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회 동해왕 이사부 항로 탐사 (21) 신미양요와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
미국 그랜트 대통령의 조선 원정 승인을 받은 아시아 함대사령부는 1년간의 전쟁 준비를 마치고 1871년 5월에 전함 5척, 20척의 보트, 함재 대포 85문, 해군과 육전대원(水海兵) 1,230명을 동원하여 나가사키(長崎) 해상에서 15일간 해상 기동훈련을 하였다.
존 로저스(John Rodgers) 제독은 조선 원정의 실상을 모두 기록사진으로 남기려고 이탈리아계 영국인 탐험 사진가 펠리체 베아토(Felix Beato, 1832~1909)와 조수 울렛(H. Woollett)을 배에 승선시켰다. 현재 전쟁 사진 원판은 ’미국 해군 역사센터‘에 소장되어 있다.
▲ 종군사진가 펠리체 베아토(Felix Beato)(사진:위키백과)
펠리체 베아토는 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태어나 1834년경 가족이 영국 통치하에 놓였던 그리스의 코르푸섬에 이주하여 성장했다. 그는 1851년 파리에서 카메라를 구해 사진을 찍었다. 1855년에 판화가 제임스 로버트슨의 조수로 크림전쟁에 종군하여 사진 기록을 남겼는데 일종의 보도 지침에 따라 “전사자, 불구자, 환자의 사진을 찍어서는 안 된다는 대영제국 육군성의 명령”에 따라 전쟁터와 동떨어진 사진을 찍었다.
이후 예루살렘 성지를 여행하면서 도시의 기념물을 촬영하고, 카이로, 아테네, 시리아를 방문하여 사진을 담았다. 1858년 인도의 세포이 항쟁을 취재하러 콜카타에 도착했다. 3월에 칸푸르 4월에 럭나우를 찾아 현장 전쟁 사진을 촬영했다. 1860년에는 영국, 프랑스 연합군을 따라 중국 베이징에서 제2차 아편전쟁(일명 에러호 전쟁)을 기록했다.
▲ 제2차 아편전쟁(사진:위키백과)
사진가들은 전쟁을 상업적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자극적인 사진 연출과 타자의 고통을 자주 상품화했다. 베아토는 1861년 영국에서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고 인도와 중국에서 사진을 판매했다. 1863년에 위그먼과 함께 홍콩과 상하이를 거쳐 요코하마에 건너와 일본 여러 도시를 여행하며 사진을 촬영했다.
1864년에는 요코하마에 사진 회사를 설립하고 초상 사진을 촬영하고 ’요코하마 사진‘ 의 양식과 규범을 만들어 사진첩을 판매하며 언론과 잡지에 사진을 기고했다. 1871년에 사진 스튜디오를 세웠다.
1871년 5월 12일 신임 주중 미국 프레드릭 로우(Frederick Low) 공사는 조선에 항해하여 직접 협상 권한을 부여받고 나가사키에 도착해 미국에 서신을 보냈다. 그는 콜로라도(USS Colorado)호에 머물렀다.
5월 16일 나가사키 항을 출항한 아시아함대(사령관 J. 로저스)는 프랑스 해군이 병인양요(1866) 당시 제작한 해도를 사용해 19일 충청도 해미현 앞바다에 이르렀고 남양만을 거쳐 뱃길을 탐사하면서 북상하여 물치도에 정박하였다.
▲ 모노카시호 선원(사진:국가유산청)
조선 원정 함대에는 주력함인 콜라라도호와 순양함 알래스카와 베니시아(Benicia)호가 있었다. 순양함은 길이가 250피트로 강력한 60파운드 소총을 소유했다. 두 함정은 건조된 지 2년밖에 되지 않은 최첨단 선박으로 1869년 취역했다.
팔로스(Palos)호는 예인선에서 전함으로 개조된 군함이다. 모노카시(Monocacy)호는 6개의 대형 함포를 탑재했다. 수병들은 근대식 총인 레밍턴 롤링 블록 카빈으로 모두 중무장했다.
