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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3.23. 14:30 (2025.03.23. 14:21)

무진전쟁 때 승리한 번주, 정관원 당주에 하사...백과사전에 등장할 만큼 유명

 
동해 바다를 건너간 장승 1 / 1825년(文政 8, 仁孝天皇) 음력 12월 아침 니가타현(新鴻) 가시와자키시(柏崎市) 미야가와하마 해변에 2.6m나 되는 나무가 표착(漂着)했다. 새벽에 한 어민이 해변에 널려있는 나무를 주우러 왔다가 이상한 형태의 나무를 보고 무척 놀랐다.
무진전쟁 때 승리한 번주, 정관원 당주에 하사...백과사전에 등장할 만큼 유명
동해 바다를 건너간 장승 1
 
 
1825년(文政 8, 仁孝天皇) 음력 12월 아침 니가타현(新鴻) 가시와자키시(柏崎市) 미야가와하마 해변에 2.6m나 되는 나무가 표착(漂着)했다. 새벽에 한 어민이 해변에 널려있는 나무를 주우러 왔다가 이상한 형태의 나무를 보고 무척 놀랐다. 그것은 짐승 모습을 한 괴기한 형상이지만, 나무가 커서 잘 말려 쪼개면 여러 날 사용할 땔감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재앙을 줄 것만 같아 운반하기가 망설였다. 다음 날 나무를 수레에 실어 왔는데 동네에서 이런 모습을 지켜본 사람이 몰래 와서 구경하고는 동네에 소문을 냈다. 사람 얼굴을 한 조각 나무에 한자 글씨가 있고 얼굴이 괴물처럼 생겼다는 흉흉한 소문이 이웃 마을까지 널리 퍼졌다.
 
한 호사사(好事家)가 소문을 듣고 나무를 가진 어민을 찾아가 충분한 보상을 약속하고 넘겨받았다. 호사가는 여러 날 나무를 가지고 있다가 나가오카(長岡) 번주에게 헌상하고, 번주는 다시 장승을 에도(江戶, 도쿄)로 보냈다.
 
1868년 무진전쟁(戊辰戰爭) 내란이 벌어졌다. 내란은 막부 세력과 고메이 천황 세력 간의 분쟁으로 천황 세력이 승리했다. 정관원 9대 당주 哲斎翁가 나가오카 번주로부터 장승을 하사(拜領) 받았다. 이 장승은 수필가 스즈키 마키유키(鈴木牧之, 1770~1842)가 자기 고향 니가타(新鴻)현에 대해 저술한 인문지리 백과사전 《北越雪譜》에 등장할 만큼 유명하다.
 
 
▲ 「貞観園所蔵 娥眉山下橋の標木(사진:정관원)
 
 
일본 명승 정관원 홈페이지에는 조선 장승을 소개하면서 당토(唐土)라고 표시했는데, 당시 일본은 중국이나 한국(신라, 백제, 고려, 조선)에서 온 물건을 모두 당(唐)으로 표기했다.
 
【원문】 1825年(文政8年)12月、刈羽郡椎谷の浜に漂着した唐土の標木といわれ、鈴木牧之の「北越雪譜」に図で報じられたほど話題になりました。高さ2.6m周り88cm、柱身に「娥眉山下橋」の五文字が刻まれており、これを拾った漁夫より藩主堀候「十四代近江守直哉」に献上され、のち江戸に運ばれ評判となったといわれます。後年、戊辰の役に当家九代哲斎翁が藩主堀右京亮より拝領し、現在に至っています。またこの標木を伝え聞いた良寛和尚は、下記の七言絶詩を詠んでいます。
 
현재 아미산하교(峨眉山下橋) 장승은 에도시대에 저택을 소유한 무라야마(村山) 家의 정원인 정관원(貞観園)에서 보관하고 있다. 정관원은 1090년경에 시나노겐(信濃源)씨가 발상(發祥)하여 1784년 5대 당주가 정관당을 건설했다.
 
