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무라 히데토-야마시타 나오키, 미즈우라 등 협력, 고인의 뜻 받들어
일본 나가사키시에 거주하며 군함도 탄광 조선인 강제징용자 및 원폭 피해자를 돕는 기무라 히데토 선생님이 카톡으로 문자를 보내왔다. 내용은 “강제징용자의 유골을 모시고 2024년 11월 14일 출발합니다. 한국에 도착하여 징용자의 고향으로 가서 안장하고 성당에서 위령미사를 드립니다.”라는 메시지였다.
기무라 선생님은 군함도와 원폭기념관을 방문하는 많은 한국인에게 친절하게 설명을 해주고 강제징용자의 유골을 한국으로 봉환하는데 통역을 맡아 수고하셨다.
▲ 강제징용자 심재선
나가사키현 탄광에 강제징용자로 끌려 온 강원도 청년 심재선(沈載璇, 1923~2007)이 있었다. 1943년 3월에 순사와 면사무소 서기가 고기를 잡아 생활하는 어부의 집을 찾아와 가족들에게 “일본으로 떠나라. 임금을 많이 준다.”라고 명령했다. 이에 놀란 가족들이 모두 주저하자 순사는 나이가 많은 아버지를 끌고 가려고 해 장남 심재선이 나섰다.
당시 강원도 명주군은 강제징용자 인원 200명이 할당되었다. 인솔자는 사람을 모아 기차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때 몇 사람이 탈출에 성공했다. 관부연락선을 타고 시모네세키항에 입항했다. 심재선과 동료들은 다시 기차를 타고 나가사키 탄광에 배치되었다.
이후 7개의 탄광에서 일하다 탈출하여 오무라비행장 등 노동판을 전전했다. 8·15해방 후에 귀향하려고 결심하고 밀항선을 타려고도 했지만, 조선인을 바다에 빠트려버린다는 소문에 일본을 떠날 수가 없었다.
1945년 8월 22일 3,725명의 징용자를 태운 일본 해군 우키시마마루(浮島丸, 4,730t)호가 아오모리현의 오미나토항을 출항하여 1945년 8월 24일 오후 5시 20분경 마이쓰루항에 입항하려다 원인 모를 폭발 사고로 침몰했다. 당시에 조직적인 대학살이라는 소문이 돌았다. 일본 정부는 2024년 9월에 승선자 명단 일부를 79년 만에 한국 외교부에 전달했다.
▲ 우키시마마루(浮島丸, 4,730t)호(사진:연합뉴스)
1945년 8월 18일에는 남사할린 가미시즈카(上敷香)경찰서 유치장에 조선인을 가두어 놓고 건물에 방화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8월 24일에는 남사할린 최대 항구인 오도마리(大泊)로 가는 피난길에 있는 작은 촌락 미즈호 촌에서 조선인 27명을 조직적으로 학살하고 사체를 유기한 사건이 발생했다.
해방 후에 심재선은 중소 탄광에서 필사적으로 일하다 1964년 1월 미네탄광이 폐광하여 다카시마 해저탄광으로 옮겨 일했다. 조선인 광부는 사람 취급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심한 욕설과 차별대우를 받았다.
심재선은 1967년 석탄차를 타고 갱도에서 올라갈 때 커브에서 헬멧램프가 아치에 걸려 밴드가 끊어지지 않은 채 말려 들어가는 사고를 당했다. 승강기 운전자가 바로 멈추지 않아 배와 다리가 뒤틀리며 뚝하는 소리가 났다.
광부는 중상을 입고 다카시마 병원으로 옮겨졌다. 의사는 “아! 이 조선인은 오늘 밤을 넘기지 못할 것 같다. 허리를 심하게 다친 것 같다.”라고 말했다. 광부는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지만, 근본적인 수술을 받지 못한 채 오랜 입원 생활을 하였다.
산재 신청을 하였지만, 인정을 받지 못했다. 다카시마마치 동사무소에서 상담하여 연금을 받게 되었다. 퇴원 후 허리 통증을 참아가며 탄광의 갱외 작업을 하였지만 1986년 12월 탄광이 문을 닫아 직장을 잃었다.
