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374강 강의자료 요약 (2025.1.16)
2025년 1월 16일 강의 장면 -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1. 唐詩 300首
1) 당시 제목 : “경설” 2) 당시 중국어 발음 怪 | 得 | 北 | 風 | 急 | guài | dé | běi | fēng | jí | 前 | 庭 | 如 | 月 | 輝 | Tiān | rén | nìng | xǔ | qiǎo | 天 | 人 | 寧 | 許 | 巧 | Guo4 | jiang1 | qian1 | chi3 | lang4 | 剪 | 水 | 作 | 花 | 飛 | Jiǎn | shuǐ | zuò | huā | fēi |
3) 작자 : 육창(陸暢, 820년 전후) ~ (한시 365 참조) 육창(陸暢)은 당나라 헌종 때 사람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도 지낸 시인이다. 강서관찰판관이란 지방관을 지낼 때 하루 종일 시만 짓고 공문서를 보지 않자 관찰사가 한 마디 충고했더니 벼슬을 버리고 갔다고 한다. 육창은 소주(蘇州) 출신이라 다른 데는 이 사람의 행적이 잘 보이지 않지만 소주의 지지(地誌)인 《고소지(姑蘇志)》에 그 행적이 자세하게 서술되어 있다.
이백이 <촉도난(蜀道難)>이란 시를 지어 검남 절도사 엄무(嚴武)를 비난하자 이 사람은 자신이 은혜를 받은 위고(韋皐)를 칭찬하기 위해 거꾸로 <촉도이(蜀道易)>를 지었다고 한다. 사실 이백이 지은 <촉도난>은 촉으로 가는 산길의 험준함을 주로 노래하고 있는데 그 우의성에 대해 역대로 말이 있었다. 이를 보면 벌써 육창이라는 사람은 이백의 시가 단순하지 않다는 것을 간파하고 그것을 패러디한 것을 알 수 있다. 여하튼 이런 행적만 보아도 성격이 독특하며 시로 자부한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영허(寧許)는 여차(如此)와 같은 말인데 차이가 있다면 의문문을 만든다는 것이다. 이 시도 기발한 착상이 시를 떠받치고 있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을 보고 하늘이 물을 조금씩 떼어내어 꽃을 만들어 날리는 희한한 재주가 있다고 본 것이다.
이런 시를 흔히 영물시(詠物詩)라 한다. 영물시는 기발한 착상을 소재로 한 것이 많다. 그래서 한 편의 동시 같기도 하다. 영물시를 모티브로 그림을 그리거나 그림을 그려 놓은 것에 제화시(題畵詩)로 사용하는 경우도 많다. 이런 그림은 대개 화폭이 작아 소경(小景)이라 부른다. 인터넷에 잘 보이지는 않지만 아마 이 시도 누군가 제화시로 사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눈의 별칭을 전작화(剪作花)라고 하는 것은 이 시에서 유래한 것이다. 백거이 <야설(夜雪)>에 나온 ‘절죽성(折竹聲)’도 이런 경우인데, 시인은 이렇게 고상하고 아름다운 말을 새로 만들어내는 경우가 많다
* 上有天堂 下有蘇杭
* 蘇州
* 항주
* 중국 가옥에는 前庭과 後院이 있습니다. 후원에 상추가 심어져 있으면 과부, 부추가 심어져 있으면 배우자가 있다고 합니다. 중국 가옥의 후원(後院)에 심는 식물과 관련된 속설은 전통 민속 문화와 상징적 의미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1. 상추(生菜)와 과부 상추는 전통적으로 “생채(生菜)“라고 불리며, “생(生)“과 “나가다(离)“를 연상시켜 떠나는 것을 상징한다는 민간 신앙이 있습니다. • 따라서 후원에 상추를 심으면 가족 중 누군가 떠나거나, 특히 배우자가 사별할 수 있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상추의 진정 효과가 있어 잠을 유도한다는 점은 실제로 알려져 있지만, 과부와의 연결은 민간의 상징적 해석에서 기인합니다.
