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나라에 맞서 강력한 의견을 미국 정부 제출...해임 후 한국행도 막아 조지 클래이튼 포크 공사의 조선 사랑과 이별
청나라 주재 미국 프데드릭 퍼디넌드 로우(1826~1894) 공사는 1871년 5월 30일 조선 관리에게 6월 1일 강화해협을 탐측한다고 통보하고 조선 사행 임무를 밝혔다. 이후 미 수병은 손돌목돈대 포격 사건을 벌이고 협상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곧 협상은 결렬되고 6월 10일 상륙작전을 개시해 강화도 초지진, 덕진진, 광성보에서 교전했다.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은 광성보를 본진으로 수자기를 걸고 싸우다 미 해병 ‘제임스 도허터’의 총검에 찔려 전사하였다. 조미전쟁(朝美戰爭) 선봉에 섰던 미국 도허터 해병도 광성보 전투에서 죽었다.
▲ 신미양요(사진:국가유산청)
조미전쟁에서 조선군은 어재연(魚在淵, 1823~1871) 장군을 비롯하여 353명이 전사하고 24명이 다쳤다. 미 해군은 3명의 전사와 10명의 부상자가 발생했다. 미군 해병대 병사들은 조선 수군 장군기를 비롯하여 각종 군기 50개, 대포, 화승총, 장수 칼 등 481문을 전리품으로 빼앗고 약탈했다. 침략군은 조선군 장군기를 콜로라도호에 매달고 승리를 자축했다.
▲ 조선 수군 어재연 장군기(사진:국가유산청)
어재연 장군기가 2007년 국내에 귀환하게 된 것은 포항 한동대의 토머스 듀버네이(Thomas Duvemay) 교수가 1995년 신미양요를 연구하면서 미군이 강화도에서 어재연 장군의 깃발을 빼앗고 깃발을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보관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조선 수군 장수기 반환’을 위해 인터넷에 영어판 ‘홈페이지 신미양요’를 만들어 홍보하고. 빌 클린턴 대통령과 후임인 조지 부시 대통령을 비롯한 지미 카터 대통령에게 수차례 장군기 반환을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고 1999년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방문했다.
2007년 국가유산청이 미국 해사박물관에 공식 서신을 발송하였는데, 미국 해군사관학교에서 협상에 응해 오랜 시간에 걸쳐 ‘장수기 반환’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회의를 통해 확인된 수자기는 가로 4.13m, 세로 4.3m의 크기로 삼베로 제작되었다.
미국 정부는 1814년 ‘미 해군 전리품 깃발 수집’과 관련한 의회법을 제정하고, 1849년 제임스 포크 대통령은 미 해군 장관에게 “전쟁 중 적의 군기, 색상기 등을 몰수할 것을 명령하고 보고나, 보존, 전시를 위해 미국 해군사관학교를 관리기관으로 정한다.”라는 행정명령을 내려 현재 미 해사박물관에는 다른 나라의 깃발 250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
조선 수군 어재연 장군기는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소장되었다가 2007년 10월 18일 136년 만에 임대 방식으로 국내에 돌아와 매 2년씩 계약을 연장하며 강화전쟁박물관에서 전시하고 2024년 3월 16일에 미국 해군사관학교에 반환했다.
▲ 1956년 미국 해군사관학교 거북선 모형(사진:미해군박물관)
팰리체 베아토가 조선에서 촬영한 사진은 미국 뉴욕의 정치 잡지인 하퍼스 위클리(Harpers Weekly)에 1871년 9월 9일 자로 보도되었다. 이것이 조선 최초의 전쟁 사진이다. 사진가는 47점의 조선 사진을 모아 『신미양요 사진첩』을 만들어 판매했다. 현재 원본 유리판과 프린트는 미 해군박물관과 케티박물관 등에 분산되어 소장되고 있다, 팰리체 베아토의 사진 작품은 서구 제국주의자의 선정적인 눈으로 침략과 지배를 일관되게 보여주는 특징이 있다. 2021년 5월 14일 용산 전쟁기념관에서는 어재연 장군 순국 150주년을 기념하여 「어재연 장군과 신미양요 재조명」 학술회의가 개최되었다.
포크는 조선에서 3년간 주재하는 동안 조선의 문화에도 깊은 관심을 표하고 물품을 수집하고 사진과 《조선 여행기》를 남겼다. 1884년 11월 1일 포크 공사는 가마를 타고 44일 동안 공주, 전주, 나주, 주산, 충주를 거치는 1,448km의 먼 거리를 여행했다. 그는 1897년에 조선왕조의 이순신 장군과 거북선을 외국에 최초로 알렸다. 포크는 대동여지도를 구입하여 미국에 보내 미국 위싱턴 신 주립대학교 도서관에 보관되어 있다. 최근에 발표한 연구 논문에 의하면 “미국정보부(CIA)는 포크를 ‘인적 네트워크를 통한 정보 수집의 선구자’로 높게 평가한다.”라는 발표가 있다.
