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황 항복 선언 후 항일독립투사 5명 처형... 감옥 중요 서류 소각도 뤼순 감옥 타고지로(田子仁郞) 소장
중국 랴오닝성 다렌 시에 있는 뤼순 감옥은 11개국의 항일 독립투사들과 많은 중국인이 갇혀 고문 받고 신음하며 고통 속에 살다 병사하거나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이 감옥의 마지막 형무소장인 타고지로(田子仁郞, 다쯔런랑)는 일본제국이 항복하기 전날 밤에 감옥의 자료와 중요한 서류를 소각하도록 지시하고 범죄의 증거를 훼손했다. 그는 미국의 원자폭탄 투하로 군대의 사기가 떨어져 일본제국 히로히토 천황은 황복을 선언한다. 교도소장은 8월 16일에 간수를 시켜 공산당원 류봉천 등 항일 독립투사 5명의 처형을 지시하였다.
▲ 화가 천젠(陈坚)이 그린 일본군 항복(降伏) 유화(자료:바이두)
1945년 9월 9일 오전 9시에 중국 주둔 일본제국 총사령관 오카무리 야스지(冈村宁次, 1884~1966)가 난징의 중앙 육군 군관학교 대강당에서 중국 국민당 정부가 마련한 항복 문서에 서명하고 자신의 무기를 중국 측에 인계했다. 중국은 충칭에 주재한 육군 총사령관 허잉친(何应钦, 1890~1987)이 항복 문서를 받고, 장체스의 명령을 일본에 전달했다.
타고지로는 뤼순 해방 후 혼란을 틈타 도주하다 1945년 10월 소련 홍군에 체포되어 시베리아에 수감되었다. 그는 1950년 7월 중국 푸순 전범관리소에 송환되어 갇히는 신세가 되었다. 푸순 전범관리소는 1950년부터 1964년까지 약 1,100명의 일본 전범을 수용, 교육했다. 1956년 중국 정부는 전범 공개 재판을 실시해 1,062명의 전범 중 45명만 기소하고 나머지는 불기소 처분하여 석방하였다, 중국인을 피로 물들인 흉악한 사형집행인 타고지로 소장은 1956년 7월 석방되어 일본에 도착한 후 행적이 묘연하다.
▲ 여순 감옥 제10대 소장 타고지로(田子仁郞, 다쯔런랑)(사진:每日頭條)
뤼순 감옥 형무소장 타고지로(田子仁郞)가 진술한 범죄 내용을 역사적 진실을 위해 공술한 번역본을 그대로 옮긴다. (翻譯 馬千里於 1954年 8月 18日 譯)
죄행 1. 저는 당시 400여 명의 중국의 평화로운 주민과 항일 분자를 수용한 적이 있습니다. 저는 모두 다롄 지역 법원 검사국 검사의 지휘하에 행동했습니다. 이 수용자들은 계속 수용되거나 석방되는 등의 이유로 누적 인원이 약 3,000명 이상입니다.
▲ 뤼순감옥 역대 형무소장(사진:궁인창)
죄행 2. 저는 부하들에게 수용된 중국 항일(抗日) 인원과 중국 주민 등에게 소량의 식량만 주거나, 부패한 수수가 섞인 주먹밥을 주도록 명령하고, 형무소 내의 공장에서 하루 10시간 이상의 중노동을 강제했습니다.
【원문】罪行2.我命令部下對被收容的中國抗日人員、中國和平居民等只給少量的糧或是混有已腐敗高粱的飯糰子,而且強制在刑務所內的工場從事勞動每日10小時以上的重勞動。
▲ 뤼순 감옥 작업장(사진:궁인창)
재임 기간 동안 공장에서 얻은 이익은 8,000위안(엔화)(당시 쌀 25,000kg 이상의 가치에 해당)입니다. 이 돈을 일본 대장성(재무부)에 송부합니다. 수용자들에게 감식, 찬물 채우기, 채찍질, 발로 차기, 손가락 사이에 연필 끼우기, 매달아 채찍질, 수갑과 족쇄를 찬 형벌을 간수들에게 명령하여 한 달에 평균 5명 이상, 제 재임 중 총 700명 이상이 사망했습니다. 저는 부하들에게 시신을 대련 형무소에서 서쪽으로 약 1km 떨어진 산속에 묻도록 명령했습니다.
▲ 桶裡面的屍骨就被絞殺的中國人(사진:每日頭條)
죄행 3. 재임 중, 저는 대련지방법원 검사국으로부터 「치안통제법」 위반의 죄명으로 태형(笞刑)을 선고받은 중국인의 허리, 엉덩이 등을 30. 60, 90대를 때려야 합니다. 이렇게 매달 태형을 받는 중국 주민은 30여 명이며, 제가 재임 중에 400여 명이 태형을 받은 적이 있습니다. 이들은 허리나 엉덩이를 맞아 피가 나거나 움직일 수 없거나 이로 인해 사망한 경우도 있습니다.
죄행 4. 제가 형무소 소장으로 재직할 때 종종 '감방 규칙' 및 기타 죄명을 위반하여 부하 간수에게 수용 중인 중국 국민에게 다음과 같은 형벌을 사용하도록 명령합니다. 식량을 줄이기 위하여 주식을 7등밥(分為七等飯)으로 나누고, 찬물을 끼얹어 고문하고, 가죽풀 옷을 입으며 암실 감금하고, 곤봉으로 때리고, 손가락 사이에 연필을 끼우고 매달아 채찍으로 때리고 이로 인해 수갑, 족쇄 등을 차고 다니게 합니다. 이로 인해 부상자도 적지 않고 중상자도 있으며 모욕, 학대, 폭언 등을 일삼아 매달 8명 이상이 사망합니다. 제 재임 중 사망자는 모두 100명 이상입니다. 저는 시체를 모두 뤼순형무소 묘지에 묻도록 명령했습니다.
