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웨덴과 한국의 문화교류1
“역사를 모르는 사람은 미래가 없다.”라는 말이 있다. 필자는 한국의 근세사를 알고 싶어 19세기 초에 조선을 방문한 외국인의 여행기를 매일 조사하여 읽는다. 1850년에서 1920년대까지 조선을 찾은 외국인은 약 2,100명을 넘어 그 후손에게는 많은 자료가 있다.
한강 작가의 소설 7종 작품이 스웨덴 한림원에서 노벨문학상 수상 작품으로 언급되었다. 많은 사람은 한국인이 노벨문학상을 받은 것은 정말 놀라운 기적이라고 생각한다. 사람들은 스웨덴을 말하면 혼성그룹 아바와 맘마미아를 먼저 떠올린다. 그러나 스웨덴과 한국은 100여 년 전부터 상호 교류를 했다. 노벨문학상 수상은 이런 역사적 인연(因緣)의 결과이다.
▲ 소설가 한강 노벨문학상 수상(사진:mbc)
스웨덴의 고고학자이며 황태자인 구스타프 6세(1882~1973)는 1926년 10월 신혼여행으로 일본에 왔다가 조선총독부 고이즈미 박물관장의 초대로 배를 타고 부산에 도착했다. 황태자는 10월 9일 경주에 도착하여 철도호텔에 묵은 뒤 다음날 노서리 서봉총(瑞鳳冢) 고분 발굴에 참여하여 신라 금관 출토 광경을 지켜봤다.
황태자는 호텔보다는 자연스러운 집이 좋아 경주 최부자 댁에 머물며 문파 선생의 극진한 대접을 받았다. 그리고 발굴 현장에 있었던 석당 최남주(1905~1980) 선생과 오랜 인연을 이어갔다. 서봉총이라 이름을 지은 것은 스웨덴의 한자 이름이 서전(瑞典)이라 이를 기념한 것이다.
황태자는 스웨덴으로 돌아가 동물학자이며 탐험가인 스텐 베리만(1895~1975)에게 조선왕국에 다녀올 것을 요청하였다. 탐험가 스텐 베리만는 박제(剝製)하는 사람과 함께 1935년 2월부터 1936년 11월까지 조선 함북 주을에 머물며 백두산에 오르고 많은 동물과 조류 380종을 잡아 스웨덴자연사박물관으로 보냈다.
스텐 베리만은 1938년 4월 『한국의 야생동물지』 책을 발간했다. 말년에 교통사고를 당해 2년간 병상에서 투병 생활을 하였는데 그를 간호해 준 사람이 한국인 간호사였다. 교육방송 형건 피디가 1997년 암스테르담 고서점에서 스텐 베르만의 책을 발견하고 이를 다큐멘터리로 제작해 방영했다.
▲ 동물학자 스텐 베리만(사진;교육방송)
경기도 여주 출신인 최영숙(1906~1932년 4월)은 1922년 이화여고보를 졸업하고 이천에서 교사를 하다가 독립투쟁에 헌신하려고 1922년 9월에 중국 남경 명덕학교에 입학하여 1924년 4월부터 흥사단 활동을 하였다.
그녀는 스웨덴 사회운동가인 ‘앨렌 케이(1849~1926)’의 여성 해방에 관한 글을 읽고 21살 때인 1926년 7월에 스웨덴으로 유학을 떠났는데 상하이에서 다렌(大連)을 거쳐 하얼빈으로 가던 중에 사회주의 서적이 많다 하여 경찰이 의심했다.
▲ 경제학자 최영숙(사진:역사채널)
이효진 교수가 2018년 『아시아여성연구』 제57권 2호에 발표한 논문 「신여성 최영숙의 삶과 기록」에 의하면 “최영숙은 시그투나에서 머물며 스웨덴어를 배웠고, 자수를 놓아 생활비를 벌었다.”라고 말했다.
그녀는 1928년 9월 스톡홀름 사회정치와 정책연구소에 입학하여 1930년 6월 13일 졸업했다. 그녀는 조선어, 일본어, 중국어, 영어, 독어, 프랑스, 스웨덴어에 두루 능통하여 조선을 방문했던 스웨덴 구스타프 아돌프 황태자도서실에서 번역 일을 하며 일본에서 온 영친왕(1897~1970) 부부를 만났다.
