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백한’ 청춘들의 ‘도도한’ 이야기 - 김애란의 소설들 - 한혜경 ․ 명지전문대 문예창작과 교수
1. 청춘의 현주소 - 창백한 청춘들
청춘! 발음하는 순간 푸른 물이 톡 터지는 듯한 단어. 풋풋한 싱그러움이 느껴진다. 신록을 연상시키는 젊은 육체, 꿈을 이루기 위한 땀방울, 두려움 없이 도전하는 정신, 안이함을 거부하는 모험심, 패기와 열정, 사랑과 낭만을 꿈꾸며 불의를 용납하지 못하는 가슴……. 예로부터 많은 작가들이 현란한 수식어를 동원하여 청춘의 아름다움을 예찬해 왔다. 그러나 한편으로 청춘은 이상이 높고 순수한 만큼 고뇌와 좌절로 점철되는 시기이기도 하다.
2010년을 반년 앞두고 있는 시점에 20대를 관통하고 있는 우리 사회의청춘들은 어떠할까? 젊은 시절 전쟁과 가난의 기억을 지니고 있는 5, 60대나 권위주의 독재 권력의 억압을 경험했던 4, 50대에 비한다면 요즘 젊은이들은 부족함을 모르고 자란 행복한 세대라 할 수 있겠다. 그러나 근래 대학을 졸업해도 취직하기가 어려운 현실에 직면하여 많은 청년들이청년 실업과 비정규직 양산에 불안해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들의 이야기는 소설 속에서 어떻게 그려지고 있을까? 2000년대 주목받는 젊은 작가 중의 하나인 김애란은 요즘 젊은이들의 팍팍한 삶을 고스란히 담아 보여 준다. 소설 『자오선을 지나갈 때』(2005) 『성탄 특선』(2006) 『도도한 생활』(2007) 등은 재수생에서부터 대학생, 뒤늦게 적성을 찾아 편입을 준비하는 자, 대학 졸업 후 취업 준비하는 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는 자 등 아직 ‘계급’과 ‘제도’에 소속되지 못한 젊은이들의 현주소를 찬찬히 그려낸 수작들이다.
이 소설들에는 빠듯한 돈으로 재수하느라, 사립대 등록금을 감당하느라, 몇 년째 공무원 시험과 임용 고사를 준비하느라, ‘얼굴이 전부 노랗고’ ‘시뻘게진 눈으로 밤을 새우고’ ‘스트레스 때문에 한 달째 똥을 못 눠’ 얼굴이 까맣고, 피로 때문에 ‘발뒤꿈치가 바작바작 갈라져’ 있으며 아르바이트 뛰느라 ‘저녁을 굶기 일쑤’이고 ‘새까매진 얼굴’로 동생 집에 찾아와‘고꾸라져 사정없이 자는’ 젊은 여성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화장이나 치장과 거리가 먼 채로 ‘꽃 같은 20대’를 삭막하게 보내고 있다. ‘젊었지만 허약한 청춘’들의 표상인 것이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에서 작가는 소수의 승자만이 모든 것을 갖는 시스템 아래에서 고군분투하지만 제도권에 진입하는 것이 어려운 일임을 깨닫는 인물들을 통해 ‘잘사는 집’과 ‘돈’이 가장 중요한 덕목이 된 ‘차가운 자본주의’ 사회를 그려낸다. 대입이나 취업에 실패하는 까닭이 단지 개인의 능력 부족이나 태만 때문만은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면서 이들을 벼랑 끝으로 모는 것은 무엇일까를 천착하는 것이다. 4.0이 넘는 성적과 토익점수 900점 이상, ‘원만한 성격’ 정도의 이력으로는 취업의 문을 열 수 없다는 이 땅의 엄혹한 현실을 통해서 이들에게 부족한 것은 ‘돈으로 만드는’ ‘콘텐츠’임을 드러낸다.
