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탐험 ⑩】금 캐는 사람 또는 극지탐험가 다양하게 불러...원양어선 타고 북극 정착한 조선여인 유모 고용도 체코 모험가 ‘얀 벨츨’의 여행기
체코 모험가 얀 벨츨(Jan Welzl, 1868~1948)의 여행기는 정말 놀랍고 신기한 북극 지방 에스키모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송파도서관에 빌려온 책에는 130여 년 전에 정어리 어장을 따라 원양어선을 타고 왔다가 섬에 남은 조선 여인의 이야기가 담겨 있었다.
한 가정의 에스키모가 아이를 낳고 죽어 아이를 다른 사람에게 양육을 부탁했는데 아이가 아장아장 걸어 다니던 5세 때 양녀의 유모로 고용하여 7년을 같이 지낸 기록이 있어 매우 흥미롭다.
서양에서는 그를 금을 캐는 사람(gold-digger)과 에스키모 족장, 뉴시베리아 섬(New Siberia island)의 법원장, 판사, 이야기꾼, 작가, 북극 지역의 우체부, 어부, 고래잡이 선원, 선장, 의사, 디자이너, 사업가, 세계 여행자, 장난꾸러기, 극지 탐험가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그는 모피를 수집하고 팔아 부유한 덕분에 백인 정착민과 에스키모들은 그를 존경하였다. 이 때문에 북극의 비스마르크(Arctic Bismarck)라고 불렀다.
▲ 극지 탐험가 얀 벨츨(Jan Welzl) [사진:euro-cz]
얀 벨츨의 전기(Biography)에 의하면 그는 체코(Czech) 동부 모라비아(Moravia)의 자브르제흐(Zábřeh)에서 1868년 태어나 교육을 받고 16세 되던 해인 1884년 즈볼레(Zvole)에서 자물쇠 수리공(locksmith) 교육을 마치고 수습기능공(journeyman)이 되었다.
2년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the Austro-Hungarian Empire)의 주요 도시를 도보로 여행했다. 군대에서 복무를 마친 후에 1888년 이탈리아 북서부에 있는 제노바(Genoa) 항구로 가서 미국으로 가는 기선 배에 석탄을 나르는 화부(stoker)로 취직했다.
그는 배를 타고 아프리카가 있는 인도양, 대서양과 태평양을 지나 아시아를 항해하고는 미국에 머물지 않고 블라디보스토크로 향했다. 1892년(24세)에 러시아와 중국 국경에 있는 아서(Port Arthur) 항에서 노동자로 일했다. 1893년(25세)에는 이르쿠츠크(Irkutsk)로 옮겨가 시베리아 횡단 철도(the Trans-Siberian Railway) 건설에 참여했지만, 몇 달 후 북극에 가보고 싶은 열망에 일을 그만두었다.
▲ 사하공화국 말 [사진:위키피디아]
1894년(26살) 봄에 크라스노야르스크에 도착하여 말과 수레를 구하고 북극을 향해 출발하여 늦가을에 야쿠츠크(Yakutsk)에 도착하여 겨울을 보냈다. 그곳은 지구에서 가장 넓고 추운 사하공화국(야쿠티아공화국, Siberian Yakutia) 수도였다.
당시 청년을 북극 섬까지 안내한 교통수단은 야쿠티아 말이다. 몇 년 전 삼성동 코엑스에서 개최된 국제관광전에서 멋진 의상을 입은 야쿠티아 여성을 보기 전에는 이런 고장이 우리나라의 북쪽에 있다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인구가 적은 공화국에서 전세 비행기를 타고 대구종합병원을 방문해 종합 검진과 건강상담을 하는 것을 목격하고 놀랐던 적이 있다. 러시아 영토의 18%를 차지하는 야쿠티아공화국의 면적은 몽골의 2배로 인도보다 조금 작고 아르헨티나보다 크다.
한국보다 31배나 큰 땅에 세계 최대 다이아몬드 광산이 있다. 사하공하국 예고르 보리세프 대통령(재임기간:2010~2018)은 2016년에 올림픽 정신을 대중화하고 국제 스포츠 협력을 주도했다.
그는 《아시아의 아이들》 국제위원회를 거쳐 승인을 받아 《2019년 제1회 동계유소년 아시아 국제 스포츠(The 1st Winter Youth Asia International Sports Competition)》를 유즈노사할린스크에서 개최했다. 당시 종목은 바이애슬론, 알파인 스키, 크로스컨트리 스키, 스키점프, 스노보드, 피겨 스케이팅, 아이스하키, 쇼트트랙이었다.
