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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6.26. 11:25 (2025.06.26. 10:52)

【열하일기 11】만주·몽골·한문 등 3개어 새긴 비문,.수차례 버려졌다 다시 세워져...굴욕의 교훈으로 사적 101호 지정

 
삼전도비 건립
조선 조정은 신익성의 병환을 급히 협의하여 제액은 예조참판 여이징이 쓰게 하였다. 밤을 새워가면서 6월 27일에 간신히 제액이 완성되었다. 이제 문제는 돌에 새기는 일만 남았다. 좁은 공간에 여러 글자로 나누어 쓰려고 하니 작업이 더욱 느려졌다.
만주·몽골·한문 등 3개어 새긴 비문,.수차례 버려졌다 다시 세워져...굴욕의 교훈으로 사적 101호 지정
삼전도비 건립
 
 
조선 조정은 신익성의 병환을 급히 협의하여 제액은 예조참판 여이징이 쓰게 하였다. 밤을 새워가면서 6월 27일에 간신히 제액이 완성되었다. 이제 문제는 돌에 새기는 일만 남았다. 좁은 공간에 여러 글자로 나누어 쓰려고 하니 작업이 더욱 느려졌다. 마부타는 비가 서는 것을 보고 가겠다고 계속 억지를 부렸다. 삼전도에서는 도저히 작업이 안 된다고 하소연하여 결국 마부타가 양보하여 “늦더라도 제대로 새기라!”라는 부탁을 하고 귀국길에 나섰다.
 
 
▲ 서울 삼전도비(사진:국가유산청)
 
 
마부타가 떠난 지 22일 만인 음력 7월 28일에 작업이 완성되고 탁본을 떠 마부타에게 보냈다. 그런데 연말이 되자 청 사신단이 다시 와서 앞면에는 만주글자, 몽골글자만 새기고 한문은 뒷면에 새기는 것으로 체제를 바꿔버렸다. 모든 일이 헛수고가 되어 형조참판 오준이 다시 삼전도로 가서 글을 다시 썼다. 오준이 현장을 감독하는 가운데 음력 11월 20일 저녁부터 23명의 석공이 매달려 밤낮으로 글자를 새겨 청 사신이 도착하는 28일 오후에 간신히 작업을 마칠 수가 있었다. 남은 작업은 한문으로 된 비문을 만주글자와 몽골문자로 번역하여 새기는 일이지만, 조선에서는 이를 아는 사람이 적어 제대로 작업을 할 수 없었다. 다행히 청 태종이 마부타와 함께 차브하이. 이서봉, 비리삭투 박시(文官)를 보내서 작업을 마칠 수 있었다.
 
송파구 석촌호수 옆에는 1637년 당시 도승지였던 이경석(李景奭, 1595~1671)이 비문에 들어갈 글을 짓고, 명필 한성부 판윤 오준(吳竣, 1587~1666)이 글씨를 맡고, 이조참판 여이징(呂爾徵, 1588~1656)이 쓴 높이 3.95m의 대청 황제공덕비가 있다.
 
 
▲ 청 태종(사진;위키백과)
 
 
조선 인조 17년(1639) 12월 8일에 세워진 삼전도 비석 앞면 왼쪽에는 몽골글자, 오른쪽에 만주글자, 뒷면에는 한자로 기록되었다. 이경석은 “글공부를 한 것이 천추의 한이로구나!”라고 형에게 탄식했다. 한석봉의 제자이며 왕희지체에 능한 오준은 글씨를 쓰고 나서 한강으로 나가 큰 돌로 자신의 오른손을 내려쳤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번역문]
 
황제께서 십만 군대로 동방에 원정 오니
천둥 같은 기세에다 범처럼 용맹했네. (중략)
우리 임금 복종하여 다 함께 귀순하니
위엄 때문 아니요, 덕에 귀의한 것이라네.
황제께서 가상히 여겨 은택을 베푸시고
온화한 낯빛으로 창과 방패 거두셨네. (중략)
우리 임금 돌아오니 황제의 은덕이요
황제께서 군대 돌려 우리 백성 살리셨네. (중략)
우뚝한 비석이 한강 가에 서 있으니
만년토록 조선 땅에 황제의 덕 빛나리라.
 
[원문]
 
皇帝東征, 十萬其師. 殷殷轟轟, 如虎如豼. (中略) 我后祗服, 相率以歸. 匪惟怛威, 惟德之依. 皇帝嘉之, 澤洽禮優. 載色載笑, 爰束戈矛. (中略) 我后言旋, 皇帝之賜. 皇帝班師, 活我赤子. (中略) 有石巍然, 大江之頭. 萬載三韓, 皇帝之休.
 
