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극 탐험 ⑫】아델리안 펭귄 명명 후 기차 화재로 사망...라페루즈 제독, 울릉도 발견해 ‘다줄레’ 이름 붙여 서양지도 기록 프랑스 탐험가 쥘 뒤몽 뒤르빌Ⅱ
뒤몽은 항해를 마치고 돌아와 사령관으로 승진했다. 1826년 4월 22일부터 Astrolabe 호를 타고 남태평양 탐험을 35개월 동안 하기로 해군성에 보고하였다. 그는 항해를 통해 현재 파푸아뉴기니에서 거의 알려지지 않은 16,000km 이상의 해안선과 작은 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며 그중 약 60개는 아직도 지도에 표시되지 않았다고 생각했다.
로열티 제도의 지도를 작성하고 뉴질랜드 해안에 대한 새로운 조사(1769년 James Cook의 이전 조사)를 수행했으며 통가 제도와 몰루카 제도의 탐사에 착수했다.
Astrolabe 배는 오세아니아에 대한 지식을 상당히 발전시킬 수 있는 수로학 문서, 동물학, 식물학 및 광물학 보고서의 인상적인 컬렉션을 가지고 1829년 3월 25일에 마르세유로 돌아왔다.
뒤몽은 태평양 문화와 폴리네시아 섬 그룹을 구별하기 위해 말레이시아, 미크로네시아, 멜라네시아라는 용어를 제안했다. 프랑스 국왕은 2차례 항해를 통해 얻은 자료를 출판하라고 사령관에게 명령해 이를 시행했다.
▲ Vanikoro(사모아) 라페루즈 제독을 기리는 기념비 참배(1830년)(사진:뉴욕 공립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판 187)
장 프랑스이 드 갈롭 드 라페루즈(Jean François de Galaup, La Pérouse, 1741~1788) 백작은 15세에 프랑스 해군에 입대한 뛰어난 탐험가이다. 알비(Albi)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라 페루즈(La Pérouse)는 7년 전쟁이 시작되자 영국 해군에 입대해 그의 멘토인 슈발리에 드 테르네(Chevalier de Ternay)의 명령에 따라 북미와 서인도 제도에서 벌어진 이 전쟁 중에 불의 세례를 경험했다.
그는 1758년 루이스버그 포위전과 이듬해 추기경 전투에도 참전했다. 이 싸움에서 부상을 당해 영국에서 포로로 잡혔다. 파리 강화조약이 체결되었을 때 그는 다양한 호위 임무에 배정되었으며, 특히 일드프랑스에서 5년을 보냈다.
미국 독립 전쟁이 시작되기 전에 프랑스로 돌아온 그는 중위로 승진하고 생루이 십자가 훈장을 받았다. 적대 행위가 재개되자 그는 서인도 제도에서 영국군과의 싸움에 참여했다.
그는 그레나다 점령과 세인트 크리스토프(Saint-Christophe) 및 레 세인트(Les Saintes) 전투에 참여했으며, 허드슨 만(Hudson Bay)의 영국 시설에 대한 원정을 지휘하는 임무를 맡았으며, 그곳에서 영국 요새 2개를 점령하여 해상 및 군사적 용맹을 보여주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해군 대령 라페루즈는 해군 장관 캐스트리스 후작과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가 태평양에서 제임스 쿡이 발견하지 못한 곳을 탐험하고 관측하라는 명령을 받고 세계 일주 탐험대를 조직했다.
루이 16세는 라페루즈를 1785년(40세)에 선장에 임명하고 8월 1일 엘리트 선원과 왕국의 최고 과학자로 구성된 220명의 탐험대원을 부솔(Boussole)호와 아스트롤라브(Astrolabe) 호에 승선하게 하여 프랑스 해군기지 브레스트(Brest)항을 출항하게 했다.
프랑스 원정대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건너 1786년 5월 30일 하와이에 도착했다. 7월에는 밴쿠버를 정찰하다가 해상 사고로 선원 22명을 잃었다. 1787년 3월 28일 광동성과 타이완 해역을 탐험하고 5월 19일(조선왕조 정조 11년)부터 27일까지 조선의 제주도(켈패르. Quelpaert) 부근을 시작으로 남해안과 조선의 동해를 지나 타타르 해(달단), 홋카이도, 쿠릴열도, 캄차카반도, 오호츠크해를 탐험하며 조선의 울릉도를 처음으로 서양 지도에 기록했다.
라페루즈 제독은 동해에 동이 틀려고 할 무렵 조선 해안에서 약 20리 정도 떨어진 커다란 섬을 발견하고는 울릉도를 일주하며 둘레, 수심, 위도와 경도를 측량하였다. 그는 이 섬을 최초로 발견한 항해사이며 천문학자인 다줄레의 이름을 따서 울릉도를 ‘다줄레(Daegelet, 鬱陵島)’로 명명했다. 항해기에 다줄레 섬의 경관과 조선 목수에 대해 자세히 묘사했다. 원정대는 1788년까지 항해하였다.