▲ 심재선(사진:기무라 히데토)
심재선은 1966년 12월 14일 민단에 가입해 민단 행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아픈 몸을 돌봐주는 가족이 있어 행복했지만, 2000년대 들어 신장 기능이 약해져 병원에 자주 입원했다. 투병하는 동안 성당에 다니는 교우 미즈우라(95세) 부부가 많은 도움을 주었다. 미즈우라 선생은 이웃에 사는 조선인을 친형제처럼 생각했다.
2003년 가을에 평소 잘 아는 야마시타 나오키 씨 집을 찾아가 “내가 죽으면 내 뼈를 고향 땅에 묻어달라!”라고 부탁했다. 3일에 한 번씩 혈액투석을 받던 심재선은 2007년 1월 28일에 몸이 이상해 바로 이웃에 있는 미즈우라 선생 집을 찾아가 도움을 받아 나가사키 시내의 사쿠라마치 병원에 입원했다. 그러나 몸이 회복되지 않아 1월 29일 사망했다.
장례는 민단 나가사키현 본부의 협력을 받아 미즈우라 선생이 주관했다. 미즈우라 선생은 고인을 나가사키 니시마치 성당 봉안당에 모시고 1년에 두 번씩 연미사를 올렸다.
▲ 나가사키 니시마치 성당(사진;西町聖堂)
2007년에 강제징용진상규명네트워크 사무국장 후쿠도메 노리아키 씨와 나가사키현 다카시마 지구 노동조합 대표를 지낸 야마시타 선생이 한국을 방문해 심재선 씨 동생을 만났다.
동생은 “저희 형편이 어려워 형님의 유골을 인수할 수 없습니다. 천안 ‘망향의 동산’에 안장을 추진해 주시면 꼭 참배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이후에 후쿠도메 사무국장이 사망하고, 심 씨 동생도 세상을 떠나 유족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졌다.
야마시타 씨는 건강하던 몸이 조금 불편해 노조 활동을 했던 이시마루 고지 씨에게 도움을 청했다. 이시마루 고지 씨는 나가사키현의 공무원 노조에서 일하면서 일본 천황의 전후 책임과 식민지 피해에 관심이 많았다. 그는 2019년 11월 29일 후쿠오카 대한민국 영사관을 방문해 도움을 요청했지만, 이후 아무런 소식을 전달받지 못했다.
▲ 2016 나가사키 범선축제(사진:궁인창)
필자는 2016년 4월 범선 코리아나호를 타고 여수에서 출항하여 ‘나가사키 범선축제’에 참가한 이후 자주 나가사키시를 방문했다. 기무라 선생님은 “군함도에서 탈출해 거친 바다를 헤엄쳐 육지에 도착해 힘이 빠져 죽은 조선인 청년을 바닷가 마을 사람들이 정성을 다해 시신을 거두고 묻어주었다.”라고 말했다. 우리 일행은 강제징용자 광부 무덤에 들려 추모를 하였다.
2019년 7월 23일 고려대학교 문과대학 서관 2층 225호실에서 제8회 역사 NGO 세계대회가 개최되었다. 기무라 선생은 분과회의에서 “전쟁과 평화: 원폭과 강제동원”을 발표했다. 선생님은 일본제국의 강제연행과 강제노동에 대하여 깊이 사과하고 ”강제노동은 세계에서 유례가 없는 인간성을 무시한 국가 범죄입니다. 전쟁 중에 돌아가신 단 한 명의 유골이라도 소홀히 하면 안 되고, 고국에 봉환할 수가 있으면 꼭 실천해야 합니다.”라고 강조했다.
▲ 제8회 역사 NGO 세계대회(사진:궁인창)
사진가 이재갑 선생은 2008년도에 기무라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군함도를 촬영했다. 사진가는 군함도 전시회를 매년 개최했는데 선생님은 한국에 오셔서 격려를 해주었다. 2019년 11월 19일에는 서대문 형무소 역사관 10동 옥사에서 ‘군함도 해드랜턴 전시회’가 열렸다.
선생님은 필자에게 강제징용자 유족을 찾는 방법을 질문했다. 그리고 망향의 동산을 가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지난 몇 년 동안 조선인 강제징용자의 수기를 일본어로 번역하면서 해석이 잘 안 되는 글이 있으면 카톡으로 알려와 전화로 통화하며 의미가 다르게 전달된 글을 수정했다.
