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개국 항일투쟁가 2천명 수감...안중근 유해 발굴 노력했으나 못찾아 다렌 뤼순 감옥 견학기
《열하일기》 답사 대원들이 중국 다렌국제공항에 내려 연암 박지원이 걸었던 사행길이 시작되는 곳인 단둥시로 가기 전에 제일 먼저 방문한 곳이 뤼순 감옥이다. 이 감옥은 일본 제국이 직접 운영하다 1932년부터는 일본 제국이 괴뢰국으로 세운 만주국에서 운영했다.
만주국은 1932년에 건국되었다가 1945년 8월에 일본 제국이 패망하여 역사에서 완전히 사라졌다. 뤼순 감옥은 약 2,000명이나 수감이 가능한 큰 감옥으로 11개국의 항일투쟁가가 갇힌 감옥이다.
조선인으로는 역사학자이며 항일 투쟁에 선봉을 섰던 단재 신채호(申采浩, 1880~1936) 선생.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 안중근(安重根, 1879~1910, 안응칠), 신흥무관학교를 설립해 독립군을 양성한 우당 이회영(李會英, 1867~1932), 김구 선생의 지시로 1932년 5월 다렌 기차역에서 일동 관동군 사령관과 남만주철도 총재를 처단하려다 거사 이틀 전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된 유상근(柳相根, 1910~1945)과 최흥식(최흥식(崔興植, 1909~1932), 고려혁명위원회 조직을 만들고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박희광(朴喜光, 1901~1970), 군자금을 만주로 밀송했던 백여범(白汝範, 1903~1981), 신민부 빈강(濱江)지구 유격대장 채세윤(蔡世允, 1902~1973) 등 많은 조선인 항일 독립투사들이 투옥되어 복역하다 옥에서 병사하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 우당 이회영(李會英, 1867~1932) 선생 생전 모습(사진:궁인창)
우당 이회영 선생은 이조판서를 지낸 이유승(李裕承, 1835~1906)의 넷째 아들로 한성부에서 태어났다. 그는 1896년 항일 의병의 자금조달을 위하여 개성 풍덕 지방에서 삼포농장을 경영했다, 1905년 을사늑약이 체결되고 국권 침탈이 가시화되자 해외에서 독립투쟁을 할 구상을 하였다. 1906년 아버지가 사망하자 집안의 노비들을 모두 면천하고 1906년 10월 만주에 서전서숙을 세우고 무력항쟁기지를 설립하려고 재산을 처분할 생각을 하였다.
1910년 8월 29일에 일제는 일본 황실령 제14호 〈조선귀족령〉을 공포하여 76명에게 작위를 주고 1924년에 명단을 추가하여 총 158명이 작위를 받았다. 조선총독부는 양반들에게 작위를 내리고 막대한 은사금을 주면서 독립운동을 하지 말라고 회유했다.
1910년 경술국치를 당해 조선이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자 우당 이회영은 여섯 형제(健榮, 石榮, 喆榮, 會榮, 始榮, 頀榮)와 의논하여 항일 독립투쟁에 사용할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명동성당 주변의 땅과 가곡리 소유 전답 등 모든 재산을 처분하고 12월 30일에 60명에 이르는 대가족과 일꾼 40여 명을 이끌고 만주로 망명했다. 6형제는 만주와 상하이에서 항일 독립투쟁을 하였다.
이회영은 1932년 11월에 항일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하여 상하이에서 다렌으로 이동을 결심했다. 이때 일본 밀정의 첩보와 사상이 달랐던 조카 이규서의 밀고로 다렌 항구에서 체포되어 일본 영사관 감옥에 수감되었다. 백정기(白貞基, 1896~1934)는 1932년 10월 밀정 이규서를 암살했다. 백정기는 1924년 일본 하야카와 수력발전소 공사장 파괴와 일본 천황을 암살하다 실패하고 중국으로 건너갔다. 당시 동아일보 기사에는 이회영이 삼노끈으로 쇠창살에 목을 매서 자결했다고 보도가 되었다.
다른 기록이 있는데 이회영은 체포된 이후 뤼순 감옥 36호 방에 갇혀 가혹한 고문으로 11월 16일 순국하였다. 고인의 유해를 본 목격자의 진술과 긴급 화장 행위로 볼 때 고문으로 인한 사망이 원인이다. 중국 항일운동가인 김소묵의 보고서에 따르면 1932년 11월 17일 일제가 뤼순 감옥에서 재판도 거치지 않고 교수형에 처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 단재 신채호 선생이 이관구에게 보낸 편지(사진;대전시)
단재 신채호 선생은 1928년 5월 8일 타이완 기륭우체국에서 체포되어 7개월간 구속되어 있다가 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고 뤼순 감옥에 수감되었다가 1936년 2월 21일 35호 방에서 뇌졸중, 동상, 고문 후유증, 영양실조 등 합병증으로 향년 57세로 순국하셨다.
