의 포경선은 몇 달 치 식량을 싣고 고래를 찾아 바다를 돌아다녔다.
 
 
▲ 네덜란드 화가 A. van Salm가 그린 고래잡이(사진:미국 뉴 베드포드 고래박물관)
 
 
한반도의 동해는 한류와 난류가 교차하는 지점이라 다양한 물고기가 많았다. 특히 고래가 좋아하는 먹이가 풍부해 다양한 종의 고래 보금자리였다. 중국은 오래전부터 동해를 경해(鯨海)라 불러왔다.
 
18세기 중엽 고래기름을 이용한 미국 양초 산업이 번창함에 따라 포경업계는 더 많은 고래기름을 확보하려고 혈안이 되었다. 북태평양에서 고래를 잡던 포경선들은 고래 숫자가 계속 줄어들자 새로운 어장을 개척하기 시작해 인도양과 조선의 동해까지 진출했다.
 
 
▲ 국보 285호 반구대 암각화(사진:울산암각화박물관)
 
 
양초는 기원전 3,000년 전부터 이집트 테베와 그리스 크레타 등에서 사용했다. 필자가 이집트 남부 룩소르 왕들의 무덤을 구경하고 룩소르 박물관(Luxor Museum)을 관람할 때 박물관 가이드가 동물 기름을 이용한 고대 양초 제조법과 왕의 무덤을 건설할 때 내부 조명을 자세하게 들려주었다. 이집트 왕들의 지하 무덤에는 놀랍게도 검은 그을음이 하나도 발견되지 않는다.
 
1834년에 발명가 조셉 모건(Joseph Morgan)이 고형의 양초 대량 생산법을 개발한 이후에 향유고래의 머리 부분에 있는 기름을 냉각시킨 뒤 압축하여 만든 새로운 발명품 경랍(鯨蠟)은 불쾌한 냄새가 없고, 밝은 불꽃을 오래 내며, 변형되지 않고, 깨끗하여 인기가 좋았다.
 
1859년에 석유가 처음 발견되면서 포경산업은 사양산업이 되었다. 양초 산업은 1879년 10월 21일 에디슨의 백열전구 개발과 과학의 발전으로 위축이 되었다. 그러나 양초는 종교적인 행사나 각종 의식, 기념일, 평화시위, 촛불시위, 생일, 선물 등에 널리 사용되고 양초에 고급 향을 추가하면서 진일보하여 다시 최고의 전성기를 맞았다.
 
1883년 미국에 외교사절로 파견되었던 보빙사가 귀국하여 대한제국 고종 황제에게 전기 사용을 건의하였다. 고종 황제는 에디슨에게 경복궁에 전구를 설치해 달라고 편지를 보냈다.
 
1884년 에디슨전기회사와 전등 설비 계약을 맺고, 1886년 11월 전등 기사 윌리엄 매케이(Mckay)를 초청해 이듬해 1월 화력발전식 전기등소를 완공했다. 당시 용량은 백열등 750개를 달 수 있는 규모였다. 고종 24년(1887년) 3월 6일에 경복궁 내 건청궁 주변에 최초로 전등이 점화됐다. 백열전구와 야크 전등은 자주 껌벅거려 궁의 상궁들은 ’건달불‘이라고 불렀다. 『승정원일기』와 국립중앙과학관 어린이 과학 달력에 나오는 내용이다.
 
 
▲ 경복궁 전기등소 터 전경(사진:국가유산청, 2015.5.27)
 
 
1849년부터 미국 포경선이 한반도 동해에 진출하여 참고래, 혹등고래, 귀신고래, 북방긴수염고래를 잡기 시작하면서, 선장과 항해사들은 새로운 어장 항로 주변에서 섬이나 작은 암초를 발견하면 해도와 수로지에 기록했다.
 
미국 포경선 체로키(Cherokee, 216t) 호 선장 제이콥 L. 클리브랜드가 작성한 1849년 4월 16자 항해일지에 “해가 질 무렵에 울릉도가 15마일 떨어진 북동쪽에 위치하고, 우리 해도에 나와 있지 않은 작은 two small islands가 남동쪽 20마일 정도 남동쪽에 위치한다.”라고 기록했다.
 
