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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4.11.06. 11:36 (2024.11.06. 10:40)

미 정부, “고래잡이 및 무역중개지 확보 조선정벌 승인”... 벨 사령관, 군 파병 요청 거절

 
제17회 동해왕 이사부 항로 탐사 (20) - 조지 클래이튼 포크 영사와 셔먼호 배상문제
미국 정부는 1885년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와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훈령을 조선 주재 조지 클래이튼 포크(George Clayton Foulk) 총영사 대리에게 보냈다.
제17회 동해왕 이사부 항로 탐사 (20)
조지 클래이튼 포크 영사와 셔먼호 배상문제
 
 
미국 정부는 1885년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General Sherman)와 관련해 조선 정부에 피해 보상을 요구하는 훈령을 조선 주재 조지 클레이턴 포크(George Clayton Foulk) 총영사 대리에게 보냈다.
 
현재 포크(1883~1887)가 작성했던 문서는 미국 국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 뉴욕 공공도서관(New York Public Library), 버클리 대학 밴크로프트 도서관(Bancroft Library at UC Berkely)에 분산 소장되어 있다.
 
 
▲ 미국 국회도서관(Library of Congress)(사진:위키백과)
 
 
미 상선 제너럴 셔먼호는 1866년 음력 7월 27일(양 9.5)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조선 평양부에 통상을 요구해 혼란을 부추기고, 선원들이 포를 마구 쏘아 사람들을 살상했다. 이에 평양부는 배를 불태우고, 흥분한 평양 군민들은 탈출한 선원들을 죽였다.
 
포크 총영사 대리는 조선말을 완벽하게 할 줄 아는 최초의 미국인으로, 본국에서 보내온 훈령을 읽으며 당시 상황을 면밀하게 조사했다. 포크가 만난 사람들은 개신교 선교를 말하고, 상당한 무기를 싣고 와 조선과의 무기 밀거래도 시도했다고 말했다. 어떤 이는 평양 왕릉 발굴과 배에서 살아남은 사람 이야기를 증언했다. 포크는 조선 정부의 문서 기록과 입장을 경청했다.
 
 
▲ 미 상선 제너럴 셔면 호(사진:강화문화연구소)
 
 
포크 총영사 대리가 본국에 보낸 전문에 조금 부정적인 의견을 표시했다. “셔먼호가 대동강에 진입할 시기는 대원군이 통치하던 시기로 프랑스 선교사 9명을 포함하여 기독교인 박해의 표적이 되었다. 당시 많은 사람이 기독교인으로 의심을 받아 처형당한 시기로 병인사옥이 일어났다.
 
평양은 기독교인이 특히 많아 지역 전체가 공포와 흥분에 잡혀있었고 외국인들이 곧 쳐들어올 것이란 불안감이 특히 팽배했다. 그런데 정체 모를 큰 배가 갑자기 대동강에 나타나 조선 측이 배를 회항하라고 여러 차례 요청하는데도 거부하고 포를 계속 쏘아 조선 사람들은 기독교 박해를 복수한 것으로 보았다.
 
당시 기독교를 믿는 사람 중에 외국인과 내통한 사람들이 있어 자기 목이 달아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빠져 공격에 가담했다.” 포크 총영사 대리는 조선의 정당방어를 설명하고 손해배상 청구의 부당성을 논리적으로 항변했다.
 
청년 로버트 저메인 토머스(R. J. Thomas, 1840~1866) 목사는 런던선교회 소속으로 아내와 같이 상하이로 건너왔다가 사역을 하던 중에 아내 캐롤라인이 유산으로 갑자기 죽고, 상사인 무어헤르 선교사와 갈등으로 선교사직을 사임하고 청나라 해상 세관에 통역원으로 취직한다.
 
토마스는 어느 날 지푸라는 곳에서 조선에서 건너온 천주교도 김자평, 최선일을 만나 조선의 기독교 상황을 듣고는 1865년 9월을 전후하여 작은 배를 타고 조선 황해도 옹진군 창난도 해안에 상륙하여 두 달 반 동안 머물며 복음을 전하며 조선말을 배웠다. 그는 작은 배를 구해 몰래 한성으로 가려고 하였으나 풍랑으로 실패해 1866년 중국으로 돌아갔다.
 
미국 선적의 80톤급 증기 범선 셔먼호는 대포 2문을 가진 선주 프레스톤 (W. B. Preston) 개인 배로 요양을 위한 여행 도중에 잠시 텐진(天津) 항구에 들렸다, 이때 배를 빌린 것은 영국 무역상사였다.
 
승무원 구성을 보면 선주 프레스턴, 선장 페이지, 항해사 윌슨 등 미국인 3명, 영국인 토마스와 청나라에서는 막가파 인물로 널리 알려진 화물관리인 호가스(Hogarth) 2명, 중국인과 말레이 선원 총 24명이다. 이때 대영제국은 조선과의 교역을 열망해 선주 프레스톤과 텐진 주재 영국의 메도우즈 상사와 용선 계약을 맺었다.
 