▲ 뤼순 감옥 고문도구(사진:궁인창)
예를 들어, 1944년 가을 형무소 벽돌 공장에서 부하 간수 사사키 마사오가 수용 중인 중국 평화 주민 한 명을 곤봉으로 때려 숨지게 한 일이 있습니다. 제 재임 중 간수가 때려죽인 사람은 이 한 명뿐만이 아니지만, 피해자의 이름을 하나하나 기억할 수는 없습니다.
▲ 교수형 집행과정 설명문(사진:궁인창)
죄행 5. 1945년 8월 23일 소련군이 뤼순을 해방하자, 저는 부하들에게 명령하여 수감 중이던 항일인 유상근을 독방에 가두고 음식을 줄이며, 병이 있는데도 치료해 주지 않아 빨리 죽게 하였습니다. 지난 25일 한 중국인 여성이 남편의 행방을 알아보러 와서 간수장 소약혜에게 “어제 소련군을 위해 석방되었다.”라고 숨길 것을 지시했는데, 실제로 그 여성의 남편은 부하의 학대로 인해 8월 24일 저녁에 사망했습니다.
▲ 뤼순 형무소 매장 모형도(사진:궁인창)
죄행 6. 1944년 8월, 저는 뤼순고등법원 검사관의 지시를 받아 간수장 소약혜(小掠惠)에게 형무소 사형선고를 받은 중국 항일 지하공작원 6명(그중 1명은 아세아 측 이집트인)을 형무소 사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할 것을 명했습니다.
죄행 7.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한 후 8월 16일, 뤼순 고등법원 검사국 검사관 미타 마사루 등이 관동주청 경찰부 구치소에서 사용한 자동차에서 4명의 중국 항일 지하 공작원을 형무소로 데려왔습니다.
▲ 뤼순 고등법원(사진:궁인창)
법원에서 재판을 받지 않은 중국 항일 지하공작원 4명을 형무소에 수용해 사형을 선고받은 중국 평화 주민 1명에게 사형을 집행하라고 지시했습니다. 저는 부하 간수들에게 이 다섯 명의 중국인을 형무소 사형장에서 사형을 집행하라고 명령하고, 시체를 형무소 근처 묘소에 묻었습니다.
죄행 8. 저는 뤼순형무소에서 범한 범죄를 은폐하기 위하여 “1945. 8. 16. 상관의 지시 없이 부하들에게 일체의 중요 문서를 불태우도록 명령하였습니다.”라고 진술했다.
▲ 1971년 발굴 뤼순 감옥 묘지 발굴 사진(사진:궁인창)
뤼순 감옥의 중요한 문서가 불에 타서 사라졌지만. 타고지로(田子仁郞, 다쯔런랑) 형무소장의 진술만으로도 그가 사람을 죽이지 않은 날이 없었음을 알 수 있다. 형무소 소장은 감옥 내에서 벌어진 일들을 솔직하게 모두 말할 수 없었다. 본인이 증언한 것보다 더 많은 사람을 죽인 것으로 뤼순 감옥(旅順日俄監獄博物館)을 조사한 학자들은 추측했다.
▲ 형무소장 타고지로 공술 문서(사진:每日頭條)
베이징연협회로부터 2014년 4월 베이징국제연축제(2014 Baijing International Kite Flying Festival) 참가 초청을 받아 필자는 안중근 초상화가 그려진 창작연을 고안하고 회원들과 의견을 나눴다.
대회에는 대한민국예술연협회 이창석 회장, 이희섭 총무, 류인평 등 여러 회원이 참여하여 베이징 공설운동장에서 안중근, 윤봉길, 정율성 연을 날리며 조선인의 항일 독립투쟁을 중국에 알렸다. 이 대회에 이어 5월 22일 심양 과이포 동북호랑이공원에서 개최된 심양국제연대회에서도 조선의 민족영웅 안중근 연을 하늘에 올리고 길림 시에서도 윤봉길 창작연을 날렸다.
▲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 연(사진:궁인창)
중국 베이징, 선양, 길림의 국제연대회를 마치고 한국에 돌아와 중국 뤼순 감옥에서 순국한 애국열사의 대한 자료를 조사하기 위해 서울 남산에 있는 안중근의사기념관’을 방문하고 관련된 자료를 요청했다.
▲ 2014 Baijing International Kite Flying Festival(사진:궁인창)
그런데 안중근기념관 학예사는 “중국에서 활약한 조선인 항일 자료나 책이 아직 갖추어지지 않아 보여줄 수 있는 것이 별로 없다. 서고에 있는 책 중에 도움이 될만한 것이 있는지 찾아보겠다.”라고 말하고 안으로 사라졌다. 40분을 의자에 앉아서 기다리자, 학예사가 2013년 뤼순 감옥박물관에서 발간한 《旅順日俄監獄博物館 故事》 책을 가져와 “같은 책이 3권 있는데 필요하면 가져가서 자료로 사용하라.”라고 하면서 책 한 권을 주었다.
▲ 《旅順日俄監獄博物館 故事》(사진:궁인창)
이 책을 쓴 뤼순 감옥박물관장 강엽(姜曄)은 서문에 신채호 선생의 말을 인용하고, 1931년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일본제국의 주요 인사를 암살하고 독립운동을 전개하기 위해 조직한 비밀결사단체 한인애국단을 조직한 김구(金九, 1876~1949) 주석를 상세하게 설명했다. 김구 선생은 1932년 도쿄 이봉창 의거와 1932년 상하이 윤봉길의 의거를 주도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