▲ 라페루즈 조선 항해 지도(사진:국립해양박물관)
원정대원 중에 러시아 통역관 바르텔레미 드 레셉스(D.Lesseps)는 캄차카의 페트로파블롭스크에서 하선하여 시베리아를 횡단하여 본국에 항해일지를 전했다. 세계 일주 탐험대는 브레스트 항구를 떠난 지 3년 후인 1788년 2월 7일 호주의 보터니 만(Botany Bay)에서 유럽으로 출항하는 배의 사령관에게 뉴칼레도니아와 뉴기니로 돌아간다고 편지를 작성했다.
원정대 배는 사모아를 향하던 중 풍랑으로 바니코로(Vanikoro, 사모아)에서 난파되었다. 밀레-뭐로는 라페루즈가 보낸 탐사보고서를 모아 4권의 책으로 발간했다. 《라페루즈 항해기》 초간본은 1797년 처음 출판되었다.
▲ 자크 리오즈가 그린 라페루즈의 항해지도(사진:라페르즈 박물관, 1941년)
필자는 프랑스에서 50년간 한국학 전문가로 독도를 알렸던 이진명(1946~2023) 교수가 고향 통영으로 돌아오려고 하던 중에 2023년 5월 13일 향년 77세로 별세하여 프랑스의 한국 자료를 구할 수 없게 된 것이 정말 아쉽게 느껴진다.
라페루즈의 배는 1791년부터 1794년 사이에 침몰한 것으로 추정되는데 이후 몇 년 동안 앙투안 부루니 당트레카스토(d'Entrecasteaux, 1737~1793) 중장이 지휘하는 구호 원정대가 호주 지역을 수색하였으나 발견하지 못했다.
라페루즈 선단의 실종에 대한 단서는 1826년 이 지역을 항해하던 아일랜드인 피터 딜런(Peter Dillon, 1788~1847) 선장이 바니코로에서 프랑스 물건을 구입해 알려졌다. 1828년 L'Astrolabe의 난파선을 발견한 뒤몽 사령관이 지휘한 원정대가 바닷속에서 호위함의 유물을 건져 올렸다.
뉴질랜드에서 태어난 리시 디스콤베(Reece Discombe, 1919~2007)는 자동차 정비사로 생활하면서 심해 잠수부로 활동했다. 그는 바누아투에 정착하여 선도적인 구원 전문가로 활동하였다.
1964년 3월에 프랑스 해군 탐험대와 함께 배 잔해물을 재발견해 드골 대통령으로부터 공로 훈장을 받았다. 1999년 5차 탐사 중 육상에서 프랑스 캠프를 발견하여 군복 단추, 킹스풋, 못, 으깬 소총알, 자오선 총신을 발견했다. 난파선은 산호 공원에 좌초되어 있다.
뒤몽 사령관은 1837년 프랑스 국왕의 남극을 발견하라는 명령에 따라 호위함 아스트롤라베(Astrolabe)와 젤레의 코르벳 선박을 타고 남아메리카로 항해했다. 원정대는 웨델(Weddell)이 1823년에 세운 남위 74° 15' 기록을 뛰어넘도록 노력하라는 요청받았다.
1838년에는 웨델의 항로를 따라 웨델해(Weddell Sea)로 내려가려고 시도했다. 첫 번째 빙산을 본 지 2주 후, 두 배는 1838년 다시 얼음덩어리에 갇혀 있었다. 두 달 동안 원정대는 원하는 위도에 도달할 수 있도록 얼음을 통과하는 통로를 찾으려는 점점 더 필사적인 시도를 주도했다. 한동안 배들은 얼음이 없는 수로를 유지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바람이 바뀌면서 다시 갇히게 되었다.
▲ 〈1838년 2월 9일 빙원에서 나오는 코르벳함〉 화가 Louis Le Breton 1846년 그림(사진:뉴욕 공립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판 25)
원정대는 사우스 오크니 제도에 도착한 후 원정대는 사우스 셰틀랜드 제도(South Shetland Islands)와 남극 대륙을 분리하는 브랜스필드 해협으로 직접 향했다. 짙은 안개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지도에 스케치가 된 일부 땅을 찾아내 땅 이름을 명명했다. 승무원은 괴혈병 증상을 보였고 갑판은 선박 화재로 인한 연기와 악취로 뒤덮여 견딜 수 없게 되었다.
▲ 프랑스 해군 원정대 항로(사진:위키피디아)
1838년 2월 말, 사령관은 더 남쪽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정하고 웨델(Weddell)이 도달한 실제 위도를 계속 의심했다. 따라서 그는 두 척의 배를 칠레 중부의 탈카우아노(Talcahuano) 항구로 향하게 하여 괴혈병에 걸린 선원들을 위한 임시 병원을 설립하고 얼마간의 시간을 보냈다. 1839년에 남쪽으로 향했다.