즉 주인공이 쌓은 이력은 ‘아무나’ 할 수 있는 것으로 특별한 ‘콘텐츠’가 없는 것이다. 콘텐츠는 어떻게 만드냐는 주인공의 질문에 선배는 단도직입적으로 말한다. “어떻게 만들긴, 돈으로 만들지.” 그래서 ‘잘사는 집 애들’이 아니라면 공무원 시험이 최선이라고 인생 선배들은 조언한다. 왜냐하면 “이게 뭐 얼굴을 보냐, 그렇다고 아버지 직업을 보냐. 손가락 열개 달렸음 되고, 그냥 열심히 해서 답만 맞히면 되”기 때문이다.
승자가 되는 데 유리한,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는 자와 그렇지 못한‘나’와의 차이는 자기소개서에서 부터 확연하게 드러난다.
한번은 인터넷을 뒤져 대기업 인사과장이 올려놓은 모범 답안을 정독했다. ‘서류는 일단 자기소개서를 잘 써야 한다’며 시작되는 글이었다. 그런데 모범 답안 작성자는 자기소개서를 잘 쓴 게 아니라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었다. 만일 내가 IT회사에 서류를 낸다면 - 아마 포털 사이트에 대한 관심으로 자기소개서를 채울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서부터 아버지가 사다준 애플 컴퓨터를 분해하며 노는 것이 참 즐거웠습니다.’라고 쓸 것이다. 그는 취미도 ‘승마’였다. 나는 ‘독서’라고 쓰는 것이 왠지 부끄러워 보편적이면서도 무난한 ‘영화 감상’이라고 썼다. 『자오선을 지나갈 때』 중에서
어떤 노력도 ‘인생 자체가 잘 씌어’ 있는 것에 미치지 못한다는 씁쓸한인식은 7년이 지난 후에도 나아진 게 없다는 사실을 발견할 때 더욱 강화된다. 재수생 시절 노량진의 4인용 독서실에서 ‘연필처럼’ 끼어 자며 공부를 했고 대학생이 되어서는 등록금을 감당하기 위해 내내 보습 학원에나가 돈을 벌고 졸업 후엔 서른 번째 취업 낙방을 한 스물여섯의 ‘나’는노량진을 지나면서 묻는다. 1999년 ‘지나가는 곳’이라 믿었던 노량진을 7년이 지난 지금도 왜 여전히 ‘지나가고 있는 중’일까? 하고.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없다. 지하철은 ‘여전히 그리고 묵묵히’ 달려갈 뿐이다.
2. ‘사람답게’ 사는 삶, ‘남들처럼’ 사는 삶
이들이 바라는 것은 무엇일까? 취직이 되어 제도권에 진입하는 것? 또는 계급 상승?
성탄특선의 인물들이 소망하는 것은 추상적이긴 하나 간결하다. ‘사람답게’ 사는 것이다. 다르게 표현하자면 ‘좀 사는 것같이 사는 것’이며 ‘보통의 기준’에 가까워지는 것, ‘남들처럼’ 사는 것이다. ‘사람답게’ ‘남들처럼’ ‘보통의 기준’ 모두 명확하게 정의 내릴 수 없는 상대적 개념들이다. 그러나 구체적으로 표현된 꿈들을 보면 이 기준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곧 그것은 좀 더 좋은 방에서 지내고 자신만의 방을 갖는 것, ‘남들처럼’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것에서부터 세부적으로는 유리병에 물을 담아놓고 마시는 것, 화장실에 세정제를 넣는 것, 인터넷을 하고 사는 것 등이다.
일견 소시민적으로 보이는 이 꿈들은 10여 년 서울 살이 동안 ‘고만고만한 보증금과 월세에 맞춰’ 자주 방을 옮겨야 했던 사내에게는 중요한 것들이다.
사내가 수없이 이사를 다녔지만 부엌이 따로 있는 방은 드물었다. 사내는 밥을 사 먹었고 목이 마를 때면 방에 있는 한 칸짜리 냉장고에서 생수 통을 꺼내 병째 들이켜곤 했다. 그러다 처음, 밥을 지어 먹을 수 있는 곳으로 방을 옮겼을 때, 사내는 두 손 가득 보리차가 든 유리컵을 들고 아이처럼 외쳤다. “이야! 컵에다 물 마시니까 정말 맛있다!”
