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 사기 383강 강의자료 요약 (2025.5.08)
2025년 5월 8일 강의 장면 -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1. 唐詩 300首
1) 당시 제목: “행궁” 2) 당시 중국어 발음 行 宮 - 元 稹 寥 | 落 | 古 | 行 | 宮 | liáo | luò | gǔ | xíng | gōng | 宮 | 花 | 寂 | 寞 | 紅 | gōng | huā | jì | mò | hóng | 白 | 頭 | 宮 | 女 | 在 | bái | tóu | gōng | nǔ | zài | 閒 | 坐 | 說 | 玄 | 宗 | xián | zuò | shuō | xuán | zōng |
* 행궁(行宮) =행재소(行在所) * 논설(論說) =비평(批評) * 班固, 〈答賓戲> 공석불난(孔席不暖) 묵돌불검(墨突不黔)
"공자의 자리는 따뜻해 질 틈이 없다"는 뜻으로, 공자가 한 곳에 오래 머물지 않고 끊임없이 돌아다니며 활동했음을 나타냅니다. 이는 공자가 자신의 이상적인 정치와 도덕을 실현하기 위해 많은 나라를 돌아다녔다는 사실에서 유래합니다. 즉, 그는 자신의 사명에 충실하여 바쁘게 활동했기 때문에 앉은 자리조차 따뜻해 질 여유가 없었다는 의미입니다."묵자의 굴뚝은 그을음으로 검어 질 틈이 없다"는 뜻으로, 묵자가 자신의 사상을 전파하기 위해 매우 바쁘게 돌아다녔음을 나타냅니다. 묵자는 이웃 사랑과 비전쟁론을 설파하기 위해 여러 곳을 다니며 활동했기 때문에 그의 집 굴뚝이 검어 질 여유가 없었다는 비유입니다. 이는 그가 집에 있을 시간이 거의 없었음을 의미한다
3) 작자: 원진(元稹, 779년 ~ 831년) 당나라 중기의 저명한 시인이자 정치가로, 그의 문학적 업적과 정치적 경력은 중국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생애와 배경 원진은 허난성(河南省)에서 태어났으며, 북위 황실의 후예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의 도움으로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학문에 힘썼습니다.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여 관직에 진출하였고, 감찰어사로서 부정부패를 고발하는 등 강직한 성품을 보였습니다. 그는 헌종과 선종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주목받았으나, 환관과의 갈등으로 좌천되기도 했습니다. 이후 재상에 오르기도 했으나,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해임되었습니다. 그의 말년은 무창군절도사로 근무하며 보냈습니다.
- 문학적 업적 원진은 당나라의 시인 중에서도 특히 신악부 운동의 주도자로 알려져 있으며,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원백체'로 불리는 시풍을 발전시켰습니다. 그의 시는 주로 사회적 문제와 개인의 감정을 다루었으며, 대표작으로는 **《연창궁사(連昌宮詞)》**와 **《전가사(田家詞)》**가 있습니다. 이 시들은 전쟁으로 고통받는 농민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그의 사회적 비판 의식을 잘 보여줍니다. 원진은 또한 **소설《앵앵전(鶯鶯傳)》**을 저술하였으며, 이는 중국 고전 소설의 중요한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시는 총 719수에 달하며, 그 중 풍유시가 가장 많습니다.
