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면적 60배 크기 남극 대륙...7세기 뉴질랜드 원주민, 고래 사냥하다가 처음 발견 남극 항해 탐험가 - 2
뉴질랜드 민족생물학자이며 환경생물학자인 프리실라 웨히(Priscilla M. Wehi) 박사는 “남극 대륙은 한반도 면적의 60배 크기로 7세기에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이 처음 발견했다.”라고 2021년 뉴질랜드 왕립학회 저널 논문에서 주장했다.
그녀는 와이카토 대학교 마오리 태평양 개발 학교에서 박사 과정을 마치고 뉴질랜드 남섬 더니딘에 위치한 오타고 대학교((University of Otago)의 부교수로 재직 중이며 2021년 힐 틴슬리 메달을 수상했다.
박사는 마오리족 및 원주민 연구 학부인 테 푸아 와낭가 키 테 아오(Te Pua Wānanga ki te Ao)와의 관계를 유지하며, 마나아키 위누아 랜드케어 연구소의 환경 생물학자이며, 테 푸나하 마타티니 복합 시스템 우수 센터의 차기 공동 소장이다.
▲ 뉴질랜드 원주민 마오리족과 18세기 제작된 대형 카누(사진:APP)
박사는 “폴리네시아 항해사 후이 테 랑기오라가 다른 선원들과 함께 650년경 고래의 이동 경로를 따라 라로통가에서 남극에 도착했다.”라고 주장한다. 마오리족을 포함한 많은 폴리네시아인이 카누로 남극해를 항해했다고 하는데, 이는 라로통간 와카파파의 족보에 나오는 이야기이다. 뉴질랜드에는 50만 명의 마오리족이 살고 있다.
▲ 27m의 긴수염고래 (사진:알프레드 베게너연구소)
뉴질랜드는 1642년 네덜란드 동인도회사 소속 항해사인 아벨 얀손 타스만(Abel Janszoon Tasman, 1603~1659)이 최초로 발견했다. 그는 뛰어난 탐험가로 네덜란드 동인도 총독 앤서니 반 디멘에 의해 남태평양과 인도양을 탐험하기로 선정되었다.
타스만 선장은 1642년 2척의 배로 바타비아를 출항해 모리셔스를 거쳐 태즈메이니아와 뉴기니, 통가, 피지를 발견했다. 1647년에 무역함대를 이끌고 태국으로 갔고, 1648년에는 필리핀에서 스페인 군함과 맞서 함대를 지휘했다.
▲ 아벨 타스만 항해도(사진:Wikipedia)
제임스 쿡(1728~1779)은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8살 때 석탄 운반선의 견습공으로 들어가 항해술을 익힌 후 1755년 대영제국 왕립 해군에 자원입대했다. 쿡은 실력을 인정받아 범선(Bark)의 선장이 되어 지도 측량을 하면서 지도 제작법을 습득했다. 하사관 쿡은 1768년 8월 항해에 참여했는데 왕립 해군본부는 쿡이 항해술과 측량, 천문학에 조예가 깊어 대위로 승진시킨 후 탐사대장으로 지명했다.
쿡 선장은 엔데버호(368톤)에 94명의 일행을 태우고 플리머스 항을 출항했다. 이 배에는 당시의 쟁쟁한 동·식물학자와 사생 화가가 함께 동승했다. 1769년 타이티 섬에 도착한 후 관측소를 설치하고 미지의 대륙 존재를 조사하기 위해 항해에 들어갔다. 쿡 선장은 뉴질랜드가 2개의 큰 섬으로 나뉜 것을 알아내고, 오스트레일리아 동해안을 탐사하여 사람이 거주할 땅임을 처음 확인했다.
1771년 7월 영국 도버 항으로 귀환하면서 철저하게 기록한 항해 보고서를 제출해 놀라운 항해 기록을 확인한 해군본부는 쿡을 중령으로 특별 진급시켰다. 쿡 선장의 항해로 태평양 지역은 세계지도에 처음으로 소개되었다.
2차 항해는 1772년 7월에 시작되었다. 대영제국 해군본부는 미지의 남방 대륙을 찾기 위하여 탐험대 규모를 200명으로 늘렸다. 쿡 선장은 1차 항해에서 30명의 사람이 괴혈병으로 죽은 것을 마음에 두고 배가 항구에 도착하면 신선한 식료품과 과일을 충분하게 실고 선원에게 공급했다.
▲ 제임스 쿡 선장 항해 지도(사진:김이재 교수)
이후 항해 중에 괴혈병에 걸린 선원이 한 명도 발생하지 않아 대항해시대의 고질병을 완전히 없애는 계기가 되었다. 쿡 선장은 희망봉을 지나 남극 대륙의 75마일까지 접근하면서 빙산을 발견하고 남극을 쳐다보았다.