당시 포경선들이 사용하는 해도(海圖)에는 두 개의 섬이 전혀 기재되어 있지 않았다. 포경선 체로키(Cherokee) 호는 정확하게 1849년 4월 17일 12시경에 독도를 발견하였다.
 
포경선 월리엄 톰슨(William Thompson) 호는 1849년 3월 18일 항해일지에 “울릉도 동남쪽 40마일쯤에 어떤 해도에도 없는 3개의 바위를 보았다고 기록하였다. 이는 조선왕조실록 성종 때의 삼봉도(三峯島)와 일치하는 기록이다.
 
캠브리아(Cambria) 호는 1849년 4월 28일에 울릉도를 발견하고 4월 29일에 ’the small islands’를 보았다고 기록하고 항해일지에 그림을 그렸다.
 
 
▲ 캠브리아(Cambria) 호 항해일지
 
 
프랑스 포경선 리앙꼬르 호는 1849년 1월 27에 울릉도 해상에서 독도를 발견하고 1850년 4월 19일 항해 보고서를 제출했다. 프랑스 해군은 1851년에 독도를 발견한 배의 이름을 인용해 독도를 ’리앙꼬르‘라고 명명하고 해군 수로지와 해도에 실었다.
 
1854년에 러시아 극동원정대 푸차친(Putiatin) 제독은 러시아 인기작가 곤차로프를 비서로 대동하고 일본으로 항해했다. 그러나 일본과의 수교 교섭에 실패하고 러시아 항구로 귀항하면서 한반도의 동쪽 해안과 일본의 서쪽 해안을 측량했다.
 
극동원정대는 독도를 1854년 4월 6일 발견했다. 올리부차호가 2개의 섬을 발견하고 높은 봉우리가 있는 서도를 ’올리부차‘, 동도는 ’마 날라이암(Manalai rocks)‘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당시 ’마 날라이암‘이라고 붙인 이유는 올리부차호가 동방에 소속하기 전에는 흑해함대에 속해 있던 1846년 당시 배의 이름이었다.
 
푸차진은 원산을 자신의 상관이었던 라자레프 제독을 기념해 ’라자레프항(Port Lazaref)로 명명했다. 러시아 극동원정대 항해는 러시아 해군지 1855년 1월호에 게재되었다.
 
팔라다호는 1854년 4월에 거문도에 도착해 5일 동안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항해를 마치고 귀국한 후 1858년에 『전함 팔라다호』 2권을 출판해 당시 항해 과정을 자세히 알렸다. 러시아 해군부 수로국은 러시아 해군 필라다(Pallada) 호 장교들이 측량한 자료를 바탕으로 『조선동해안도』에 독도를 조선의 부속 도서로 표기하였다. 1882년 발간한 수정판에는 정밀하게 관측한 독도 그림을 첨가하였다.
 
 
▲ 러시아 해군부 수로국 발행 『조선동해안도』(사진:동북아역사넷)
 
 
1855년 4월에 영국 호넷(Hornet) 함정이 동해 해상을 항해하다 독도를 발견하고 ’Hornet‘이라고 명명해 영국 해군은 1856년 수로지에 이를 개재했다. 그러자 프랑스 해군이 이런 내용을 지적하고 프랑스 해도를 전해주어 이후 두 나라는 독도를 리앙꼬르암(Liancouer Rocks)으로 기록하였다. 프랑스 해군 함정 콩스탄틴(Constantine) 호는 1855년 11월 17일 독도 그림을 그려서 보고했다.
 
플로리다(Florida) 호는 1857년 3월 27일 울릉암(Dagelet Rock)을 보았다고 기록하고, 4월 3일과 4월 7일 기록에는 을릉도와 울릉암 두 섬을 다시 보았다고 기록했다. 여기서 말하는 울릉암은 독도를 말한다. 당시 포경선 선장들은 두 섬이 같이 있는 속도(屬島)로 인식했다.
 
포경선 선장은 포경선이 항구에서 더 멀리 떨어지면 식량이 부족할까 걱정되어 선원들에게 주는 음식을 조절했다. 이에 젊은 선원들은 배가 고파 고참 선원과 자주 다투었다. 이런 사소한 일은 해상에서 자주 발생했다. 멜빌 켓시는 선원 4명을 규합해 보트를 훔쳐 포경선을 탈출했다. 그런데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아다닌 지 여러 날이 되자 멀리서 육지가 보였다.
 
