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지식놀이터
지식자료
지식자료 구독
구독 내역
게시판
게시판
작업요청
최근 작업 현황
지식창고
지식창고 개설 현황
자료실
사용자메뉴얼
about 지식놀이터

문화재·역사·전고재완의 지식창고 2024.11.08. 09:10 (2024.11.08. 09:00)

조선의 교육기관(성균관 2)

 
오늘은 대성전 구역에 이어 조선시대 고등 교육기관인 명륜당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오늘은 대성전 구역에 이어 조선시대 고등 교육기관인 명륜당에 대하여 알아봅니다.
 
 
 
▣ 조선 한양 성균관
 
 
3. 명륜당 구역
 
① 대성전 북쪽에 자리 잡은 명륜당은 유생들이 수업을 받던 강당으로, 인간 사회의 윤리를 밝힌다는 뜻이다. 이 건물의 좌·우측에는 교육을 담당하던 성균관 관원들이 머물던 방이 있었다.
 
 
② 명륜당은 정면 본사(本舍) 3칸, 익사(翼舍) 3칸의 35평 건물이다.
 
 
③ 명륜당 외부 현판은 1606년(재건) 명나라 사신으로 온 주지번(朱之蕃, 1575~1624)의 글씨다.
 
 
 
☞ 월대위의 비석
고종이 1871년 3월 12일 문묘에 친림하여 작헌례(酌獻禮)를 올리고 성균관과 사재(四齋)의 장의(掌議)와 유생(儒生)들에게 서원 철폐의 당위성과 폐단에 대해 하교하고 그 내용을 적어놓은 비석으로 천원권 지폐에도 나온다.
 
十二日。 詣文廟, 行酌獻禮。 仍引見四齋掌議、參班儒生。 敎曰: "書院設置, 卽有道學、忠節, 俟百世不易之公議, 然後始可擬議。 而近則不然, 是豈設院之本意乎? 且一人之書院, 或至四五處者, 亦甚無義。 自今爲始, 道學、忠節之公議所愜外, 切勿設置。 而雖有設院之人, 一人一院外, 毋得疊設, 至於謹悉道學、忠節人外, 亦不得妄許, 以爲金石之典。" -고종 실록-
 
 
④ 그리고 명륜당 앞뜰에는 중종 때 성균관 대사성(大司成)이던 윤탁(尹卓)이 심은 은행나무 2그루가 있다. 명륜당과 그 앞뜰은 교육 공간으로서 과거 시험장으로도 이용하였다.
 
☞알성시(과거) : 선조 임금이 성균관에 행행(行幸)하여 알성(謁聖) 후 분향례(焚香禮)를 행했다. 이어 명륜당에 임어(臨御)하여 시제를 내어 제술 시험을 보여 차운로(車雲輅) 등 12명을 뽑고, 무과(武科)로는 민의서(閔義瑞) 등 1백 명을 뽑았다. -선조실록 1583년 4월 4일-
 
 
 
⑤ 명륜당 앞쪽 좌우에 유생(儒生)들의 기숙사인 동재(東齋), 서재(西齋)가 있다. 동재(18개의 방)와 서재(19개의 방)는 방이 모두 37개였고 한방에서 4명이 생활했다. 동재의 오른쪽에 유생들의 진사 식당(정면 13칸, 측면 5칸의 사각 건물)이 있었다.
 
▼기숙사 동재의 전면과 후면
 
 
 
⑥ 그리고 식당의 북쪽으로는 관원들의 사무실인 정록청, 도서관인 존경각 등의 부속시설이 있었다. 이 구역은 유생들의 생활과 관원들의 업무가 이루어지는 곳이었다.
 
 
4. 성균관 유생
 
성균관은 관리로 임용되는 과거에 합격하기 위해 입학해 공부하였다.
 
① 성균관 입학 자격 -경국대전-
· 생원(生員)과 진사(進士), 사학(한양의 향교) 생도 중 15세 이상으로 『소학』 및 사서오경 중 1경에 통한 자
· 공신과 3품 이상 관리의 아들로 『소학』에 통한 자
· 문과 및 생원·진사시의 초시인 한성시(漢城試)나 향시(鄕試)에 합격한 자와 관리 중 입학을 원하는 자
 
※과거에 9번이나 장원했던 율곡 이이(1536~1584)는 특이한 사유로 성균관 입학을 거부당했다. 류성룡(柳成龍)의 <운암잡록(雲巖雜錄)>에 의하면, 이이가 1564년(명종 19) 생원시에 장원으로 합격해 성균관에 들어가려고 했지만 유생들이 제지했다. 이이가 젊은 시절 승려를 했다는 이유였다. 퇴계의 제자였던 권문해(1534~1591)의 도움으로 겨우 입교했다.
 
