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8년 만들어진 대법당 상량문에 신통력 지닌 마라난타 존자 창건 알려져 남도 기행, 나주 덕룡산 불회사 탐방
새해 들어 첫 여행지로 전라도를 방문했다. 이번 여행은 무등산(1,187m) 자락 광주에 사는 친구가 대학 동기들과 함께 운주사, 순천만 습지, 여수 밤바다를 함께 방문하고 싶다고 작년 여름에 전화를 걸어와 시작되었다. 그래서 친구에게 “무슨 사연이 있는가?”라고 물으니 “국문과 친구들과 대학생 때는 같이 여행도 가고 그랬는데, 대학을 졸업하고 40여 년이 지났지만, 바쁘다는 핑계로 한 번도 여행 간 적이 없어 죽기 전에 소원이다.”라고 말을 했다.
한 달 후에 전화가 다시 왔는데 고전 번역을 하는 친구 유기가 시간이 안 나서 겨울에나 가능하겠다고 말했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다. 12월에 들어 전화가 와 “여행 가려면 언제가 좋은가?”라고 물어와 날씨를 보고 연락을 주겠다고 말했다. 일기를 관찰하니 춥지 않고 눈과 비가 없는 2025년 1월 13일이 좋아 출발일을 통보하고 호남선 SRT 기차표를 예약했다. 출발 전 1주일간 날씨는 정말 요란했다. 강추위가 몰려와 전국의 산하(山河)가 꽁꽁 얼어붙고 강풍이 불고 눈과 비가 자주 내렸다. 출발일이 다가오자, 날씨가 거짓말처럼 완전히 좋아졌다.
1월 13일 새벽 2시에 눈이 떠졌다. 여행 가는 일정도 있고 새벽에 글을 쓰느라 일찍 일어났다. 책을 읽고 아침을 먹고는 가족의 응원을 받으며 지하철역으로 향했다. 집에서 가까운 수서역으로 가 SRT 기차를 타니 몇 달 동안 친구와 나눈 대화가 생각났다.
광주 송정리행 기차는 정시에 출발했다. 출근하는 승객이 많아 통로에도 사람이 많았다. 평택지제역, 천안아산역, 오송역을 지나니 기차 안이 한결 조용하다. 공주역을 통과하여 유리창 밖을 내다보니 논밭에 하얀 눈이 보였다.
정읍역을 지날 때는 온 세상이 눈에 파묻혀 말 그대로 설국(雪國)이었다. 오전 10시 17분 광주 송정리역에 도착하니 서울 날씨와 다르게 정말 따뜻해 입고 온 두꺼운 옷이 거추장스러웠다. 친구가 승용차를 가지고 역에 마중을 나와 첫 방문지인 운주사로 출발했다.
▲ 나주 덕룡산 불회사 대웅전(사진:궁인창)
오늘 점심은 순천으로 가다가 짱뚱어탕을 먹는다고 친구가 말했다. 승용차는 어느새 나주시 남평(南平)을 지나 다도면 나주 호반을 지나 덕룡산 불회사 쪽으로 가고 있었다. 운전하는 친구에게 운주사에 가기 전에 “천년고찰 불회사를 방문하면 어떨까?” 하고 제안하니 서울서 내려온 친구들은 불회사는 아직 가보지 못했다고 가보고 싶다고 말했다.
불회사 일주문에 도착해 차에서 내려 기지개를 켜고 주변 산을 바라보았다. 눈이 많이 쌓여 절로 올라가는 길이 조금 미끄러웠다. 일주문에서 그냥 운주사로 가려다 불회사로 가보자 해서 빙판길을 조심조심 올라갔다.
40년 전에 처음 이 절을 탐방할 때는 정말 한적했다. 흙길에 돌로 만든 커다란 박석(薄石)이 깔리고 나더니 몇 년 지나 아스팔트 포장이 되었다. 차에서 내려 미끄러운 길을 조심조심 걸어서 진여문 앞에 도착해 대웅전을 바라보았다.