 
 
▲ 1741년 겸재 정선 송파진(松坡津)(사진:동아일보)
 
 
삼전도 비문에 등장하는 청나라의 군사 규모는 사료로 확실하게 밝혀진 것이 없다. 삼전도 비문에 등장하는 상징적인 숫자 10만(十萬)에만 단순히 의존하고 있다. 서울 삼전도 비문의 실증적인 연구자는 타이완의 역사학자이며 국립 칭화대학(清华大学)에서 교편을 잡은 황일농(黃一農, 1956~ ) 교수이다. 그는 2004년 팔기한군(八旗漢軍) 문제를 다룬 논문을 통해 병력 규모를 약 2만 명으로 추산했다.
 
 
▲ 황일농(黃一農)교수(사진:國立臺灣師範大學)
 
 
서울대 구범진 교수와 제자 이재경이 2008년에 발표한 공동논문 〈丙子胡亂 당시 淸軍의 構成과 規模〉에서 구 교수는 청군 진영의 정규 병력을 대략 34,000명 정도로 추정하고 병자호란 당시 참전 병력은 약 1만 명이라고 추정했다.
 
병자호란이 끝난 후 조선 조정은 가도(假島)에 대한 식량 지원을 중단했다. 1637년 4월 9일 임경업 장군을 수장으로 청나라 군대와 연합하여 평북 철산군 가도를 토벌했다. 이때 가도 도독 심세괴(沈世魁, 1576~1637)는 5만 명의 군사로 저항하다 죽어 가도의 동강진은 병자호란이 끝난 1637년에 붕괴되었다.
 
 
▲ 김윤겸(1711~1775)의 '호병도(胡兵圖)'(사진:국립중앙박물관)
 
 
1642년 선천부사 이계는 명나라 상선과 밀무역을 하다 청나라 군사들에게 걸려 잡혀갔다. 이계는 옥에 구금되어 용골대의 심문을 받게 되자 이를 모면하려고 “조선이 명을 지지하고 청을 배척한다.”라고 말하며 척화(斥和) 5신으로 신익성, 신익전, 허계, 이명한, 이경여를 지목해 그들은 선양(瀋陽)으로 압송당해 억류되고, 의주에 있던 김상헌도 고초를 겪었다.
 
용골대의 보고를 받은 청 태종은 “이계가 사실대로 고하긴 했지만, 나라를 팔아 제 목숨을 구하려고 했기에 죄가 무겁다. 조선 국왕은 법에 따라 처단하라.”라고 말했다. 조선 조정에서는 의금부도사 정석문을 보내 1642년 이계를 참수하였다. 그때 다시 황제가 구금만 하라고 연락이 왔지만, 이미 처형이 끝난 뒤였다.
 
신익성은 억류 생활에도 조금도 굴하지 않고 있었다. 그는 소현세자가 신익성 형제가 국왕의 인척임을 주장하여 다음 해 2월 방면되어 귀국해 선양에 체류한 경험을 담은 《북정록(北征錄)》를 지었다. 그는 귀국 후 시를 쓰며 세월을 보냈다.
 
 
▲ 서울 삼전도비(사진:궁인창)
 
 
조선왕조 말기, 한성 삼전도에 있는 대청황제 공덕비는 청 사신들이 조선에 올 때마다 제일 먼저 참배했다. 갑오전쟁이 패배하고 청나라 세력이 조선에서 물러나면서, 이 비는 조선 고종 32년(1895) 3월에 비문을 강 속으로 던져졌다. 1909년 민간인의 밭에 쓰러진 채 발견된 비석을 일제강점기인 1917년에 다시 세웠다. 비각은 1925년 을축년 홍수로 무너졌다.
 
1945년 광복 직후에 동네 주민이 땅속에 묻었다가 세어졌다. 당시 송파동의 동장으로 있었던 정호성(鄭虎成) 씨의 증언에 따르면 “1952년 고위층의 지시로 대한독립청년단원이 주축이 되어 200여 명이 밧줄을 걸고 넘어트리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라고 말했다. 이승만 대통령이 “국치의 비여서 보기 싫으나 귀중한 것이니 잘 보관하라”라는 명령을 내려 작업자들은 비신 을 크레인으로 뽑아 다시 묻었다.
 
 
▲ 1916년 촬영한 삼전도비(사진:국가유산청)
 
 
다음 해 큰 장마로 강둑과 수항단(受降檀))이 유실되어 비신이 노출되어 1959년 가을에 한 달간 작업하였다. 1963년 한강 대홍수로 땅이 침식되면서 몸돌이 드러나 사적 101호로 지정하고 석촌동 289-3으로 이전했다. 1981년 남한산성을 다녀온 전두환은 굴욕의 역사에서도 교훈을 얻으라는 지시를 내려 삼전도비 주변을 정비하고 1982년 공원으로 지정했다. 비문은 1983년 송파대로 확장으로 삼전동으로 이전했다. 2007년 2월 3일에 ‘철거 370’ 이란 글자를 페인트로 적은 낙서 사건이 벌어져 문화재청은 3개월의 복구 기간을 거쳐 문화재 가치가 적은 부조 동판은 철거하고 서울시립대 서울학연구소 배우성 교수에게 삼전도비 건립 위치 고증 연구 용역을 맡겼다. 서울학연구소 측은 보고서에서 “삼전도비는 송파진에 세워졌다.”라고 보고하며 최초 건립 위치를 추정하여 서울 삼전도비는 2010년 4월 25일 석촌호수 서호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 서울 삼전도비(사진:궁인창)
 