2. 부추(韭菜)와 부부 금슬 • 부추는 “구(韭)“라는 발음이 “오래 지속되다(久)“와 같아 부부 관계의 장수와 화목을 상징합니다. • 또한, 부추는 중국 전통 의학에서 양기를 보강하고, 남성의 건강에 이롭다고 여겨졌습니다.
중국 전통 가옥의 후원에 상추와 부추를 심는 속설은 상징적 해석에 기반을 둔 민간 신앙으로, 과학적 사실과 직접적으로 연결되지는 않습니다. 다만, 부추의 건강 효과는 전통 의학적으로 부분적인 근거가 있습니다.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27강(2023.10.19.) 강의 교안
*《史記》〈周本紀〉 注釋
1. 旣 - 甲骨文, 원래는 그릇 앞에 앉아서 바라보는, 또는 배부른 모습 《說文解字》「旣, 小食也。从皀旡聲。論語曰.不使勝食既」
1) 다하다, 완료하다, 2) 日蝕(月蝕), 3) 끝나다,
4) 잃어버리다, 《史記》〈太史公自序〉「士不可以不弘毅, 任重而道遠。仁以爲已任, 不亦重乎? 死而後已, 不亦遠乎? 俠者救人于厄,振人不贍,仁者有乎, 不旣信,不倍言,義者有取焉」 선비는 굳센 용기가 없으면 안된다. 중대한 사명이 있는데 그것을 실천할 방법이 요원하다. 仁의 이상을 실천하는 것이 자기의 임무이기에 또한 중대하지 않은가? 이 일은 죽어서야 그치니 역시 요원하지 않은가? 협객은 위난에서 사람을 구하고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데서 사람들을 구제하니, 仁즉 仁義之心이 있는가? 믿음을 저버리지 않고(旣) 다른 사람에게 언약한 바를 위배하지 않으니, 義 즉 忠義之心이 있는 사람이 않겠는가?
《史記》란 어떤 책인가? 1. 중국의 관리가 되기 위해 과거 시험 교재의 최상위 교재이다.
2. 황태자의 최종 공부 과정이다. 1) 이덕치인 (以德治人) 2) 태평천하지서 (太平天下之書)
3. 五不 1) 사마천의 단독 저서가 아니다. (1) 사마천의 아버지인 사마담과 공저이다. (2) 사마담이 1/3 정도 기록하였다. (3) 사마천이 14년 내지 15년 동안 걸려서 기록했다.
* 사마담의 생애와 역할 (GEMINI참조) 사마담은 중국 한나라 시대의 태사령으로, 역사가 사마천의 아버지입니다. 사마담은 대대로 사관을 배출한 가문에서 태어나 역사 기록의 중요성을 깊이 인식하고 있었습니다. 태사령으로서 그는 다음과 같은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 역사 기록 : 역사적 사실을 기록하고 비판하는 사관의 직무를 충실히 수행했습니다. • 황제 자문 : 문학, 역사, 천문, 역법 등 다양한 분야에 정통하여 황제의 자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 제도 개혁 : 중대한 제도 개혁과 의례 절차 제정에 참여하여 국가 발전에 기여했습니다. • 사서 수집 : 사서 및 국가 장서를 수집하고 정리하여 역사 자료를 체계화했습니다.
* 사마천에게 미친 영향 사마담은 임종 직전 아들 사마천에게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습니다.
• 태사가 되어 가문의 전통을 이어갈 것 : 사마담은 사마천에게 태사의 자리를 이어받아 가문의 명예를 빛내줄 것을 당부했습니다. • 역사서를 완성할 것 : 사마담이 저술하고자 했던 역사서를 완성하여 역사에 남길 것을 강조했습니다. • 효도의 중요성 : 효도의 궁극적인 목적은 입신양명하여 부모를 빛내는 것이라고 강조하며, 사마천에게 학문에 정진할 것을 격려했습니다.