② 입학 정원
건국 초기 100명에서 세종 때 200명이었으나 임진왜란 후에 75명으로 줄어들었다가 영조 때 다시 126명으로 늘어났다.
 
③ 입학 평균 나이
생원 • 진사시 합격자의 평균 연령은 34.5세이나 1734년(영조 10) 윤봉삼(尹鳳三)은 84세, 1770년(영조 46) 어필명(魚必溟)은 83세였다.
④ 유생 복장
유생들은 유복(儒服)을 입고 유건(儒巾)을 썼다. 시대별로 붉은색, 흑색, 흰색, 청색 등 여러 색의 옷을 섞어 입다가 1758년(영조 34) 당하관 복식이 개정되면서 유생의 복장도 청의(靑衣)로 통일됐다.
 
아래 사진은 양반들(미국 헌팅턴 도서관, 1904년 잭 런던 촬영)로 보인다.
 
 
⑤ 유생의 하루 일과
· 유생들은 이른 새벽 북소리가 한번 울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나고, 북소리가 두 번 울리면 새벽 공부로 하루를 시작하며, 북소리가 세 번 울리면 밥 먹으러 식당으로 갔다.
· 성균관 유생들은 아침저녁으로 식당에 가서 꼭 이름을 적어야 했는데 식당 입구에는 출석부가 있어서, 여기에 동그랗게 표시를 해야 했다. 이것을 ‘원점’이라고 하는데 날마다 아침과 저녁, 하루 두 번 출석을 표시하면 원점 1점을 딸 수 있다. 원점이 300점이 넘어야 대과(과거 시험)를 볼 수 있으며 꼭 몇 년을 다녀야 한다는 제한은 없었다.
· 밥을 먹고 나서 북소리가 한 번 더 들리면, 수업을 시작했다. 유생들은 강의실로 가 스승에게 인사하고 자리에 앉지요. 유생 가운데 누가 질문을 하면, 스승은 답을 해 주고, 나머지 유생들은 배운 것을 복습한다. 다시 북소리가 두 번 울리면 한 사람씩 스승 앞으로 나아가 공부한 것을 점검받아 통과하면 새로운 것을 공부하고, 그러지 못하면 다시 공부해야 했다.
 
⑥ 교육 과정
· 사서(四書), 오경(五經), 제사(諸史)의 강독과 의(疑), 논(論), 부(賦), 표(表) 등의 제술(製述), 해서(楷書), 행서(行書), 초서(草書) 등의 서법(書法) 등으로 구성되었다. 학제는 4년 반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나 실제로는 평균 8년 정도를 재학하였다.
· 조선 초기에 작성된 ‘학령(學令)’에 따르면 성균관의 교육 과정은 날마다 실시하는 일강(日講)과 열흘에 한 번씩 시행하는 순제(旬製)로 이루어져 있다. 일강은 유교 경전인 사서오경을 강독하는 것으로, 성균관 교육의 본령을 차지하였다. 순제는 열흘에 한 번씩 정해진 문체의 글을 짓는 것으로, 과제로 주어진 문체는 부(賦) · 표(表)나 대책( 對策) 등 문과의 시험 과목에 대응되는 것이었다. 성균관의 교육은 유학 공부와 과거 공부를 결합하여 학문 연구와 시험 준비를 병행하도록 짜여 있었다.
 
⑦ 권당(捲堂)
성균관 유생들은 수업을 거부하거나 밥을 굶는 방법으로 임금님과 조정 대신들에게 자신들의 확고한 뜻을 알리는 방법을 말한다.
 
 
▣ 마무리
 
왕권 국가의 교육기관은 오직 관리들을 양성하는 목적으로 세워졌다. 그러다 보니 양반들은 관리가 되기 위해 과거시험에 합격하려고 죽어라 공부했지만 모든 사람들이 과거에 합격할 수 없었다. 특히 사서오경(四書五經)을 교재로 하다 보니 유교적 사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그리고 과거를 돌아보고 미래를 생각하며 분석하는 창의적인 교육이 아니라 암송 위주의 교육이 한계였다.
 
일제 강점기 성균관 배치도를 보면 조선시대 반궁도에 있던 일부 건물들이 소멸되었고 현재와 비교해도 계성사가 사라졌고, 식당 자리에는 유림회관이 세워져 있다. 앞으로 정비 계획을 수립해 유지·관리를 잘하는 바람이다.
 
 
출처: 국가유산청, 민족문화 대백과, 성균관 박물관, 종로구청, 구글, 네이버, 월간 문화재, 국립중앙박물관, 만월대 디지털 기록관
 
 

 
※ 원문보기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