▲ 모노카시호가 상륙군 보트를 견인하는 사진(사진:국가유산청)
조선 정부는 미국 군함이 아산만을 거쳐 올라오자 서둘러 관리를 파견했으나 조선 관리가 전권대사가 아니라는 이유로 로우 공사는 대화를 거부하고 돌려보냈다. 군함은 계속 한강 하구 염하로 진입했다.
전함을 발견한 해안가 병사는 경고하는 뜻으로 대포를 한 방 쏘았는데 사정거리가 매우 짧아 배에 미치지도 못했다. 조선 군대가 정당방위로 쏜 대포를 미국 로저스 제독은 배가 공격당했다고 주장하고 강화도 광성보를 공격하여 대학살을 감행했다.
2023년은 어재연 장군의 탄생 200주년이 되는 해로 충북 음성군은 신미양요를 재조명하는 특별전시회를 20024년 7월 2일부터 10월 25일까지 음성문화예술회관에서 개최하였다.
▲ 미국 해군 손돌목 돈대에서 조선군 공격(사진:국가유산청)
미국 캘리포니아 캐봇대학(Chabot College)의 에릭 니더레스트(Eric Niderost) 교수는 미국역사와 군사역사 전문 역사학자로 1871년 신미양요에 관한 글을 미국 군사 유산(Military Heritage)에 기고하면서 1871년 미국 해군에 의해 자행한 놀라운 조선 광성보와 돈대의 대학살을 사실 그대로 기술했다.
1860년~1880년대의 동아시아 해상 무역의 상황을 자세히 살펴보자. 일본 고메이 천황은 13세에 14대 쇼군이 된 도쿠가와 이에모치(1846~1866)가 1854년 미국 페리 제독과의 통상조약 추진과 체결 과정에서 천황의 허락을 얻지 않고 조약을 맺은 사실에 대해 강한 불신을 드러냈다. 통상수교 거부정책을 계속 옹호해 쇼군은 고메이 덴노에게 양이(攘夷)를 맹세했다. 고메이 덴노는 1863년 6월 막부에 서양인을 몰아내라는 양이의 칙명을 내려 이후에는 외국인 습격 사건이 빈번해졌다.
▲ 조슈번(長州藩)(사진:newsverse)
일본은 1840년 청나라 아편전쟁의 소식을 전해 듣고는 위기감을 불러일으켜 막부의 허락을 득해 사가번에서 대포를 제조하고 군함을 네덜란드에 발주하며 신형 서양식 대포 도입을 서둘렀다,
해안선이 긴 조슈번(長州藩)은 외국 배들이 자기의 바다를 거리낌 없이 항해하는 것에 공포를 느꼈다. 고메이 천황이 양이를 외치고 도쿠가와 막부가 양이운동을 실행하자, 즉시 바칸해협에 방어형 포대를 설치하고 1,000명의 병사와 군함 2척 증기 군함 2척의 함선을 상주시켰다. 1863년 5월 간몬해협을 통과하는 미국 및 프랑스 상선 키엔샹(Kien chang)호에 대해 아무런 통보도 없이 무차별 포격을 감행하였다.
▲ 시모노세키의 단노우라 대포(사진:시모노세키 교육위원회)
이에 놀란 프랑스 배는 협상을 위해 작은 배에 선원 5명을 태워 육지로 보냈으나 조슈번 병사는 총을 난사해 서기관 1명이 다치고 선원 4명이 죽었다. 5월 26일 네덜란드 메두사(Medusa)호는 4명의 사망자가 발생하고 선체에 큰 피해가 나 급히 도주했다.
피해를 본 나라들은 제각기 군대를 출동시켰다. 15일 뒤에 미국과 프랑스 군함이 출동하여 포격했다. 1863년 6월 1일 요코하마에 있던 미국 전함 와이오밍함아 바칸해협으로 파견되어 죠수번 함대와 포진지를 포격하고 요코하마 항으로 복귀했다.