사마담의 이러한 유언은 사마천에게 큰 영향을 미쳐, 사마천은 후에 '사기'를 저술하는 데 강한 동기를 부여받았습니다.
* 사마담의 유언과 사마천
- 말년과 죽음 기원전 110년, 한 무제가 태산에서 봉선의식을 거행할 때 사마담은 병으로 참석하지 못했습니다. 이를 큰 치욕으로 여긴 사마담은 번민 끝에 사망하게 됩니다. 사마천은 아버지의 뜻을 이어받아 3년 후 태사령이 되어 '사기' 저술을 시작했습니다.
- 결론 사마담은 단순히 사마천의 아버지를 넘어, 중국 역사에 큰 족적을 남긴 인물입니다. 그의 학문적 열정과 역사에 대한 깊은 이해는 사마천에게 큰 영향을 미쳐 '사기'라는 위대한 역사서 탄생의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사마담의 삶과 업적은 오늘날에도 역사학자들에게 많은 시사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2) 우리가 보는 史記는 사마천 사기는 525,650字의 원본인가? (1) 현재 우리가 보는 史記는 宋나라 本이다. (첨삭하여 약 3만자 증가 됨) (2) 이 宋나라 本이 청나라 文淵閣 四庫全書에 들어갔다. (3) 현대 중국 中華書局라는 출판사의 점교본(奌校本)이다. (4) 첨삭 최초 발견자는 동안의 반고이고 10篇이 누락되었다고 함 (5) 현재 확인된 것은 130편중 34편이 누락되었다고 함 (6) 후대 학자중 대표적인 사람은 저소손이 보충하였다
* 저소손[褚少孫] 서한의 문학가이며 사학가이다. 지금의 하남성 우현(禹縣)인 영천(潁川) 출신으로 어렸을 때 지금의 강소성 패현(沛縣)인 패(沛)로 이주하여 살았다. 일찍이 당시의 저명한 유학자 왕식(王式)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원제(元帝)와 성제(成帝) 연간에 박사(博士)로 있었다. 사마천의 史記에 누락된 부분이 있는 것을 발견하고 보찬(補撰)했다. 효무본기(孝武本紀), 삼왕세가(三王世家), 외척세가(外戚世家), 귀책열전(龜策列傳), 일자열전(日者列傳) 및 골계열전(滑稽列傳)을 보찬하거나 부록으로 달았다.(옛글산책 참조)
* 당나라 사마정(司馬貞)은 삼황본기(三皇本紀)를 저술하여 오제본기(五帝本紀)앞에 넣었다.
3) 기전체의 효시가 아니다. (1) 기전체는 전기체로서 인물중심으로 기록하는 것이다.