- 사랑과 인간관계 원진은 당나라의 유명한 여류 시인 설도(薛濤)와의 애정 관계로도 잘 알려져 있습니다. 설도는 원진보다 10살 연하였으며, 두 사람은 서로 깊은 감정을 나누었으나, 사회적 신분 차이로 인해 결실을 맺지 못했습니다. 설도는 원진을 위해 많은 시를 지었고, 이들의 사랑 이야기는 후세에까지 전해지고 있습니다. 원진은 831년에 사망하였으며, 그의 문학적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많은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 선비족 탁발씨의 기원과 대위 건국 탁발씨는 3세기 중반부터 등장하여, 386년에 북위를 건국하게 됩니다. 이들은 원래 내몽골 지역에서 세력을 형성한 선비족의 일파로, 대(代)라는 국가를 세운 후 북위로 발전하게 됩니다. 탁발씨의 시조는 탁발역미(拓跋力微)로, 그는 부족을 통합하고 세력을 확장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 북위의 효문제와 성씨 변경 북위의 제7대 황제인 효문제(孝文帝, 원굉, 元宏)는 471년부터 499년까지 재위하며, 북위의 한화 정책을 추진했습니다. 그는 선비족의 전통적인 문화와 관습을 버리고 한족 문화에 통합하기 위해 여러 가지 개혁을 단행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탁발씨의 성을 원씨(元氏)로 변경하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는 한족과의 융합을 촉진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강화하기 위한 조치였습니다. 효문제는 또한 선비족의 복장과 언어를 금지하고, 한족의 성씨를 하사하는 등의 정책을 통해 한족 문화와의 통합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북위가 유목민 중심의 국가에서 보다 보편적인 국가 체제로 변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 - 결론 탁발씨는 북위의 건국과 함께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효문제의 한화 정책에 따라 성씨가 원씨로 변경된 것은 북위의 문화적 통합과 정체성 강화를 위한 중요한 조치였습니다. 이러한 변화는 북위가 한족 사회에 통합되는 과정에서 필수적인 요소로 작용하였고, 이후 중국 역사에서 선비족의 정체성이 점차 사라지는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333강(2023.12.07.) 강의 교안
*《論語》〈里仁〉 4-05.子曰:富與貴,是人之所欲也;不以其道得之,不處也。貧與賤,是人之所惡也; 不以其道得之,不去也。君子去仁,惡乎成名? 君子無終食之間違仁,造次必于是,顚沛必于是。
해석 : 부하고 귀하게 되는 것은 사람이 원하는 바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부과 귀를 얻지 않으면 그것을 누리지 않는다. 재물도 없고 지위도 없는 것을 싫어하는 바이다. 정당한 방법으로 빈과 천을 얻지 않으면 그것을 떠나지 않는다. 군자가 인에서 벗어나면 어떻게 명성을 이룰 것인가? 군자는 밥 한 숟가락 먹는 순간에도 인에서 벗어남이 없고, 갑작스러운 순간에도 인해야 한다. 넘어지고 깨져도 반드시 인해야 한다.
*춘추공량전 “희공 23년 주”에 보면 “無終食之間”이 없다.
* 약유도이신반빈천(若有道而身反貧贱): 이 부분은 "만약 도가 있다면 몸은 오히려 가난하고 천하게 된다"는 의미입니다. 즉, 도를 따르는 삶을 살더라도 물질적으로 가난할 수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이는 도덕적 가치와 물질적 성공이 항상 일치하지 않음을 강조합니다.
* 차시불이기도이득야(此是不以其道而得也): 이 부분은 " 이것은 그 도를 따르지 않고 얻는 것이다"라는 의미입니다. 즉, 어떤 것을 얻었더라도 그것이 정당한 방법이 아니라면 그 가치는 낮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 유도자선부귀(有道者宜富贵): "도(道)를 가진 사람은 부귀를 누려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도를 따르는 사람, 즉 도덕적으로 올바른 삶을 사는 사람은 자연스럽게 부와 권리를 누릴 자격이 있다는 것을 나타냅니다. 유교에서는 도를 따르는 것이 개인의 도덕적 성장과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 길이라고 봅니다.
* 무도자선빈천(无道者宜贫贱): "도(道)가 없는 사람은 가난하고 천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이는 도를 따르지 않는 사람은 그에 상응하는 결과로 가난하고 천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경고입니다. 도덕적 원칙을 무시하고 살아가는 사람은 결국 사회에서 낮은 위치에 머물게 된다는 것입니다.
