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지식놀이터
지식자료
지식자료 구독
구독 내역
게시판
게시판
작업요청
최근 작업 현황
지식창고
지식창고 개설 현황
자료실
사용자메뉴얼
about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5.07.12. 22:07 (2025.07.12. 21:54)

【열하일기 21】누르하치, 25세 13벌 갑옷 군사 일으켜 만주벌판 흩어진 여진족 통일

 
소백기와 팔기제도
만주에서 여진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 1559~1626),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 愛新覺羅)는 랴오닝성(遼寧) 新賓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열하일기 21】누르하치, 25세 13벌 갑옷 군사 일으켜 만주벌판 흩어진 여진족 통일
소백기와 팔기제도
 
 
만주에서 여진족 족장의 아들로 태어난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 1559~1626), 아이신 기오로(Aisin gioro, 愛新覺羅)는 랴오닝성(遼寧) 新賓에서 태어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좋아하고 무예가 뛰어났다. 그는 건주 좌위지휘직을 세습했으나 당시 집에 남은 것은 낡은 갑옷 13벌뿐이었다. 그는 산에서 잣이나 인삼을 캐서 명나라 상인에게 팔아 생계를 유지하다 25세 때 13벌의 갑옷으로 군사를 일으켰다. 누르하치는 건주여진(建州女眞), 해서여진(海西女眞)을 통합하며 가는 곳마다 승리를 얻어 만주 벌판에 흩어진 모든 여진족을 통일했다.
 
누르하치라는 이름은 여진어(女眞語)로 ‘멧돼지 가죽’이라고 한다. 그는 멧돼지 같은 힘과 용맹을 지녀 싸움터에서 비범한 책략과 놀라운 투혼을 발휘했다. 누르하치는 때가 왔다고 판단하고 1616년 한(汗, Khan)의 지위에 올라 국호는 금(金)나라의 뒤를 잇는다는 의미에서 대금(大金, 後金)으로 지었다. 연호는 천명(天命)이다.
 
해서여진의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 1068~1123)는 1115년 금나라를 건국하여 9년 동안 재위하였다. 금나라는 남송과 평화롭게 지냈으나 1189년부터 남송과 싸우고, 1211년부터 몽골제국과 23년간 전쟁하다 1234년 패해 멸망했다. 《요사》>와 《송사》는 아고달(阿古達)로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만주어 ‘아구다(Aguda)’를 가차한 것으로 ‘너그럽고 넓은 아량이나 모양(寛濶)’을 나타내는 말이다.
 
 
▲ 금나라 태조 완안아골타(完顏阿骨打)(사진:위키백과)
 
 
천명 원년인 1618년에 후금은 명(明)을 공략하기 시작하여 무순(撫順), 요양(遼陽)의 성을 차례대로 함락시키고 선양(瀋陽)으로 천도했다. 여진의 이름도 만주(滿洲)라고 개명했다.
 
만주는 현재 동북 3성인 랴오닝, 지린, 헤이룽장과 내몽골 자치구 동부, 때로는 대흥안령 이남과 사할린을 포함한 외만주까지 넓은 지역을 말하는데 그 글자의 어원은 티베트 불교의 문수보살(文殊菩薩)의 지혜를 본받고 높은 덕을 찬양하기 위한 목적이었다.
 
청대의 수숭만주(首崇萬洲, 满洲根本)는 청나라의 기본 국책이 되었다. 누르하치는 1599년 가가이 자르구치와 어르더니(Erdene)에게 명해 만주문자를 만들고 팔기(八旗)군 제도를 제정했다. 1587년에 도성을 여진족 족장이자 누르하치의 할아버지인 지오창가의 거주지였던 헤투 알라(hetuala, 혁도아랍, 赫圖阿拉城)에 성을 쌓기 시작하여 1603년에 옮기라고 명했다.
 
헤투알라는 후금의 첫 수도로 1616년부터 1622년까지 사용되었다. 1634년에 청 왕조가 발흥(發興)한 곳이라는 뜻에서 싱징(興京)으로 이름을 변경하였다. 싱징 유적지는 중국 랴오닝성(遼寧省) 무순시(撫順市) 만주족 자치현인 신빈현(新賓縣) 영릉진(永陵鎭)의 소자하(蘇子河) 남쪽에 있는 성으로 훈강의 지류인 수지강이 있다.
 
