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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2.22. 11:57 (2025.02.22. 11:57)

흉노족 침입 물리치기 위해 수호신 모심...몽골 훈촐로는 제주 돌하루방 상관 없어

 
옹중석, 장승의 기원?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였던 정승모(1953~ ) 선생은 우리나라 장승의 기원을 진나라 장수 옹중석(翁仲石, 石翁仲)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흉노족 침입 물리치기 위해 수호신 모심...몽골 훈촐로는 제주 돌하루방 상관 없어
옹중석, 장승의 기원?
 
 
국립민속박물관 학예사였던 정승모(1953~ ) 선생은 우리나라 장승의 기원을 진나라 장수 옹중석(翁仲石, 石翁仲)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진시황(秦始皇) 때 옹중석은 전쟁터에서 흉노족을 많이 물리치고 큰 공을 세웠으나 죽었다. 진시황은 전쟁터에서 올라온 보고를 접하고 그의 공로를 기려 함양궁(咸陽宮) 궁문 앞에 옹중석 구리 동상 12개를 만들어 궁궐 문 앞에 세웠다.
 
 
▲ 옹중석(翁仲石) 상(사진;承恩寺文物保管所)
 
 
흉노족은 옹중석이 죽었다는 기쁜 소식을 듣고 원한을 풀기 위해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에 쳐들어왔는데 아방궁 앞에 키가 큰 옹중석이 딱 버티고 있는 것을 보았다. 병사들은 지휘관이 말려도 옹중석이 죽지 않고 살아있다고 놀래 그대로 도망을 쳤다고 한다.
 
이후 진나라에서는 옹중석을 수호신으로 모셨다. 위(魏)나라 명제는 동인(銅人) 둘을 주조하여 사마문(司馬門) 앞에 세웠다고 《상우록(尙友錄)》에 기록되어 있다.
 
옹중석 동상의 무장 복장의 허리띠를 자세히 관찰하면 사자 길들이기 그림이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사자는 지혜와 힘의 화신으로, 길상, 번영, 끊임없는 의미를 담고 있으며, 지위, 존엄, 평안을 상징한다.
 
 
▲ 옹중석(翁仲石) 상 조각(사진;承恩寺文物保管所)
 
 
고대에는 문무 관료들의 관복 무늬에 문관은 새를 넣고 무관은 짐승 그림을 넣었다. 석조에 나타나는 문양은 당시를 알려주는 귀중한 유물이다. 공포의 장수로 불렸던 완옹중(阮翁仲)의 동상(銅像)은 우리나라에 건너와 간결하게 표시되고 무덤을 지키는 석상이나 장승으로 많이 만들어졌다. 옹중석(翁仲石) 석상의 허리 그림을 자세히 살펴보면 놀라운 조각이 들어있다.
 
중국 은(殷 )나라의 삼인(三人)의 한 명으로 전해 내려오는 기자(箕子)가 조선에 왔다가 묻혔다는 평양의 기자묘에 옹중석 상이 있다. 기자에 대한 기록은 최치원의 〈양위표〉에도 나오며 고려 숙종 때인 1102년에 평양에 기자 사당이 세워진 것을 기점으로 조선에서 크게 숭배했다. 현재 북녘 금단의 땅에 있는 기자묘는 철책선에 가로막혀 갈 수가 없다.
 
 
▲ 평양 기자묘 옹중석(翁仲石)(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제주돌문화공원 김정선 학예사는 문신 김몽규(金夢煃)가 영조 28년(1752)에 제주목사 겸 방어사로 부임해 흉년이 들고 아사자가 많고 원귀가 살아 살아있는 사람을 괴롭혀 1754년에 석공에게 “장승을 만들라!”라고 지시했다.
 
석공은 이제까지 장승을 전혀 본 적이 없어 제주목사가 말해준 것을 생각하며 상을 만들어 삼문 밖에 세웠다. 이것은 1918년 심재 김석익(1885~1956)이 탐라의 사적을 기술한 편년체 역사서 《탐라기년(耽羅紀年)》에 나오는 돌하르방 문헌 내용이다. 52기의 돌하르방이 만들어져 여러 곳에 설치되었다.
 
