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상에 대하여 적어봅니다. 이불상은 금동여래 입상(金銅如來立像)으로 서울 용산 국립 중앙 박물관에서 전시 중입니다. ▼ 개요 • 국보(119호)로 금동여래입상(金銅如來立像, 금을 입힌 서 있는 부처) • 539년 고구려에서 제작(연가칠년. 延嘉七年) • 전체 높이 16.2cm, 불신 높이 9.1cm, 광배 너비 8.1cm, 대좌 높이 12.1cm, 대좌 지름 5.5cm • 불꽃무늬 광배(光背) 뒷면에 새겨진 4행 47자의 글자가 있음 • 1963년 경남(慶南) 의령(宜寧)에서 도로 공사 중 발견되어 신라 옛 땅에서 고구려 불상이 나옴
▣ 불상 사진(정면, 측면, 후면) - 국립 중앙박물관 -
▣ 금동 불상 더 알아보기 1. 한반도에 불교가 들어오다. • 고구려 소수림왕(372년) 때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해진 이래 375년에 초문사(肖門寺, 혹은 省門寺)와 이불란사(伊弗蘭寺)를 지었고, 18년 뒤에는 평양에 구사(九寺)를 짓습니다. 또 장수왕은 평양으로 천도하면서 동명성왕의 무덤도 함께 옮기고 무덤 옆에는 웅장한 규모의 정릉사(定陵寺)라는 대사원을 건립하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 사찰에 어떤 양식과 도상의 불상이 안치되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습니다.
• 현재 지상에 남아 있는 우리나라의 불상은 대부분이 500년대 이후에 만들어진 것들입니다. 이는 삼국의 고대국가 형성기에 전래된 불교가 민중 속에 뿌리내리기까지 그만큼 많은 시간이 걸렸음을 뜻합니다.
2. 광배(光背)와 뒷면 글자 내용 • 배 모양의 광배와 연화 대좌(받침), 신체가 한 몸으로 주조되었고 불상 전체에 도금이 두껍게 입혀져서 생생한 금빛 광채를 자아냅니다. 불상의 전체 높이 16.2cm, 불신 높이 9.1cm, 광배 너비 8.1cm, 대좌 높이 12.1cm, 대좌 지름 5.5cm입니다.
• 이불상은 조각 기법과 주물이 다소 거칠고 광배의 불꽃무늬도 일정한 패턴을 찾기 어려울 정도로 자유분방합니다.
• 광배는 윗부분이 깨진 것을 접합한 것으로 표면 가득히 일정한 패턴을 찾기 어려운 역동적인 불꽃무늬(화염문,火焰文)가 새겨져 있습니다. 이는 눈에 보이지 않는 부처의 신성한 기운을 가시적인 불꽃무늬를 빌어 묘사한 것입니다.
• 광배 뒷면에는 주물이 끝난 뒤 끌로 새겨 넣은 4행, 47자의 해서체(楷書體)로 명문 내용은 延嘉七年歲在己未高麗國樂良 東寺主敬第子僧演師徒卌人共 造賢劫千佛流布第卄九因現義 佛比丘法穎所供養 연가7년인 기미년(539) 고려국(高麗國: 고구려)의 수도 낙랑(樂良: 평양)에 있던 동사(東寺)의 주지스님 경(敬)과 그 제자 승연(僧演)을 비롯한 사도 40인이 함께 현겁천불(賢劫千佛)을 조성하여 유포하기로 하였는데 (이 불상은) 제29불인 인현의불(因現義佛)로 비구 법영(法穎)이 공양합니다.
3. 불상 알아보기
• 부처는 배(舟) 모양의 광배를 배경으로 연꽃 대좌를 딛고 곧게 선 당당한 모습입니다.
• 가늘고 긴 신체는 두터운 가가(법의)에 덮여 몸매가 드러나지 않습니다.
• 머리는 나발(螺髮, 머리카락)이며 중앙에 팽이 모양의 육계(肉髻, 상투처럼 솟은 것으로 부처의 지혜를 상징)가 솟아 있습니다.
• 얼굴은 중국 북위(北魏) 시대 금동불이나 운강(雲崗)과 용문(龍門) 석굴에서 흔히 보이는 것처럼 길쭉합니다.
• 귀는 타원형 판을 붙여 놓았을 뿐 세부 표현은 전혀 하지 않았습니다.
• 긴 얼굴은 이목구비의 윤곽만을 표현하였지만 지그시 내려감은 눈과 엷은 미소를 머금은 작은 입에서 정적인 분위기가 가득합니다.
• 수인(手印)은 오른손을 위로, 왼손을 아래로 하여 시무외인ㆍ여원인(어떠한 두려움도 없애 주고 어떤 소원도 다 들어준다는 뜻) 을 맺었습니다.
• 법의는 중국의 포복식(袍服式, 곤룡포 형태의 의복) 복장을 그대로 이어받아 오른쪽 어깨에서 내려오는 옷자락이 살짝 반전하여 왼쪽 팔에 걸쳐 흘러내렸고, V자 모양의 두툼한 가슴의 옷깃 사이로 대각선으로 간결하게 표현한 내의 자락이 노출되어 있습니다. 복부 중앙에 표현된 계단식의 옷 주름은 오른쪽으로 약간 휘어 흘러내린 동적인 모습이며, 가사의 끝단과 그 아래로 드러난 치마의 끝단은 마치 물고기 지느러미처럼 몸 좌우로 날카롭게 뻗쳐 있습니다.
• 발목까지 드러낸 발은 부피감이 있지만 지나치게 커 다소 어색한 비례를 보입니다.
• 대좌는 연실(蓮實)과 여덟 개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었는데, 사이사이에 예리한 형태의 사잇잎(間葉)을 표현하였습니다.
4. 삼국 시대 불상들
광배에 명문이 남아있는 삼국시대 소형 금동불들로 간송미술관 소장의 국보 72호 계미명(癸未銘) 금동 삼존불(563년), 호암미술관 소장의 국보 85호 신묘명(辛卯銘) 금동 삼존불(571년), 국립중앙박물관 소장의 보물 196호 정지원명(鄭智遠銘) 금동 삼존불입상이 있다( 아래 사진 좌측에서 우측으로)
5. 고구려 불상이 신라 땅에서 출토(?)
•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다는 사실과 양식적 특징만을 고려한다면 신라 금동불로 분류해야 마땅합니다. 아마도 명문이 없었다면 "신라불상 특유의 단순성과 거친 조형성이 돋보이는 작품" 정도로 묘사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광배 뒷면에 새겨진 명문에서 보듯이 이 불상은 고구려의 평양에서 천불상의 하나로서 조성되었습니다.
• 고구려의 불상 양식이 멀리 신라의 오지까지 전파되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이자, 불상의 제작지 추정에서 출토지보다는 양식적 고찰이 중요함을 일깨우는 귀중한 예입니다.
• 고구려 불상이 신라의 옛 땅에서 출토된 것에 대한 경로는 미스터리로 372년 고구려에 들어온 불교를 신라 법흥왕 때 527년 이차돈이 순교하여 받아들였으므로, 539년고구려에서 만든 금동 불상을 불경과 함께 신라로 들어왔을 가능성이 크다고 봅니다.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국가유산청, 구글, 나무위키, 네이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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