 
▲ 팔기(八旗)(사진:바이두백과)
 
 
팔기군은 일종의 군사 세습직으로 평시에는 생업에 종사하다 유사시에 군대가 되는 조직이다. 누르하치를 불세출의 영웅으로 만든 팔기(八旗)군은 여진족 기병대 조직이다. 여진족은 고유의 사냥조직을 기(旗)라는 군사 조직으로 편성했다. 기본적인 편성은 성인 300명을 한 니루(niru, 화살)로 하여 5 니루를 1 잘란((jalan) 1,500명으로 하고 5 잘란을 1 귀사(gvsa)로 한다. 귀사를 중국어로 번역하여 기(旗)라고 부른다. 니루는 인구 증가에 따라 유연성 있게 150~400명으로 조정되었다.
 
팔기제도는 1601년에 비공식으로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1611년, 누르하치는 황, 백, 홍, 남, 네 가지 색기로 구분하고, 각 부대는 고유색의 천에 용을 그려 넣어 자체 군대를 상징하는 기로 사용했다.
 
누르하치는 여진족을 통일하고 1615년 네 가지 색깔을 기반으로 각 색깔을 정과 양으로 나누어 총 여덟 개의 깃발로 확장되었다. 이때의 깃발은 정황기, 양황기, 정백기, 양백기, 정홍기, 양홍기, 정람기, 양람기로 구성되었다. 각 깃발은 특정한 군단을 나타내며, 깃발의 색깔은 군단의 지위와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후 모든 만주족은 8개의 기 중 하나에 소속됐으며 후에는 몽골족이나 한족에 의해 편성된 팔기도 창설됐다.
 
이는 중원을 차지할 때도 강력한 군사력을 발휘했으며, 입성 이후에 청나라 제도의 중심이 됐다.
 
조선 사신단이 갔던 길은 국도에서 3~4㎞ 정도 벗어나 유하구를 지나 백기보(현 소백기보)로 향하지만, 우리가 탄 관광버스는 신민 시에서 G102번 국도를 따라 북진 시로 향하다 운전기사 장카이(张凯)가 두 갈래 갈림길에서 소백기보점 이정표를 발견하고 좌회전해 좁은 이차선 도로로 진입했다.
 
 
▲ 소백기보점(사진:궁인창)
 
 
버스가 한참 달리자 농촌풍경이 완연하게 달라졌다. 한참 후에 민가가 보이는 곳에 버스가 멈춰 섰다. 대원들은 버스에서 내려 민가로 다가갔다. 답사 대장이 신민의 집들은 대들보를 걸치지 않고 지붕 모양이 평상 같은 일자가옥(無樑屋)으로 길쭉하다고 설명을 해주었다.
 
조선 선비들은 이 고장을 지나가면서 요서 지방의 독특한 건축양식에 주목해 들보가 없이 지붕을 지탱하는 집을 보고 모두 기록했다. 이 마을 사람들은 평상시에는 농사를 짓고 군사훈련을 받아 집마다 군사 장비가 있다고 했다.
 
 
▲ 일자가옥(無樑屋)(사진:궁인창)
 
 
버스는 다시 한참 달리다 소백기 비석이 있는 마을을 찾아냈다. 장카이(张凯)는 2차선 도로에서 버스를 안전하게 주차할 넓은 장소를 찾아 대원을 내려주었다, 시원한 공기를 맛본 대원들은 20분간 걷기를 원했다. 일렬로 길을 걷다가 작은 가게를 만나 이래현 대원이 아이스크림과 빵을 사서 나눠주었다. 길을 따라 걷다 새로운 돌을 발견했다. 기념비 옆에는 소백기보촌이라는 한자가 들어간 가공공장이 있었다.
 
 
▲ 소백기보점비(사진:궁인창)
 
 
중국 신민(新民) 팔기군 유적지는 청나라의 팔기군과 관련된 역사적 유적지로 팔기군은 만주족의 군사 조직으로서 청나라의 군사적, 정치적, 사회적 구조의 핵심을 이루었다. 막강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명과 정면 대결을 선언한 누르하치는 같은 유목민족인 몽골족을 끌어들여 몽골 팔기를 창설하며 명나라 정복에 참여시켰다.
 