진여문에서 합장하고 몇 계단을 오르니 깨끗하게 정리된 넓은 불회사 마당이 나타났다. 절 마당에서 주변의 높은 봉우리를 바라보며 마음껏 시원한 공기를 마셨다. 겨울 산사는 정말 고요하고 적막했다.
불회사 대웅전에서는 사시마지(巳時摩旨) 예불 의식을 거행하고 있어 반야심경 독경 소리가 문틈으로 새어 나왔다. 마지는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으로 공양주가 밥을 지은 뒤 제일 잘된 부분을 마지 그릇에 담아 경건하게 불전에 올린다. 대웅전에 들려 부처님께 참배하고 불단을 바라보았다.
▲ 불회사 대웅전 건칠비로자나불좌상(사진:궁인창)
친구가 시간이 없다고 말해 서둘러 나왔다. 그런데 불회사를 처음 방문하는 친구들은 불회사 도량 주변을 구경하느라 천불천탑 운주사로 갈 생각을 안 했다. 불회사 창건 연혁과 종이로 만든 국보 건칠비로자나불좌상을 설명했다.
고려왕조에서 다도면 지역은 질이 좋은 닥나무가 많이 생산되어 종이 생산지로도 유명했다. 고려 말에 제작된 건칠비로자나불좌상은 삼베와 칠(漆)을 8겹 정도 겹으로 올려 만들고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을 하고 있는데 손은 나무로 삽입하였다.
당시 칠은 고급 재료로 값이 엄청 비싸지만, 불상을 더욱 정교하게 조각할 수 있어 절에서는 칠을 많이 사용했다. 불회사 건칠 불상은 2008년에 나주 심향사의 건칠아미타여래좌상과 함께 보물로 지정되었고 남원 선국사와 나주 죽림사의 건칠불을 포함하여 전국에 20여 기가 남아있다.
▲ 영광 법성포 마라난타사(사진:궁인창)
불회사의 창건 기록은 조금 특이하다. 인도 간다라 승려 마라난타(摩羅難陀) 존자(尊者)가 불교를 전파하러 중국 동진(東晉)에서 머물며 포교했다. 이를 전해 들은 백제 왕이 7월에 동진 황제에게 청을 하여 황제는 존자에게 저장성 항저우에서 배를 타도록 준비한다.
배는 9월에 중국 산둥반도 포구를 거쳐 바닷길을 건너 384년 백제 땅 영광군 법성포에 도착해 백제 침류왕의 성대한 영접을 받았다. 영광(靈光)이란 뜻은 ‘본래 함유한 깨달음의 빛’, ‘佛法(불법)을 들여온 은혜로운 고장’이란 뜻을 의미하여 무량광불(無量光佛)의 ‘무량한 깨달음의 빛’이라는 뜻과 서로 통한다.
간다라 승려는 불갑사(佛甲寺)와 불호사(佛護寺)를 세우고 백제인 10인을 출가시켰다. 사찰명에 갑(甲)이라는 글자는 여기가 시원(始原)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는 말이다.
《불갑사고적기(佛甲寺古蹟記)》』에 “나제지시(羅濟之始) 한위지간(漢魏之間)”이라는 기록이 있고, 《불갑사창설유서(佛甲寺創設由緖)》에도 384년 백제 침류왕 원년에 창건했다,”라는 기록이 보인다.
불호사는 지금의 마란난타사로 영광군은 초전법륜지를 기념하여 사찰을 재건하였다. 법성포(法聖浦)는 ‘성인이 불법을 전해온 포구’라는 뜻으로 초기에는 존자가 아미타불을 품에 안아 내렸다고 하여 아무포(阿無浦)로 부르다 부용포(芙蓉浦)로 변하고 현재 지명 법성포로 굳어졌다. 영광 지역에는 80여 곳의 불교문화유산이 있다.
신통력을 지닌 마라난타 존자는 일행을 이끌고 불법을 전하러 남쪽으로 내려와 불회사 사찰을 창건했다. 마라난타 존자의 행적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백제본기(百濟本紀)〉, 《해동고승전》에도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78년 불회사 대웅전 번와 불사 과정에서 1798년 만들어진 대법당 상량문이 나타나 불회사 창건이 세상에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
▲ 나주 덕룡산 불회사 대웅전(사진:궁인창)
호남에는 강진 덕룡산(433m)이 있고 나주 봉황면에도 덕룡산(376m)이 있다. 나주 덕룡산은 사찰 주변 숲에 동백숲, 비자림, 편백나무, 측백나무가 많아 공기가 아주 맑고 청정하다. 산은 높지는 않지만, 산이 깊어 오지로 불릴 정도로 단아하고 고요하다.