(2) 기전체 형식은 本紀, 세가, 열전, 표, 서이다. 가. 본기 ~ 12명 (12는 1년 12달과 춘추 12公이라는 학설이 있다) 나. 세가 ~ 30명(제후,왕, 신하) : 한나라때 수레 바퀴살 30개에서 왔다는 설이 있다. 다. 열전 ~ 70명(신하들) : 12x3x2=72, 70+2(윤달) 에서 왔다는 학설이 있다. 라. 표 ~ 10 (10간12지에서 나왔다는 학설) 마. 서 ~ 8 (천지 일월, 산천, 예악)
(3) 사기는 춘추를 본받아(效)하여 기록했다. (기전체 효시는 세본이다)
* 效 周公(예, 악), 繼 春秋(편년체) * 世本은 周代 史官에 의해 편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중국 譜學史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로 인해 중국학계에는 세본에 관한 연구가 상당 정도 축적되어 있다. 이러한 연구에서 세본의 유실 시기는 唐代, 五代, 宋代, 宋·元 교체기, 明代로 추정되고 있다. 이 중 세본이 송대에 유실되었다고 추정하는 연구에서는 세본이 隋·唐代의 도서에서 소개되고 있는데 비하여, 송대 초기의 崇文總目에서는 소개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그리고 세본이 송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래되었다고 주장하는 연구에서는 세본이 비록 관찬 도서인 숭문총목에서 소개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송대와 명대의 다른 도서에서 세본을 인용하고 있기 때문에 세본이 송대 이후에도 계속해서 전래된 것으로 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세본은 한국 보학사에서도 중요한 의미를 가진 것으로 평가받았지만, 현재 한국학계에서는 세본에 관한 연구가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하지만 高麗史 ‘世家’篇에 따르면, 宋 哲宗이 1091년(송 철종 6, 고려 宣宗 8)에 128종의 서명이 적힌 서목을 고려에 보내와 해당 서적들을 전사해 줄 것을 요청하였는데, 그 서목 안에는 宋衷의 注解本일 것으로 생각되는 ‘世本四卷’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러한 사실은 숭문총목이 편찬된 해인 1041년(송 仁宗 1)으로부터 50년이 지난 시점까지도 송 황실에서는 세본을 찾아 볼 수 없었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아울러 漢代 이후로 편찬된 여러 종의 주해본 가운데 송충의 주해본이 가장 가치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음을 말해준다고 할 수 있다. 송대에 원본은 없어졌다. (안강호의 논문 “세본의 전래와 유실에 관한 새로운 접근” 참조)
4) 史記는 원래 책이름이 아니다. (1) 太史公太史公書->太絲記 ->史記(3국시대) ~이름 변천 과정 (2) 사마천이 처음 감수받은 사람은 “동방삭”이다. (이름을 태사공이라고 써 줌)
5) 사기는 오류가 있다. (1) 인명, 지명, 사건명에 오류가 많다. (2) 상고시대의 오제(五帝)~한나라 무제 태초 년간(BC 104~101년)의 중국과 그 주변 민족의 역사를 포괄하여 저술한 통사이다.
4. 三疑 1) 太史公이란 무엇을 의미 하는가? (1) 관직설 (x) (2) 존칭 (▲) (3) 서명 (O) (4) 부자 병칭설 (O)
2) 출생지는 어디인가 (1) 산서성(山西省) 하진(河津) 가. 고대에 하동군(河東郡) 관할 지역에 속했으나, 현대에는 하진으로 독립된 지역으로 구분됨. 나. 하진은 황하가 산서성을 지나며 형성된 용문(龍門) 근처에 위치하며, 이는 사마천 가문의 고향으로 알려짐.
(2) 한성시(韓城市) 지천진(芝川鎭) 가. 최근 사마천의 출생지로 선전하는 경향이 있다. 나. 이는 역사적 근거보다는 지역 관광 자원 개발 및 홍보 목적이 강하다는 비판이 있습니다.
(3) 근거와 정리 가. 산서성 하진현 용문설 《사기(史記)》와 후대의 문헌에 따르면, 사마천의 고향은 산서성(山西省) 하진(河津)용문(龍門) 부근으로 기록되 있다. 아버지 사마담이 芝川鎭에서 공부를 위해 이사를 가 아들 이름을 옮길 遷이라 지음
나. 한성시 지천진 설의 배경 현대 중국에서 사마천의 유적을 홍보하며, 섬서성(陝西省) 한성시(韓城市)의 지천진을 사마천의 고향으로 주장. 이는 사마천의 조상 묘소(사마묘, 司馬廟)가 한성시에 위치한 데서 비롯된 혼동으로 추정. 그러나 이는 사마싸 조상들 묘소 위치를 동일시한 과장된 주장으로 보임.