그녀는 황태자가 조선에서 가져온 역사 고전 목록을 만들고 내용을 번역했다. 고국으로 돌아오기 전인 1930년에 세계 20여 개 나라를 방문하였다. 인도에서는 간디를 에방하고, 여성지도자 나이두(Sarojini Naidu)와 대담을 하였다. 그녀는 조선 여성의 삶을 사회적으로 해방해주고 싶은 목표로 1931년 11월 추운 겨울에 조선으로 돌아왔지만, 서구에서 교육받은 신여성을 받아주는 곳은 한 곳도 없었다.
그녀는 의복제도 개량, 노동 청년들을 위한 계몽서 『공민녹번』도 함께 출간하고, 여자 소비조합을 결성해 서대문 밖 교남동 작은 점포에서 콩나물과 배추를 팔았다. 조선 땅에 돌아온 지 불과 5개월 만에 영양실조와 과로, 각기병에 걸려 병원에 갔다가 1932년 4월 11일 동대문부인병원에서 산모 상태가 위험하다는 진단을 받고 수술을 받았는데 4월 13일 28세 나이에 삶을 홀연히 삶을 마감했다. 그녀가 더 오래 살았으면 조선 여성 노동자와 여성의 삶도 크게 개선되었을 것인데 하는 강한 아쉬움이 남는다.
한국전쟁 때 스웨덴 정부는 병원선과 의료지원단 1,100명을 보내 병사들을 부산에서 200만 명의 사람들을 치료해 주었다. 스웨덴은 덴마크, 노르웨이와 함께 선진 의학 교육을 위해 서울에 병원을 설립하여 국립중앙의료원의 시초가 되었다.
▲ 스웨덴 의료지원단(사진:전쟁기념관)
스웨덴 베르나도테 왕조 제7대 국왕 칼 16세 구스타프(1946~ )는 세계스카우트연맹 명예회장 자격으로 1991년 강원도 고성에서 개최된 세계잼버리에 참가했다. 2012년 5월 세계 베이든포우엘 펠로십에 참석하러 서울을 방문했고, 2018년 평창 동계올림픽에 출전한 스웨덴 선수단을 격려하기 위해 대한민국을 찾은 구스타프 국왕은 9박 10일 동안 선수들과 함께 선수촌에서 지내며 선수들을 격려했다. 이런 소탈한 모습에 스웨덴 국민은 국왕을 존경한다. 스웨덴 선수단은 금메달 7, 은메달 6개, 동메달 1개를 거둬 국왕의 7차례 한국을 방문을 더욱 빛나게 했다.
▲ 평창 동계올림픽 스웨덴 여자 바이애슬런 팀과 구스타프 국왕(사진:스웨덴대사관)
영국의 육군 장교 베이든 포우엘(1857~1941) 경이 1907년 브라운시(Brownsea Island) 섬에서 20명의 소년과 함께 야영을 시작한 것이 스카우트의 기원으로 현재 175개 회원국, 5,700만 명의 회원이 활동하고 있다.
스카우트 운동의 창시자인 포우엘 경은 “Scouting은 심오하거나 어려운 공부가 아니다. 즐거운 게임일 뿐!”이다 명언을 남겼다.
스웨덴 기자 월리엄 안데르손 그렙스트(W. A:SON Grebst, 1875~1920, 필명은 아손 그렙스트)는 일본제국 수도 도쿄에서 러일전쟁을 취재하러 오래 머물렀다. 그런데 군부는 기자에게 한반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사건 취재를 금지하는 지침을 내리고 조선 방문을 허용하지 않았다.
아손은 조선 압록강 쪽 중국 대련에서 벌어지는 일본과 러시아의 전쟁을 취재하고 싶은 욕심에 ‘면의류 회사(Cotten Garment Company)’ 명함을 만들어 무역상이라 속이고 가방에는 다양한 색깔의 천을 잔뜩 넣고 1904년 12월 24일 나가사키에서 부산으로 가는 배 ‘나토마루’에 승선해 바다를 건넜다.
아손은 일본 제국주의 경찰의 감시를 피하려고 철저하게 상인 복장으로 위장했다. 그는 부산포에 도착하여 조선인과 일본인을 비교했다. “조선인은 일본인보다 머리통 하나가 더 있을 정도로 키가 컸다. 신체가 잘 발달하고 균형이 잡혔다. 태도는 자연스럽고 여유가 있었다. 똑바로 추켜올린 얼굴은 거침없고 당당하다.” 그는 철도 개통식 현장을 목격하고 첫 기차 승객으로 기차를 타고 한성으로 오면서 역 주변 풍광을 모두 기록했다.
