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지식놀이터
지식자료
지식자료 구독
구독 내역
게시판
게시판
작업요청
최근 작업 현황
지식창고
지식창고 개설 현황
자료실
사용자메뉴얼
about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2.19. 17:53 (2025.02.18. 15:10)

북송 시기 도교의 신격으로 출현 ...망자의 영혼을 관장하는 위상이 높아져

 
나주 불회사 석장승의 안내판을 보면서 장승에 적혀있는 명문(銘文)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을 생각했지만, 누구를 칭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페이스북에 적어둔 메모장을 펼쳐보았다.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이승수 교수는 2016년 12월 전남대 호남문화연구 60권에 기고한 〈주장군(周將軍) 당장군(唐將軍) 석장승의 역사적 기원과 문화적 기능(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이란 발표 논문에서 문헌 자료를 통해 주장군은 17세기말 사찰 건축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고 보았다.
북송 시기 도교의 신격으로 출현 ...망자의 영혼을 관장하는 위상이 높아져
불회사 석장승 고찰(考察)
 
 
나주 불회사 석장승의 안내판을 보면서 장승에 적혀있는 명문(銘文)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을 생각했지만, 누구를 칭하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페이스북에 적어둔 메모장을 펼쳐보았다.
 
 
▲ 불회사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사진:궁인창)
 
 
한양대 국어국문학과 이승수 교수는 2016년 12월 전남대 호남문화연구 60권에 기고한 〈주장군(周將軍) 당장군(唐將軍) 석장승의 역사적 기원과 문화적 기능(전라도 지역을 중심으로)〉이란 발표 논문에서 문헌 자료를 통해 주장군은 17세기말 사찰 건축의 일환으로 조성되었다고 보았다. 이 교수는 두 장군은 중원갈장군(中元葛將軍)과 함께 삼원장군 또는 삼원진군(三元眞君)으로 불리는 도교의 신격(神格)으로 북송(北宋) 시기에 출현하였으며, 후대에 들어 천궁(天宮)의 수문(守門)과 문서 전달 기능에서 망자의 영혼을 관장하는 것으로 그 위상이 높아졌다. 그러나 전래한 흔적이 보이지 않고, 고려 불교를 통해 삼원장군이 우회적으로 전래하는 과정을 확인했다. 당나라 말기 장천(藏川)이 불교의 지장신앙과 도교의 명부관(冥府觀)의 습합하여 지은 예수십왕생칠경이 고려에 들어왔다.
 
 
▲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사진:궁인창)
 
 
고려의 유불지식인으로 남해에서 활동한 정안(鄭晏)은 1246년 해인사에서 민족, 국왕의 안녕과 몽골 침략군의 격퇴, 조야(朝野)의 평안을 기원하려고 6종의 경전을 조성했다. 그중에 불설예수시왕생칠경(佛說豫修十往生七經)》 〈변상도(變相圖)〉에 삼원장군(三元將軍)이 처음 등장한다. 《예수경》은 살아있는 사람이 죽음을 대비하여 시왕에게 미리 공양하고 죄업을 참회하는 칠재의(七齋儀)를 행함으로써 죽은 뒤 좋은 세상에 다시 태어날 수 있다는 것을 밝힌 경전이다. 필자는 지난 2018년 12월 4일부터 3개월간 국립중앙박물관 기획전시실에서 열린 〈대고려 918~2018 그 찬란한 도전〉 특별전시회에서 지옥의 모습을 새긴 고려시대 목판 판각본(보물 제734-4호) 해인사 소장품 변상도를 처음 보았다. 〈시왕경(十王經)〉이라고도 하는 이 경전에는 인간이 죽어서 만나게 되는 지옥이 모습이 잘 묘사되어 있는데 지옥의 있는 열 명의 시왕은 살아서 지은 죄업과 복덕을 판결한다고 한다. 제5 염라왕은 동그란 업경대에 비추어진 살아생전 지은 죄로 판결을 내린다. 2011년 6월에 불교문화재연구소 김윤희 선생은 미술사연구 제270호에 기고한 〈조선 후기 명계불화 현왕도 연구〉에서 현왕제와 사후 3일 불교 의례를 상세하게 설명하고 고려의 삼일장 습속(習俗)을 고증했다.
 
조선왕조 16~17세기에는 전국적으로 생전예수재가 널리 유행하고 명부전 건축이 유행하면서 주장군 당장군은 사찰의 수호 신장으로 구현되어 사찰 영역의 외곽인 법계와 속세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 세워졌다고 보았다. 이승수 교수는 불회사 석장승은 뛰어난 조형미를 갖추면서도 하층과 상승 토착문화와 외래문화가 함께 어우러진 측면이 있어 역사적 의의도 크다고 결론을 내렸다.
 