다. 역사적 문헌의 지지 《한서(漢書)》와 기타 고대 문헌은 사마천이 하동군 용문 출신이라는 점을 명확히 언급. 하동군은 산서성 일대에 위치하므로, 사마천의 출생지는 하진현 용문 지역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라. 종합하면 사마천의 출생지는 산서성 하진현 용문 지역으로 보는 것이 역사적 문헌과 사실에 부합합니다. 현대 중국에서 한성시 지천진을 그의 출생지로 선전하는 것은 지역 경제적 목적이 강하며, 학문적 근거는 약한 주장으로 평가됩니다.
3) 李陵을 변호하다가 궁형을 당한 것인가? (1) 사마천(司馬遷)의 스승 가. 동중서(董仲舒) • 사마천은 동중서에게서 금문경학(今文經學)을 배웠습니다. • 유교적 윤리와 천인감응(天人感應) 사상을 전수받았으며, 이후 역사서에 이 사상이 녹아 들었 습니다.
나. 공안국(孔安國) • 공자의 후손으로, 고문(古文)을 전수한 학자. • 사마천은 공안국에게서 《고문상서(古文尚書)》를 배워 역사 기록과 고문학적 기초를 다졌습니다.
다. 호자(胡子) • 도가(道家)의 사상을 전수한 스승. • 호자는 도가적 자연주의와 철학적 관점을 가르쳐 사마천의 역사관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라. 공승(孔僧) • 주로 시(詩)와 예(禮)를 가르친 학자. • 사마천은 공승에게서 유교적 예학(禮學)과 문학적 감각을 배양했습니다. 사마천은 기원전 2세기에서 1세기에 걸쳐 한나라 무제 시대에 살았던 중국의 위대한 역사가 입니다. 동중서에게 금문경학, 공안국에게서 고문을 배우며 유가(儒家)의 사상을 익혔고, 호자와 공승으로부터 도가와 예학의 영향을 받았습니다. 이러한 학문적 토대는 그의 저작 《사기(史記)》에 반영되어 다양한 철학적 사유와 역사적 통찰을 담아낼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습니다.
(2) 한고조와 한 무제에 대한 사실 기록으로 미움을 샀다.
(3) 한 무제가 첩 이夫人을 너무 이쁘했다.
* 한대(漢代)의 후궁(後宮) 직급은 황후를 정점으로 엄격한 서열 체계가 있었습니다. 1. 황후(皇后) • 후궁의 최고 직위이자 황제의 정실 부인. • “중궁(中宮)“으로 불리며, 내정을 총괄하고 후궁을 관리.
2. 부인(夫人) • 황후 다음의 높은 직위.
3. 귀인(貴人) • 부인 계급 중 가장 높은 직위. • 황제의 총애를 받거나 공로를 세운 후궁에게 부여.
4. 미인(美人) • 귀인보다 낮은 직위. • 재능과 미모로 선발된 후궁.
5. 양인(良人) • 미인보다 한 단계 낮은 계급. • 일반적인 후궁 계급으로, 후궁 생활의 기본적 역할 수행.
6. 팔자(八子) • 후궁의 하급 계급 중 상위 8단계에 속함. • 후궁 생활의 말단 업무나 보조적 역할 수행.
7. 칠자(七子) • 팔자보다 낮은 계급. • 궁중 내에서 기본적인 복무 역할 담당.
8. 장사(長使) • 후궁 체계에서 특정 업무를 맡은 관리 역할. • 비교적 낮은 계급으로, 실질적 관리 업무 수행.
9. 소사(少使) • 장사보다 낮은 계급으로, 후궁 생활의 말단 업무를 담당.
종합하면 한대의 후궁 체계는 황후(皇后)를 정점으로 부인(夫人) 계급, 하위 계층인 팔자(八子)와 칠자(七子), 그리고 장사(長使)와 소사(少使)로 구성되었습니다. 이는 엄격한 서열과 체계를 통해 황실의 위엄을 유지하고 권력 구조를 반영한 것입니다.