이 전투에서 미국은 수병 6명이 사망하고 조슈번은 8명이 죽었다. 4일 후 프랑스 동얌 함대 2척도 조슈번 진지를 포격하고 해병대를 상륙시켰다. 그러나 이번에도 조슈번은 아랑곳하지 않고 포대를 수리하고, 이동하여 해안봉쇄를 1년 이상 계속했다.
▲ 모리(毛利) 가문 문장(사진:위키백과)
이 당시 조슈 번주 모리(毛利) 가문은 서양 세력을 물리치려면 서양의 기술을 배워야 한다고 생각하여 막부의 쇄국정책에 반대했다. 1863년 하급 무사 출신인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 1841~1909), 항해술을 배우던 이노우에 가오루, 해군학을 배우려는 야마오 요조, 이노우에 마사루, 항해술을 배우려는 엔도 키스케 5명을 영국에 보냈다. 이때 밀항 자금은 의사이며 군사전문가인 오무라 마스지로(大村益次郞, 1825~1869)가 보증을 서 자금을 융통했다.
이토는 영국으로 가던 길에 상하이에서 아편전쟁 이후의 실태를 보았다. 이토는 런던에 도착하여 영어와 화학을 공부하여 선진문물을 견학하며 외교관인 어니스트 사토우(Ernest Satow)와 인연을 맺는다.
영국 생활 중에 1863년 8월 15일에 벌어진 사쓰에이 전쟁(薩英戰爭, 가고시마 포격전)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런데 런던 타위 입구에 있던 신문가판대에서 배상금 지급 요청을 하다 영국 군함 3척 손실, 함장 등 13명 사망, 50명 부상에 따른 강력한 조치로 대영제국 해군의 조슈번 공격 계획이 1면 톱으로 실린 신문을 발견했다.
신문에는 “내년 7~8월에 연합함대를 결성하여 일본 조슈번 간몬해협의 군사시설과 시모노세키 시내를 대대적으로 포격한다.”라는 내용이었다. 유학생들은 밤새 머리를 맞대고 궁리하다가 영국과의 전쟁을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고 귀국을 결정했다.
▲ 일본 시모노세키 전쟁(사진:위키백과)
1864년 7월에 요코하마에 도착한 이토와 이노우에는 대영제국 공사를 찾아가 조슈 번주를 설득할 생각이니 해상 공격을 중지해 달다고 요청한다. 공사는 이들을 군함에 태워 조슈번 시모노세키로 보냈다. 그러나 이토는 번주를 만나 유학 중에 보고 들은 것을 이야기하며 서양을 배척하는 양이를 멈추라고 설득하고 호소했지만, 설득에 실패했다.
간몬해협의 봉쇄가 길어지자 크게 분노한 대영제국은 다른 나라와 계속 협의를 서둘렀다. 간몬해협은 태평양을 건너 미국으로 갈 때 지름길로 무역항로에서 중요한 해협이었다. 이 해협이 막히면 규슈 지역의 남단 가고시마를 돌아가기 때문에 시간과 비용이 더 많이 들었다.
바칸해협(馬關海峽)을 봉쇄당한 대영제국, 미국, 네덜란드, 프랑스 네 나라는 협의를 거쳐 대영제국의 어거스틴 쿠퍼 제독을 총사령관에 임명하고 미국 1척, 대영제국 9척, 프랑스 제2제국 함대 3척, 네덜란드 4척의 연합함대에 병력 5,000명, 군함 총 17척을 편성하여 1864년 8월 5일 시모노세키 해안포대를 포격하고 100문의 대포를 노획해 자기 나라로 가져갔다. 종군사진가 베아토는 시모노세키 전쟁의 모습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8월 18일 정전 교섭이 시작되어 일본 협상자로 선정된 이토는 영국 통역관인 어니스트 사토우에게 “조슈번(長州藩)은 단지 막부의 명을 따랐을 뿐이다.”라고 강변하여 조슈번이 지불해야 할 배상금을 에도막부로 돌리는 데 성공했다.