 
▲ 민학동지회장 김두하(金斗河)
 
 
향토문화연구가 김두하(金斗河, 1911~1996)는 1970년대에 친구들과 등산하며 전국의 문화재를 탐방하였다. 그는 우보회(牛步會)를 창립하고 20여 년을 800여 장승을 찾아다니며 사진을 찍고 기록했다. 에밀레 미술관장 조자용(趙子庸, 1926~2000) 선생은 “우리나라에 산맥(山脈) 수맥(水脈)이 있듯이 예맥(藝脈)이 있다. 한국적인 예맥을 찾아서 밝혀 외국 사람에게 널리 알리고 자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김두하 선생은 상원주장군(上元周將軍), 하원당장군(下元唐將軍), 상원당장군(上元唐將軍), 하원당장군(下元周將軍), 건상주장군(乾上周將軍), 건하당장군( 坤下唐將軍)을 도교(道敎) 계통 장군으로 분류하고 상원(上元)과 하원(下元)은 음력 정월 15일과 10월 15일의 별칭으로 보았다. 또한 《삼동경(三洞經)》을 보면 상원은 선녀이고 하원은 신선의 이름이라 되어있다고 말했다.
 
 
▲ 金斗河 著 《벅수와 장승》(사진:궁인창)
 
 
필자가 불회사 석장승에 관해 글을 쓰는 것을 알고 사진가 김경상 선생이 전화를 걸어와 김두하 선생이 1990년에 발간한 1,140쪽 《벅수와 장승》 책이 있는데 “책을 주겠다.”라고 말하고는 놀랍게 바로 가져왔다. 교통이 불편한 시절에 깊은 산골과 논밭을 찾아다니며 장승을 집대성한 책에 정말 놀랐다. 책을 펼쳐놓고 한 번도 쉬지 않고 500쪽을 읽어나갔다. 김두하는 장승의 어원을 신라 시대 장생(長生)이란 말에서 어원을 찾았다. 장생이란 신라나 고려에서 왕이 절에 많은 토지를 하사하여 승려들이 왕이 오래도록 장수(長壽)하라고 절 입구에 세운 장생표비(長生表碑)에서 유래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장승 중 상원이 여자 장승이고 하원이 남자 장승인 경우는 거의 없다. 그는 주장군은 삼국시대 오나라 주유(周瑜), 혹은 주창(周倉)을 의미하며, 당장군은 벽사진경의 풍습인 문배(門排)로 당의 위경공(尉遲恭)과 진숙보(秦叔寶) 장군일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했다.
 
 
▲ 문신(門神) 진숙보(秦叔寶)와 위지공(尉遲恭)(사진:위키피디아)
 
 
고대에 중원에서는 새해가 되면 외부로부터 들오는 잡귀와 악령들을 막기 위해 문에 그림을 붙이는 풍속이 있었다. 이를 문배, 문신(門神)이라고 하는데 불교가 전래한 이후에는 사천왕상과 금강상 등 문신의 종류가 많이 늘어났다. 우리나라는 통일신라시대에 문배가 처용가(處容歌)에서 시작되었다.
 
타이완 국립역사박물과 시내에 있는 도교 사원을 구경하면서 사원 입구에 근엄한 모습을 한 진숙보(秦叔寶)와 위지공(尉遲恭)을 자주 보았다. 진국보의 얼굴은 매우 곱고 눈은 봉황이고 손에는 금빛 채찍과 창을 들고 있었다. 위지공(尉遲恭)은 얼굴이 검고 손에 금빛 채찍을 들고 있는데 눈은 분노한 얼굴이었다.
 
 
▲ 타이완국립역사박물관(사진;궁인창)
 
 
위지경덕(尉迟敬德, 585~658)은 이름은 공(恭), 자는 경덕(敬德), 본명은 위지융(尉迟融), 삭주선양(今州善陽) 출신으로 능연각(凌烟閣) 24 공신 중 한 명이다. 능연각은 정관의 치(貞觀之治)에 이바지한 개국공신 24명의 초상을 걸어 둔 누각을 말한다.
 
장군은 수나라 대업 말년에 공로로 조산대부가 되었고, 유무주가 군사를 일으켜 편장으로 삼아 진, 浍 등의 주를 차지하여 영안왕 이효기를 격파하고 독고회은을 생포했다. 무덕 3년(620년), 패전하여 당나라에 귀순하고, 위지공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진왕 이세민을 따라 당초 통일 전쟁에 참여하여 왕세충, 두건덕, 유흑타, 서원량 등의 세력을 평정하고 상당한 공훈을 세웠다. 도가(道家)에서는 진숙보(571~638)와 함께 잡귀를 쫒는 신으로 모신다.
 
