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에 수나라 30만 대군 쳐부순 을지문덕 장군 전승비 세워져 평안도 안주산성 백상루
평안도라는 지명은 평양과 안주라는 말에서 유래되었다. 원래 안주는 고구려 때는 식성이라 불렀고, 고려초에는 팽원이라 하다가 12세기 중엽부터 안주라 하였다.
정태혁 교수는 다시 발길을 재촉하여 안주읍(安州邑) 쪽으로 가려고 방향을 바꿨다. 멀리 안주성곽(安州城廓)이 보인다. 성곽 안에 높이 솟은 백상루(百祥樓)가 의젓하게 서 있다. 안주성(安州城) 북쪽, 높은 언덕 위에 우뚝 솟아 있는 2층 누각(樓閣)이다. 읍내를 성큼 지나 성문(城門)을 뒤로하고 백상루에 오른다. 높은 층계를 올라가니 수백 명이 앉을 정도로 넓은 누각이다.
▲ 안주 백상루(百祥樓)(사진: 국립중앙박물관, 원판번호 D270101)
1400년 전에 고구려(高句麗)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이 수(隋) 나라 30만 대군을 쳐부순 살수(薩水)가 눈앞에 흐르고, 서쪽 연안(沿岸)에는 홍경래(洪景來) 장군이 수만 대군을 거느리고 버티었던 송림촌(松林村) 넓은 벌이 보인다. 옛날에는 강물이 바로 이 다락 밑으로 흘러가서 다리 위에서 낚시를 드리우며 풍류(風流)를 즐길 수 있었는데 이제는 멀리 떨어져 흐른다. 칠성지(七星池)는 어디에 있으며, 칠성공원(七星公園)은 어디에 있는가? 백상루 남쪽에는 을지문덕 장군의 전승비가 서있다.
▲ 호수 안의 작은 섬이 북두칠성으로 배치된 칠성공원(七星公園)(사진:나무위키)
안주읍(安州邑)을 둘러쌓은 성곽(城郭)은 마치 용이 몸을 뒤틀며 하늘로 오르고 있는 것 같기도 하고, 하늘에서 떨어진 용이 허물을 벗고 힘없이 누워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잡초(雜草) 속에 무너진 석축(石築)은 옛일을 이야기하건만 이제 아는 이가 누구인가.
고려의 명장(名將) 서희(徐熙)가 이 성을 축성(築城)한 것을 삼백 년 전에 다시 개축하였다고 하나, 13척 높은 성벽(城壁)과 동서남북에 있는 성문(城門)은 무너진 채 그대로이다. 난간(欄干)에 기대어 멀리 기러기 떼가 나르는 벌판을 굽어보며 점점이 이어지는 연산(連山)을 바라보니 옛 시가 머리에 떠오른다.
고려 충숙왕(忠肅王)이 이 백상루(百祥樓)에 올라 청천강을 바라보며 읊은 시가 있다.
천강 백상루에 이제 올라 바라보니 삼라만경이 한눈 밖에 펼쳤도다. 풀은 푸르러 멀리 이어졌고 긴 둑은 하늘가에 뻗었으니 뫼뿌리 줄지어 우쭐대고 서 있구나 비단 병풍 두른 속에 나르는 따오기와 옥거울 맑은 물에 배 한 척이 떠 있도다 속세에 이런 선경(仙境) 있는 줄 내 아직 몰랐더니 오늘 와 밀성(密城)에 드니 영주(瀛州)가 여기로다.
清川江上百祥樓 萬景森羅不易收 (청천강상백상루 만경삼라불이수) 草遠長堤青一面 天位列岫碧千頸 (초원장제청일면 천위열유벽천경) 繡屛影裏飛孤鵂 玉鏡光中點小舟 (수병영이비고휴 옥경광중점소주) 未信人間仙境在 密城今日見瀛州 (미신인간선경재 밀성금일견영주)
옛날에 나르면 따오기는 보이지 않으나 때 따라 찾아온 기러기가 하늘가로 울어간다. 멀고 먼 걷고 걸어 안주(安州) 땅을 찾아오니 떼져 가는 저 기러기 어디로 가는고 네가 가는 길에 나도 함께 가게 하면 칠성지(七星池) 칠성정(七星亭)을 단숨에 둘러보고 칠불사(七佛寺) 부처님께 너의 복(福)을 빌어주라. (원문: 정태혁)
▲ 안주성 현무문(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이렇게 혼자 읊조리면서 백상루(百祥樓)를 내려간다. 어디로 갈 것인가 잠시 망설이다가 해도 지고 추위가 몸에 배는지라 칠불사 부처님 품으로 가고 싶다. 성문(城門)을 나와 안주(安州)에서 만주(滿洲)로 통하는 도로를 끼고 칠불산(七佛山)에 오른다. 겹겹이 쌓인 절벽이 기관(奇觀)을 이루고 있는 칠불산은 옛 모습 그대로이다.
