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하일기 10】명, 원병 요청해 강홍립 도원수 1만 3천명 파병...부차전투에서 명군 1만명과 조선군 8천명 몰살 후금 홍타이지의 조선 침략
열하일기 답사를 떠나기 전에 조선과 명, 청에 대한 외교사, 전쟁사를 공부했다.
여진족을 통일한 누르하치는 1616년에 황제가 되어 국호를 금(金)이라 정하였다. 명나라는 광해군 10년(1618)에 요동을 침범한 후금을 토벌할 때 조선에 원병을 요청했다. 조선은 명의 재조지은(再造之恩)으로 인해 동년 8월에 강홍립(姜弘立, 1560~1627) 도원수, 김경서를 부원수로 화기병 13,000명을 파병하였다. 광해군은 전쟁터에 나가는 강홍립에게 명나라 장수의 말을 그대로 따르지 말고, 오직 패하지 않을 정도로만 대처하라고 각별하게 격려하며 당부했다.
▲ 사르흐전투 누르하치 동상(사진:바이두백과)
강홍립 도원수는 1619년 3월 4일 부차전투(富車戰鬪)에서 명군 사령부 유정 제독의 작전 실패로 명군 1만 명과 조선군 8,000명이 몰살당했다. 당시 조선군은 명의 서로군과 북로군이 후금군에게 궤멸당한 것을 몰랐다. 평지로 이동하다 누르하치의 아들 귀영가(貴盈哥)가 이끄는 3만 명의 기동작전에 걸려 패배했다. 당시 강홍립은 말먹이가 떨어지고 군량이 전혀 보급되지 않는 불리한 상황에 빠져있어 후금과 강화 교섭을 하여 조선 병사 5,000명의 목숨을 구했다.
강홍립은 조선 장수의 명예를 더럽히지 않았다. 그는 10년 만에 전쟁포로 신분으로 귀환했다. 후금의 홍타이지는 1627년 조선을 침공할 때 사촌 형 아민에게 군대를 내주어 한윤을 길잡이로 삼고 강홍립을 대동해 안주(安州)를 차지하였다. 조선에 돌아온 강홍립 장군은 1년 4개월이 지나서 1628년 7월 7일 병사하여 서울 관악구 난향동(蘭香洞)에 묻혔다. 무덤이 있는 곳은 조선에서는 난곡리(蘭谷里)로 부르다가 근래 신림7동을 거쳐 난향동이 되었다. 동명은 강홍립이 난초를 많이 심어 그 향기가 그윽하다는 데에서 유래되었다.
▲ 화가 김후신(金厚臣, 1710~1757)의 파진대적도’(擺陳對賊圖)(사진:규장각)
강홍립은 후금 진영에 있을 때도 조선 조정과 긴밀하게 교류하며 복잡한 국제관계와 강화 체결을 매듭지고 후금군의 약탈을 사전에 방지토록 하였다. 조선 조정에서는 그를 역적으로 몰아 의심했지만, 광해군이 그를 옹호해 주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후 강홍립은 관직을 박탈당했다. 그는 적지에서 살아남아 조선을 생각하며 묵묵히 자기의 길을 걸었다, 강홍립의 할아버지는 우의정을 지낸 강사상(姜士尙)이고, 아버지는 임진왜란 때 강원도 관찰사로 있으면서 군사 2,000명을 이끌고 왜군 선박을 나포한 강신(姜紳, 1543~1615)이다. 국어학자 권혁래 교수는 《책중일록》을 분석해 강홍립을 새롭게 평가했다.
윤훤(尹暄, 1573~1627)은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윤두수의 아들로 1625년에 부체찰사 겸 평안감사로 부임해 변방의 혼란한 사정을 빠르게 간파하고 6,000명의 병력을 확보했다. 병사들은 조련된 군사가 아닌 민가에서 징발한 노약자 농민으로 구성된 군대였지만,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군사를 이끌고 안주성에서 싸웠다. 당시 병사는 두려움에 빠져 상당수가 도주하여 안주성을 싸우지도 못하고 빼앗겼다. 윤훤은 후퇴하여 평양에서 싸우고자 주장했지만, 종사관 홍명구의 건의를 받아들여 후방 성천으로 철군하였다.