1922년 방화에 대비하여 재래 기와집을 개보수하고 부속 건물을 절반으로 줄였다. 1931년 처음 공개하고, 1937년에는 일본의 명승으로 지정되었다. 2005년부터 2008년까지 3년간 수리를 거쳐 2009년 6월 12일부터 일반공개를 재개하였다. 현재 정관원은 13대 당주(堂主)가 지키고 있으며, 폭설로 인해 매년 12월 1일부터 다음 해 5월 31일까지는 휴관한다.
 
정관원의 이름은 일본 국보로 지정된 목조약사여래입상(木彫藥師如來立像)을 모신 정관당에서 따와 1843년 유학자 아이자와 난죠(藍澤南城, 1792~1860)가 명명했다. 난죠는 한학자로 청년 때 에도에 가서 공부하다 29세에 향리에 돌아와 학원 「三余堂」을 열고 향학열이 높은 청년들을 지도하며 2,000여 편의 시를 지었다. 니가타 주민들은 장승을 ‘마쓰오사마’라고 하며 술의 신으로 존숭한다.
 
에도(江戶) 말기는 쇄국정책으로 외부 세계에 대한 호기심이 많고 중국 문화에 대한 동경심이 심하던 때였다. 나가오카 번주는 나무 기둥에 서 있는 글자가 궁금하여 유학자를 불러 장승에 있는 글자를 써달라고 부탁하고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아미산이 어떤 산인지 질문했다. 이에 유학자는 번주에게 ”아미산은 멀리 중국 쓰촨성 아미산이며, 당나라 시인 이백이 바로 촉(蜀, 四川, 쓰촨) 사람입니다.
 
당 현종 개원 12년(714)에 쓴 《아미산 월가(峨眉山月歌)》는 이백이 고향 쓰촨을 처음 떠나면서 달밤에 배에서 시를 썼는데, 이 시는 고향 풍경을 묘사하고, 고향의 산수에 대한 그리움과 천리촉강(千里蜀江)의 행려도(行旅圖)를 그대로 표현한 것이다.”라고 말하며 이백의 시를 낭랑한 목소리로 들려주었다.
 
 
峨眉山月半轮秋
影入平羌江水流
夜发清溪向三峡
思君不见下渝州
 
 
필자는 고향을 떠나는 시선(詩仙) 이백의 마음을 살피고자 칠언절구(七言絶句) 한시(漢詩)를 번역해 보았다.
 
높고 험준한 아미산 앞에 상현달의 절반쯤 되는 가을 달(半輪秋)이 걸려 있구나
하늘은 높고 유유히 흐르는 평강(平羌, 칭이강, 靑衣江) 강물 위에 달그림자가 비치는데
달밤에 배를 타고 청계(淸溪, 칭시)를 지나 민강으로 들어가 삼협(三峽, 싼샤)으로 향하네
이제 보고 싶어도 못 만나고 그리운 친구(君, 月)를 두고 위저우(濰州)로 간다.
 
 
▲ 이백의 동상(사진:CGTN)
 
 
료관(良寬, 1758~1831)은 에치고국(越後國) 이즈모사키(出雲崎, 현 니가타현(新鴻縣))의 작은 마을에서 촌장과 신사의 신관을 겸임한 야마모토 이난(山本以南, 1736~1795)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료관의 본명은 야마모토 에이조(山本榮藏)로 어릴 때부터 한문 교육을 받고 15세에 한학 서당에서 사서오경과 노장 철학을 배웠다. 그는 어릴 적부터 출가를 희망하여 18세에 집 근처에 있는 광조사(廣照寺)에 출가하여 사문이 되었다. 22세에 원통사 국선화상(國仙和尙)에게 수계 받고 ‘良寬大愚’라는 법명(法名)을 가지게 되었다. 대우(大愚)라는 법명은 ‘마음이 넓고 관대하며 지혜가 우매(愚昧)한’ 사람이라는 뜻이다.
 
 
▲ 불교성지 아미산(출처:ems517.com)
 
 
대우는 스승 국선 선사의 가르침을 받고 깊이 감화되어 매일 아침 3시에 일어나 경을 외우고, 도량 청소하고, 요리하고, 탁발하며 수행하였다. 34세 때에 스승이 세상을 떠나자, 전국을 순례하며 보시(報施)를 구걸(求乞)했다.
 
