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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재·역사·전고재완의 지식창고 2025.05.31. 15:46 (2025.05.31. 15:27)

익산 미륵사지 석탑(石塔)의 사리장엄구

 
석탑 속의 유물에 대하여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난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이어 오늘은 익산 미륵사지 서탑(석탑)의 해체 ·복원 과정에서 나온 유물에 대하여 자료를 통해 알아봅니다.
석탑 속의 유물에 대하여 알아보고 있습니다. 지난번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이 나온 경주 불국사 석가탑에 이어 오늘은 익산 미륵사지 서탑(석탑)의 해체 ·복원 과정에서 나온 유물에 대하여 자료를 통해 알아봅니다.
 
백제 장인들이 만든 금속공예 유산 가운데 "금동 대향로"와 더불어 가장 뛰어난 조형미를 지닌 걸작으로 "익산 미륵사 터 석탑 출토 사리장엄구"를 꼽는다.
 
 
☞ 사리장엄구(舍利莊嚴具)는 부처나 덕이 높은 고승의 주검을 화장한 뒤 나온 사리 조각들을 무덤 격인 불탑에 안치할 때 쓰는 용기와 함께 바치는 예물 등을 가리키는 말로, "사리 갖춤"이라고도 한다.
 
 
▣ 미륵사 개요
 
 
• 미륵사는 전형적인 1탑 1금당(불전)의 백제식 가람 배치와 달리 3탑 3금당(3개 탑과 3개 금당)의 독특한 배치 형식이다.
 
 
• 우리나라 석탑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창건 시기가 명확하게 밝혀진 석탑 중 가장 오래된 탑(약 1400 년)이다.
• 해체, 복원한 미륵사지 석탑은 3 개의 탑 중 서쪽에 위치한 탑으로 남아있던 6층까지의 높이는 약 14.2m이고 상·하 이층으로 구성된 기단의 전체 폭은 약 12.5m이다.
• 1층은 각 면이 3칸으로 구성되고 가운데 칸에는 문을 내달아 계단을 통해 사방으로 통하게 하였다.
• 석탑 내부의 금제 사리 봉영기(사리를 봉안 후 금판 기록물)에 따르면 미륵사는 639년(백제 무왕 40)에 좌평(佐平, 현재 장관급)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사찰을 창건하고, 사리를 봉안하여 무왕(재위 600~641)의 장수, 치세와 왕후의 건강과 국가의 안녕을 기원하였다.
 
 
▼ 1915년 일본인들이 무너진 부분에 콘크리트를 덧씌웠다.
 
 
• 원래는 9층으로 추정되고 있으나 부서진 상태로 6층 일부까지만 남아있었다.
• 서탑을 복원·해체 중 사리공(가로 25cm, 세로 25cm, 깊이 26.5cm)에서 사리 봉안 당시의 모습 그대로 완전한 형태로 발견되었다.
 
 
▣ 미륵사지 석탑 내부 유물
 
"익산 미륵사지 서탑 출토 사리장엄구"는 2009년 익산 미륵사지 서탑 심주석(心柱石, 탑 건축에서 탑의 중심을 이루는 기둥으로, 중앙에 위치한 주춧돌 위에 세워짐)의 사리공 (舍利孔, 보관 구멍) 및 기단부에서 출토된 유물로서, 639년을 기록한 금제 사리 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와 함께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금제 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를 비롯해 각종 구슬 및 공양품을 담은 청동합 6점으로 구성되었다.
 
▼ 아래는 해체 전의 서탑(좌측)과 보수 후 서탑
 
위태로웠던 미륵사지 서탑(西塔)을 되살리기 위한 해체·보수·복원 공사가 2001년 시작돼 2019년 마무리됐다. 19년에 걸친 대역사(大役事)였다. 해체·복원된 미륵사지 석탑은 그 외관이 참 특이하다. 뽀얀 돌과 빛바랜 누런 돌이 섞여 있고 탑의 모양이 엉거주춤하다. 탑을 구성하는 4개 면의 경사가 불규칙하다. 어딘가는 빠져 있고 어딘가는 끊겨 있다. 서탑은 불확실한 모습의 복원(동탑)보다 있는 그대로 복원에 중점을 두었기 때문이란다.
 