* 즉시이지상도야(即是理之常道也): "이것이 바로 이치의 상식적인 도리이다"라는 의미로, 위의 두 가지 원칙이 자연의 이치와 사회의 도리에 부합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즉, 도를 따르는 것이 자연스럽고 합리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것입니다.
* 군자 : 화(禍) ->불처(不處) ->부귀(富貴) ->智 (智者利仁) 군자 : 천명(天命) ->불거(不去) -> 빈천(貧賤 ->仁(仁者安仁) ~安貧樂道
* 주석 1) 道-정당한 방법 또는 도 2) 處-置身于, 居, 안주하다, 누리다, 不處와 뒤의 不去 비교 3) 去-떠나다, 벗어나다, go away, leave 4) 뒤의 (貧與賤)得之-去之로 바꾸는 것이 합당하다는 주장도 있음(楊伯峻), 떠나다, 벗어나다 5) 惡乎(呼)-첫째, 의문대명사는 何, 何所, 何處, 怎麽樣 의미. 둘째, 감탄사는 嗚呼의 의미. 6) 成名-모종의 성취로 명성을 얻음, 成君子之名 7) 終食之間-첫째, 밥 한 끼 먹는 시간, 終은 完成, 時間短促, 매우 짧은 시간을 비유함. 둘째, 생전의 마지막 식사. 8) 違-떠나다 9) 造次-急遽(急遽苟且),倉猝, 匆忙、倉促、須臾... 10) 是-仁, 仁을 떠나지 않는다, 즉 仁德에 의거하여 일처리 한다. 11) 顚沛-좌절, 傾覆流離
* 不以 ~1)不爲, 不因 2)不用, 不靠 3)無論 不管
* 乏財曰貧, 無位曰賤
* 왕상 王祥(외빙구리 臥冰求鯉) "왕상(王祥)"의 "외빙구리(卧冰求鲤)" 이야기는 중국의 전통적인 효도 이야기 중 하나로, 왕상이 그의 계모를 위해 얼음 위에 누워서 잉어를 잡으려 했던 일화를 담고 있습니다. 이 이야기는 효(孝)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왕상이 보여준 극진한 효심을 강조합니다.이야기의 배경 왕상(王祥): 왕상은 동진(東晉) 시대의 인물로, 현재의 중국 산동성 리니(临沂) 출신입니다. 그는 어린 시절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가 재혼하여 계모인 주씨(朱氏)와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주씨는 왕상에게 매우 가혹하게 대했습니다.
이야기의 전개 1. 계모의 요구: 어느 겨울, 왕상의 계모가 생선, 특히 잉어를 먹고 싶어 했습니다. 하지만 그 당시 날씨는 매우 추워서 강이 얼어 있었고, 생선을 구하기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2. 왕상의 결단: 왕상은 계모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잉어를 잡기로 결심합니다. 그는 자신의 옷을 벗고 얼음 위에 누워서 얼음을 녹여 잉어를 잡으려 했습니다. 그의 이러한 행동은 극한의 고통을 감수하면서도 계모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 모습으로, 효도의 극치를 보여줍니다. 3. 기적의 발생: 왕상이 얼음 위에 누워 있던 중, 갑자기 얼음이 갈라지며 두 마리의 잉어가 뛰어올랐습니다. 왕상은 이 잉어를 잡아 계모에게 가져가게 됩니다. 4. 결과: 왕상이 잉어를 가져오자 계모는 매우 감동하였고, 이후 그녀는 왕상에게 더 이상 가혹하게 대하지 않게 되었습니다. 왕상의 효심은 이웃과 주변 사람들에게도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의미와 영향 "외빙구리" 이야기는 효(孝)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자식이 부모를 위해 어떤 고통도 감수해야 한다는 유교적 가르침을 잘 보여줍니다. 이 이야기는 후에 "이십사효(二十四孝)" 중 하나로 기록되어, 중국 전통 문화에서 효의 상징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습니다. 왕상의 이야기는 오늘날에도 효도와 가족에 대한 사랑의 중요성을 일깨우는 교훈으로 여겨집니다. *"효우격천(孝友格天)"~ 유교의 중요한 가치 중 하나로, 효도와 우애를 통해 하늘의 뜻을 따르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개념은 부모에 대한 효도와 형제 간의 우애가 하늘의 도리와 일치한다는 것을 강조합니다. *格 = 이르다 (=到)
* 참고 - 孔子는 최고 최악의 순간에도 仁만 추구함,
富貴貧賤生於天命, 부귀비천은 천명에서 나온다. 〈憲問〉「(君子)不怨天不憂人」의 심정으로 생활. 하늘을 원망하지 않고 사람을 나무라지 않는다.
