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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3.04. 14:34 (2025.03.04. 14:34)

설훈과 경천, 의겸 등 화승, 독창적인 화풍으로 전수... 추사, 초의 스승 해붕과 교류

 
서울대 조인희 선생은 2014년 《미술사학연구》에 〈조선 후기의 여동빈에 대한 회화 표현〉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동빈(呂洞賓)은 조선왕조 후기 유불선(儒佛仙) 회화에 모두 포용되는 독특한 위상을 가졌다.
설훈과 경천, 의겸 등 화승, 독창적인 화풍으로 전수... 추사, 초의 스승 해붕과 교류
조선 회화에 등장하는 여동빈
 
 
서울대 조인희 선생은 2014년 《미술사학연구》에 〈조선 후기의 여동빈에 대한 회화 표현〉이란 논문을 발표하였다. 여동빈(呂洞賓)은 조선왕조 후기 유불선(儒佛仙) 회화에 모두 포용되는 독특한 위상을 가졌다.
 
도사는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 문무(文武)를 겸한 유자(儒者), 불법(佛法)을 수호하는 조사(祖師)라는 중층적 이미지를 바탕으로 조선에서는 여러 화가들에 의해 다양한 유형의 회화가 제작되었다. 특히 불교의 <신중도(神衆圖)>의 호법신중(護法神衆)으로 등장해 현등사 <신중도>(1790)에는 순양건을 쓰고 보검을 든 무장(武將)의 모습으로 그려졌다. 신중도는 가로 122cm, 세로 123cm로 극락전에 봉안되었으나 최근에 문화재로 지정되어 보광전에 두루마리로 보관되어 있다.
 
 
▲ 마군상(马君祥)이 그린 〈조원도(朝元圖)〉(사진:위키피디아)
 
 
조선왕조에서 여동빈을 불화 속에 그린 승려는 경상도 출신으로 전라도 화맥을 이어받은 관허당 설훈(寬虛堂 雪訓)과 경기도 화맥을 이어받은 용봉당(龍峯堂) 경천이다. 설훈의 화맥(畵脈)은 의겸에서 각총으로 이어졌다. 의겸은 전남과 경남에서 44년간 활동해 많은 작품이 남아 있고, 해인사 출신 각총은 경기도 봉선사 〈괘불도〉를 그렸다. 화승(畵僧) 설훈은 각총에게 화맥을 전수 받고는 홍천 수타사에서 〈지장보살도〉(1776)를 제작하며 실험적이고 독창적인 화풍을 만들었다.
 
정조 14년(1790) 정조는 현릉원에서 가까운 갈양사(葛陽寺) 터에 비운에 간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기 위해 용주사를 창건하게 했다. 이때 상겸이 설훈을 모시고 진행한 용주사 불화 제작은 경천 등 다른 화승에게 많은 영향을 주었다.
 
설훈과 경천은 현등사 청동지장보살좌상(懸燈寺靑銅地藏菩薩坐像)을 조각했다. 설훈의 화풍은 용주사 화승인 화담신선(華潭愼善)에게 전해졌다. 신선은 19세기 경성화파(京城畫派)를 대표한 화승으로 1832년 서울 흥천사 〈비로자나불 삼신괘불도〉를 17명의 화승과 함께 조성했다.
 
 
▲ 가평 현등사 '신중도' (사진:가평문화원)
 
 
현등사 신중도는 오른쪽에는 범천(梵天)과 제석천(帝釋天)을 중심으로 일원천자와 복숭아와 병을 든 동자상을 배치하고 왼쪽 상단에 날개깃이 올라간 투구를 쓴 위태천(韋駄天, 塞建陀, 室建陀)이 그려져 있다.
 
위태천은 힌두교 시바 신의 차남인 스칸다(Skanda)가 불교의 호법신이 된 것으로 도교의 국장군 신앙과 습합했다. 그는 갑옷을 입고 검을 가진 젊은 무장의 모습의 모습으로 그려져 있고, 금광경에 등장하는 24명의 천신 수호신 중 한 명이다. 전설에 따르면 스칸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완전히 믿었던 덕망 높은 왕의 아들로 부처님이 열반에 들어가셨을 때 부처님은 스칸다에게 법을 지키라고 말씀하셨다.
 
