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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4.01. 12:44 (2025.04.01. 12:40)

담양 출신 송현숙 화가와 결혼...전남대 교환교수 근무 때 방문 매료돼 독일서 전시회 개최

 
화순 운주사와 조각가 요헨 힐트만 / 전남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을 독일에 처음 알린 사람은 독일인 조각가 요헨 힐트만(Jochen Hiltmann, 1935~ )이다. 그는 1986년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운주사 사진 전시회에서 “화순은 땅의 에너지가 왕성하게 넘치고 평화롭고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신비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담양 출신 송현숙 화가와 결혼...전남대 교환교수 근무 때 방문 매료돼 독일서 전시회 개최
화순 운주사와 조각가 요헨 힐트만
 
 
전남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을 독일에 처음 알린 사람은 독일인 조각가 요헨 힐트만(Jochen Hiltmann, 1935~ )이다. 그는 1986년 독일 뮌헨에서 개최된 운주사 사진 전시회에서 “화순은 땅의 에너지가 왕성하게 넘치고 평화롭고 바람이 잔잔하게 부는 신비롭고 평화로운 곳이다. 지구상의 마지막 삶을 보내기에 딱 좋은 곳으로 태초에 만들어진 수백 개의 고인돌과 천 개의 탑과 불상이 신비로움으로 감추어져 있다.”라고 소개했다.
 
 
▲ 《미륵(운주사 천불천탑의 용화세계)》(사진:학고재)
 
 
요헨 힐트만은 1953년부터 1955년까지 독일 북부 발트해에 면한 항구 도시 뤼벡(Lubeck)에서 농업 교육을 받고 프랑스 남부의 한 양조장에서 일했다. 1956년부터 1959년까지는 함부르크, 크레펠트, 뒤셀도르프에서 자유 미술을 공부해. 1958년에 크레펠트 시로부터 예술상을 받았고, 클레이브룩의 기본 자금 지원의 틀 안에서 독일 기업 문화로부터 장학금을 받았다.
 
그는 1959년에 그림에서 벗어나 조각으로 전공을 바꾸었다. 조각을 독학하며 노력해 다음 해에 국제적인 인정을 받는 중요한 조각상을 연속 수상했다. 1960년에는 플로렌스 빌라 로마나상을 받고 1962년에는 뒤셀도르프 시의 코넬리우스상, 1964년에 로마 빌라 마시모상, 1965년에 독일 청소년 플라스틱 예술상을 받았다.
 
 
▲ 요헨 힐트만의 1968년 조각 작품(사진:Jochen Hiltmann, Marl 조각미술관)
 
 
그는 1967년에 함부르크 미술대학에서 금속 플라스틱 강사가 되었고 1970부터 2001년까지 함부르크 대학의 교수로 활약했다. 1974년에는 함부르크 미술대학 부총장으로 재직했다. 1975년에 암스테르담에 있는 제릿 리트벨드 아카데미에서 교사직을 얻었고 1972년부터 1975년까지 힐트만은 주로 이론적인 작업을 했다.
 
조각가이며 사진작가인 힐트만은 독일 예술가 협회의 회원으로 그의 작품은 눈에 보이는 생산 과정에서 만들어진 특정한 형태의 강조로 특징지어진다. 그는 1975년 이후에는 예술 영화와 비디오를 촬영했고 예술에 관한 글을 많이 발표했다.
 
 
▲ 요헨 힐트만(사진:ARTSTUDIO HAMBURG)
 
 
힐트만은 1977년 기차 옆자리에 앉은 동양인 여인 송현숙(1952~ )을 만나 깊은 사랑에 빠진다. 당시 송현숙은 간호사 보조원으로 근무하다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진학하여 그림을 배우는 학생이었다. 조각가는 송현숙에게 청혼하여 1979년 결혼하고, 1985년 부인의 고향 담양을 처음 방문했다.
 
한국에 도착한 후 한국 전통문화에 완전히 심취하여 1986년 전남대 교환교수를 신청하여 6개월간 머문다. 이때 화순 운주사 천불천탑을 방문하여 사찰 사진을 찍고 독일로 돌아가 뮌헨에서 운주사 사진 전시회를 개최하였다. 그는 전시장을 찾은 독일 예술인에게 한국과의 인연으로 볼 때 “아마도 자기가 전생의 한국 고승이었을 것이다.”라고 덕담을 했다.
 
 
▲ 전남 담양 무월리 벅수와 선돌(사진:웰촌)
 
 
송현숙은 1952년 담양 무월리 산골 마을 농부의 딸로 태어났다. 무월리는 벅수와 선돌이 마을을 지키고 400년이 넘는 신목(神木)이 있는 산골이라 송현숙은 10리를 걸어 초등학교에 갔다. 그녀는 성장하여 광주에 있는 수피아여중·고를 졸업하고 형제들의 뒷바라지를 하면서 학업과 새로운 삶에 대한 걱정이 많았다.
 
우연히 길에서 파독 간호 보조사 모집 광고를 보고 집에 돌아와 고향을 떠나 타국에서 생활하는 것이 매우 힘들겠지만, 새로운 삶을 결심한다. 그녀는 부모 형제를 설득하여 20살 때인 1972년 독일행 비행기에 올랐다.
 
 
▲ 1966년 1월 간호사 독일 푸랑크푸르트 도착(사진:한국일보)
 
 
당시 독일 사회는 외국인 혐오증이 아주 심해 외국인이 일하는 것이 무척이나 힘들었다. 송현숙은 낯선 땅에서 나이가 많은 노인들과 말이 잘 안 통해 일하는 것이 고역이었지만, 하나씩 극복해 나갔다. 그녀는 어릴 때부터 미술을 좋아해 고향이 그리울 때면 담양 무월리 마을 풍경을 담은 그림과 일기를 매일 적었다. 그러면 마음이 진정되고 진한 향수병이 사라졌다.
 