 
언어학자 성백인(成百仁, 1933~2018)은 만주 퉁구스 어학이 전공으로 삼전도 비문 만 한문(滿·漢文) 표기법에 지대한 관심을 두고 〈三田渡碑 滿洲文〉 논문을 발표했다. 당시 만주어가 사용되기 시작한 지 7년밖에 되지 않은 시점이라 만주어 표기 연구에 아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언어학자 김방한(金芳漢, 1925~2001) 교수는 알타이 어학이 전공으로 몽골어에 능통해 삼전도 비문을 탁본해 성 교수에게 제공하고, 1965년에 〈삼전도비 몽문에 관하여〉 논문을 발표해 성백인 교수 논문 작성과 해석에 큰 도움을 주었다.
 
미국 하버드대학교의 프랜시스 우드먼 클리브스(Francis Woodman Cleaves, 1911~1995) 교수는 보스턴에서 태어나 뉴햄프셔에서 사망했다. 그는 미국에서 몽골 연구의 선구자, 창시자로 뛰어난 언어학자, 역사가이다. 김방한 선생은 1959년 하버드대에서 1·2학기를 클리브스 교수로부터 몽골어를 배우고 교수의 소개로 Mostaert 신부를 만나 오르도스 구비집의 몽골어를 배웠다. 최신 삼전도비 몽문 연구는 미국 클리브스 교수의 1995, 1996년 해독이 가장 최근의 것이다.
 
 
▲ Francis Woodman Cleaves 교수 (사진:American Center for Mongolian Studies – ACMS)
 
 
심영환 박사는 청나라 조정의 몽골인이 주로 호르친부(코르친부, 중국어: 科爾沁部 Kē'ěrqìn bù, 만주어: ᠬᠤᠷᠴᠢᠨ, 몽골어: Хорчин Khorchin)라는 점에 착안해 동부 몽골어인 호르친 방언(qorčin dialect)으로 삼전도비를 연구하였다. 이 부족은 칭기스 카안의 동생 주치 카사르와 그 후예로 누르하치와 결혼 동맹을 맺은 강력한 몽골 부족이다.
 
정민 교수는 조선판 국방백서 《비어고(備禦考)》의 실제 저자가 다산 정약용(丁若鏞)이라고 주장한다. 《비어고(備禦考)》 책에는 동북아에서 벌어진 전쟁사와 군수 보급방법, 병력 운용 등이 자세하게 수록되어 있다, 책은 단순히 전쟁 기술이나 군사 전략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백성을 보호하고 국가를 지키는 데 필요한 모든 요소를 포괄적으로 다루고 있다.
 
국방 정책, 군사 전략, 요새 및 성곽 축조, 병기, 장비, 무기 체계, 장비 관리, 군수 물자, 군사 교육, 군인들의 훈련 방법, 정신 교육의 중요성, 민방위 및 민생, 생활 안정을 위한 정책들을 제시했다. 다산은 1789년 겨울에 왕명으로 한강교 주교(舟橋)를 설치하고, 1792년 화성 축성을 하였다. 다산이 유배로 죄인의 신분이라 자신의 이름 대신 제자 이중협과 정주응(鄭周應)의 이름을 빌렸다. 다산이 실제로 구상한 것들이 대부분 책에 실현되었다.
 
규장각 본 《비어고(備禦考)》는 일본을 주 대상으로 삼았고, 양종의 《미산총서(眉山叢書)》는 청을 염두에 두었다. 이 문헌에 선현들의 각종 군사 관련 저술을 망라하고, 전쟁사를 정리해 한 질의 방대한 저술을 기획하였다. 《비어고(備禦考)》 〈道路考〉에 연근해 육로와 수로 지도가 있다. 특히 압록강 어귀에서 旅順 입구, 金州와 山東省 연변, 아래로 浙江省과 福建省 남쪽까지의 물길 및 당시의 朝聘 도로를 채록했다. 〈武備考〉엔 척계광의 《紀效新書》를 발췌했다.
 
 
▲ 남한산성 남문과 지화문 현판(사진:궁인창)
 
 
경기도 광주시 남한산성을 방문하면 청량산 정상에 있는 수어장대로 올라가 한강 물줄기와 석촌호수 주변 삼전도비를 조망하고 하산 길에 남문에 들려 정조의 글씨를 집자한 지화문(至和門) 현판을 만난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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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