오래전부터 ‘소독한 델몬트 주스 유리병에 보리차를 담아,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가 시원하게 마시는 것’은 사내의 로망 중에 하나였다. 그런 것 하나가 자기 삶을 어떤 보통의 기준에 가깝게 해 주고 또 윤택하게 만들어 주는 것 같아서였다. 『성탄특선』 중에서
이외에도 사내가 고집하는 생활 습관이 몇 개 더 있는데, 그것은 ‘아무리 돈이 없어도 화장실 세정제만은 반드시 사 넣어야 한다.’ ‘요즘 세상에 배는 곯아도 인터넷은 좀 하고 살아야 사람답게 살 수 있다.’라는 것들이다. ‘누우면 더 이상 공간이 없을 정도로 매우 좁은 방’에서 ‘어마어마한소음을 내며’ 돌아가는 고물 컴퓨터는 ‘사람답게 살기 위해 한 손으로 힘겹게 돌리는 발전기’처럼 보는 이의 가슴을 아리게 한다.
남들처럼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싶어 하는 연인들의 소망 또한 애잔하다. 4년 넘게 사귀면서 한 번도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지 못한 이유가 돈이 없어서였기 때문이다. 첫 해는 ‘입을 옷이 변변찮단 이유로’ 여자가 도망쳤고 두 번째는 취직 못 한 남자가 데이트 비용이 없어서, 세 번째는 헤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다시 만난 이들은 네 번째 성탄절을 드디어 함께 보내게 된다. 해마다 어김없이 돌아오는 크리스마스를 ‘역병’처럼 느꼈던 이에게 남들과 같은 크리스마스 데이트를 할 수 있다는 사실은 큰 기쁨일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들이 기준으로 삼고 있는 ‘남들처럼’은 사실 막연하다. ‘남들’이 어떤 계층이며 어떤 수준인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므로. 또 남들을 따라 한다는 것은 타인의 시선에 의존하는 것이므로 남들처럼 해서 행복한 것이라면 그 삶은 가짜이기 쉬울 것이다. 이들이 따라하는 데이트 코스는 크리스마스를 겨냥한 로맨틱 코미디 영화를 보고 패밀리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하고 바에서 와인을 마시고 모텔에 가는 것으로, TV 드라마나 광고 등에서 주입해 온 이미지일 뿐, 견고한 것이 아니다. 뭔가 하고 있다는 기분에 들떠 영화가 지루하다는 사실과 음식이 비위에 거슬리는 점들을 짐짓 무시하지만 환상이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즉 지금은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것을 ‘할 수 있게’ 되었다는 사실이 모든 것을 덮고 있으나, 반복해 경험한다면 곧 권태로워질 것이고 특별한 느낌도 점차 휘발될 것이다.
하지만 ‘남들처럼’ 하고 싶은 이들의 로망을 허영, 혹은 사회가 심어 놓은 환상을 맹목적으로 추종하는 것이라고 간단히 비난하기는 어려울 것같다. 삶의 전체 등급을 올리기는 벅차기 때문에 일종의 자구책으로 화장실 세정제와 같은 최소한의 것으로 잠시 누리는 사치 혹은 위안을 가짜라고 몰아붙이는 것도 잔인해 보인다. 변기 안에 고인 푸른 물을 보면서 ‘자신이 괜찮은 인간처럼’ 느끼는 것, ‘분수껏 사는 일’이 지겨워져 “한번쯤 ‘무리’라는 걸 모른 척하며 살아보고” 싶어 비싼 집으로 이사하는 것들은 ‘잠깐 동안 돈을 주고 살 수 있는 환상이라 하더라도’ ‘먹먹한’ 현실을 견디며 살아나가기에 필요한 것이기 때문이다.
3. 우리 시대의 ‘도도한’ 청춘
나아지는 게 없어 보이는 현실 앞에서 김애란의 인물들은 비교적 담담하다. ‘부모 잘 만난 애’가 아닌 사실에 울분을 품지 않으며 답답한 상황에 대해서도 울적해 할 뿐, 비통함이나 분노, 절망은 나타나지 않는다. 비좁은 독서실에서라도 재수를 할 수 있는 게 ‘황송’하다고 여길 정도로 자신의 처지를 있는 그대로 인정하고 그 범위 안에서 ‘분수껏’ 성실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태도는 아마도 자신의 상황을 거리를 두고 바라볼 수 있는 힘에서 기인한다고 하겠다. 그러한 거리에서 여유와 웃음도 피어나는 법이므로 김애란의 인물들은 유머러스하기도 하다. 웃음은 이들의 팍팍한 삶이 주는 긴장을 허물며 가족 간의 따뜻한 유대감을 형성시킨다.