▲ 문신 윤훤(尹暄)(사진:위키백과)
윤훤은 1624년 인조의 책봉을 받는 책봉 주청사로 명에 다녀왔다. 조선 조정에서는 후금 군대와 제대로 싸우지 못하고 퇴각하여 영토를 빼앗기고 전선을 뒤로 철군한 장본인으로 윤훤을 지목하고 연일 대간의 간쟁(諫諍)이 있었다. 인조는 대간의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다가 결국에 윤훤(尹暄)을 군문(軍門)에 효수(梟首, 縣竿示衆)하도록 명했다.
명나라 장수 유흥치(劉興治)는 후금에 귀부(歸附)하여 활동하다가 1630년 4월에 진계성과 흠차통판 유흥학 등 100여 명을 죽이고 조선 영토 가도(假島)에 주둔하는 명군 모문룡에게 다시 투항했다. 유흥치는 모문룡이 죽은 후 1630년 4월부터 1631년 3월까지 가도를 집권하며 후금과 동맹을 맺는다. 이때 조선과 명, 후금 사이에 묘한 긴장감이 돌고 정세 상황이 급변했다. 요민(遼民)들이 명을 배신하고 후금과 몰래 내통할 가능성이 생겼다. 조선 땅에 눌러앉아 살려던 수많은 요민(遼民) 때문에 조선 조정은 항상 시끄러웠다, 당시 조정에서는 강력한 토벌론과 청진강 이북의 통치를 잠시 유보하자는 청북포기론 두 가지가 대립했다. 당시 명나라와 후금은 모두 동강진의 전략적 가치를 중시했다.
▲ 정묘호란, 병자호란 전개도(자료:나무위키)
후금은 1631년 홍이포(紅夷砲)를 설치하고 기술을 배워 손수 제작하여 화력을 대폭 증강하였다. 후금은 오랑캐 이(夷)란 명칭이 싫어 홍의포(紅衣砲)로 바꿔 불렀다. 1636년 후금은 국호를 청으로 바꾸고 명을 치기 전에 먼저 조선 공략을 결정했다.
청은 선봉장으로 마부대(馬夫大, 마푸타)가 기병 300명을 이끌고 12월 8일 압록강을 지나 의주를 통과하고 6일 만에 파죽지세로 경기도까지 진출하여 조선 조정과 비밀리에 외교를 하였다. 당시 조선은 의주 백마산성에 임경업 장군이 3,000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방어에 나섰고, 안주성은 유림 장군이, 영변 철옹산성은 신경원 장군이 3,000명의 장졸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청군 지휘자들은 전투를 회피하고 그대로 남하해 조선 왕성을 공략했다.
청의 좌익군 1,200명이 얼어붙은 압록강을 도강하여 12월 8일 창성에 진입하자 창성 부사 조응립과 삭주 부사 이명립은 입보군 500명을 각각 이끌고 당아산성로 들어갔다. 도르곤이 선봉대를 보내 조선군을 찾도록 하자 길 안내를 맡은 조선인 향도는 일부러 다른 길로 빙빙 돌아 시간을 끌어 12월 14일 밤에 당아산성(螳蛾山城, 900m)에 도착했다. 이 덕분에 백성들은 산성에 피신했다. 조응립은 성이 튼튼한 것만 자신하고 방비를 엄하게 하지 않아 청나라 병사가 야음을 타고 경사가 가파른 북면 절벽을 타고 넘어와 당아산성을 급습해 많은 군사가 죽고 몇몇 살아남은 장수만 도주했다. 청군은 약산 철옹산성을 거쳐 12월 20일 안주에 도착했다. 홍타이지와 본군 기마병 6,000명이 12월 10일 압록강을 도강하고 의주를 지나 15일에 평북 안주성에서 공방전을 하였다. 청군 본군은 조선으로 신속하게 이동해 개성을 지나 송파 들판에 진영을 잡고 남한산 위에서 포대를 운영하며 포를 발사해 막강한 군사력을 자랑했다.