안중근 대한의군(大韓義軍) 참모중장은 대한제국의 국권을 강탈하고, 명성황후를 살해하고, 을사늑약 체결 시 관여하고, 무고한 조선인 살해에 관여하고, 만주 침략을 노린 일본 추밀원 의장 이토 히로부미를 5가지 죄를 들어 1909년 10월 26일 하얼빈역에서 총으로 사살했다.
▲ 안중근 참모중장 수감 독방(사진:궁인창)
안중근 참모중장은 11월 3일 뤼순 감옥으로 압송되어 6번의 재판을 받고 1910년 3월 26일 뤼순 감옥에서 31세로 죽었다. 당시 중국의 쑨원(孫文, 1866~1925) 위안스카이, 장제스, 사상가 장타이옌(章太炎, 1869~ 1936), 량치차오(梁啓超, 1873~1929)는 안중근 의사(義士)를 영원히 빛날 민족 영웅(永垂干古的民族英雄安重根)으로 높게 평가했다.
▲ 구리하라 사타키치 초대 형무소장(사진:궁인창)
구리하라 사타키치(栗原貞吉)는 1906년 4월 타이완 감옥에서 간수장을 담당하다 다렌 관동주 민정서로 파견되어 관동주 감옥을 건설하고 초대 소장을 맡아 1913년까지 근무했다. 그는 감옥을 설계할 때 수감자를 한 눈엔 관찰할 수 있도록 면밀하게 설계하였다. 그는 1911년 뤼순 감옥 묘지에서 죽은 영혼을 위해 위령제를 지냈다.
▲ 뤼순 감옥(사진:궁인창)
뤼순 감옥을 견학하면서 가슴이 미어지게 아파 전시장의 자료를 제대로 볼 수 없었다. 감옥을 견학한 중국인들도 고문 도구와 역대 일본인 소장의 악랄한 교도 행정에 치를 떨며 부르르 떨었다. 뤼순 감옥에는 전시관, 의무실, 고문실, 교화실, 공장 등이 있어 천천히 견학하며 돌아보았는데 중앙 간수대에서 바라보면 방사용 감옥 구조가 눈에 띄었다. 감옥 각 방은 7~8명이 갇혀 공동으로 생활했다.
감옥에는 어둡고 깜깜한 암방(暗牢)이 4개 있다. 안은 캄캄하고 촉촉하며 앞이 하나도 보이지 않고 간수가 내부를 들여다볼 수 있는 작은 원형의 감시창이 1개 있다, 설명문에 한글로 ‘암방’이라 적고 한자로는 ‘암뢰’로 적었다. 뇌(牢)는 짐승을 가두어 기른 우리를 뜻하는 한자로 이 방은 감옥 규칙을 중대하게 위반한 자나 투쟁하는 자를 가뒀다. 주황색은 정치범들이 입고 파란색은 일반 죄수들이 입는 옷이다.
▲ 뤼순 감옥 정치범 죄수복(사진:궁인창)
뤼순 감옥에는 일본인 간수 100여 명이 상주하며 감옥 곳곳을 순찰하고 감시하였다. 그들은 감옥에 들어온 수감자들을 맞이하여 감방에서 등을 맞대 앉게 하고, 말하거나 밖을 보지 못하게 했다. 이 규칙을 어기면 손을 배식하는 구멍으로 내밀게 하여 손목을 묶고 나서 간수가 지칠 때까지 계속 때렸다. 감방 규칙을 어기면 대나무 가지로 혹독하게 때리고, 간수들은 추울 때도 수감자를 맨발로 눈길을 뛰어다니게 하여 수감자들은 발톱과 발이 동상에 걸렸다. 감옥에는 간수 휴게실, 고문실, 의무실도 있었다, 긴 복도에는 여러 종류의 옥중 시가 걸려있었다.
1934년에 신설된 뤼순 감옥 교형장에 들어가니 밧줄이 3개가 있었다. 끈을 목에 걸고 세게 당기면 목숨이 끊어졌다. 의사가 입회하여 죽었다고 확인되면 아래에 준비된 나무통으로 떨어지게 하여 수감자를 구부려 넣고 인근 야산 형무소 묘지로 보내 묻었다. 1942년부터 1945년 사이에만 약 700명이 이 방을 거쳐 갔다. 현재 교형장은 최근에 복원되었다.