깃대봉 아래에 자리 잡은 불회사는 봄에는 벚꽃으로 유명하고 가을에는 단풍이 아름다운 사찰로 관광객이 많이 방문한다. 평소에는 적막강산이라 등산객을 제외하고는 찾는 이가 별로 없다. 대웅전 마당에서 시원한 공기를 마음껏 마시고 친근한 미소를 가진 석장승(石長丞)을 보러 갔다.
▲ 나주 불회사 석장승 주장군(사진:궁인창)
그런데 불회사 석장승을 장승으로 볼지, 아니면 우리 전통 수호신인 벅수(法首)로 말해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아 한참 고민했다. 민속학자들은 일제강점기 이후 굳어진 명칭 장승으로 보는데, 일부 학자들은 우리 전통의 수호신인 벅수로 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불회사 석장승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과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의 제작 연대는 조선왕조 숙종 45년(1719) 무렵에 세워진 것이다. 필자는 장승에 적혀있는 장군의 정체가 궁금해 그동안 여러 사람에게 물었으나 알려주는 이가 없어 오랜 기간 자료를 조사했다. 일반적으로 절에 세워진 표식은 사찰 경내에 들어오는 부정(不淨)과 전염병을 엄금하려고 금표(禁標) 역할을 하는 석장승을 세우거나, 마을 주민이 동구제의 대상으로 세웠을 수 있다. 부처님의 위신력(威神力)이 얼마나 크고 높은데 왜 사찰로 통하는 길가에 도교(道敎)를 습합(習合)하여 상원, 하원 글자와 이름 모를 장군 이름을 적어 세웠을까 하는 의문이 있었다.
〈조선왕조 중기에는 기근과 전염병이 자주 발생하여 국가적 위기가 자주 발생했다. 〉
《조선왕조실록》 〈숙종실록〉 63권 1월 6일 기묘 2번째 기사(1719년 강희 58년)를 보면 역병으로 인해 온 가족이 몰사한 호수를 상세하게 조사하게 하다〉라는 글이 있다.
【숙종실록 원문】 ○備局言: "前冬因臣健命箚請, 京外癘疫全家合歿, 未盡收瘞者, 令京兆及諸道, 一一精査, 以施恤典, 所受還穀身布, 一倂許減矣。 卽見漢城府申目, 全家合歿, 多至一千一百一戶, 單戶死亡, 亦至四百十八戶。 昨年癘疫雖曰熾盛, 全家合歿, 不必如是數多。 若非任掌輩循情濫報, 必不至此。 漢城府當該堂郞, 請推考, 使之各別精査, 亦以此分付外方。" 世子可之。
비국(備局)에서 말하기를, "지난 겨울에 신(臣) 이건명(李健命, 좌의정)이 차자(箚子)를 올려 청한 것으로 인하여 경외(京外)에서 여역(癘疫)으로 온 가족이 몰사(沒死)하였는데 다 거두어 매장(埋藏)하지 못한 경우 경조(京兆)와 제도(諸道)로 하여금 낱낱이 상세하게 조사하여 휼전(恤典)을 베풀고, 받은 환곡(還穀)과 신포(身布)를 한결같이 감해 주도록 윤허(允許)하셨습니다. 그런데 지금 한성부(漢城府)의 신목(申目)을 보건대, 온 가족이 몰사한 경우가 많아서 1천 1백 1호(戶)에 이르고, 사망한 단호(單戶) 또한 4백 18호에 이르고 있으니, 작년에 역병이 비록 치성(熾盛)하였다고는 하나 온 가족이 몰사한 경우가 반드시 이와같이 많은 수(數)에 이르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만약 일을 맡아 관장(管掌)한 무리가 사정(私情)에 따라 지나치게 보고한 것이 아니라면 반드시 이와 같은 데 이르지는 않았을 것이니, 청컨대, 한성부의 해당 당상관(堂上官)과 낭청(郞廳)을 추고(推考)하여 각별히 상세하게 조사하게 하고, 또한 이로써 외방(外方)에 분부(分付)하소서." 하니, 세자(世子)가 이를 옳게 여겼다. 이름을 알기 위한 여정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임진왜란 전에 《조선왕조실록》 표지를 쪽빛으로 염색하고 습기 방지를 위하여 표지에 밀랍을 입혀 기록물을 보존했다. 《조선왕조실록》 오대산 사고본은 일제강점기인 1913년경에 동경제국대학 도서관에 기증하는 방식으로 몰래 일본에 무단 반출되었다가 월정사의 반환 요청으로 2006년부터 환수되기 시작하여 110년 만에 오대산으로 다시 돌아와 2023년 11월 11일 개관한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에 소장되었다.