그는 평생 사찰의 주지도 맡지 않고 소탈하게 아이들과 어울리고 시를 짓고 책을 쓰며 초암(草庵)에 살았다. 항상 외롭고, 청빈하게 자유자재한 생활 방식을 선호했다. 문화원년(文化元年, 1804)에 이르러 고향인 국상산(國上山) 국상사에 정착했다. 1826년에 마을 주민에게서 아미산하교(峨眉山下橋) 소식을 들었다.
 
그는 오래전부터 아미산을 가고 싶었지만, 외국에 나갈 수 없어 보현보살이 거주하는 불교 성지가 그리워 〈제아미산대교항(題峨眉山大橋抗)〉이라는 시를 지었다.
 
 
不知洛成何年代
書法俊美且淸新
分明峨眉山下橋
流寄日本宮川浜
 
언제 어느 때 세워진 지 모르겠지만
글씨체가 아름답고 또한 청신하구나
분명히 아미산 아래 다리가 분명한데
일본 미야가마 해변까지 흘러왔구나
 
 
▲ 승려 료관(良寬)(사진:료우관노사토미술관)
 
 
선사는 사람들이 베풀어주는 선심(善心)에 기대어 생활했지만, 절대로 수치(羞恥)스럽게 여기지 않았다. 가인(歌人), 한시인(漢詩人), 서예가로 이름이 높았지만, 작품을 팔지 않고 가난한 사람이 작품을 원하거나, 자신을 도와준 사람에게 보답해야 할 경우에만 붓을 들어 하이쿠나 서예를 하였다.
 
료우관노사토미술관에는 그의 서예 작품이 보관되어 있는데, 글씨는 정말 순수하고 초연하여 영혼의 맑은 그림자를 보여준다. 수행자는 자연에 대한 사랑과 아이에 대한 사랑,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을 주로 작품에 담아 많은 사람이 그의 작품을 좋아했다. 작품은 일본 문인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주기도 했다.
 
 
▲ 료관(良寬의 〈天上大風〉(출처:료우관노사토미술관)
 
 
《설국(雪國)》으로 유명한 일본 소설가 가와바다 야스나리(川端康成, 1899~1972)는 1968년 노벨문학상 수상 소감에서 일본 승려 료관(良寬)의 시 세계와 자기의 세계가 비슷하다고 말했다. 니가타현 유자와마치 역사민속자료관 ‘유키구니칸’(湯沢町歴史民俗資料館「雪国館」)을 방문하면 소설을 주제로 꾸민 방이 있어 일본 전통 난방장치 ‘이로리’를 볼 수 있다.
 
 
▲ 유자와마치 역사민속자료관 설국관(사진:4travel.jp)
 
 
일본 민속학계에 알려진 조선 장승은 장승 연구가 김두하, 한보광 교수가 최초로 연구를 시작했다. 한보광은 1967년 경주 분황사에서 출가한 후 동국대 불교대학을 졸업하고 1981년 일본 교토대학(京都大學) 불교대학에 유학해 ‘신라정토사상’을 연구해 1989년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 성지 아미산(峨眉山)(사진:신화망)
 
 
그는 귀국에 앞서 야나기다 세이야마(柳田聖山, 1922~2006) 교수댁을 인사차 방문했다. 야나기다 세이야마 교수는 불교학과 선종사(禪宗史)를 전공한 불교학자로 1962년에 일본인도학불교학회상(日本印度學佛敎學會賞)을 받았다. 교수는 대화하던 중에 소장하고 있던 아미산하교(峨眉山下橋) 글씨가 있는 목주(木主) 사진을 보여주었다.
 
 
▲ 아미산 中日詩碑亭(사진:樂山市)
 
 
야나기다 세이야마 교수는 1986년에 양국의 우호적인 교류와 문학 분야의 교류를 촉진하기 위해 설립된 일중우호한시협회(日中友好漢詩協會) 회장으로 있어 일본 승려 료관의 〈제아미산대교항(題峨眉山大橋抗)〉 시비(詩碑)와 똑같은 시비를 제작하여 1990년에 중국 쓰촨성 아미산에 시비(詩碑)를 세운다고 말했다. 한보광은 사진 속의 조각된 나무는 어디서 많이 보았던 모습이라고 생각하며 은사에게 귀국 인사를 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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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