승가(僧伽)의 신도들이 마왕(魔王)에게 방해를 받을 때 그들을 보호하고 승가 구성원들 간의 갈등을 해결하는 것이 그의 의무였다. 부처님이 돌아가시고 화장한지 며칠 후 악귀들이 부처의 유물을 훔쳤는데 스칸다가 신앙과 법을 지키겠다는 다짐으로 악귀들을 물리치고 유물을 반환하는 데 성공했다.
 
 
▲ 베이징 묘응사의 위태천(韋駄天)(사진:위키피디아)
 
 
설훈의 활약상은 18세기 말 초의(艸衣)의 스승으로 당대 최고 선승이었다던 해붕전령(海鵬展翎, ?~1826)이 지은 《해붕집(海鵬集)》에 뛰어난 그림 솜씨와 명성에 대한 찬시(讚詩)가 있다. 추사(秋史, 1786~1856)는 1820년대 도봉산과 삼각산에서 승려 해붕과 교류하며 불교 공(空) 사상을 배웠다.
 
 
▲ 추사 김정희(1786~1856)초상화(사진:과천문화원)
 
 
추사는 제주와 북청에 유배되었다가 돌아와 1856년(철종 7)에 승복을 입고 봉은사에서 수도하며 후학을 지도하고 경기 과지초당(瓜地草堂, 果川)을 오가면서 지냈다. 하루는 해붕의 제자로부터 청을 받아 해붕대사 영정(77cm×116.2cm) 영찬(影讚)을 짓는다.
 
 
▲ 추사의 세한도(사진;국립중앙박물관)
 
 
추사는 세상을 떠나기 5개월 전에 이름을 전혀 모르는 승려로부터 한 통의 편지를 받았다. 편지에는 자신이 호운(浩雲)이라는 중으로 해붕대사 문도인데 큰 스님의 영정을 만들었느니 거기에 화상찬을 하나 써 달라는 부탁이었다.
 
추사는 30세 때인 1815년에 수락산 학림사(鶴林寺)에 있을 때 인근 산사에 머무는 해붕선사를 찾아갔다. 당시에는 초의가 해붕 선사를 모시고 있어 공각(空覺)에 대해 밤을 지새우며 격렬하게 토론을 벌일 수가 있었다. 이후 추사는 선교에 정통하고 문장이 뛰어나며 덕이 높은 대사에게 존경을 표하고 도교와 불교 교리를 배우러 선사를 자주 찾아뵈었다. 추사는 나이가 들고 병이 깊어 몸이 불편했지만, 마지막 기력을 다해 정성을 모아 해붕대사 영정에 제(題)를 직접 짓고 써주었다.
 
 
▲ 해붕당대화상진영(海鵬堂大和尙眞影)(사진:선암사)
 
 
조선왕조 제22대 국왕인 정조는 1782년 의빈 성씨가 문효세자를 낳았으나 5살 때 홍역으로 요절하여 왕위를 계승할 후사가 없었다. 정조 13년(1789)에 선암사 눌암(訥庵)이 원통전에서 해붕이 대각암에서 각각 왕자 탄생을 기원하는 백일기도를 올려 1790년 수빈 박씨(綏嬪 朴氏)가 순조를 낳았다.
 
왕실은 선암사 사찰에 인천대복전(人天大福田)이란 편액과 은향로, 금병품 등을 하사하였다. 순조 22년(1822)에 승중문음(僧衆文音)으로 유명한 해붕이 칠전(七殿)을 중창하였는데 1823년(순조 23) 3월 30일 실화로 선암사에 화재가 발생해 대웅전을 포함한 여러 동의 전각이 불에 타 사라졌다.
 
