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금 누르하치 요동 점령 바람에 조선 사신들 바닷가로 가도~녹도~등주 이용 조선 사신 중국 사행록
조선왕조의 사신 일행은 육로로 개성, 평양, 정주, 곽산으로 올라갔다. 1621년에 후금의 누르하치가 요동을 점령하는 바람에 사신들은 바닷가로 향해 가도, 녹도, 등주 바닷길을 이용했다. 사신은 한양을 출발한 지 12일 만에 안주(安州)에 도착해 백상루(百祥樓)에서 잤다. 베이징으로 사행 가는 사람들은 일정상 숙박지와 행로가 대부분 비슷했다.
▲ 조선사행노정(朝鮮使行路程)(사진:위키백과)
동국대 인도철학과 정태혁(鄭泰赫, 1922~2015) 교수는 1980년 북한 1월호(통권 제97호)에 〈평안남도 안주 칠불사를 찾아서〉를 기고했다. 필자는 은사의 글을 읽으며 한문 문장에 주석을 달았다. 여행기에는 한자가 많아 사전을 찾아 조사하며 쉬운 말로 풀었다. 책 한 권을 다 읽고 가만히 생각하니 혼자 감상하기에는 너무나 아까웠다.
북녘의 땅은 조선왕조에서 사은사가 가던 길로 이제는 갈 수 없는 길이 되어버렸지만. 북녘 산하에 대한 호기심과 가보지 못한 땅에 대한 그리움은 사무쳤다. 은사는 금강산을 비롯해 북한의 사찰을 두루 탐방하면서 중소도시를 탐방하고 소회(所懷)를 적어 교수님이 걸은 노정(路程)을 따라가 보았다.
▲ 정태혁(鄭泰赫) 교수(사진:불교평론)
〈평안남도 안주 칠불사를 찾아서〉 정태혁(鄭泰赫)
개천읍(价川邑)을 등지고 안주(安州)로 향해서 떠나려 하니 뿌옇게 온 하늘이 가라앉아, 눈이 금시에 내릴듯하다. 먼 산이 구름 같기도 하고 바다에 뜬 섬 같기도 한데, 안갯속에 우뚝우뚝 솟은 뫼 뿌리가 멀리 보인다. 개천역(价川驛)에서 안주로 가는 기차를 탔다. 만포선(滿浦線)과 이어지는 이 철도(鐵道)는 비교적 승객이 많다. 통학(通學)하는 학생들도 눈에 뜨인다. 광산전용철도(鑛山專用鐵道)가 신안주(新安州)에서 천동(泉洞)으로 달리는 것이 눈에 보인다. 기차가 달림에 따라서 눈 앞에 펼쳐지는 남북의 길이가 40km이고 동서는 20km로 넓은 들판이 안주평야(安州平野)이다. 청천강(淸川江) 맑은 물이 흐르다가 치마폭같이 펼쳐진 벌판에는 ‘열두삼천(三千)리벌’로 불리는 놀라운 전설이 전해온다.
동서(東西)로 밋밋한 구릉(丘陵)이 산지(山地)를 이루었고, 멀리 자모산맥(慈母山脈)이 마치 어진 어머니와 같이 에워싸면서 서해안 쪽으로 뻗어 나간다. 묘향산(妙香山)으로부터 흘러내리는 청천강을 끼고 기차는 덜렁대며 달린다. 청천강은 박천강(博川江)과 합류(合流)하여 서해로 들어가는데 길이가 217km에 이르고 작은 하천 300개가 합류한다.
▲ 열두삼천리벌(사진:평화문제연구소)
나도 서쪽으로만 무작정 달려가고 싶다. 그러나 안주 땅에 온 것은 남면(南面)에 원적사(圓寂寺)와 용화사(龍華寺)와 금동사(金洞寺)가 있으며, 안주성(安州城) 북쪽에 칠불사(七佛寺)가 있어 순례차(巡禮次) 온 것이 아닌가? 동쪽을 바라보면 높이 솟은 태향산(汰香山)이 개천군(衿川郡)과 경계를 이루고 있다. 이제 동면(東面)으로 가려 하니 도중에서 하차(下車)하여 역 앞에 섰다. 아침이라 쌀쌀하여 기온이 영하 6~7도는 됨직하다. 멀리 운곡면(雲谷面) 쪽에서 하늘에 높이 떠 훨훨 나르는 듯한 뫼 뿌리가 보인다. 저것이 접무봉(蝶舞峰, 340m)이다. 비정(非情)한 저 산도 나를 맞아주는데 인간은 누구 하나 맞아주는 사람이 없어, 호젓이 갈갈만 재촉한다. 접무봉(蝶舞峰) 옆에 원용산(元龍山, 301m)이 있고, 또 그 앞에 있는 것은 두미산(頭尾山, 419m)이다.