 
▲ 몽골 훈촐로(사진:궁인창)
 
 
김정선 학예사는 “몽골의 목초 수호신인 훈촐로를 제주 돌하르방의 원조로 보는 분도 있지만, 훈촐로는 의자에 앉아 가축을 바라보는 좌상이고 돌하르방은 상반신만 땅에 있는 형태로 전혀 다르다. 시기적으로도 원나라 때와 400년의 차이가 있어 전혀 상관이 없다.”라고 말했다.
 
 
▲ 제주대학교박물관 돌하르방(사진:궁인창)
 
 
2008년 《탐라문화》 통권 33호에 발표한 김정선 학예사의 논문 〈翁仲石 :돌하르방에 대한 고찰〉에서 논문을 읽으며 제주대학교 박물관 앞에 서 있는 돌하르방 사진과 몽골국립박물관에서 본 훈촐로 상을 비교했다.
 
1990년 초대 한국몽골학회 회장을 역임한 주채혁(周采赫, 1942~ ) 교수는 “제주도 돌하르방은 어떤 시기에 한정해서 파악할 수 있는 조형물이 절대 아니다. 우리가 알지 못하는 신석기시대 이래로 제주도가 독자적으로 생성 발전해 온 문화 가능성을 연구하고 가치를 규명해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 몽골 말(사진:신익재)
 
 
제주목사 김몽규는 영조대왕 탄신일에 축하하는 사육체(四六體)의 전문(箋文)을 올리지 않아 전라 감영의 장계에 의해 영조 30년(1754) 10월에 파직되었다. 그러나 제주도민은 어려운 시기에 도민을 돕고, 습한 곳에 있던 향교를 남문 밖에 옮겨 짓도록 하고 관덕정을 중창하고 선정을 많이 베풀어 그가 떠났지만 5년 후인 영조 35년(1759) 4월 제주향교에 ‘목사김공몽규존성대사비(牧使金公夢煃尊聖待士碑)’를 세웠다. 그리고 1885년(고종 22)에 현 위치로 옮겼다.
 
 
▲ 관덕정(사진:제주관광정보센터)
 
 
장승의 기원설은 고대의 ‘남근 숭배설’, 사찰의 ‘장생고 표지설’, 솟대에서 유래된 고유 민속기원설, 퉁구스 기원설, 남방 벼농사 기원설, 환태평양 기원설 등이 있지만 확실한 것은 없다, 당장군(唐將軍)을 백제 멸망 후 백제 중흥의 핵심인물이었던 흑치상지(黑齒常之, 630~689) 장군으로 추정하는 사람도 있다.
 
 
▲ 진시황 병마용박물관(사진:궁인창)
 
 
사마천 《사기(史記)》 〈진섭세가(陣涉世家〉에는 ‘鑄以爲金人十二’라는 글이 있다. 진나라 초대황제 진시황은 550년에 이르는 춘추전국시대를 끝내고 6국을 병탄하여 천하를 통일했다. 그리고는 이름난 성을 헐어버리고 호걸 인물을 마구 죽였다. 병사들은 농가를 돌며 천하의 병기를 수거했다. 그리고 수거한 것을 모두 함양에 모아 날카로운 병기와 활촉을 주조하여 금인(金人) 상을 만들어 천하의 백성(百姓)들을 약하게 만들었다.
 
 
▲ 병마용 수학여행 온 중국학생((사진:궁인창)
 
 
당시 제자백가로 진시황에게 천하통일의 계책을 진언하고 병법서를 지은 위나라 사상가 울료(尉繚)는 시황제의 용모를 두고 “코가 높고 눈은 찢어졌으며 가슴은 매처럼 생기고 목소리는 들개 같으며 은혜를 모르는 사람으로 폭압적 정치하는 극악무도한 사람이다.
 
겉으로는 겸손한 척하나 속으로는 인덕이 부족하고 음험해 승냥이나 이리 같은 자”라고 혹평했다. 시황제(始皇帝)는 폭군이 되어 인심을 잃고 위엄이 떨어져 향년 49세로 붕어(崩御)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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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