▲ 삼전도비 지도(자료:규장각)
1637년 1월 26일부터 29일까지 남한산성을 지원하기 위해 남쪽으로 향하던 평안도 관찰사 홍명구(1596~1637)의 근왕군(勤王軍) 2,000명과 평안도 병마절도사 유림(1581~1643) 장군의 3,000명 연합군사가 김화 생창리에서 청나라 병사들과 싸워 청의 병사 3,000명을 죽이고 승리했다. 당시 홍명구는 청군이 조선군을 피해 다른 길로 진출할 것을 우려해 평지에 진을 쳤고, 유림은 병력 부족을 이유로 백전(栢田, 城齋山, 471m)에 진을 쳤다. 백전 전투에서 홍명구는 절명했다.
필자는 병자호란 2대 승첩지(勝捷地)인 김화 백전(栢田) 전투 지역을 돌아보고 충렬사를 참배했다. 철책선 안에 조선군이 묻힌 전골총이 있어 보병 제3사단 장병이 묘역을 잘 돌보고 있다. 겸재 정선(1676~1759)은 화강백전(花江栢田)의 승리를 기념해 수묵화를 그렸다.
1636년 겨울 조선의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피난해 45일간 저항하다 강화도가 함락당하고 식량이 모두 떨어져 2월 24일 송파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군신의 예를 행했다. 청 태종은 조선에 구제역이 횡횡하여 돌자 급하게 청으로 돌아갔다. 병자호란이 끝나고 백성 60만 명이 청에 포로로 끌려갔는데 이런 비극은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참극 현장이었다. 포로들은 끝내 조선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선양, 베이징, 길림 등지에서 생애를 마쳤다.
청의 장수 마부타는 인조 15년(1637) 6월 26일에 인조가 절한 자리에 단(壇)을 세우도록 요구한다. 5개월이 지나 청의 사신은 승첩비를 세우라고 강권했지만, 인조와 대신들은 이를 받아들이기가 두렵고 거북해 비석 세우는 일을 계속 늦추었다. 그러자 서인의 영수이며 연장자인 김류(金瑬, 1571~1648)가 청원을 올려 마지못해 사업이 재개되었다. 김류는 인조 밑에서 3번이라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단은 한강의 홍수가 나면 침수할 우려가 있으므로 크게 개조하고 청문과 담장까지 세웠다. 남은 것은 비석과 비각만 만들면 되었다. 청나라가 비석을 세우는데 큰 관심을 보였다.
▲ 청나라 대학사 범문정(范文正)(사진:바이두백과)
음력 11월 24일 책봉사로 온 타타라 일굴다이와 마부타가 직접 삼전도 현장을 답사하고, 다음날 인조와 귀부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사신들은 이 자리에서 비문의 초안을 요구했다. 인조는 “애초 청나라가 우리에게 글을 주겠다고 하여 기다리고 있었다. 보여달라는 것은 소국이 감당할 바가 아니다. 소국에는 찬술할 만한 인재가 없으니 지어 보내 달라.”라고 말했다. 청 사신은 황제의 교령을 핑계하며 황제가 볼 수 있도록 문안을 지어달라고 재차 요청하여 인조는 대신들에게 글을 짓도록 명하였다.
《인조실록》에 의하면 당시 4대 문장가로 이름난 장유(張維, 1587~1638), 이경전, 조희일, 이경석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는데, 조희일은 고의로 글을 거칠게 작성하고, 이경전은 처음부터 병을 핑계로 짓지 않았다. 공조판서 장유와 이경석이 글이 지어 청 사신들이 출발하기 직전에 전달되었다. 청나라 사신은 두 대신의 글을 청나라에 가져가 청나라 대학사 범문정(范文正, 1597~1666)에 전달하여 대학사가 검토하였다.
▲ 북송 범중엄(范仲淹) 초상화(사진:Yahoo)
범문정은 북송의 명신인 범중엄(范仲淹)의 17대손으로 그의 집안은 16세기 초에 만주로 이주하였다. 범문정은 18세에 과거 원시에 합격하여 선양에서 생원이 되었다. 누르하치가 선양을 공격했을 때 21세 나이에 포로가 되어 심문을 받았다. 황제는 “젊은 선비의 재주가 대단하다.”라고 감탄하고 등용해 누르하치의 군사(軍師)가 되었다. 범문정은 명나라의 요동총사령관 원숭환과의 대치에서 반간계를 이용해 청 태종이 전쟁을 하지 않고도 명나라 군대를 물리치게 했다. 그는 좋은 정책을 자주 내어 누르하치. 홍타이지. 순치제, 강희제의 아래에서 만주족이 대륙을 장악해 통치하는데 큰 공을 세워 한족으론 처음 의정대신에 올랐다.