〈述而〉「富而可求也, 雖執鞭之士, 吾亦爲之, 如不可求, 從吾所好」 부유한 것을 가히 구할 수 있다면 비록 마부(집편지사)라 할지라도 나 또한 하겠다. 그렇게 할 수 없다면 내가 좋아하는 바를 따르겠다.
〈述而〉「飯疏食,飮水, 曲肱而枕之, 樂亦在其中矣(安貧樂道). 不義而富且貴, 於我如浮雲」 거친 음식을 먹고 물을 마시고 팔꿈치를 구부려 베게 삼고, 낙은 그 안에 있다. (안빈낙도) 의롭지 않은 것으로 부자가 되고 귀하게 되면, 나에 대해서 뜬 구름과 같다.
〈衛靈公〉「君子謀道不謀食, 君子憂道不憂貧」 군자는 도를 구하고 음식을 구하지 않으며, 군자는 도를 걱정하고 가난을 걱정하지 않는다"는 의미입니다. 이 문장은 군자의 삶의 태도와 가치관을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 琅琊 王氏(山東 지역) 家訓 1) 현황-25史 중에서(史記~唐書)근거; 시기-西漢~唐까지(대략 1천년)
4대 명문가-王, 謝, 袁, 蕭; 최고-琅琊 王氏; 시조-西漢 大儒 王吉; 출신 인물-36 皇后, 36 駙馬; 92 宰相; 62 史書 記傳; 1 開國功臣(王導-王與馬共天下); 2賢人(五賢祠-王祥, 王覽); 600經典 大師; 竹林7賢-王戎; 2聖(孝聖-王祥(臥冰求鯉)-明, 嘉靖帝 御筆「孝友格天」; 書聖-王羲之)
2) 家訓-王祥「言行可覆, 信之至也; 推美引過, 德之至也; 揚名顯親, 孝之至也; 兄弟怡欣, 悌之至也; 臨財莫過, 讓之至也」, 즉 信, 德, 孝, 悌, 讓 5개 글자
* 중국 4대 명문가 1. 왕씨(王氏): 낙양과 낭야(琅琊)를 중심으로 한 가문. 동진(東晉) 시기 왕도(王導), 왕돈(王敦) 등 이 권력을 장악하며 최고 귀족 가문으로 부상. 2. 사씨(謝氏): 진류(陳留) 출신. 동진에서 사안(謝安), 사현(謝玄) 등이 비수대전(淝水大戰)에서 승리하며 명성을 얻음. 3. 원씨(袁氏): 여남(汝南) 원씨. 후한 말 원소(袁紹), 원술(袁術)로 유명하며 남북조 시대까지 영 향력 유지. 4. 소씨(蕭氏): 남조(南朝) 양나라와 제나라의 황족. 남량(南梁) 무제 소연(蕭衍)이 대표적 인물.