이에 해붕은 노구를 이끌고 눌암, 익종(益宗)과 함께 6번째 중창 불사에 나서 지금의 선암사를 만들고 1826년 10월 6일에 열반에 들었다. 순천 선암사 성보박물관에는 24명의 고승 진영이 있는데 해붕대사 진영(眞影)은 의자에 정좌하고 바닥에 돗자리를 깔아놓은 모습으로 추사(阮堂)의 서체로 써진 찬문(贊文)이 남아 있다. 특이한 것은 해붕의 진영은 역대 고승 진영의 제작 기법과 다르게 주장자나 얼굴 방향이 정반대로 제작되었다.
 
 
▲ 순천 선암사 승선교(昇仙橋)(사진:선암사)
 
 
해붕당대화상진영(海鵬堂大和尙眞影) 찬문(贊文) 일부를 인용한다.
 
“예전에 어떤 사람이 이르기를 선(禪)이 바로 대위(大潙)라면 시(詩)는 바로 박(朴)일진대 대당천자(大唐天子)와 단지 세 사람일레 하였으니 해붕은 바로 대당천자의 선인(仙人)인 것이다. 지금도 생각나는 것은, 눈이 가늘고 검어서 푸른 눈동자가 사람을 꿰뚫는 듯한 해붕(海鵬)의 모습이다. 그는 비록 재가 되었지만, 푸른 눈동자는 아직도 살아 있다. 30년이 지난 지금 쓰는 이 글을 보고서 껄껄 웃는 모습(落筆呵呵大笑)이 삼각산(三角山)과 도봉산(道峯山) 사이에서 뵐 때처럼 역력(歷歷)하구나!”
 
 
▲ 〈조원도(朝元圖)〉(사진:위키피디아)
 
 
필자는 삼청전 전각 내부를 돌며 〈조원도(朝元圖)〉에 등장하는 신상들을 천천히 구경했다. 큰 상들이 너무 많아 조금은 혼란스러웠지만, 신상이 정말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크고 웅장해 황홀했다. 수염과 머리카락이 곧고 눈썹을 위로 추켜 올린 신왕도 있고, 꽃을 들고 미소를 지으며 말하려는 듯한 옥녀도 있었다. 정중한 표정을 짓고 있는 선후와 공손하고 우아한 학사도 있고 조용히 혼자 있거나 때로는 움직이며 표정과 모습이 매우 변화무쌍했다.
 
 
▲ 여동빈도(呂洞賓圖)(사진:안산 김홍도미술관)
 
 
경기도 안산시 김홍도박물관은 2020년 4월에 김홍도가 50대에 그린 여동빈 그림을 경매를 통해 구입했다. 여동빈은 깊은 밤 파도치는 바다 바위에 걸터앉아 세상을 응시하고 있는데 마침 학 한 마리가 하늘을 날고 있다. 이 그림은 여동빈이 세상 사람들을 위해 밤에도 정진하는 있는 그림이다. 여동빈은 자신의 지물(持物)인 검(劍)을 매개로 귀신을 물리치는 영험한 신선으로, 의(義)를 강직하게 지키고 실현하는 문무겸전의 유학자로, 불법을 수호하는 신중(神衆)으로 많은 사람에게 호감을 주었다.
 
 
▲ 〈조원도(朝元圖)〉(사진:Baidu百科)
 
 
영락궁을 보기 위해 방문했을 때는 점심시간이 조금 지나서인지 관람객이 많지 않아 아주 조용했다. 그래서 벽화를 보는 유럽 방문객을 옆에서 살짝 지켜보니 벽화의 모습이 너무 사실적이고 생동감이 있어서인지 매우 흡족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영락궁 〈조원도(朝元圖)〉 벽화는 당·송 회화의 유풍을 계승한 회화 기법으로 원대의 회화 특징을 모두 융합하여 독특한 스타일을 형성했다. 필자는 고전(古典)적인 작품 속에 있는 신들이 몇 명인가 궁금해 작은 목소리로 한 명, 두 명 세어 나가다 너무 많아 152명에서 그만두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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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