토마스는 스코틀랜드 성공회 지푸 지회의 후원을 얻어 선교용 전단을 실으며 “조선이야말로 선교의 최적지다.”라고 말했다, 배는 7월 29일 지푸항에서 출항 전에 각종 화물을 실었다. 조선은 1832년에 독일 출신의 루터교 선교사 아우구스트 귀츠라프를 비롯하여 서양인 모방 신부 등이 조선에 잠입하여 활동하고 선교사들이 많이 왕래했다.
 
일부 학자들은 “지금도 셔먼호의 정체를 알 수가 없으며, 토마스는 단순 통역사로 배를 탔다.”라고 주장하지만, 단국대 사학과 김원모 교수가 쓴 「셔먼호 사건과 미국함대의 침입」 논문에는 당시 정황이 아주 상세하게 서술하며 토마스 목사를 주역으로 보고 있다.
 
 
▲ 평양 대동문과 대동강(사진:천주교 평양교구)
 
 
제너럴 셔먼호는 청나라 상선의 안내를 받아 8월 16일 평안도 용강현 다미면 부근에 도착하였다. 8월 22일 만조를 이용해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와 평양 만경대에 도착하여 국제법을 무시한 채 평양부에 교역을 강요하고 이를 거부하면 서울까지 쳐들어가겠다고 선언하며 공갈 협박을 하였다.
 
셔먼호에 탄 선원들은 배를 구경하러 온 사람들에게 망원경, 자명종, 유리그릇을 보여주며 자랑했다. 일부 선원은 육지에 상륙하여 인근 지역을 탐사하며 선교 활동을 하였다.
 
평안도 관찰사 박규수(1807~1877)는 예를 갖추어 세 차례에 걸쳐 푸짐한 음식물을 대접하고 거듭 배를 돌릴 것을 요청했다. 상선이 처음 대동강으로 진입할 때는 비가 많이 내려 대동강 수위가 높았지만, 장마가 끝나가 대동강 수량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셔먼호 선원들은 육지에 올라왔다가 조선의 관원들에게 붙잡혔다. 선원들은 곧 특공대를 파견하여 억류된 동료 선원을 구출하면서 주민 두 명을 배로 납치했다. 이에 주민들은 납치당한 사람을 구출하려고 나섰다가 유혈 충돌이 벌어진다. 배에 머문 기간이 늘어나자, 선원들은 해적으로 돌변하여 마을을 덮쳐 식량을 약탈했다.
 
셔먼호 선원들은 만경대 한사정(閑似亭)에까지 올라와 중군 이현익(李玄益)을 납치하여 쌀 1,000석과 금, 은, 인삼을 주면 석방하겠다고 협박 공갈을 하며 대포를 자주 발사했다. 이에 퇴직한 장교 박춘권(朴春權, 1839~1920)이 혼란을 틈타 배에 몰래 침입하여 잡혀있던 이현익을 구출했다. 이때 셔먼호는 양각도(羊角島) 하단까지 올라왔다.
 
선장은 배를 빼려고 서둘렀으나 간조기라 모래톱에 걸려 배가 움직일 수가 없었다. 관찰사 박규수는 대원군의 명에 의해 화공책(火攻策) 전술을 수립하여 사흘 동안 공방을 하였다.
 
8월 31일 평양부 방수성(防守城) 아래에서 전투가 벌어져 조선 수군은 7명이 전사하고 5명이 크게 다쳤다. 9월 2일 박규수는 조선 사람의 피해가 계속 늘어나자, 조선 조정에 화공작전을 상신하여 윤허를 얻어냈다. 이에 뗏목에 유황과 나무를 실어 불을 붙여 상류로부터 하류로 계속 떠내려가게 하고 불화살을 연속하여 쏘았다.
 
배가 불에 타자 토마스와 조능봉(趙凌奉)이 뱃머리로 뛰어나와 살려달라고 청원해 즉시 사로잡아 강기슭으로 데려왔다. 그런데 이를 발견한 군민들이 울분을 참지 못하고 일제히 모여들어 그들을 때려죽였다. 다른 선원은 총을 들고 계속 설쳐대며 공격해 조선 측에서도 20여 명이 목숨을 잃었다.
 
 
▲ 1840년 중국 상하이 석판화(사진:『해양사연구』)
 
 
제너럴 셔먼호가 오랜 기간 알려지지 않자 중국 상하이에 있는 영국 사람들은 배가 풍랑으로 침몰한 것으로 여겼다. 시간이 흘러 조선에서 머물던 외국 신부들의 입을 통해 배 소각 사실이 청나라에 알려졌다.
 
당시 제너럴 셔먼호의 용선 계약 기간에 일어난 책임은 모두 대영제국에 있었다. 그런데 미국 정부가 나서서 ‘청국이 조선의 종주국‘이라는 전통적 조공 관계를 들먹이며 청나라 조정에 배상을 청구했다.
 