▲ 윈필드 슐리(사진:위키피디아)
당시 미 해군 소령으로 강화도 광성보 전투에 참여한 윈필드 슐리(Winfield Scott Schley, 1839~1911)는 회고록에서 “조선군은 그들의 진지를 사수하기 위해 용맹스럽게 싸우다 모두 전사했다. 아마도 우리는 가족과 국가를 위해 그토록 용감히 싸우다 죽은 국민을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라고 회고했다. 그는 훗날 미국 해군 소장으로 스페인-미국 전쟁 당시 산티아고 데 쿠바 전투의 영웅이었다.
미국 전쟁사에는 조미전쟁을 ‘48시간 전쟁’으로 기록했다. 토머스 듀버네이 교수는 1871년에 벌어진 조미전쟁(朝美戰爭)은 미국 외교가 실패한 ‘미국인 난동이다’라고 평가한다.
▲ 1871년 6월 콜로라도호 전쟁평의회 모임(사진:미 해군 역사센터)
포크 영사는 조선의 정치에 깊숙이 간여하는 청나라 위안스카이와 강력하게 맞서며 정책을 논의했다. 그는 셔면호 사건이 벌어진 지 20년이 지났지만, 당시 조선의 암울한 상황을 정확하게 인식하며 주변의 보이지 않는 암살 음모를 걱정했다.
포크는 갑신정변이 일어나기 전인 1884년 11월 10일에 전주 전라감영을 방문하여 전라감사 해사(海士) 김성근(金聲根, 1835~1919)과 대화하고 환영연을 받아 상세하게 상차림을 기록했다. 포크는 당대 권력자인 민영익의 지원을 받아 여행을 떠났는데, 전주에서 사흘간 머물며 전라감사에게 세계정세와 청나라와 프랑스 간의 전쟁을 설명했다.
▲ 전라감영 김성근 전라감사(사진:위스콘신대학교)
당시 전라감사 김성근은 27세에 과거 급제한 문신으로 서예가 뛰어난 해남 대흥사, 송광사, 팔공산 동화사 등 여러 사찰에 현판을 썼다. 그는 과거 전생에 해봉(海奉)이란 승려였는데, 선비로 다시 태어났다고 하여 호를 해사(海士)로 고치고 많은 절을 찾아 공부하고 삼보(三寶)를 받들어 보호했다.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조정은 전라감사를 5년이나 한 김성근을 다시 등용해 민심을 수습했다. 그는 서재필의 외숙부로 1910년 일제가 조선의 국권을 침탈할 때 자작이 수여되어 친일인명사전에 수록되었다.
포크 영사는 조선이 어려움에 처했을 때 청나라와 강력하게 맞서며 미국 정부에 의견을 제출했다. 미국 정부는 본국의 의도와 다른 의견을 가진 포크 영사를 청의 압력으로 그대로 둘 수 없어 해임 통보를 한다. 포크 대리공사는 1886년 6월 29일에 조선을 떠나 일본 나가사키 항에 도착한 이후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려고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으나 미 국무부가 허락하지 않았다.
▲ 조지 클래이튼 포크 부부(사진:Naval Historical Center)
포크는 일본 교토에서 무역회사에 나가고 도시샤대학 경영학과 대학교수가 되어 학생들에게 수학을 가르쳤다. 포크는 조선에 머물면서 서신을 오래 주고 받았던 무라세 카네(Murase Kane)와 1887년 9월 7일 결혼했다. 포크 부부는 1893년 여름에 남편의 건강을 위해 가나가와현 하코네(箱根町)에 갔다. 포크는 혼자 인근 산에 올랐다가 실종되었다. 다음날 시신이 발견되어 의사는 사망 원인은 심부전(心不全)으로 진단했다. 포크는 1893년 8월 6일 37세의 젊은 나이에 생을 마쳤다. 고인의 시신은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공동묘지에 안장되었다. 포크의 부친은 아들이 조선에서 3년간 수집한 자료를 미국 지리학회에 매각하고 밀워키대학 등에 기증하였다.
▲ 조지 클래이튼 포크의 묘(사진:미 해군 역사센터)
새무엘 홀리(Samuel Hawley)는 선교사의 아들로 한국에서 태어나 서울에서 성장한 후 20년간 한국과 일본에서 영어를 가르쳤다. 그는 캐나다 온타리오주 킹스턴 퀸즈대학교에서 역사학 학사 및 석사학위를 받고 연세대 영문학과 교수로 재직하다 2007년 퇴직하여 캐나다에 건너갔다. 그는 조지 클래이튼 포크 미국 영사의 일기를 정리해서 2007년 《화륜선 타고 온 포크, 대동여지도를 들고 조선을 기록하다》 책을 발간했다.