2023년 봄에 필자에게 전화를 했다. 일본 나가사키 민단 관계자가 강릉에 가서 심재선 씨 유족을 만나려고 하는데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물었다. 강릉으로 가는 교통편과 예약한 호텔을 상세하게 알려주고 삼척에 계신 이효웅 형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 군함도 해드랜턴 전시회(사진:이재갑)
2023년 10월에 이시마루 씨와 선생님은 심재선의 고향인 강릉시 강동면사무소를 방문하고 정동 2리 이장도 만났지만, 유족 정보는 개인 정보라 알려줄 수 없다는 답변을 들었다. 면사무소 담당자는 강제징용자의 친척들이 일본인의 방문을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으며 다음 기회에 만나기를 바란다는 말을 대신해서 전달해 주었다.
선생님은 실망하지 않았다. 서울로 오면서 예전 군함도 취재를 통해 인연이 있는 이혜민 작가에게 안부 전화를 걸었다. 작가는 팔순 노인이 한국을 드나들며 유족을 찾는 모습에 놀라 2023년 11월 중순 가톨릭신문사에 “유골 봉환을 추진하는데요. 미사 집전을 해주실 신부님을 모시려면 어찌해야 할까요?”라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리고 기자에게 강제징용자를 돕는 일본인의 애쓰는 모습을 있는 그대로 전달했다.
고령의 미즈우라 선생은 심재선 씨 유족 외의 다른 사람의 이야기를 모두 거절했다. 민단 사무국장 김상진 선생이 2024년 6월 중순 한국 정동진에서 심재선의 둘째 제수를 만나 유해 반환요청서를 작성했다. 이 문서를 받은 미즈우라 선생이 동의하여 유골 반환 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유해 반환 허가는 7월 17일 이뤄졌다.
심재선 씨의 유골이 고향으로 갈 때 어떻게 돌아갈지 의논을 하였다. 마침 8월 22일 대한항공의 나가사키 취항이 발표되었다. 나가사키에서 인천 직항 노선은 5년 7개월 만에 재개되는 운항이었다. 10월 27일부터 인천 직항항로가 생겨 유골 봉환을 11월로 결정했다.
가톨릭에서 11월은 ‘위령 성월’로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영혼을 기억하며 하늘나라에 있는 이들을 위해 교회 전체가 기도하는 달이다. 천주교 위령미사는 죽은 이들을 위해 봉헌하는 미사로 ‘연미사’라고 부른다.
▲ 나가사키 니시마치 성당(사진;西町聖堂 기무라 히데토)
11월 13일 일본 성당에서 이시마루 고지 선생이 유골을 반환받아 집으로 모셨다가 다음날 11월 14일 나가사키국제공항에서 대한항공 KE798 비행기를 타고 오전 10시 30분 이륙하여 인천국제공항 2터미널에 12시 30분에 도착한다.
이번에 유골 봉행에 나선 이시마루 고지 선생과 민단 김상진 선생, 기무라 선생은 오후 3시 강릉행 리무진 버스를 타고 3시간 걸려 오후 6시경에 강릉시외터미널에 도착해 예약한 숙소로 향한다.
▲ 강원도 강릉시 임당동 성당 성 골롬바노 성전(사진:강릉시)
2024년 11월 15일 아침 일찍 숙소를 출발하여 고향 친지들이 기다리는 강릉 청솔공원 봉안당에서 안장 의식을 마치고 춘천교구 강릉 임당동 성당으로 이동하여 오전 10시경 위령미사를 드린다. 조선인 강제징용자 심재선은 일본에서 살다 죽었지만, 17년 만에 재일본 대한민국민단(在日本大韓民國民團)과 일본인 이웃의 도움으로 마침내 고향 땅에 돌아왔다.
천주교 춘천교구 주교님이 특별하게 위령미사를 허락해주신 강릉 임당동 성당은 1921년 설립된 오래된 성당으로 주보 성인은 성 골롬바노이고 축일은 11월 23일이다. 강릉도호부 가까이 위치한 성당은 2010년 2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457호로 지정되었다.