칠불사가 세워진 것은 고구려 영양양 23년(612)에 을지문덕 장군이 청천강 남쪽 기슭에서 수군 30만 병력을 쳐부술 때 일곱 명의 스님이 옷을 입은 채 청천강 위를 유유(悠悠)히 걸어가자, 이것을 본 수(隨) 나라 군사가 이 강을 건너 쳐들어올 때 그를 깊은 곳으로 유인하여 모두 물에 빠져 죽게 하였다. 그때의 위적(偉績)을 기리기 위하여 절을 지어 칠불사라고 했다고 한다. 칠불사를 찾아 산으로 오르는데 돌층계가 숲속에 묻혀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였으나, 옛 스님들은 물 위도 건넜거늘 뭍에선 어떠랴! 힘을 내어 한숨에 오르니 칠불사 절터가 보인다. 간판도 없고 법당도 없고 그저 절터만 남았구나, 이 어찌된 일인가. 이 땅의 집권자들은 절 이름조차 싫어서 이토록 버려두었는가. 그렇지 않으면 옛 고사(故事)가 믿어지지 않아서 헐벗게 내버려두었는가?
▲ 을지문덕 표준영정(사진:문화관광부, 1975년 운보 김기창 제작)
옛 스님들이 깊은 강을 물처럼 건넌 것이 대단한 것이 아니라, 그 스님네의 우국충성(憂國忠誠)이 거룩한 것이다. 지성(至誠)으로 나라를 생각한 옛 스님들에게 이런 기적이 다반사(茶飯事)가 아니랴. 이즈음 스님들에 비하면 상상인들 할 수 있으랴만, 물욕(物慾)을 떠나 오직 이 나라 백성의 안위(安危)를 걱정한다면, 어떤 신통(神通)인들 없을쏘냐?
오늘에 빗대어 옛일을 평하거나 자신의 못남을 비추어 남을 재는 어리석은 자들과는 말을 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절의 경내(境內)를 두루 살피니, 수(隋) 나라 군사가 잘못 물을 건넜던 곳 오도탄(誤渡灘)으로부터 늙은 스님이 나타난다. 그러더니 성큼성큼 물을 건너 나의 앞으로 다가오는 것이 아닌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노라니, 내 곁으로 왔다가 말없이 사라진다. 흐르는 저 청천강(淸川江)이 이 사연을 말하고 있건만 누가 이를 알 수 있으랴. 그 스님은 어디로 갔는가? 서쪽 하늘가에 붉은빛이 더하다니 구름 사이로 보이는 그림자가 있다.
조선왕조에서 만든 고지도에는 청천강 한 가운데에 커다란 섬 칠불도(七佛島)가 보인다.
▲ 임진왜란 직후 개축한 안주성 내성과 신성(사진:나무위키)
아! 저기가 어딘가 서삼봉(西三峰, 451m)이 아닌가. 저곳은 휴정 서산대사(西山大師, 1520~1604)가 묘향산(妙香山, 1,909m)에 들어가기 전에 수도(修道)하던 곳이다. 전설에 의하면 안주군(安州郡) 용화면(龍花面) 마산리(馬山里)에서 서산대사가 태어났다고 하니, 그곳을 꼭 찾고 싶으나 해가 지려하니 어찌할꼬?