홀리 작가는 16세기 일본의 조선 침략과 중국 정복 야욕을 다룬 700페이지에 달하는 《임진왜란》을 2005년 9월 발간했다. 그는 스포츠 논픽션을 주로 다루다가 소설작가와 영화제작자로 활동하며 2013년에 소설 《나쁜 코끼리 파 스트림》를 발표했다. 최근에 완성한 소설 《다이콘, DAIKON》은 2025년 7월에 Simon & Schuster's Avid Reader Press에서 출간될 예정이다. 소설가 새무엘 홀리는 현재 튀르키예 이스탄불에서 아내와 살며, 뉴욕에서 존 호킨스 & 어소시에이츠의 문학 에이전트 워렌 프레이저가 대표로 활동하고 있다. 우석대 역사교육과 조법종 교수와 서양사를 전공한 조현미 교수는 사무엘 홀리 교수가 저술한 책을 2021년 2월에 번역해 출간했다.
일본 교토시 와카오지 산(若王子, 183m) 산록 남선사(南禪寺) 묘지 근처에는 도시샤대학 공동묘지가 있다. 이 공동묘지는 1890년에 도시샤대학 창립자 니시마 조(新島襄)를 장사한 이래 많은 교직원이 매장되어 있다. 19세기말 조선 정부를 위해 헌신하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미국 영사 조지 클래이튼 포크의 묘비에 국화꽃 한 송이를 올리고 싶은 마음에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공동묘지에서 정확한 위치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25번 구역에 있는 250명의 묘지의 하나인 것으로만 추정했다. 도시샤대학 공동묘지를 찾아가는 길은 남선사 삼문 옆 도로를 따라가면 히가시야고등학교와 에이칸도초(永觀堂町), 선림사 아미타 법당을 지나 산길로 쭉 따라 올라가면 묘역에 도착한다. 도시샤대학 묘역은 입구가 철문으로 막혀 있어 출입은 학교의 허락을 받아야 가능하다.
▲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공동묘지 약도(사진:同志社大學)
일본 교토의 유서 깊은 명문 대학 도시샤대학 캠퍼스에는 일제강점기에 이 대학을 다녔던 윤동주(尹東柱, 1917~1945.2.16.) 시인의 추모비가 있다. 민족시인 윤동주는 1942년 10월 도시샤대학 문학부 영어영문학과 전공 학생으로 편입하였다. 그는 시를 통해 조선 민족의 아픔을 어루만졌는데, 한글로 시를 써 독립운동을 한다는 이유로 1943년 7월 14일에 일본 시모가모 경찰서에 사상범으로 체포되어 재판 결과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형을 선고받고 후쿠오카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1945년 2월 16일 27세 나이에 옥사(獄死)했다. 윤동주 시비는 영면 50주년 기념일인 1995년에 同志社校友會에서 도시샤대학 이마데가와 교정에 건립하여 지금도 많은 방문객이 찾아가 방명록을 적는다.
▲ 일본 교토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윤동주 추모회(사진:우리문화신문)
교토에는 윤동주를 기억하는 시인 야나기하라 야스코 씨 등 많은 사람이 시인을 추모하고 있다. 윤동주 하숙집터가 있는 교토조형예술대학에도 시비가 건립되어 매년 도시샤대학에서 추도식을 거행하고 있다. 윤동주 시비 옆에는 충북 옥천군이 한·일 문화 교류를 위해 2005년 12월에 세운 정지용(鄭芝溶, 1902~1950) 시인의 시비 〈압천(鴨川), 가모가와〉이 있다. 교토 가모가와 강변은 비가 올 때는 물이 많이 흐르지만, 그렇지 않은 날에는 내가 말라 있다.
〈압천(鴨川)〉 시인 정지용
압천(鴨川) 십리(十里)ㅅ벌에 해는 저믈어…… 저믈어…… 날이 날마다 님 보내기 목이 자졌다…… 여울 물소리…… 찬 모래알 쥐여 짜는 찬 사람의 마음, 쥐여 짜라. 바시여라. 시언치도 않어라. 역구풀 욱어진 보금자리 뜸북이 홀어멈 울음 울고, 제비 한쌍 떠ㅅ다, 비마지 춤을 추어. 수박 냄새 품어오는 저녁 물바람. 오랑쥬 껍질 씹는 젊은 나그네의 시름. 압천(鴨川) 십리(十里)ㅅ벌에 해가 저믈어…… 저믈어……
〈압천(鴨川)〉 정지용(사진:우리문화신문)
정지용이 1924년에 발표한 압천(鴨川) 시비에는 알기 쉽게 한글과 일본어로 시가 새겨져 있어 많은 이들이 도시샤대학(同志社大學) 교정을 방문해 시를 감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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