▲ 청천강(淸川江)
한없이 뻗어 있는 구릉(丘陵)을 몇 고개 넘어 얼어붙은 작은 시냇물을 건너 아늑한 산록(山麓)에 닿으니, 한 농가(農家)가 있다. 지붕 위에 면화(棉花) 송이가 널려 있고 경사(傾斜)진 언덕을 덮은 뽕나무밭이 겨울 추위에 달달 떨고 있다. 뽕나무밭이 왜 이렇게 많은가? 이 고장은 예부터 양잠업(養蠶業)이 성(盛)하였으니, 아낙네들의 물레 소리가 저 촌가(村家)에서 들릴 법도 하다. 그러나 이제는 물레 대신 괭이자루를 잡고 억지로 노동(勞動)해야 하는 신세가 되었구나. 옛날에 물레를 돌리면서 인생의 한(恨)을 풀던 그 모습이 오히려 그립지 아니한가.
물레야 돌아라
가다가 돌아라 흑 흑 오동추야 긴긴 밤에 우리 님 그려서 못살겼네 인생(人生)이 살면 한 백년 사느냐 훅 훅 살아 생전에 마음대로 노자 간다 간다........나는 간다 흑 흑 우리 님 따라서 나는 간다 달도 밝고 명랑한데 흑 흑 우리님 그리워 내 못살겠네
전해오는 안주애원곡(安州哀怨曲)이다. 이렇게 혼자서 읊조리며 애수(哀愁)에 젖어 옮기는 발걸음은 무겁기만 하다.
▲ 우리나라 전통 자수공예 안주수(安州繡) 기법(사진;국가유산청)
500년 전 이원익(李元翼)이 고을 목사(牧使)로 와서 처음으로 누에 치는 일을 장려한 이래로 항라명주산지(亢羅明紬産地)로 유명했던 이곳이다. 안주수(安州繡)는 유명하여 서울에서 온 궁중 귀인들이 이곳에 살면서 수(繡)놓는 기술을 전수(傳授)했다고 한다. 안주 방면(方面)으로 유배(流配)되어 온 사람들이 소일거리로 수(繡)를 놓기 시작한 것이 인연이 되었다고도 하나, 하여튼 안주수(安州繡)는 정교(精巧)하고 우아하였으므로, 이런 전통을 이어서 염직공장(染織工場)이 많이 있던 곳이다. 19세기 안주에서 생산된 자수는 최고로 숙련된 남성 기능공에 의해 제작된 자수 작품으로 고품질의 명주와 수실로 만들어 베우 높은 가격에 거래되었다.
원적사(圓寂寺)를 찾아 두미산(頭尾山) 쪽으로 가는 길에 멀리 동쪽으로 눈을 돌리니 광구(鑛區)인듯한 것이 있다. 이것이 자모산금광지(慈母山金鑛地)이다. 철석(鐵石)을 실어 나르는 인부들이 여기저기에 보이고 기러기 떼가 서해(西海)로 향해 울며 날아간다. 끼럭 끼럭 끼럭 끼럭..... 같은 울음소리이건만 서울에서 듣던 그 소리와는 달리 애조(哀調)가 더욱 깊다. 그때 멀리서 「쾅」하는 소리가 들린다. 운곡면(雲谷面) 쪽에서 들려오는 듯하니, 운곡(雲谷)에 있는 운룡광산(雲龍鑛山)에서 화약(火藥) 터뜨리는 소리인가 보다.
안주읍(安州邑)을 중심으로 동쪽에 있는 가두산(加頭山), 그 남쪽에 있는 오도산(悟道山)은 운곡면(雲谷面)에 걸쳐서 우뚝 솟은 품이 세사(世事)를 초연(超然)한 도인(道人)과도 같다. 오도산(悟道山)은 원통산(元通山)이라고도 하다가 이제는 원룡산(元龍山)이라고 한다. 여기에 금동사(金洞寺)가 있다. 고구려 영류왕(재위 618~642) 때는 사찰로 금동사(金洞寺), 중대사(中臺寺), 진구사(珍丘寺), 유마사(維摩寺), 연구사(燕口寺), 대승사(大乘寺), 대원사(大原寺), 개천사(開天寺) 등이 있었다. 그 옆 동편으로 서 있는 상산(上山, 528m)은 옛 이름이 왕산(王山)이니, 그 산기슭에 왕산동(王山洞)이 있어 여기에 용화사(龍華寺)와 원적사(圓寂寺)가 있는 것이다. 왕산동(王山洞)을 찾아간다. 500m쯤밖에 안 되는 나지막한 산이지만 아담한 뫼 뿌리가 멀리서 손짓한다.