(3) 이 부인의 오빠 이광리 장군을 편애하는 용병술을 비판했다 한 무제 때 李廣利 장군의 동생 李夫人으로 권력을 누렸다. 이광리는 한무제 유철이 내린 막강한 군사를 이끌고 서역 대원(大宛)의 이사성(貳師城)을 공략하여 성공을 거둠으로써 이사장군(貳師將軍)으로 불리게 된다. 다른 오빠 이연년은 노래와 춤을 생업으로 하는 광대 집안 출신이었다. 여동생 李夫人 덕에 궁중 음악을 담당하는 최고의 자리에 올랐다. 소제(昭帝)를 보좌하여 국정을 돌보던 곽광(霍光)은 무제 유철의 평소 소원을 잊지 않고 이부인을 종묘에 배향하고 효무황후(孝武皇后)로 추존했다. 사마천이 이부인과 한무제등을 사관으로 태사공서에 남기자 궁형을 당하는 한 계기가 된다.
* 한혈마(汗血馬)는 중국 역사에서 명마라 불리던 말의 한 종류이다. 한혈마라는 이름에 대해서는 「피와 같은 땀을 흘리며 달리는 말」, 즉 말의 털 색깔(혹은 말의 피부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기생충으로 인한 출혈 또는 피부 자극) 때문에 마치 피와 흡사한 땀을 흘리는 말이라는 뜻으로 한혈마라고 불리게 되었다. 말의 피부에 기생하며 피를 빠는 기생충의 경우 그것이 말의 능력을 저하시키지는 않으며, 오히려 기생충에게 피를 빨리는 말은 그 고통 때문에 보통 말이 주행하는 속도나 거리 이상으로 질주하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것을 명마라고 생각하고 한혈마를 명마라고 부르는 데까지 이르렀다는 것이다. 이 말의 원산지는 중앙아시아 국가 투르크메니스탄(Turkmenistan)으로 국제적으로 공인된 이름은 아칼 테케(Akhal Teke)다. 중국인은 그 말에 전기적인 색채가 농후한 명칭, 한혈보마(汗血寶馬)라 붙였다. 현재 전 세계에 3000여 필밖에 없고 그중 2000여 필은 투르크메니스탄에 있다. 그 나라의 국보다.
(4) 이능장군의 변호(perplexty참고)
사마천이 궁형을 받게 된 이유는 이릉 사건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이릉 장군은 흉노와의 전투에서 5,000명의 결사대를 이끌고 싸웠지만, 3만 명의 흉노군에 포위되어 결국 항복하게 되었습니다 ∙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을 매국노로 성토하는 분위기였으나, 사마천은 이릉을 변호했습니다. 그는 "이릉은 중과부적으로 어쩔 수 없이 거짓항복한 것이며 그는 훌륭한 장수다"라고 주장했습니다 ∙ 이 발언이 한무제의 분노를 샀고, 사마천은 "황제를 무고한 죄"로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당시 사마천의 나이는 48세였습니다 ∙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한무제는 사마천에게 사형을 명했습니다. 사형을 면하는 방법은 두 가지였습니다. 가. 50만 전을 내는 속전(贖錢) 나. 궁형을 받아 내시가 되는 것
사마천은 속전을 낼 돈이 없었고, 결국 궁형을 자처했습니다. 그 이유는 아직 완성하지 못한 <사기> 때문이었습니다 ∙ 사마천이 궁형을 감수한 이유는 다음과 같습니다. 가. 역사 기록에 대한 사명감 : 사마천은 역사서를 완성해야 한다는 강한 의지가 있었습니다. 나. 역사에 대한 열정 : 궁형의 치욕에도 불구하고, 사마천은 역사 저술에 대한 열정을 잃지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사마천은 42세부터 56세로 사망할 때까지 14년에 걸쳐 <사기>를 완성했습니다 ∙ 궁형 이후 <사기>에는 한제국과 한무제를 비판하는 시각이 포함되었고, 사회의 문제점과 권력층의 부패를 신랄하게 지적하는 내용이 담기게 되었습니다.
(2025.1. 16 강의 요약자 : 주정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