▲ 국립조선왕조실록박물관(사진:국가유산청)
〈중종실록〉을 보면 당시 전염병의 심각성을 들여다볼 수 있다. 조선왕조는 도교와 중국 관운장(關雲長) 장군의 힘을 빌려 조속하게 전염병을 물리치려고 시도했다. 이런 상황을 조금이나마 극복하려고 조선왕조 선조는 임진왜란이 끝난 후 1605년에 평안도 영유현에 와룡묘를 짓게 하고 관헌을 보내 제사를 지냈다. 이후 와룡묘는 전국으로 퍼져 나갔다. 서울 남산에도 제갈량(諸葛亮, 181~234)을 모시는 사당 와룡묘(臥龍廟)가 건립하고 제갈량과 관우의 석고상이 모셨다.
국립민속박물관의 전시운영과장을 지낸 박호원은 2004년 발표한 〈장승(長栍)의 기원과 신앙의 형성〉 논문에서 장생, 장승에 대하여 상세한 분석과 장승 신앙의 성립에 대하여 풀이하며 길가의 장승을 장군(將軍)으로 지칭하는 것은 점차 수호 신장으로 전환되어 가는 장승 신앙의 성립을 보여주는 것으로 보고 이런 사례들은 18세기에 들어와 시작되었다고 주장하였다.
장승을 오래 연구한 황준구(1946~ )는 길(노정, 路程)을 알리는 장승과 수호신 벅수는 엄연히 다르다고 주장한다. 그는 벅수가 나타나기 시작한 때를 불교가 우리 땅에 들어온 시기로 보았다. 불교 경전 화엄경(華嚴經)에는 벅수가 법수보살(法首菩薩)로 그려져 있는데 벅수의 처음 모습은 미륵을 닮은 민불(民佛)에서 시작해 1600년 무렵 중국에서 발생해 조선으로 밀려오는 역병(천연두)과 잡신, 잡귀들을 막아내기 위해 중국 전설 속의 치우(蚩尤), 용, 또는 무서운 장수나 제왕의 표정을 그림으로 그리거나 조각했고 가슴에는 명문(銘文)을 새겼다고 보았다.
조선왕조에서 보면 절집이나 성문을 지켜주던 기능의 주장군(周將軍), 당장군(唐將軍), 축사대장군(逐邪大將軍), 보호동맥(補護東脈), 와주성선(媧柱成仙), 남정중(南正重), 화정려(火正黎), 진서대장군(鎭西大將軍), 방어대장군(防禦大將軍) 등이 그들로 모두 무서운 표정을 하고 천연두를 막아내기 위한 두창(痘瘡) 벅수들도 모두 중국의 장수들을 표현한 것으로 추정했다.
▲ 운흥사 석장승(사진:궁인창)
필자는 전라도에 있는 약 51개의 석장승을 모두 가서 보지는 못하고 10여 개만 보았다. 대부분 책을 통해 공부했다. 88 서울올림픽 때는 인사동에 석장승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주민 항의로 몇 년 후에 사라져 조금 아쉬웠다. 다음 여행에 운흥사 석장승을 안내하겠다고 말하고 불회사를 떠났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