이곳은 여름이면 30℃로 덥지만, 겨울철에는 영하 4~50℃를 오르락거리는데 추위를 잘 견디는 크고 강한 야쿠티아 말이 살고 있다. 러시아 과학자들은 시베리아의 극한 기후를 견딜 수 있는 야쿠티아 말 5종류를 논문으로 발표했다.
이 말들은 영하 70도까지 떨어지는 기온에서도 은신처 없이 생존할 수 있고 깊은 눈 속에서도 눈을 헤치고 먹이를 찾아 먹는 특별한 능력이 있다. 이 품종을 연구한 야쿠츠크 농업과학연구소 말 연구자들은 야쿠티아 민족의 조상들이 남쪽에서 가져온 말과 빙하기 이후 살아남은 야생 흰 툰드라 말의 교배에서 유래했다고 믿고 있다.
▲ 야쿠타아 공화국 건국 100주년 [사진:위키피디아]
모험자는 1895년(27세) 봄에 야쿠츠크(Yakutsk)를 출발해 베르코얀스크(Verkhoyansk)를 거쳐 콜리마(Kolyma)강으로 가는 길에서 겨울을 맞이했다. 1896년(28세) 콜리마강 상류에서 하류까지 석 달 동안 뗏목을 타고 내려가서 하류인 콜림스크에서 겨울을 보냈다.
1897년(29세) 야쿠티아 말을 순록과 교환하고 썰매를 사서 콜류친에 도착했다. 그는 언 바다를 달려서 베링 해협까지 갔다가 아나디리강을 거쳐서 다시 콜류친으로 돌아왔다. 여름에 포경선을 타고 선원이 되어 고래 12마리를 잡았다. 포경선 선장은 북극해로 갔다가 노바야시비리섬에 모험가를 내려주면서 다시 만나자고 약속했다.
1898년(30세) 여름에 다른 포경선이 나타나 포경선에 올랐으나 이번에는 고래 6마리를 잡아 약속대로 양초를 받았다. 모험가는 북극권에 도달해 처음에는 생활이 아주 곤란했지만, 차츰 이웃에 사는 백인 정착민과 이누이트(Inuit)족과의 교류를 통해 힘든 생활에 곧 적응하였다.
1899년(31세)에 정착민을 만나 조언을 듣고 수리공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이누이트에게서 받은 모피나 생선, 가죽으로 살다가 장사를 생각했다. 1900년(32세) 석탄과 목재 판매를 비롯하여 가게를 열고 사업을 시작함. 마을에서 어린이를 양녀를 받아들이고 조선 여인을 유모로 두었다.
1901년(33세) 미국 알래스카 놈으로 백인 동료들과 첫 번째 출장을 떠났다. 알래스카는 원래 러시아 땅이었으나 1867년 미국 국무부장관 월리엄 슈워드가 러시아로부터 720만 달러를 주고 땅을 구입했다.
1902년(34세) 3월에 미국 출장을 마치고 샌프란시스코 도착해 유콘강 상류부터 하류까지 여행했다. 1903년(35세)에 작은 포경선을 동료들과 공동으로 매입하여 북극해에서 사업을 크게 확장해 선박 여러 척을 공동으로 소유했다. 그는 원주민에게 생필품을 전달하고 금을 캐러 온 광부에게 식량, 의약품, 탄약(ammunition), 폭약, 생필품을 공급하고 개 썰매(dogsled)를 이용해 우편물을 날랐다.
그는 친절하고 편견이 없어 북극권의 러시아 프란츠 조세프 랜드(Franz Josef Land) 제도에서부터 알래스카와 북부 캐나다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그를 항상 우호적으로 대했다.
▲ 북극권 신시베리아제도[사진:위키백과]
1924년(56세)에 그가 소유한 상선(Seven Sisters)이 미국을 방문하고 북극으로 가는 길에 미국 태평양 연안에서 배가 난파(wrecked)되어 극적으로 구조되었다. 미국 정부는 그를 심문하고 유럽으로 추방(deport)하였다.
그는 함부르크에서 무료한 시간을 보냈다. 고향 체코슬로바키아에 몇 통의 편지를 보냈는데 루돌프 태스노흘리덱(Rudolf Těsnohlídek) 기자에게 전해져 두 사람은 여러 차례 서신을 교환했다. 그의 놀라운 인생이 체코에 알려져 바로 유명한 사람이 되었다.