범문정은 후금을 청으로 바꾸고 새로운 국가로 건설하는 정책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다. 강희제는 범문정이 죽은 후에 원보고풍(元甫高風)이라는 서액을 내려 업적을 기렸다,
▲ 평서왕 오삼계(吳三桂) 영역 지도(사진:바이두백과)
범문정은 장유의 글에 등장하는 견양(牽羊; 치욕적인 항복 의례, 順手牽羊)이라는 대목에 문제점이 있다고 보았다, 견양은 춘추시대 정(鄭) 군주 양공이 초(楚) 장왕에게 져서 항복한 일에서 시작된 고사(古事)로 이는 제후끼리의 고사이므로 온당치 않다고 지적하였다. 대학사는 이경석(李景奭)의 글은 쓸만하지만, 내용이 너무 빈약해 적어준 내용을 추가하도록 회답을 해주었다. 당시 범문정이 적어준 청 태종 비문 원본이 대만에서 발견되었다.
범문정의 아들 범승모(1624~1676)는 복건성 총독을 지냈다. 범승모는 평서왕 오삼계(吳三桂), 평남왕 상가희(尙可喜), 정남왕 경정충(耿精忠)이 일으킨 삼번의 난(三藩之亂, 1673~1681) 때인 1674년 3월 경정충이 대만 정씨 왕국과 힘을 합쳐 반란을 일으킬 때 포로로 잡혀 2년간 옥에 갇혀있다 처형당했다. 1681년 강희제가 삼번의 난을 모두 평정해 통일을 이루고 황조(皇朝) 통치를 굳건하게 확립하면서 죽은 범승모 총독에게 충정의 호를 내려주었다.
▲ 삼번지란 형세 지도(사진:바이두백과)
조선왕조 인조는 이경석(李景奭)을 불러 “저들이 글로 우리의 향배를 시험하고자 하오니 이는 국가의 존망이 걸린 일이다, 잘 헤아려 저들의 마음에 들게 글을 지어서 사태가 더 악화가 되지 않도록 하라.”라고 간곡히 부탁하였다. 이경석이 작성한 비문 글은 6월에 사신 편으로 청나라에 도착하고 7월에 승인을 받았다. 비석을 더 크게 만들라는 주문에 따라 음력 8월 16일 석공들을 충주로 보내 돌을 캐어 한강 수로를 따라 운반하려고 계획했지만, 비가 내리지 않아 돌을 운반하지 못했다. 다음 해인 1639년 봄이 되어 간신히 돌을 충주에서 삼전도까지 실어 올 수 있었다. 강가에 도착한 돌을 비각으로 운반하는 데 원석이 너무 무거워 400여 명의 군사가 동원되어 비각까지 운반했다. 음력 6월 25일에 청나라 사신 마푸타가 한양에 돌아와 삼전도를 찾아가 조선 조정은 비문 작업에 더욱 신경을 썼다.
비문 상단의 전서체로 쓴 제목 전액은 선조의 딸인 정숙옹주와 혼인하여 동양위(東陽尉)에 봉해진 선조의 부마 신익성(申翊聖, 1588~1644)이 쓰고, 본문은 영접사를 맡은 오준이 쓰도록 약조되었으나 다음 날 신익성이 급하게 상소를 올렸다. “신의 오른팔이 갑자기 마비되어 붓을 못 든다.”라는 내용이었다.
▲ 조선 선조 부마 신익성(사진;위키백과)
신익성은 병자호란 당시 대표적인 주화파로 한 신하가 세자를 청에 볼모로 보내자고 말하자, 칼을 뽑아 위협했다. 그는 전서의 대가로, 삼전도비사자관(三田渡碑寫字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끝내 이를 거부하고 사퇴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