일제는 일제강점기인 1938년 4월 ‘국가총동원법’을 제정 공포하여 1939년부터 1945년까지 관 주도하에 정책적, 조직적, 집단적, 폭력적 방법을 동원하여 조선인을 ‘강제 모집’ ‘강제 징용’ ‘근로보국대’ ‘근로정신대’ 등 다양한 방식으로 강제 동원하여 국내 및 일본 및 남사할린, 중국 만주, 러시아, 남양군도 미크로네시아, 동남아시아 등에 있는 군수공장, 토목건축 현장, 석탄광산, 금속광산, 항만, 집단농장에 보냈다. 당시 조선인 7,878,708명을 강제 동원하였다는 통계 숫자는 2003년 한국정신문화연구원에서 발표한 내용이다. 해외의 강제동원자 139만 명은 더 힘든 오지로 연행되어 강제노동에 혹사당했다.
▲ 하이난성 천인갱 유해 109구(사진:SBS)
중국의 대표적인 관광지 하이난성 싼야시(三亞市) 교외 길앙구 삼라촌에는 조선인 강제징용자 1,300명이 학살당해 매장되어 있어 조선인 천인갱(朝鮮人 千人坑)이라 부른다.
일본군은 1939년 하이난을 점령한 후 섬을 요새로 만들고 철광석 광산을 개발하려고 조선 감옥에 수감된 수형자 658명을 포함하여 2,000명을 끌고 갔다. 교도관들은 “중국 해남도에 가면 형량을 대폭 감해준다.”라고 속였다.
조선 전국에서 모여든 강제징용자를 부산에 집합시켜 배에 승선시켰다. 사람들은 20일 걸려 하이난 항구에 내렸다. 땅을 오른 노동자들은 군사용 터널공사, 철도, 도로 건설에 투입됐다.
일본군은 천황이 항복을 선언한 후 중국 정부에 대량의 무기와 군수물자를 넘겨주지 않으려고 모든 물자를 리즈거우 남정산(南丁山) 기슭에 매장한 후 작업에 참여한 징용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집단 매장했다.
1998년 6월 천인갱에서 노역하다 탈출한 장달웅 씨가 KBS에 연락하여 처음 취재가 이뤄졌다. 천인갱 지역은 한국기업이 망고 농사를 짓기 위해 중국 정부로부터 토지를 임차하는 과정에서 다시 확인됐다.
무역업을 하던 한국 신우주식회사 서재홍 사장이 기념비를 처음 세웠고, 사업가 문용수 대표가 토지사용권을 확보하여 추모사업을 병행하며 유해 봉환을 촉구하고 있다.
▲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사진:연합뉴스)
2015년 KBS가 취재 중에 발견한 문서에는 하이난 주둔 일본군 사령관 고가 케이지로가 작성한 ‘해남지구 종전처리 개요 및 현상보고’가 있다. 문서에 의하면 가석방이 확인된 사람은 112명, 귀환보고서에 적힌 인원은 606명으로 700여 명이 살아 돌아왔다.
2019년 행정안전부는 2000년 1월 발굴한 유해 109위의 DNA를 한국의 유족과 대조해 신원을 확인하겠다고 발표했으나 중국과의 협조가 확인되지 않고 있다.
SBS 취재팀은 2019년 천인갱을 보도하면서 인근 집단학살지 전독만인갱(田獨萬人坑)을 보도했다. 만인갱은 일본군이 1939년 하이난을 점령하고 1945년까지 중국 전독철광산 광부 만 명을 살해하고 묻은 곳이다. 하이난성 싼야시는 2001년에 높이 8m의 ‘전독만인갱 희생 광부 기념비’를 건립했다.
현재 해외에는 강제징용자의 무덤이 상당수 존재하고 납골 시설에 유골이 방치되어 있어 동북아시아 평화공동체 실현을 위해서는 가장 먼저 청산해야 할 과거사 문제이다.
대한민국 정부는 2007~2008년에 ‘일제강제동원피해자지원재단’에서 신고를 받은 결과 일제 강제징용피해자는 218,000명이 등록하였다. 2023년 3월 현재 1,200명이 생존해 계신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 나가사키 민단 본부의 노력과 일본인들의 따뜻한 우정 속에 고향을 다시 찾은 심재선 프란치스코 교우는 강릉시 임당동 성당 교우의 환영을 받고 평안한 안식에 들어갔다.
그동안 유해 봉환에 힘써주신 여러분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고맙습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