선원들은 육지로 노를 저어갔다. 해안에 도착한 선원들은 조심스럽게 마을에 접근했다. 그들은 마음 좋은 조선 사람들에게 슬픈 표정을 짓고 먹을 것을 청했다. 그들은 배가 부르자 긴 잠을 잤다. 조선 사람들의 도움으로 중국 상하이를 거쳐 미국으로 돌아가게 된 것이다.
 
그런데 힘들게 미국에 도착한 그들은 법원에서 계약 의무를 다하지 못해 의무를 다해야 한다는 판결에 따라 미국 최대 포경기지인 뉴 베드포드항 소속 포경선 투 브라더스호(The whaling ship Two Brothers)로 되돌아갔다. 당시 구조된 선원들은 “조선 사람은 우리를 온갖 친절로 따뜻한 의복과 음식을 주고, 우리를 인간답게 대우해주었다.”라고 증언했다.
 
레이건 대통령이 국회에서 연설할 때는 한국의 해외여행 자유화가 시행되기 전이라 미국 대통령의 포경선 선원 구조 이야기가 신선하게만 들렸다. 한국의 해외여행 완전 자유화는 1989년 시행되었지만, 외국을 나가려면 반드시 반공교육을 받아야 했다. 이 제도는 늘어나는 관광객을 감당할 수 없어 1992년에 폐지되었다.
 
1866년 5월(양력 6월 24일)에 미국 상선 스쿠너 서프라이즈 호가 청나라 산동반도에 있는 즈푸(芝罘, 옌타이, 煙台) 항에서 한약재 감초(甘草)를 잔뜩 싣고 출항해 류쿠(琉球)로 향하던 중 풍랑을 만나 평안도 철산부 선사포(宣沙浦) 선암리에 표착했다. 배에 있던 선원 8명은 미국인 2명, 영국인 2명, 화란인 2명, 중국인 2명이었다.
 
 
▲ 즈푸항(芝罘, 옌타이)(사진:모리스, 1894년)
 
 
당시 철산부사 백락연(白樂淵)은 선원들을 즉시 구조해 청나라 베이징으로 가도록 조치하였다. 백락연은 1877년 정월에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부임하여 1881년 5월에 이임할 때까지 흉년에 잘 진휼하고, 제주성 동남문 밖 도로를 정비하고, 1879년에는 선비들이 과학 공부를 할 수 있도록 사마제(司馬齊)를 설치하고 선비를 배양하여 제주 선비들은 1882년 제주향교에 흥학비가 세웠다.
 
강진에서 51km 떨어진 완도군 소안도 비자리 입구에 제주목사 백락연영세불망비가 있다. 이 비는 소안도 주민들이 제주와 육지와의 항해 중에 바람을 피해 배들이 들어올 수 있도록 선박 기항지를 정해준 것에 대한 고마움의 표시이다. 이를 후풍처(候風處)라 하는데 당시의 배들은 바람을 이용하는 풍선(風船)이라 좋은 바람을 기다리는 길목이 꼭 필요했다. 당시 돛단배들이 태풍 등으로 자주 소안도에 들려 소안도 사람들은 항시 넉넉한 삶을 이어갔다.
 
개항정책을 강력하게 시행한 조선 정부는 1881년 영선사(領選使) 김윤식(1834~1922)이 청나라로 갈 때 백락연을 관변(官邊)으로 보냈다. 백락연은 군기 제조를 연구할 학도(學徒) 25명, 공장(工匠) 13명을 포함한 총인원 69명을 청나라에 인솔하고 유학생 38명이 청나라 기기국(機器局)에서 군기 제조를 학습할 수 있도록 조치하고 귀국했다.
 
조선 관리들은 바다에 표류해 오는 외국인을 인도적인 차원에서 구조한 후 그들이 원하는 대로 조치를 했다. 배를 고칠 수 있도록 나무와 사람을 지원해주고, 양식과 물을 제공하고, 배가 안전하게 출항할 수 있도록 수로 안내인을 붙여주고 베이징까지 역관을 제공했다. 이것은 조선 유교 사회의 전통인 유원지의(柔遠之意)로 ’외국인의 국적을 떠나 낯선 사람을 친척처럼 잘 대접해서 보낸다.‘는 국가원칙과 전통적인 풍속 방식에 따른 것이다.
 
(제20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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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