▲ 1901년 스테이션 호텔 전경(사진:문화콘텐츠닷컴)
조선은 근대화가 시작되면서 외국인이 들어오기 시작하며 경성역 주변에 호텔이 생기기 시작했다. 선교사 출신인 영국인 엠블리(W. H. Emberley) 부인은 제물포와 서대문 구간이 1900년 7월 8일 완전히 개통되자 1901년 4월 한옥을 개조하여 스테이션 호텔을 건축했다.
엠블리 부인은 호텔을 찾는 외국인에게 친절하게 대해 항상 손님이 많았다. 그래서 새로운 호텔을 구상하고 양식 건물 2층으로 호텔을 짓고는 이름을 그랜드호텔로 개명했다가 1905년 3월에 마르탱에게 호텔을 매각했다.
▲ 1904년 8월 신축된 그랜드 호텔(사진:문화콘텐츠닷컴)
아손은 한성에 도착하자 그랜드호텔에 머물렀다. 그는 엠블리 부인에게 통역을 잘하는 사람을 부탁하여 윤산달을 소개받았다. 아손은 윤산달과 함께 경인선의 종점인 경성역과 인근에 있는 경기 감영을 보러 갔다.
경기감영의 관찰사는 조선 왕정의 핵심으로 임금에게 제일 가까운 인물이 맡아 638명의 관찰사가 거쳐 갔다. 1905년에 경기 관찰사는 최익현(崔益鉉)이었다. 아손은 말을 빌려주는 마구청(馬具廳)도 구경했다.
아손이 한성에 머물 때 순종의 첫 번째 왕비 순명황후(純明皇后:1872~1904)가 승하했는데, 독일 영사의 도움으로 장례식에 초대받아 갔다. 아손은 고종 황제도 뵙고 조문을 하였다.
▲ 순명황후(純明皇后)(사진: 국립고궁박물관)
조선 왕실 황태자비 장례식 행렬을 보고 나서는 “그때 펼쳐진 한 폭의 그림은 아마 죽을 때까지 잊을 수 없으리라! 아무리 비용이 많은 가면무도회라 할지라도 여기에는 비할 바가 못 된다. 한마디로 말해 웅장했다. 눈이 부셨다. 동양의 찬란함이요 아낌없는 풍성함이었다.”라고 기록했다. 아손은 황후 장례식이 매우 엄숙하고 성대하게 진행되었음을 낱낱이 적었다.
한국외대 스칸디나비아어과를 졸업한 김상열은 1978년 스웨덴 스톡홀름 웁살라대학에 유학을 떠났다. 어느 날 우연히 현지 교포인 유재호 도서관 사서를 만났는데 사서가 아손이 저술한 『I. KOREA』 책을 말해 처음 듣는 이야기라 아주 흥미롭게 생각했다.
며칠 지나 유재호 사서가 근무하는 스웨덴국립도서관을 방문하여 서고에 있는 오래된 책을 가져와 함께 책을 펼쳐보았다. 유학생 김상열은 책을 펼치다가 1904년의 조선의 산하를 촬영한 140장의 사진을 보고는 기쁜 나머지 눈물을 흘렸다. 그는 스웨덴 유학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유학 시절에 읽은 여행기를 번역하고 싶은 마음에 다시 스웨덴으로 가서 번역을 의논했다.
▲ I. KOREA (사진:송파책박물관)
김상열 교수는 1984년에 이 책을 출판해 줄 출판사를 찾아 돌아다녔지만 마음에 드는 출판사를 찾지 못했다. 김 교수는 용기를 내어 스웨덴 도서관과 협의를 거쳐 책 원본을 한국으로 모셔왔다. 그는 책을 번역하고 내용을 하나씩 확인하여 ‘도서출판 책과 함께’에서 2005년 1월에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책을 출간했다.
▲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사진:궁인창)
『스웨덴 기자 아손, 100년 전 한국을 걷다』 353페이지에 등장하는 ‘유강윤의 강화 처녀 사랑이야기’는 뮤지컬 소재로도 아주 좋은 내용이다.
(다음 회에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