그는 1773년에 자신이 “의심할 여지 없이 그 선을 넘은 최초의 사람”이라는 자부심 속에 남극권을 넘어 계속 항해를 했다. 이듬해 쿡은 남극을 완전히 일주하여 위도 71° 10도에 도달했지만, 두꺼운 얼음에 의해 다시 쫓겨났다.
쿡은 남극에 도달하지는 못했지만 비옥하고 인구가 많은 대륙이 남극을 모두 둘러싸고 있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영국 해군성은 북서항로를 찾기 위한 탐색에만 몰두했다. 쿡 선장의 항해는 해양사에서 아주 중요해 다음에 상세하게 적으려고 한다.
러시아제국의 남극 탐험은 1819년부터 1821년까지 파비안 벨링스하우젠(Fabian Bellingshausen, 1778~1852)과 미하일 라자레프(Mikhail Lazarev) 탐험가의 지휘 아래 이루어졌다. 이 탐험은 지구 일곱 번째 대륙으로 보이는 남극의 존재를 증명하거나 반증하기 위해 남극해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 미하일 라자레프 함대 사령관(사진:Wikipedia)
벨링스하우젠은 러시아제국의 황제 알렉산드르 1세(1777~1825)의 명령을 받아 남쪽으로 원양 항해를 나서 1820년 남극을 발견하게 된다, 그가 지휘하는 범선은 남극을 한 바퀴 돌면서 관측하고 1821년 화산섬인 페테르 1세 섬에 상륙했다. 이 섬은 남극권 섬 중에 유일하게 이끼 등 식물이 자라는 곳이다.
▲ 벨링하우젠 선장의 남극 탐험 항해 지도(1819-21)(사진:Wikipedia)
함선 슬루프 보스토크(The sloop Vostok)는 벨링하우젠의 지휘 아래 있었고, 라자레프는 범선 슬루프 미르니(the sloop Mirny)호를 지휘했다. 승무원은 190명으로 구성되었다. 번역하는 사람이 항해 일기를 제대로 번역하지 못해 선장이 남극 육지를 보지 못했다고 잘못 인식했다.
남극 항해 장비를 갖추는 데 어려움이 많아 실제 출항은 1819년 7월 4일에 이루어졌다. 과학팀을 구성하는 것은 불가능해 지리(geography), 민족지학(ethnography), 자연사(natural history) 분야의 거의 모든 과학적 관찰은 장교들과 유일한 과학자인 임페리얼 카잔 대학교(the Imperial Kazan University)에서 학생들 가르친 이반 미하일로비치 시모노프(Ivan Mikhailovich Simonov) 부교수가 수행했다.
탐험 중에 만난 사건, 풍경, 생물 종(biological species)을 묘사하기 위해 초보 화가 파벨 미하일로프(Pavel Mikhailov)가 고용되었다. 그의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the South Shetland Islands) 그림은 1940년대까지 영국 항해에서 사용되었다.
▲ 범선 슬루프 미르니(the sloop Mirny)(사진:Wikipedia)
미국의 나다니엘 브라운 팔머(Nathaniel Brown Palmer, 1799~1877)는 탐험가, 선박설계자, 고래 사냥꾼, 물개 사냥꾼으로 유명하다. 1810년경에는 남극해 물개 가죽이 중국과의 무역 품목으로 가치가 높아 상인들은 물개를 찾아 나섰다.
팔머는 범선 Hero(14m) 호를 타고 항해하다 1820년 11월 17일 남극을 발견하고는 ‘팔머랜드’라고 이름을 명명했다, 당시 항해사들은 남극 해안과 섬이 종종 얼음으로 본토와 연결되어 있어 자신이 본토에 서 있는지 섬에 서 있는지 얼음 위에 서 있는지 확인하기가 무척 어려웠다. 팔머 선장은 고래잡이 하는 제이콥 로퍼(Loper) 선장의 집을 사들이고 그의 집에서 오래된 남극 해안선 고지도를 발견했다.
▲ 나다니엘 브라운 팔머 우표(사진:Wikipedia)
18세기에 영국 청소년들은 14살부터 7년간 바다에서 선원 견습 생활을 하였다. 윌리엄 스미스(William Smith, 1790~1847)는 그린란드 고래 어업에서 견습 과정을 밟았다. 1820년 1월 30일, 영국 해군 장교 출신인 에드워드 브랜스필드(Edward Bransfield, 1785~1852)와 윌리엄 스미스는 남극 본토의 최북단 지점인 트리니티 반도(Trinity Peninsula)를 발견했다.