기자는 모험가와의 대화를 바탕으로 그의 모험을 하나씩 기록하기 시작해 파벨 아이스너(Pavel Eisner)가 계속했지만 끝내지 못하고 Bedřich Golombek과 에드바르 발렌타(Edvard Valenta)가 완성했다.
그는 1928년 고국에 돌아와 강의를 하며 라디오 강연을 통해 북극 경험담을 소개했다. 그는 돈을 많이 벌어 1929년(61세) 북극에서 필요한 물건을 장만해 예전 살던 북극권으로 행했다. 황금의 땅 30년(Thirty Years in the Golden North)이라는 책은 1932년 출간되어 해외에서도 큰 반향을 일으켰다.
▲ 《황금의 땅, 북극에서 산 30년》
“뉴시베리아 제도는 러시아 북동부 북극해에 있는 동부 시베리아 북쪽에 위치하며, 서쪽으로는 동시베리아해에서 동쪽으로는 랍테프해를 가르고 있고, 드미트리 랍테프 해협은 신시베리아 제도와 시베리아 본토를 분리합니다. 내가 살았던 노바야시리야 섬은 해수면보다 79m 낮은 곳으로 침전물이 쌓여 생긴 섬으로 온통 얼음으로 뒤덮여 있다. 나는 이 냉혹한 곳에서 버려지는 불쌍한 여자들이 가엾게 여겨질 때면 그들에게 할 일을 주곤 했다. 그들은 겨울 내내 석탄 캐는 일을 도왔고, 그 가운데 한 명에게 집안일을 맡겼다. 하지만,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는 사람은 그 조선 여인뿐이었다. 그녀는 백인에게 요리해 줄 수 있었고 청결이 어떤 것인지도 알았다.” 이 조선 여인은 원양어선을 타고 왔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고 척박한 노바야시비리 섬을 삶의 터전으로 삼았다고 모험가는 회상했다. 당시 북극에는 여러 지역의 사람들이 정어리를 잡으러 왔다. 조선 여인은 모험가가 입양한 5살 에스키모 소녀를 7년간 키웠으며 집안 살림도 도왔다.
북극에 살았던 조선 여인에 대한 목조각은 알래스카 앵커리지박물관 홈페이지에 실려있다. 캐나다 북부 알래스카 퀸 살로트(Queen Charlotte) 섬에 살던 하이다(Haida) 부족민이 조선 여인 목조각을 만들었는데 섬에서 출토되었다.
2022년 11월 발간한 〈극지와 사람〉 제1호에 극지연구센터 이슬기 연구원이 조선 여인을 소개하면서 목조각 사진 2장을 공개하였다. 이 연구원은 하이다 원주민이 유럽인들과 바다표범과 모피를 거래할 때 모험가 얀 반츨과 교류한 것으로 추정했다. 필자는 조선 여인이 러시아 북극권에서 살다가 날씨가 좋은 에스키모인들이 많이 사는 퀸 살로트 섬으로 이주한 것으로 보았다.
▲ 캐나다 북부 퀸 살로트(Queen Charlotte) 섬 [사진:구글지도]
하이다 언어로 하이다 과이는 ‘사람들의 섬들’이란 말이다. 이곳 원주민들은 북미대륙 캐나다 서부 하이다가이 제도와 알래스카 웨일즈 섬에 살면서 어로하는 모계혈연집단이다.
하이다족 문화는 이웃에 사는 틀링깃족, 치무시족과 비슷하며 물고기, 새와 관련된 주술을 가지며, 다양한 디자인 표현과 정교한 조각 기술을 가졌다. 하이다족의 예술과 마을이 남아있는 SG̱ang Gwaay Llnagaay(Ninstints)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
마을 이름인 SG ̱앙 과아이 엘나가이는 앤서니 섬의 하이다 이름으로 ‘붉은 대구 섬’을 의미한다. 하나스 국립공원 보호구역(The Gwaii Haanas National Park Reserve)에는 많은 토템상이 있다.
▲ The Gwaii Haanas National Park Reserve 토템 기둥 [사진:유네스코]
모험가 얀 벨츨은 1929년 캐나다 북서부 도슨(Dawson)을 여행했다. 도슨 지명은 캐나다 지질학자이며 측량사인 조지 머서 도슨(George Mercer Dawson, 1849~1901)의 이름을 땄다.
도슨은 캐나다 동부 노바스코샤주 픽토우(Pictou)에서 태어나 11살 때 희귀병인 척추 결핵으로 인해 허리가 기형적이고 성장이 크게 저해되었다. 그는 몬트리올 고등학교와 맥길 대학교에 진학하고 1869년 런던으로 이주하여 왕립 광산학교에서 지질학과 고생물학을 공부했다.