▲ 안주읍 전경(사진: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산밑에는 촌가(村家)가 몇 집 있기에 한 작은 집 문을 두드리니, 흰머리에 주름이 크게 진 노파가 나와 반갑게 맞아준다. 왕산동(王山洞) 가는 길을 물어 원적사(圓寂寺)로 올라간다. 아담하고 작은 절터에 초라한 사우(寺宇)가 보인다. 지붕에는 잡초가 우거지고 떨어진 문짝이 바람에 흔들거리니, 아무도 손을 댄 사람이 없어 그저 버려진 채 있는 것이 아닌가. 승려도 없고 부처님도 없이 그저 관리인이 가끔 왔다 간 흔적만 있을 뿐, 휴양소로 사용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부처님의 혜명(慧命)이 있는 곳이라 법당(法堂)으로 들어가서 잠시 분향(焚香)하자, 향운(香雲)이 연화대(蓮花臺)를 이루면서, 관음성상(觀音聖像)이 나타난다. 너무도 기이(奇異)하여 합장(合掌)하고 있노라니, 그 성상(聖像)이 향대(香臺)를 타고 비천(飛天)하여, 닷집 뒤로 두둥실 떠오르며 용(龍)을 타고 밖으로 나간다. 길게 뻗친 용미(龍尾)가 서천(西天)으로 뻗었으니, 이 어찌 된 일인가?
▲ 안주 지도(사진:나무위키)
원적사(圓寂寺) 곁에 용화사(龍華寺)가 있는지라, 원적사(圓寂寺)와 용화사를 지키는 사람이 없어 불보살(佛菩薩)이 용(龍)의 몸을 나투어 지키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 관음성상(觀音聖像)의 펄럭이는 옷자락이 바람에 휘날리며 서천(西天)으로 떠나간 뒤를 쫓아 급히 따라간다. 어디로 가는지 첩첩산중(疊疊山中)에 인적(人跡)은 없으나 솔씨를 따먹는 솔새의 지저귀는 소리를 들으며 산으로 오른다. 산의 중복(中腹)에 이르니 깎아 세운 암벽에 돌계단이 있는데 오르기에 매우 힘이 든다. 간신히 석문(石門)을 지나 경내(境內)로 들어가니, 폐쇄된 고사(古寺)는 찾는 사람도 없이 적요(寂寥)한데 이따금 찾아오는 다람쥐가 쉬고 가며, 일 년에 한 번씩 견우(牽牛)와 직녀(織汝)를 위해서 무지개다리를 놓는 까치들만이 오고 간다. 대웅전에 모셨던 부처님은 어찌 되었는지, 비어있는 연화대(蓮華臺)에는 먼지만 쌓였으나, 천정(天井)에 퇴색(褪色)된 단청(丹靑)은 용의 숨결이 완연하다. 합장(合掌)한 손을 가슴 앞에 모은 채 지그시 눈을 감고 용화삼매(龍華三昧)에 드니 순식간에 몇 겁(劫)을 지나 용화세계(龍華世界)에 태어났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 서산(西山)에 해가 지는 무렵, 금동사(金洞寺)로 가려고 몸을 일으키니, 아쉬운 마음이 발길을 멈춘다. 남으로 발길을 돌려 금동사가 있는 오도산(悟道山)으로 향한다. 도중에 봉덕산(鳳德山)에 오른다. 이 산에는 사암(寺庵)은 없으나 옛날에 장락사(長樂寺)라는 절이 있어 산정(山頂)에 구층(九層)으로 된 철제부도(鐵製浮屠)가 있다는 기록이 있는지라 어찌 그대로 지나칠 수 있으랴. 이 산은 안주읍(安州邑)에서 가려면 20리(里)쯤 되는 곳에 있다. 산정(山頂)에 올라 부도(浮屠)를 찾아도 도무지 알 도리가 없다. 내가 찾지 못한다고 있는 것이 어디 가랴? 하고 찾은 듯이 생각하여 후련한 마음으로 하산(下山)할 때, 오도산(悟道山)이 눈앞에 다가선다.
해는 벌써 서산에 기울고 천지(天地)가 숨을 죽이듯 적적(寂寂)하기 그지없는데 작은 새까지도 소리 없이 나른다. 나는 잠시 발길을 멈추고 비스듬히 누운 나무에 걸터앉아 천지(天地)와 통정(通情)하니, 한번 주먹을 쥐었다가 펼 땐 천지를 다시 개벽(開闢)하려는 의념(擬念)속으로 한없이 한없이 잠겨 들어간다. 천지창조(天地創造)의 어려움을 이제야 알 수 있으니, 천지(天地)와 더불어 같이하는 나의 길이 또한 어려움을 알겠다.
금동사(金洞寺)로 통하는 길목에 섰다. 도표(道標)도 없는 이곳을 찾는 나의 도력(道力)도 이만저만 아니지만 폐쇄된 사우(寺宇)에서 부처님의 현현(顯現)을 보는 것이 또한 장(壯)하다 할 것이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