1819년 2월, 케이프 혼을 회항하던 중 영국 상선 윌리엄의 소유주이자 선장이며 탐험가인 윌리엄 스미스가 강풍으로 배가 남쪽으로 밀려와 사우스 셔틀랜드 제도(South Shetland Islands)와 리빙스턴 섬을 최초로 발견했다.
윌리엄 스미스 선장의 새로운 섬 발견 소식이 칠레 중부에 있는 발파라이소에 전해지자, 영국 해군의 셔리프 선장은 이 문제에 대해 추가 조사가 필요하다고 판단했다. 그는 윌리엄 호를 전세내고 브랜스필드와 두 명의 중간 선원, 새로 발견된 섬들을 조사하기 위해 HMS 슬라니 호의 외과의사를 임명했다.
스미스는 브랜스필드의 조종사로 남아있었다. 그들은 남극해로 항해해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에 도착했다. 브랜스필드는 킹 조지 섬에 상륙하여 조지 3세를 대신하여 공식적인 소유권을 얻었다. 이후, 디셉션 섬을 지나 남서쪽 방향으로 계속 나아갔다. 남쪽으로 방향을 틀어 500km 이어진 브랜스필드 해협을 건넜다. 이 지명은 1822년 영국의 탐험가 제임스 웨델(1787~1834)이 그의 이름을 따서 명명했다.
▲ 스미스 선장과 동료 항해사의 남극해 항해로(사진:Wikipedia)
1820년 1월 30일에는 남극 본토의 최북단인 트리니티 반도를 발견했다. 극지 탐험가의 전기를 쓰는 영국 작가 롤랜드 헌트포드(Roland Huntfofd, 1927~ )는 “남극 대륙의 발견이 바로 그것이었다.”라고 썼다. 브랜스필드는 그의 통나무에 두 개의 눈으로 덮인 높은 산이라는 메모를 남겼다. 그중 하나는 프랑스 탐험가 쥘 뒤몽 뒤르빌(1790~1842)이 그를 기리기 위해 브랜스필드 산으로 명명했다.
남극대륙 트리니티 반도의 한 부분을 차트에 올린 브랜스필드는 남극 빙상 가장자리를 북동쪽 방향으로 따라가다 엘리펀트 섬과 클라렌스 섬에서 다양한 지점을 발견하고, 이 지점을 영국 왕실에 공식적으로 주장했다. 그는 엘레펀트 섬 주변을 항해하지 않았고 이름도 밝히지 않았지만, 클라렌스 섬을 온전히 차트에 올렸다. 브랜스필드가 칠레 발파라이소로 돌아왔을 때, 그는 자신의 차트와 일기를 윌리엄 핸리 셔레프(William Henry Shirreff, 1785~1847) 선장에게 전달했고, 셔레프 선장은 이를 해군성에 전달했다.
▲ 칠레 구조선(SS Yelcho) Luis Pardo Villalon 선장의 흉상(장소:엘레펀트 섬, 사진:Martin Gray)
칠레의 루이스 파라도(1882~1935) 해군 장교는 1916년 8월 30일 증기 예인선 옐초(Yelcho, 전장 36.5m)를 지휘하여 어니스트 섀클턴 경의 배 인듀어런스(Endurance) 호의 22명 승무원을 모두 구출해 파라도 장교의 흉상이 섬에 세워졌다. 새클턴의 배는 1915년 1월 웨델해 얼음에 갇혔고 10월 27일에는 배가 얼음에 깔려 침몰했다.
승무원들은 도보, 썰매, 구명보트를 타고 남극 반도 북단 엘레펀트 섬에서 이동했다. 5명의 대원은 구명보트로 1,300km를 항해하여 칠레 정부에 조난을 알리고 도움을 청했다. 선원들은 오랜 기간 섀클턴 경의 구조를 기다렸다가 정말 극적으로 구조되어 1916년 9월 3일 푼타아레나스에 도착해 환영을 받았다.
남극 탐험가로 유명한 사람은 제임스 클라크 로스(1800~1862), 링컨 엘스워스(1880~1951), 박영석(1963~2011), 리처즈 에벌린 버드(1888~1957), 카르스텐 보르크그레빙크(1864~1934), 존 비스코(1794~1843), 어니스트 섀클턴(1874~1922), 로버트 팰컨 스콧(Robert Falcon Scott, 1868~1912), 로열 아문센(1872~1928), 로런스 오츠(1880~1912), 벨링스하우젠(1778~1852), 필립 브로클허스트(1887~1975), 홍성택(1966~ ), 에드먼드 힐러리(1919~2008) 등이 있다.
(이어서 3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