= * 한국 명문가 ~삼한갑족(三韓甲族) ~金씨가 해당
* 중국의 10대 성씨는 다음과 같습니다: 1) 왕씨: 약 1억 400만 명으로, 7.94%를 차지하며 1위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그 기원은 다양하며, 주로 주나라의 희씨에서 비롯되었습니다. 역사적 명인으로는 왕희지, 왕양명 등이 있습니다. 2) 이씨: 약 1억 900만 명으로 7.41%를 차지합니다. 시조는 요순 시기의 고도이며, 당나라 황실은 그 영향력을 더욱 확대하여 현대 대표로는 리카싱, 이소룡 등이 있다. 3) 장씨: 약 0.954억 명으로, 7.07%를 차지합니다. 전설에 따르면, 황제의 손자가 활과 화살을 휘둘러 '장'이라는 성을 하사받았으며, 역사적 명인으로는 장량, 장비 등이 있다. 4) 류씨: 약 0.71억에서 0.72억 명으로, 5.38%를 차지합니다. 하나라 유레에서 유래하여 한나라는 그 성씨로서의 지위를 확립하였으며, 현대 대표로는 유덕화, 유역비 등이 있다. 5) 천씨: 약 6,830만 명으로 4.53%를 차지합니다. 주 무왕은 순제의 후손으로 진나라에 봉해졌으며, 나라를 성으로 삼고 남쪽에 널리 분포했다. 6) 양씨: 약 0.48억 명으로 3.08%를 차지합니다. 주성왕의 동생 숙우(叔虞)의 봉지인 양나라에서 유래한 역사적 명인으로는 양귀비(楊貴妃), 양진녕(楊振寧) 등이 있다. 7) 황씨: 약 0.38억 명으로 2.29%-2.77%를 차지합니다. 기원은 백익의 후손인 황윤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특히 남쪽에서 흔히 볼 수 있습니다. 8) 조씨: 약 0.326억-0.33억 명으로, 2.12%-2.39%를 차지합니다. 주 목왕은 조부인 조성을 씨로 하사하였고, 송나라 황실은 그의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9) 우씨: 약 0.2780만~0.32억 명으로, 2.05%~2.34%를 차지합니다. 주 태왕의 아들 태백이 세운 오나라에서 유래했다. 10) 주씨: 약 0.2680만~0.35억 명으로 2.05%~2.55%를 차지합니다. 주로 주문왕 희창의 후손에서 비롯되었다.
상위 10대 성씨 총인구는 전국 호적 총인구의 약 30.8%-42.3%를 차지하며, 지역적 분포와 역사적 기원은 각기 다른 특징을 가지고 있다. 중국의 성씨는 약 7000개의 성씨가 존재하며, 80%가 만 명 이하의 성씨입니다.
*《史記》〈周本紀〉 注釋 1. 歸 - 甲骨文, 원래는 여자의 출가 《說文解字》「女嫁也。从止婦省,𠂤聲」
1) 여성 出嫁, 《詩經》〈桃夭〉「之子于歸,宜其室家」 이 아가씨 시집가서 남편 집에서 화합하고 순종한다.
* 지자(之子) ~ 이것 這, 姑嫏, 小姐 * 宜 ~ 和順하고 順從한다.
2) 원래 자리로 돌아오다, 《尙書》〈舜典〉「十有一月朔巡守……歸,格于藝祖,用特」 십일월 초하루에 왕이 제후국에 순수하고 돌아왔다, 자기 조상님(藝祖)의 사당에 이르러 3살짜리 황소(特)를 바쳤다.
* 희생(犧牲) 희(犧)는 털 색이 순수한 것을 의미한다. 생(牲)은 한마리 통째로 드린다.
* 대뢰(大牢)와 소뢰(小牢)의 차이는 주로 제물의 종류와 그 사용 목적에 있습니다.
대뢰(大牢): • 대뢰는 일반적으로 큰 동물, 즉 소와 같은 제물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대뢰에서 드리는 제물은 주로 중요한 제사에서 사용되며, 이는 하나님께 완전히 태워 드리는 번제(燔祭)와 같은 제사입니다. 대뢰의 제물은 흠 없는 수컷으로 선택되어야 하며, 제물의 대부분이 불에 태워져 하나님께 향기로운 냄새로 드려집니다.