 
 
● 금동제 사리외호(金銅製舍利外壺) 및 금제 사리내호(金製舍利內壺)
• 일반적으로 사리 그릇의 외형은 원통형 또는 사각형으로 뚜껑으로 분리하지만, 익산 미륵사 석탑 사리 그릇은 항아리 모양으로 중간 분리형이다.
 
 
• 사리 외호(구리+주석으로 몸체에 금 도금) 몸체가 뚜껑· 상·하단으로 구성된 것은 외호 상단 몸체의 병형 주둥이 폭이 좁아 금제 사리 내호(단조, 鍛造)를 넣을 수 없기 때문에 내호(상·하단)를 넣기 위해 몸체의 중간을 분리하여 독특하게 제작한 것이라 보인다.
• 외호안에는 사리 내호가 누워진 채로 다량의 청색, 녹색 등의 유리구슬, 금제 구슬, 자수정 등이 묻혀있었다.
• 금으로 제작된 사리 내호안에는 심하게 파손된 유리병, 사리 13과, 유리구슬 등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따라서 사리는 외호, 내호, 유리병의 3중 구조였다.
• 모두 몸체의 중앙 부분을 돌려 여는 구조로서, 이러한 구조는 동아시아 사리 그릇(舍利器) 중에서 유사한 사례를 찾기 어려운 독창적인 구조로서 주목된다. 전체적으로 선의 흐름이 유려하고 볼륨감과 문양의 생동감이 뛰어나 그릇 모양의 안정성과 함께 세련된 멋이 한껏 드러나 있다.
 
 
 
● 유리 사리병과 사리
 
 
 
●금제 사리 봉영기(金製舍利奉迎記)
 
• 가로 15.3cm, 세로 10.3cm, 두께 1.3mm의 금판에 글자를 새기다.
• 얇은 금판 앞·뒷면에 각각 11줄 총 193자(앞면 99자, 후면 94자)가 음각되었다.
• 내용은 좌평(佐平) 사택적덕(沙乇積德)의 딸인 백제 왕후가 재물을 희사해 사찰을 창건하고 기해년(己亥年, 639)에 사리를 봉안해 왕실의 안녕을 기원한다는 내용이다.
• 그동안 ‘삼국유사(三國遺事)’의 기록 등에 따라 서동왕자였던 백제 무왕과 신라 진평왕의 셋째 딸 선화공주가 사랑을 성취한 뒤 함께 익산에 미륵사를 창건했다고 믿어왔기에 국경과 신분을 초월한 사랑이었기에 더욱 감동적이었다. 그러나 미륵사를 창건한 백제 왕후는 선화공주가 아닌 좌평 사택적덕의 딸이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 금판(金板)
 
• 금판은 구리와 주석 성분의 합금으로 크기가 각기 다르다.
• 18개의 금판이 발견되었는데 그 가운데 3개의 금판에 글자가 새겨져 있습니다. 글자의 내용은 백제의 행정 구역과 관등, 시주자의 이름 등으로 백제의 행정제도나 관등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고 있다.
• 한 냥(一兩)이라는 글씨가 쓰인 금판의 무게는 평균 13.2g이다. 이 금판의 용도는 고가의 물품을 구매하기 위한 칭량(稱量) 화폐로 보인다.
 
 
●청동합(靑銅盒)
 
• 사리공에서 청동 그릇 6점이 발견되었는데 6점 모두 다른 형태와 기법으로 만든 것으로 보아 처음부터 만든 사람이 달랐을 것으로 생각한다.
• 사리 구멍 벽면 주위에 둔 것으로 보아 가운데에 사리호를 놓고 그 주변을 에워싸는 모습으로 계획했던 것으로 생각한다.
• 6점의 청동 그릇 중 하나의 뚜껑에 ‘上卩達率目近(상부 달솔 목근)’이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공양자가 상부(上部)의 달솔(達率) 관등(제2품)에 있었던 목근(目近)이라는 사람임을 알려주고 있다.
 
 
 
● 청동합 내부 유물들
 
 
 
 
 
 
 
출처: 국가유산 포털, 한겨레, 민족문화 대백과, 구글, 네이버, 국립문화재연구소 전북, 익산 박물관, 미륵사지 석탑 해체 조사 보고서, 경향신문, 향토문화사전, 국립중앙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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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