1870년대에 퀘벡 시티에 있는 모린 칼리지에서 화학 교수로 경력을 시작했다. 1883년과 1884년에 캐나다 로키 산맥을 여행하며 주요 산, 산 고개, 강을 지도로 작성했다. 그는 지질학적 연구 외에도 여행 중 만난 원주민들의 언어와 문화에 깊은 관심을 가졌다.
1878년 퀸 샬럿 제도(하이다 그와이)의 석탄 매장지를 연구하면서 하이다족에 대한 포괄적인 보고서를 작성했다. 하이다 마을과 토템 기둥에 대한 그의 사진은 귀중하고 독특한 기록으로 남아 있다. 유콘족과 브리티시컬럼비아 북부의 원주민, 밴쿠버섬의 콰키우틀족, 브리티시컬럼비아 중부의 슈스왑족에 관한 논문도 발표했다.
▲ 캐나다 지질학자 조지 머서 도슨 [사진:위키피디아]
도슨 시는 현재 인구가 1,577명(2021년 통계)에 불과하지만, 1896년 8월 17일 유콘 지역 서부의 클론다이크강과 유콘강이 합류하는 곳 근처에서 금이 발견되면서 크게 소문이 나서 사람이 몰렸다. 그들의 집들은 대부분 천막과 목재로 화재에 취약해 1897년 11월 마을의 주점과 극장을 태워버렸고, 1898년 10월에는 호텔, 우체국 등 26개의 건물을 전소시켰다. 당시의 불을 밝히는 것은 촛불과 석유램프를 주로 이용해 정말 위태로웠다.
1899년 4월 26일에 발생한 대화재는 소방서의 파업이 겹쳐 피해가 더 커져 도시 건물 117채를 불탔다. 이후에 도시는 재건되어 호황기를 누렸지만 1920년대 이후 금 생산이 줄어들며 사람이 떠나 한가한 시골 마을이 되었다.
1897년까지 30,000명의 금광 탐사자가 새로 건설된 스캐그웨이(Skagway)와 다이아(Dyea) 마을에 도착했지만, 심한 영양실조, 저체온증, 눈사태로 대부분 죽었다. 클론다이크 골드러시는 단명해 1899년에 금을 캐고자 몰려든 사람들은 알래스카로 이동했다. 알래스카 남단 스캐그웨이(Skagway)에 있는 ‘클론다이크 골드러시 국립역사공원(Klondike Gold Rush National Historical Park)은 이를 기념하는 공원이다.
▲ 캐나다 북서부 도슨(Dawson) 시의 얀 벨츨 묘비 [사진:위키피디아]
모험가 얀 벨츨은 1929년 캐나다 북서부 도슨(Dawson)을 여행했고 이 도시로 이주하여 1948년 9월 19일 80세 나이로 사망해 도슨 금광묘지에 묻혔다. 체코 예술가 스타니스라프 라흐(Stanislav Lach)는 1998년에 탐험가 얀 벨츨 동상을 고향 자흐레브에 건립했다.
이 고장을 찾는 여행자는 멋진 수염을 가진 탐험가의 동상을 보고 미소를 짓는다. 체코 필젠 필하모닉은 체코 라디오 플젠의 스튜디오 S1에서 얀 벨츨의 삶을 대화형 음악 쇼로 선보였다. 음악 편곡은 작곡가 토마시 일레(Tomáš Ille)가 맡았고 필젠 필하모닉은 상임 지휘자 토마시 브라우너(Tomáš Brauner)의 지휘 아래 연주되었다.
▲ 체코 모험가 얀 벨츨 동상 [사진:위키피디아]
얀 벨츨이 남긴 여행기에는 놀라운 내용이 가득하다. 북극 에스키모인들은 추운 날씨 때문에 모험가에게 마스크를 몇 통씩 구입했다. 만약 외출할 때 마스크를 하지 않고 외출했다가는 이가 모두 부러지고, 폐에 동상이 걸릴 수도 있었다.
유라시아 북단 작은 섬에서 살며 상인이 되어 원주민에게 필요한 식량을 제공하며 그들과 함께 오랜 기간 친구로 어울리며 살았던 상상력이 풍부한 모험가가 그려낸 일상은 놀람 그 자체이다. 그는 북극권 노바야시비리 섬에서 30년을 지내며 북극에 사는 사람들이 어떻게 살아가는지를 생생하게 사람들에게 알려준 위대한 모험가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