사령관은 1940년 1월 10일 호바트를 떠났다. 그는 바람이 허용하는 한 남쪽으로 계속 나가기를 원했다. 1월 19일 남극 대륙을 보았다. 1월 21일, 뒤몽 뒤르빌은 남극 대륙의 인도양 쪽 해안에 있는 섬에 상륙한 후 그 땅을 프랑스의 영토라고 선언하고 아델리 랜드(Adélie Land)라고 명명했다. 2월 25일, 오클랜드 제도를 향해 항해하여 자기 측정을 수행하고 여기에서 남극 발견을 발표했다.
▲ 〈1840년 1월 19일 아델리 땅의 발견〉, 화가 Louis Le Breton 1846년 그림(사진:뉴욕 공립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 판 168)
루이스 르 부르통(Louis Le Breton, 1818~1866)은 해양 그림을 전문으로 그리는 프랑스 화가로 원래는 의학을 공부하였다. 두 번째 항해에 참여한 후 공식 일러스트레이터가 항해 중 사망하여 그림을 그렸다. 1847년부터는 프랑스 해군을 위한 해양 주제를 묘사하는 데 전념하여 그가 그린 작품은 뉴욕 공립 도서관 디지털 컬렉션이 되었다.
뒤몽 사령관은 섬에서 작고 귀여운 70cm 크기의 펭귄 무리를 만났다. 펭귄은 검은색과 흰색 두 가지 색깔로 이루어져 있고 꽁지깃이 아주 긴 것이 특징이며 멀리서 보면 검은색 머리 전체에 하얀 테두리를 가진 눈이 마치 단춧구멍처럼 보여 신기했다.
특히 아장아장 걷는 펭귄이 아내처럼 앙증맞고 귀여워서 펭귄에게 아델리란 아름다운 이름을 붙이고는 펭귄을 스케치했다. 지구에 있는 6속 18종의 펭귄 중 남극 대륙에서 발견된 것은 황제펭귄, 임금펭귄, 젠투펭귄, 턱끈펭귄, 록호퍼펭귄, 마카로니펭귄, 아델리펭귄 등 7종이고 남극의 펭귄 중에 가장 많은 종이 턱끈펭귄과 아델리펭귄이다.
▲ 아델리팽귄(사진:Todor lolovski)
프랑스의 탐사 원정대는 뉴질랜드, 토레스 해협, 티모르, 레위니옹, 세인트 헬레나를 거쳐 마침내 프랑스 툴롱을 거쳐 1840년 11월 6일에 돌아왔다. 뒤몽 사령관은 귀국 후 소장으로 승진했으며 파리 지리학회의 금메달을 수상하고 나중에 회장이 되었다. 그는 남극 및 오세아니아로의 항해 보고서의 집필을 맡았다.
▲ 뫼동(Meudon) 열차 탈선 및 화재(사진:위키피디아)
1842년 5월 8일, 사령관 가족은 왕을 축하하는 수상 경기를 관람한 후 베르사유에서 파리로 가는 기차(Rive-Gauche)를 탔는데 뫼동(Meudon) 근처에서 첫 번째 기관차의 축이 파손된 후 열차가 탈선하고 석탄이 열차에 불이 붙어 화재가 발생했다.
당시에는 열차 차장이 기차를 출발하면 문을 잠가서 55명이 사망했다. 이때 사령관 가족도 모두 사망했다. 뒤몽 드르빌 사령관의 유해는 파리 14구역의 장폴 샤르트르, 샤를 보들레르 등 문학가가 잠들어 있는 몽빠흐나쓰(Cimetière du Montparnasse) 묘지에 안장되었다.
▲ 뒤몽 뒤르빌 묘지(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남극 원정대는 호주 남쪽 남극 대륙에 가까운 푸앵트 제올로지 군도 (Archipel de Pointe Géologie) 페트렐(Petrels) 섬에 1952년 펭귄 서식지 연구를 위한 소형 기지를 마레(Marret) 기지로 명명했다.
같은 해 62km 떨어진 포르 마르탱 기지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본부 연구원들을 마레 기지로 옮겨 월동하게 하였다. 이후 페트럴 섬에 위대한 탐험가 뒤몽 사령관을 높이 기리는 뒤몽 뒤르빌 남극기지(Base antarctique Dumont-d'Urville)를 신축하고 1956년 1월 12일 문을 열었다.
▲ 프랑스 뒤몽 뒤르빌 남극기지(사진:위키피디아)
뒤몽 뒤르빌 남극기지에서는 실험실, 생활공간, 물, 에너지, 폐기물, 작업장, 창고 시설을 갖추고 프랑스 과학연구센터의 중요한 연구를 수행하고 있다. 연구원은 남극 운석 조사를 위해 눈이 하얗게 덮여있는 땅 위를 탐사한다.
▲ 남극 대륙, 운석 조사(사진:CNRS-Le Journal)
뒤몽 뒤르빌 기지 주변의 황제펭귄 서식지는 중요 조류보호지역(IBA)으로 지정되었고 황제펭권 약 3,600쌍, 아델리펭귄 54,000쌍, 비둘기바다제비, 힌풀마갈매기, 남방큰풀마갈매기가 함께 지낸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