 
▲ 위지경덕(尉迟敬德)(사진:大紀元制圖)
 
 
626년 7월 2일. 당의 수도 장안성(西安, 시안) 태극궁의 북문인 현무문에서 당 고조 이연(李淵, 566~635)의 후계자 선정을 두고 왕자들 간에 충돌로 현무문지변(玄武門之變)이 일어났다. 이연은 슬하에 22남 19녀를 두었다. 이때 반란군 위지경덕은 진왕 이세민(李世民, 598~649)에게 선제공격을 강력히 주장해 현무문 밖에 있는 태자파의 제왕(濟王) 이원길(李元吉, 603~626, 넷째 아들)의 부하를 모두 주살하고 태자 이건성(李建成, 589~626, 맏아들)과 그의 아들 6명을 모두 죽여 이세민이 전권을 장악하여 고조가 퇴위하고 이세민이 황제로 즉위했다. 이후 당 태종 이세민이 황궁에서 잠을 자는데 밤마다 악령들이 몰려와 괴롭혀 항상 불안하고 헛소리를 질러댔다. 황제는 죽은 형제들이 악령이 되어 자기를 죽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해 진수보와 위지공덕 두 장군을 침소에서 밤새 경호하라고 명령했다. 이후에는 악령이 안 나타나 효험을 보게 되자 황제는 너무 기뻐 화가에게 두 장군의 모습을 그려 문마다 붙이라고 명하였다.
 
역사 기록에 의하면 학식과 사리에 밝은 문덕왕후 장손씨(601~636)는 북조의 명문가이며 수나라의 유명한 장손성 대장군의 딸로 13세에 이세민과 결혼하여 항상 뒤에서 묵묵하게 드러나지 않게 이세민을 내조해 왕조를 안정시켰다. 그녀는 쿠데타로 권력을 잡아 죄책감과 심리적 장벽을 극복하지 못하는 황제의 내면을 부드러운 힘으로 어두운 그림자를 제거하였다.
 
 
▲ 당 태종 이세민 초상(사진:위키피디아)
 
 
또 다른 이야기는 경강의 용왕이 천계의 규칙을 어겼고, 옥황상제가 위정의 목을 베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이때 용왕은 당 태종에게 간청했고, 태종은 위정을 곁에 두고 처형 시간을 늦추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예상치 못하게 위정은 잠이 들었고 그의 영혼은 그의 몸을 떠났고, 그는 옥황상제가 지정한 임무를 수행하여 용왕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 후로 태종은 매일 밤 용왕이 와서 자신의 목숨을 요구하는 꿈을 꾸게 되었다. 매일 밤 너무 두려워서 잠들 수 없어 장군 두 사람을 불러 문 앞에서 자기를 잘 지키라고 부탁한 후로는 용왕은 감히 들어와서 다시는 당 태종을 괴롭히지 않았다고 전해온다.
 
위지경덕 장군은 정관 원년(627년)에 우무후(右武候) 대장군에 서임되고 호국공(昊國公)에 봉해졌으며, 이후 경주도행군총관, 양주도독, 동주자사가 되었다. 정관 11년(637년)에 낙양노군산(洛阳老君山)에 감수되고, 주(柱)국에 배향하고 어국공(鄂国公)에 봉해졌다. 이후 鄜, 夏 2개주 도독을 역임하고 정관 17년(643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서임되어 정무를 보지 않고 능연각(凌烟閣) 24공신 중 7위에 올랐다. 정관 19년(645년)에는 당 태종이 신라에 원정할 때 바다를 건너왔다. 장군은 현경(显庆) 3년 11월 갑진일 658년 12월 25일에 향년 74세로 세상을 떠났다. 시호는 충무이며, 당나라 2대 황제인 이세민 소릉(昭陵)에 부장되었다.
 
 
▲ 위지경덕(尉迟敬德) 장군(사진:위키피디아)
 
 
김두하는 1986년 민속학회에서 발간한 《한국민속학》 19집에 실은 그의 논문 <장승類의 명칭고찰(名稱考察)>에서 장승이란 명칭의 가장 오래된 기록을 중종 22년(1527) <훈몽자회(訓蒙字會)〉로 제시하였다. 세종대왕은 1443년에 훈민정음을 제정했다.
 
 
▲ 훈몽자회(국립한글박물관)
 
 
조선왕조 전기 역관이자 중국어에 밝았던 중국성운학자(中國聲韻學者) 최세진(崔世珍, 1468~1542)은 중인 출신이지만 중국에서 사신이 올 때마다 통역을 담당해 중종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최세진이 아동들의 한자 학습을 위해 만든 한자교학서 <훈몽자회>에서 장승을 ‘댱승’이라 표기했다는 것이다. 이 책은 상중하 3권으로 3,360자 한자의 뜻과 음을 훈민정음으로 달아 놓아 한글 보급에 큰 공헌을 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