막부는 300만 불의 배상금을 지급하기로 하고 포대를 철거하며 간몬해협 통행 자유를 보장했다. 이후 에도막부는 존황파와 막부 세력 간의 치열한 무진전쟁(戊辰戰爭, 보신전젱)이 벌어졌다. 에도막부가 무너지고 1868년 1월 3일 메이지유신(御一新, 明治維新)이 일어나 중앙집권 체제를 복구했다.
이토는 1870년 경제, 화폐 제도를 조사하기 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떠났다. 1871년에는 이와쿠라(岩倉)사절단의 일원으로 발탁되어 미국에서 8개월을 체류하고 대서양을 지나 대영제국 4개월, 프랑스 2개월,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독일 3주, 러시아 2주를 머물고 댄마크, 스웨덴, 오스트리아 비엔나 만국박람회를 시찰했다.
이때 방문한 국가는 12개 나라이다. 귀국은 홍해를 지나 실론, 싱가포르, 사이공, 상하이를 거쳤다. 이토는 헌법을 연구하기 위해 1882년 영국과 독일에 18개월 유학한 후 헌법을 작성하고 내각제를 조직하여 1885년 12월 초대 내각총리대신에 오른다. 이때 나이가 45세였다.
근대화를 추진하던 일본 메이지 신정부는 1876년 3월 사무라이들의 상징인 칼을 사용하지 못하도록 하는 폐도령(廢刀令) 등을 발표해 사무라이들의 반발을 크게 샀다. 가고시마현에 있던 육군성 포병 소속 창고에 있던 무기와 탄약을 비밀리에 세키류(赤龍丸)에 실어 오사카로 반출하였는데, 육군의 주력 장비 스나이더 총의 탄약 제조설비를 반출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1877년 1월 29일부터 9월 24일까지 규슈 구마모토현, 미야자키현, 오이타현, 가고시마현을 중심으로 사이고 다카모리가 맹주가 되어 내전인 세이난센소(西南戰爭)가 발생했다.
종군사진가 베아토는 1884년 일본을 떠나 수단 마흐디 전쟁(1885), 미얀마(1888)에서 종군하다 1902년 미얀마를 떠난 후 1909년 이탈리아 피렌체에서 사망했다. 사진가는 21년 동안 종군사진가로 대영제국의 영토 확장 전쟁에 참여했다.
▲ 수단 마흐디 전쟁(사진:위키백과)
필자는 2017년 7월 9일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에 참가하여 코리아나(선장 정채호) 범선을 타고 여수 소호마리나를 출항하여 다음 날 오후 8시에 간몬해협을 통과했다. 일본은 세토대교 다리를 건설하면서 바칸해협 이름을 간몬해협(關門海峽)으로 바꾸었다.
▲ 일본 고베 개항 150주년 범선축제 친교의 밤(사진:궁인창)
일본에서의 개항 행사를 모두 끝내고 7월 19일 아침에는 세토내해를 지나 간몬해협에서 물살이 빠른 시간대를 피하려고 정조기를 맞춰 3시간 대기하다 해협을 통과했다.
필자는 일본을 여러 차례 방문하여 근대사 역사를 공부했다. 특히 범선 코리아나호를 타고 세토내해를 항해하고, 러시아 동방포럼(Eastern Economic Forum) 부대 행사로 열린 Far East Tall SHips Regatta 2018에 참가하여 블라디보스토크항을 방문했다.
1860년부터 개화기까지 조선의 실상과 1894년에 조선의 종주권을 두고 청나라와 일본제국이 벌인 청일전쟁(淸日戰爭, 1894년 7월 24일~ 1895년 4월 17일)을 돌아보게 되고, 동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기 위한 열강들의 치열한 전쟁사를 다시 회상하게 되었다.
(제22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