처음 산 밑에 방을 구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꾸했었다. “언니, 산 좋아하잖아.” 언니는 멍하니 있다 으하하 웃으며 내 머리를 쳤다. 『기도』 중에서
내가 집을 떠나던 날, 아빠는 오토바이 ‘쇼바’를 잔뜩 올린 채 도로 위를 달리며 울고 있었다. 아빠는 오토바이 속도가 최절정에 다다랐을 때, 앞바퀴를 들며 “얘들아 너흰 절대 보증 서지 마!”라고 오열했고 비닐하우스 옆에서 머리를 조아리며 속도위반 딱지를 뗐다고 했다. 벌금은 고스란히 만두 가게에서 일하는 엄마 앞으로 전가됐다. 『도도한 생활』 중에서
언니가 싼 방값 때문에 산 밑에 방을 구한 것이나 아빠가 오열하는 것이나 모두 가슴 아픈 사연이다. 그러나 농담과 웃음이 곁들여지면서 그슬픔의 농도가 옅어지는 효과를 가져온다. 또 ‘새끼 겁주고 놀리는 걸 낙으로 삼는’ 엄마와 (『칼자국』) 아이들을 두들겨 패면서도 만두를 빚어 돈을 벌고 피아노를 사 주는 엄마(『도도한 생활』) 들은 먹고사는 일을 혼자 감당하면서도 씩씩하게 살아가는 인물들로서 김애란 소설의 여성들이 담담하게 세상을 헤쳐나가는 기질은 모계로 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보인다.
남루하고 불안한 세상을 제대로 건너기 위해서 이들은 저마다의 보루를 만들어 간직하고 있다. 그것은 자존심이기도 하며 환상, 혹은 위안거리이기도 하다. 시골에서 만두 가게를 하는 『도도한 생활』의 엄마는 “배움이 짧았고 자신의 교육적 선택에 늘 자신감을 갖지 못”했기에 그 결핍을 채우고자 딸에게 피아노를 사준다. 거실이 없어서 만두 가게 안, 작은방에 놓인 피아노는 ‘우리 삶의 질이 한 뼘쯤 세련돼진 것 같’은 느낌을 선사한다. ‘체르니란 말은 이국에서 불어오는 바람 같아서, 돼지비계나 단무지란 말과는 다른 울림을’ 주기 때문이다. 즉 피아노는 엄마에게도, 딸인 ‘나’에게도 자부심으로 자리한다. 그래서 집이 망해도 엄마는 피아노를 팔지 않고 딸들이 사는 서울 반지하방에 옮겨 놓는 것이다.
어느날 문득 ‘나’의 머리에 떠오른 생각, “세상 사람들은 가끔 아무도모르게 도- 도- 하고 우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은 자부심, 혹은 ‘도도한’ 태도가 남루한 삶을 버티게 한다는 깨달음이다. 폭우가 내리는 밤 빗물이 차오르는 반지하 방을 홀로 감당해야 하는 경우에 도도함 외에 그녀가 기댈 수 있는 것은 없다. 바가지로 물을 퍼내도 도로 차올라 피아노마저 물에 잠겨 가고 언니의 예전 애인이 술에 취해 찾아와 쓰러져 있는 상황에서 그녀는 자신이 할 수 있는 항거를 한다. 셋방에서 피아노를 치면 안 된다는 금기를 깨는 것이다. 그래서 ‘검은 비가 출렁이는 반지하에서’ 피아노를 치는 마지막 장면은 “‘쇼바(완충기)’를 잔뜩 올린 오토바이한 대가 부르릉 - 가슴을 긁고 가는 기분이 들” 때 자신을 지킬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 보여 주는 인상적인 장면이라고 하겠다.
새국어생활 제19권 제3호(2009년 가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