서산대사가 이 땅에 태어나서 왜군(倭軍)을 무찌른 일과 저 고구려(高句麗) 때 살수(薩水)에서 수군(隨軍)을 물에 빠져 죽게 한 일곱 분의 스님과는 무슨 인연이 있는가. 살수는 물살이 빨라 지어진 이름이다. 부처님도 과거(過去) 칠불로 계셨고, 미래에 또한 일곱 부처가 나타난다고 하니, 칠불사에 모셨던 일곱 분의 스님은 바로 부처님이시다. 그분들은 이 땅을 시작 없는 과거로부터 영원한 미래에까지 부처님의 법력(法力)으로 가호(加護)할 것이니 이 땅에는 영원토록 끊이지 않고 불보살(佛菩薩) 가호(加護)가 있으리라. 임진란(壬辰亂) 때 나타나신 서산대사가 일곱 부처 중의 두 번째 부처님이었다면 언제 또다시 부처님이 나타나 이 땅을 수호(守護)할 것인가.
▲ 서산대사 眞影(사진:국립중앙박물관 소장품 번호 동원 2591)
칠불사가 비록 저렇게 버려져 있어 옛 자취를 찾을 길 없으나 칠불이 게시는 이 땅은 영구히 수호되리라. 멀리 태향산(汰香山)이 청천강 어구에 임(臨)해서 의젓이 서 있다. 전설에 의하면 옛날 어느 때 큰 장마가 져서 묘향산(妙香山)에 사태(沙汰)가 나서 흙이 내려와 쌓인 것이 저 태향산이라고 하니, 상전(桑田)이 벽해(碧海)가 된다더니 없던 산이 생겨났기에, 변적(變跡)도 이 땅에서 앞으로 멀지 않아 있으리라, 하물며 모상(毛常)한 인간세상(人間世上)인지라 못난 인간들이 꾸며낸 인간사에 불변하는 것이 어디 있으랴. 김일성(金日成) 족당(徒黨)들이 제아무리 버티고 있은들 불보살(佛菩薩)의 부사의(不思議)한 법력(法力)은 거역하지 못하리니, 이 땅에서 저들이 각성(覺醒)하여 칠불사에 일곱 부처를 다시 모시는 날 이 땅의 중생(衆生)들이 모두 구제(救濟)될 것으로 생각하며, 태향산 쪽으로 발을 옮긴다.
▲ 안주 지도(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입석면(立石面)에 들어서자 청천강 어구에 우뚝 솟은 병풍(屛風) 같은 층암(層岩)이 칼날같이 서 있다. 이것이 태향산(汰香山)이다. 몇 개의 작은 봉우리가 소담하게 모여 있다. 산 아래 노강진(老江鎭)은 옛 모습을 찾을 길 없고, 청천강을 거슬러 올라가는 곳에 있는 전선포(戰船浦)가 또한 그립다.
청천강 물 가운데 멀리 보이는 저 섬은 무슨 섬인가. 적골도(積骨島)가 아닌가. 옛날 수(隋)나라 대군(大軍)이 고기밥이 되어 그들의 뼈가 쌓여 저렇게 섬이 되었으니, 저 섬을 볼 때마다 옛일을 잊지 말고, 이 땅을 잘 지켜야 하겠거늘, 붉은 사상이 이 땅을 휩쓸게 된 오늘날 적골도(積骨島)가 적골도(赤骨島)로 이름이 바뀔 날이 오게 해야 하겠다. 옛날이나 이제나 어느 한 사람의 힘으로 나라의 안위(安危)가 결정되는 것이 아니고 온 국민이 합심해서 나라를 지켜야 하니, 옛날 을지문덕 장군의 힘도 힘이려니와 국민이 단합해서 수군(隋軍)을 쳐부순 것이었다. 그중에서도 불승(佛僧)들의 힘이 또한 컸고,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한 지혜(智慧)를 낸 것이 불승이었음을 알게 한다.
▲ 안주 읍성의 3중 성벽(사진:나무위키)
저 칠불사 연유담(緣由譚)은 바로 이런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청천강은 비록 맑은 물이지만 많은 더러운 목숨이 죽어간 곳이다. 그러면서도 이토록 맑게 걸러내는 그 힘이 장(壯)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마치 우리 민족성과 통하는 것이니, 우리 민족같이 숱한 고난을 겪은 민족이 어디 있으랴. 그러면서도 남을 침범(侵犯)하지 않고 오직 자신을 지키기에 억센 끈기를 보인다. 저 맑게 흐르는 청천강 물은 곧 우리 민족의 핏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묘향산(妙香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저 물에 선골(仙骨)의 피가 섞였는지라 어찌 그렇지 않으랴!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