중국 상하이에 머물던 벨(Bell, 1808~1868) 사령관은 1867년 1월 21일 와추세트호 로버트 윌슨 슈펠트(1822~1895) 함장에게 지시하여 셔먼호 탐문 활동에 나서게 했다. 슈펠트 함장은 청국 상인 우문태(宇文泰) 일행을 안내인으로 대동하고 한강으로 들어가려고 했는데, 항로를 잘 몰라 1월 23일 옹진만에 도착하여 현지민과 접촉했다. 그때 우문태는 현지 주민 김자평으로부터 생존자 4명이 있다고 들었다.
 
슈펠트는 조선 왕에게 올리는 문서를 보냈지만 15일이 지나도 답신이 오지 않자, 난파를 걱정하며 배를 돌렸다. 그는 본국에 무력행사에 근거한 해결책이 유일한 최선책이라고 보고했다.
 
1868년 4월에는 세난도어호 페비거(Febiger.J.C) 함장의 항해를 통해 새로운 사실을 알아냈다. 그것은 조선왕국이 양이(洋夷)를 동반한 해적으로 오인을 해 공격했다는 것과 생존자 가능성을 확인했다.
 
청국으로부터 생존자에 관한 질의를 받은 조선은 이를 발설한 김자평을 심문하고 증언이 날조임을 청나라에 알렸다. 미국은 대외외교정책을 군사 포함(砲艦)외교로 바꾸고 사과와 배상금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 조미전쟁(사진:금성출판사)
 
 
2021년 5월 14일 서울 용산구 전쟁기념관에서는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 순국 및 신미양요 150주년 기념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기조 강연자로 나선 신복룡 교수는 「신미양요의 전개와 역사적 의미」라는 제목의 강연에서 “미국 제18대 율리시스 S. 그랜트 정부의 국무장관은 아시아 함대사령부에서 고래잡이와 무역중개지 확보를 위한 조선 정벌의 의견서가 올라오자 이를 승인했다.”라고 발표했다.
 
벨 사령관은 놀랍게도 조선의 한성 함락을 위한 병력 20,000명을 특별 요청했지만, 미국 시워드 국무장관은 현재 남북전쟁으로 여력이 전혀 없다고 벨 사령관의 의견서를 기각하고 분명히 거절 의사를 표했다.
 
 
▲ 철갑선 ’배런 데컬브함‘(사진:미국국립문서보관소)
 
 
미국은 1861년 남북전쟁이 일어나면서 미 해군이 남북으로 분열되며 경험이 많은 해군 사관은 남쪽으로 많이 이동했다. 링컨 대통령은 남부 해상봉쇄령을 발령해 남부 지역의 경제가 무너지도록 만들었다.
 
북군의 해군은 미시시피강을 따라 남부의 주요 거점을 공격했다. 남북전쟁에서는 철갑선(Ironclad)이 처음 등장해 교전이 벌어지고, 남부동맹은 잠수함 헌리(Hunley)호를 비밀병기로 등장시켜 북부군의 군함인 거함 후사토닉(USS Housatonic) 호를 침몰시켰다.
 
시워드 국무장관의 후임으로 임명된 피셔 국무장관은 1870년 최종적으로 청국에 중재를 요청하여 조선과 조약을 체결한다는 원칙에 동의하고 그에 따른 권한을 청국 주재 로우 공사에게 일임했다. 조선은 청국에 외국과 통상할 뜻이 없음을 밝혔다.
 
미국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남북전쟁에 참전한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1822~1885) 장군을 1864년 3월 북군 총사령관으로 지명하였다. 그랜트 장군은 남부동맹보다 더 많은 전사자가 발생해도 ’무조건 항복‘ 방식으로 지속적인 공세를 펼쳐 1865년 4월 9일에 남부동맹 호버트 E, 리 장군의 항복을 받아내 남북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랜트 장군은 1869년 군에서 퇴역한 후 공화당 추천으로 정계에 입문하여 대선에 출마했다. “전쟁에서 영웅이 나고 영웅에서 제왕이 난다,”는 동서고금의 말처럼 그랜트는 높은 인기에 힘입어 1869년 3월 4일, 46세에 미국 제18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 미국 제18대 대통령 하이럼 율리시스 그랜트(사진:위키백과)
 
 
그랜트 대통령은 대통령 직무를 수행하면서 남북전쟁(American Civil War)에서 벌어진 많은 문제점을 해소하지 못하고, 통합의 시대정신을 망각했다. 대통령은 과거 군대를 통솔하는 방식대로 부하를 연방정부 요직에 기용하며 정부를 운영했는데 이들 중 상당수가 뇌물, 부정부패와 통제 불능의 스캔들을 자주 일으켜 대통령 입장이 곤란했다. 1870년 4월 4일, 그랜트 대통령은 외국을 적대적으로 대하는 조선에 원정을 단행한다고 선포했다.
 
(제21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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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