▲ 뤼순 감옥 교형장(사진:궁인창)
충남 안면도 출신의 하얼빈 이공대 김월배(1967~ ) 교수는 2005년에 다렌대 외국어 교수로 근무할 때 뤼순 감옥(旅順日俄監獄博物館) 박물관 객원 연구원으로 활동하며 많은 자료를 발굴했다. 그는 20년째 안중근 유해를 찾기 위해 노력하고 있으며 아직 발굴이 안 된 뤼순 감옥에서 700m 떨어진 동쪽 산 언덕 둥산포(東山坡) 발굴을 간절하게 기원하고 있다. 이곳은 1986년에 북한 발굴단이 다녀간 적이 있다. 당시 단장은 안 의상의 조카인 안우생이었다.
김 교수는 일제강점기 유해발굴 대행업체였던 대륙공사(大陸公司)가 뤼순 감옥 공동묘지 사망 명부와 배치도를 보유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김 교수는 1971년부터 1996년까지 뤼순 감옥 초대 관장을 지낸 저우상링(周祥令) 관장의 집을 자주 방문하며 과거 증언을 자주 청취했다.
▲ 둥산포(東山坡) 고려인 묘지터(사진:중앙일보)
구리하라 사타키치(栗原貞吉) 초대 형무소장의 딸 이마이 후사꼬(今井房子)는 아버지가 보관했던 위령제 사진을 제공하며 “사진 속의 화살표 위치가 안중근 의사의 묏자리이다.”라고 아버지의 말을 인용해 증언했다. 이마이는 집안에 사당을 만들어 평생 안 의사를 숭모했다
▲ 1911년 뤼순 감옥 위령제 사진(사진:국제한국연구원)
한일 외교의 막후 중재자이며 근현대사 안중근, 독도 등의 연구자인 최서면(崔書勉, 1928~2020) 박사는 위령제 사진을 전달받아 2008년에 한중 공동 발굴을 하였지만, 특별한 성과를 내지 못했다. 최 박사는 1994년 11월에 요령 민족출판사에서 중국어로 안중근 전기를 발간했다. 《安重根(论文·传记·资料)》是辽宁民族出版社出版的图书,作者是金宇钟、崔书勉。
그가 초기에 발굴했던 곳은 20층 아파트 단지로 변했다. 2014년 9월 서울에서 개최된 동북아역사재단 〈대한제국과 한일관계〉 학술회의에서 김영수 연구위원은 일본 외교사료관 소장문서 ‘기밀 제34호‘를 근거로 안중근 유해 화장설을 주장했다.
▲ 최서면(崔書勉, 1928~2020) 박사(사진:每日新聞)
뤼순 감옥과 교화실, 공장, 채소절임 작업장, 피복공장, 복욕탕, 주방 등을 견학하고 나오면서 하늘에 한가롭게 떠 있는 높은 구름을 보고 잠시 의자에 앉아 감옥에 갇힌 수감자들이 하늘을 보지 못하고 외부와 차단되어 세상을 얼마나 보고 싶었을까 하고 생각했다.
▲ 뤼순 감옥 높은 벽과 의자(사진:궁인창)
뤼순 감옥 안쪽에 마련한 안중근 추모관과 사형집행장을 찾다가 버스 출발 시간이 되어 버스가 있는 주차장으로 걸어갔다. 버스에서 출발을 기다렸는데 대원 일부가 보이지 않았다. 한참 기다리니 대원 5명이 안중근 추모관을 다녀오느라 늦었다고 말하였다.
▲ 안중근 의사 순국 115주기 추모식(사진:재외동포신문)
중국 정부는 뤼순 감옥을 군사기밀 보호 등을 이유로 외국인의 방문을 불허하다 2009년에 외국인 개방을 전면 허용하였다. 재중동포학자 다렌대 유병호 교수는 안중근 의사 연구와 다렌 지역의 한국인 민족운동사 자료를 발굴하고 연구하다 중국 항일운동가를 기리는 ‘순국 중국인 항일 지사 전시관이 다른 곳으로 이전하여 공간이 비게 된다는 사실을 우연히 알게 되었다. 그는 이런 사실을 한국의 국가보훈처와 광복회에 전달했다.
보훈처는 뤼순 감옥 측과 협의해 전시관을 구상하고 하얼빈 의거 100주년을 맞아 뤼순 감옥에서 숨진 항일 독립투사를 기리는 추모관과 전시관을 2009년 10월에 개관하였다. 박근혜 정부는 중국 정부에 안중근 의거 장소인 헤이룽장성 하얼빈역에 표지석 설치를 요청하여 중국 정부는 2014년 1월에 안중근 기념관을 설립했다. 대한민국 정부는 안중근 의사 순국 115주년과 광복 80주년을 맞이하여 정부대표단장을 국가보훈처 차관으로 격상하고 2025년 3월 26일 이희완 보훈처 차관이 뤼순감옥박물관 추모식에 참석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