그녀는 4년간의 간호사 보조원 생활 중 마지막 1년(1975년)을 브레멘 정신요양원에서 약물 중독자를 돌보았다. 환자들은 그림 그리기와 도자기 굽기로 중독 치료를 받았는데, 환자를 대상으로 한 그림 치료를 경험한 뒤 ‘내가 그림을 그리면 더 잘 그릴 수 있겠다’라는 생각에 연필 드로잉을 시작하고 먹으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며 학업을 더하고 싶은 생각에 미술대학 진학을 꿈꾸기 시작했다.
 
 
▲ 독일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사진:위키피디아)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은 1797년에 세워진 대학으로 8개 학과를 두고 있었다. 대학 규모가 크고 세분화한 작업 공방이 있었다. 그녀는 용기를 내어 그림 20장을 함부르크 조형예술대학에 보냈다.
 
함부르크 조형미술대학 입학 사정관은 외국인이 그린 습작을 보고 기교는 없지만, 가능성을 평가해 1976년 입학을 승인했다. 이 대학은 실험적이고 파격적인 방향을 추구해 다른 도시의 대학처럼 독일어 어학 증명을 따지지 않고 실기 시험과 인터뷰가 없어 외국인들의 입학 경쟁률이 가장 높은 대학이었다.
 
20대 후반 늦깎이 대학생은 가장 먼저 학교에 나와 그림을 배우며 가장 늦게 화실을 떠났다. 대학생이 된 송현숙은 미술대학에서 위르겐 글레제머 교수의 강의를 들었다, 교수는 동양인 여학생이 먹으로 그린 ‘심미적 메아리’ 작품에 크게 매료되어 창작 과정을 계속 지켜보면서 특별하게 보살펴주었다. 그녀는 1981년 대학을 졸업하고 다음 해에 함부르크 미술관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 〈9회〉 캔버스에 달걀 템페라, 200×150cm 2003(출처:송현숙)
 
 
송현숙은 1984년 독일 학술교류처의 장학금을 받아 1985년 전남대 미대로 와서 한국 미술사와 이태호 교수의 서예와 추사 강의를 들으며 한국 화풍을 익혔다. 그녀는 이때부터 전통 서예를 추상화로 하는 작품을 만들게 되었다.
 
그녀는 어릴 적에 본 장독, 명주, 가옥의 귀퉁이 등의 그림을 계속하며 개인전을 열고 단체전에 초대되었다. 1992년부터는 독일 영상위원회의 지원을 받아 자전(自傳) 기록영화 85분짜리 〈내 마음의 조롱박(1995)을 제작하고 회귀(1996), 집은 어디에(2003)를 이어 제작했다.
 
전라도 사투리를 구수하게 말하며 토속적인 작품을 그리는 송현숙은 1996년에는 에드빈샤르프 예술상을 받고, 그해 한국 금호미술관에서 개인전을 했다. 1998년에는 함부르크 예술아카데미 회원이 되고, 2003년 학고재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화가의 작품은 서예가가 그러하듯 단숨에 강하게 획을 긋고 10획을 넘지 않는 거친 붓질로 그림을 완성한다. 에드바르 뭉크도 1910년 작품〈절규, The Scream〉에서 템페라 기법을 사용했다. 반면 송현숙은 한지를 사용하지 않고 유럽에서 15세기에 애용된 계란 노른자위, 벌꿀, 무화과즙 등을 용매로 만든 무광택 템페라(Tempera, 혼합) 물감을 즐겨 사용하며 동양적인 요소를 추가하여 독창적인 회화 기법을 발전시켜 나갔다.
 
 
▲ 화가 송현숙(사진:한겨레)
 
 
송현숙의 작품에는 신기하게 모든 작품에 막대기가 등장한다. 그녀는 막대기를 두고 설명하기를 “정착할 때 쓰는 말뚝의 의미도 있고, 고향과 제2의 고향, 현재와 과거를 뜻하기도 한다. 말뚝을 이어주는 명주 천은 삶과 죽음을 모두 아우르는 이미지여서 즐겨 쓴다.”라고 말한다. 그녀의 작품은 어린 시절 고향의 기억 등 내면세계를 그린 작품과 한국의 노동 현장과 사회현실 고발 등 두 갈래로 나뉜다.
 
 
▲ 조각가 요헨 힐트만과 송현숙 화가(사진:ARTSTUDIO HAMBURG)
 
 
화가는 독일에서 한복을 입고 40년을 생활하면서 어릴 적 태어나서 자라고 보았던 담양 고향과 부모님을 항상 그리워하며 그림을 그렸다. 학자들은 그림은 ‘긁다’에서 파생했다고 말하지만, 화가는 ‘그림’이란 말의 어원을 고향에 대한 간절한 그리움이라고 생각했다. 시인이 마음을 옮기면 시가 되듯이, 화가가 그리운 것을 그리면 그림이 된다고 보았다.
 
 
▲ 송현숙 著 《집에서-그리거나 죽거나》(사진:한국국제문화교류진흥원)
 
 
2022년 3월 23일 베를린 중심가 슈프뤼트 마가스 갤러리에서 송현숙 개인전이 개최되었다. 전시회에는 화가의 작품 7점이 전시되고, 작가가 삶과 작품에 대한 저술한 《집에서-그리거나 죽거나》 책이 함께 출품되어 낯선 땅에서 오랜 삶을 이어 온 작가의 생애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갤러리를 찾은 관람객은 송현숙 화가의 강렬한 ‘붓질’ 작품 Tempera on canvas에 매료되어 전시회장을 떠나지 못하고 계속 바라보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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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