소뢰(小牢): • 소뢰는 작은 동물, 주로 산비둘기나 집비둘기와 같은 제물을 드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 소뢰에서 드리는 제물은 대개 가난한 사람들이 드릴 수 있는 제물로, 경제적 여건에 따라 선택됩니다. 소뢰의 경우, 제물의 처리 과정이 대뢰보다 간단하며, 제사장이 제물을 잡고 처리하는 방식이 다소 다릅니다. 예를 들어, 비둘기의 경우 제사장이 머리를 비틀어 끊고 제단 위에서 불사르는 방식으로 진행됩니다.
결론: 대뢰와 소뢰의 주요 차이는 제물의 크기와 종류, 그리고 제사를 드리는 방식에 있습니다. 대뢰는 더 큰 동물로서 보다 복잡한 제사 절차를 요구하는 반면, 소뢰는 작은 동물로서 상대적으로 간단한 절차로 드려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제사의 목적과 드리는 사람의 경제적 상황에 따라 달라집니다.
* 순수(巡狩), 술직(述職), 조공(朝貢), 조헌(朝覲), 조근(朝覲), 조견(照見)
1. 순수(巡狩) 순수는 고대 중국에서 천자(황제)가 제후의 영토를 순찰하며 그 지역의 정치와 민심을 살피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는 제후들이 자신의 지역을 어떻게 잘 다스리고 있는지를 확인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천자가 제후를 방문하는 것을 뜻합니다. 순수는 중앙과 지방 간의 원활한 소통을 위한 중요한 제도였습니다. 2. 술직(述職) 술직은 제후가 천자에게 자신의 직무를 보고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제후는 자신의 지역에서의 상황을 천자에게 보고하며, 이를 통해 중앙 정부와의 관계를 강화하고 필요한 지원을 요청할 수 있습니다. 술직은 제후의 의무 중 하나로, 정치적 책임을 다하는 중요한 절차입니다. 3. 조공(朝貢) 조공은 제후국이 천자에게 예물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는 정치적 의식으로, 제후가 천자에게 충성을 표시하고, 동시에 경제적 지원을 받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조공은 단순한 물품의 전달을 넘어, 정치적 관계를 강화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4.조헌(朝獻) 고대 중국 및 조선 시대의 정치적 의식 중 하나로, 제후나 지방 관리가 천자(황제)에게 특산품을 바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의식은 제후가 자신의 충성을 표시하고, 중앙 정부와의 관계를 강화하기 위한 중요한 수단으로 여겨졌습니다. 조헌은 일반적으로 국가의 중요한 행사나 특정한 시기에 이루어지며, 제후는 자신의 지역에서 생산된 물품이나 특별한 공물을 준비하여 천자에게 바칩니다. 이러한 행위는 단순한 물질적 교환을 넘어, 정치적 충성과 의무를 상징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5. 조근(朝謹) 고대 중국 및 조선 시대의 정치적 의식 중 하나로, 제후나 지방 관리가 천자(황제)에게 알현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조(朝)'가 봄에 제후가 천자를 찾는 것을, '근(謹)'이 가을의 행사와 관련된 것을 나타내며, 두 개념이 결합된 합성어입니다 6. 조견(朝見) 고대 중국에서 제후나 신하가 천자(황제)를 알현하는 행위를 의미합니다. 이 용어는 '조(朝)'가 아침이나 정기적인 의식을 나타내고, '견(見)'이 만남이나 보기를 의미하여, 천자와의 공식적인 만남을 강조합니다. 조견은 정치적 의사소통의 중요한 수단으로, 제후가 자신의 직무를 보고하고, 국가의 정책에 대해 논의하는 기회를 제공합니다. 이러한 알현은 제후가 천자에게 충성을 다짐하고, 자신의 지역 상황을 전달하는 중요한 의식으로 자리 잡았습니다
3) 돌려주다, 《春秋》定公十年「齊人來歸鄆、讙、龜陰田」 제나라 사람들이 운이라는 지역과 환이라는 지역과 귀의 북쪽 밭을 돌려주었다.
4) 한 곳에 모이다, 《周易》〈序卦傳〉「與人同者,物必歸焉」 다른 사람과 더불어 공동으로 일하면 거기서 생산된 산물은 노동 같이한 사람에게 반드시 모아 주어야 한다.
5) 귀속하다, 《荀子》〈王制〉「雖王公士大夫之子孫也,不能屬于禮義,則歸之庶人。雖庶人之子孫也,積文學,正身行,能屬于禮義,則歸之卿相士大夫」 비록 왕이나 공이나 사대부의 자손이라도 예의를 따르지(屬) 않으면 즉 서인으로 귀속한다. 비록 서인의 자손이라도 학문이 쌓이고 몸 가짐을 바로 하면 예의를 따르는 즉 경 상 사대부에 속한다.
6) 칭찬(찬동), 《論語》〈顏淵〉「一日克己復禮,天下歸仁焉」 하루라도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고 예로 돌아가면 온 천하 사람들이 당신을 인자라고 칭찬한다.
7) 자수하다, 《史記》〈張丞相列傳〉「錯恐,夜入宮上謁,自歸景帝」 조착이 두려워서 밤에 들어가서 임금을 뵙기를 청하고, 스스로 경제에게 자수했다.
* 상알(上謁) ~ 뵙기를 청하다.
* 장승상 = 장창(蒼)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로, 주로 농민 운동과 관련하여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주로 서진(西晋) 시대에 활동했으며, 농민들의 권리를 주장하고 사회적 불평등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었습니다. 장창은 특히 혹형(酷刑)의 폐지를 주장한 인물로, 이는 당시 사회에서의 잔혹한 처벌과 불공정한 법 집행에 대한 반발로 해석됩니다. 그의 활동은 농민들의 저항과 사회적 변화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후에 농민 운동의 중요한 사례로 기록되었습니다. 장창은 농민들의 지지를 얻어 대규모 반란을 일으켰고, 이는 당시 정부에 대한 도전으로 간주되었습니다. 그의 노력은 농민들의 권리와 인권을 주장하는 데 기여했으며, 역사적으로 중요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8) 근본(宗旨), 《史記》〈李斯列傳〉「斯知六藝之歸,不務明政,以補主上之缺, 持爵禄之重, 阿順苟合, 嚴威酷刑, 聽高邪說, 廢嫡立庶。諸侯已畔, 斯乃欲諫諍, 不亦末乎! 人皆以斯極忠而被五刑死, 察其本, 乃與俗議之異」 이사는 육예의 근본을 알았다, 법도가 있는 정치(明政)에 힘쓰지 않고, 황제의 결점을 보완하는데 힘쓰지 않았다. 높은 작위와 복록을 가지고 아부하고 부하뇌동하고, 엄한 혹형으로 다스리고, 환관 조고의 사악한 말을 듣고 적자 부소(扶苏)를 폐하고 서자(庶子)인 18번째 호해(胡亥)를 세우고, 여러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킨 후, 그는 이제야 간언하려 하니, 이는 너무 늦지 않았느냐! 사람들은 그가 극도로 충성스럽다고 여기지만, 결국 그는 다섯 가지 형벌을 받고 죽게 되었고, 그 본질을 살펴보면, 그는 세속의 의견과는 다르다."
*六禮 1) 공자 시대
2) 진나라 이후 詩經, 書經, 易經, 樂經, 禮經, 春秋
3) 한나라 이후 ~5經 詩經, 書經, 易經, 禮經, 春秋(붕서갱유로 樂經소실)
* 禮經 ~ 國禮, 儀禮, 禮記로 분류 후 13경에 하나씩 독립하게 되었다
(2025.5. 8 강의 요약자: 주정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