 
▲ 신민시 소백기보촌의 농업회사(사진:궁인창)
 
 
1618년 누르하치는 “일곱 가지 큰 원한(七大恨)”이라는 격문을 발표하고 명나라에 선전 포고를 했다. 누르하치는 몽골 귀족 가문과 적극적인 혼인 관계를 맺으면서 두 종족 간의 동맹 관계를 한층 공고하게 다져 나갔다. 누르하치와 그의 아들들은 모두 6명의 몽골 여인들과 결혼을 했다. 피로 맺어진 만주팔기와 몽골팔기는 공포의 기병대, 팔기군의 전설로 불리면서 한인들을 불안에 떨게 했다. 누르하치가 사망하고 아들 홍타이지가 가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대군을 동원해 만리장성을 넘어 진격해서 명나라 군대를 일거에 격파했다.
 
누르하치는 1626년 괴저병(등창)으로 애계보(靉鷄堡)에서 죽었지만, 튼튼한 기틀을 마련한 청나라는 268년간 지속되었다.
 
누루하치가 만든 팔기는 초기에 황색, 백색, 홍색, 남색 네 개의 깃발로 시작하여 후에 여덟 개의 깃발로 확장되었다. 깃발은 특정 지역의 군사 및 행정 단위를 나타내고 다른 뜻을 가졌다.
 
 
▲ 팔기(八旗) 재현(사진:바이두백과)
 
 
《중국통사요강(中国通史纲要)》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팔기 제도는 여진인을 군사 조직의 형태로 편성하여 여진 귀족의 통제하에 생산과 전쟁을 하는 것이다. 이런 사회 조직은 깃발을 호칭으로 하며, 깃발은 여덟 가지 색으로 나뉜다. 계획은 샹황기(镶黄旗), 정황기(正黄旗), 정백기(正白旗), 샹바이기(镶白旗), 정홍기(正红旗), 샹홍기(镶红旗), 정란기(正蓝旗), 샹란기(镶蓝旗)이다. 여기서 상감은 테두리를 두른다는 뜻으로 청룡의 노란색 깃발 둘레(화살표식 큰 깃발)에 붉은 테두리를 두른 것은 상황기를 위한 것이다. 镶는 때때로 厢이라고도 쓰는데, 청나라 황실의 기록에는 두 글자가 혼용되어 正이라고 읽힌다. 예를 들어, 노란색 깃발 전체에 이빨과 발톱을 가진 용이 수놓아져 있는데, 이는 정황기이다. 팔족(八族)은 청나라 만주 통치자의 통치 도구이지만, 기병(旗兵), 기민(旗民), 기인(旗人)은 만주인에 국한되지 않고, 몽골, 한족, 시버(锡伯), 고려 외 다른 민족도 있다.”
 
 
▲ 팔기(八旗)(사진:바이두백과)
 
 
팔기는 팔기만주(八旗满洲), 팔기몽골(八旗蒙古), 팔기한군(八旗汉军) 등으로 나뉜다. 1644년 청나라가 명나라에 승리해 중원을 제패한 이후 명나라 출신 사람들을 모아 녹영을 창설하였는데, 녹영은 팔기군의 3배에 이르는 막강한 조직이었다. 건륭제 시기에 팔기군은 10회의 원정을 하였다. 팔기는 모두 통치자의 도구이지만, 깃발과 깃발 사이에는 위계적인 차이가 분명히 존재한다.
 
옹정령전《雍正令典》에 상세한 설명이 있다. “상황, 정황, 정백 세 가지 깃발을 명령한다. 다른 것은 하오기이고, 또 다른 것은 가노가 조직한 포의좌령 하기민이다. 황색은 땅을 상징하며, 청나라의 황제와 직접 연결된 색으로 가장 높은 지위를 나타내며. 황색 깃발을 단 부대는 황제의 직속부대에 속했다. 백색은 물을 상징하며, 홍색은 태양을 상징하며 전투에서의 힘과 용기를 나타내다. 남색은 하늘을 상징한다. 팔기군의 깃발 색깔은 단순한 군사적 식별을 넘어, 만주족의 전통과 청나라의 정치적 구조를 반영하는 중요한 요소로 자리 잡았다.”
 
 
▲ 소백기보촌의 농업회사 창고(사진:궁인창)
 
 
선양에서 신민을 거쳐 긴 벌판을 보니 산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농지만 보였다, 도로의 가로수는 미루나무가 일렬로 심어져 방풍림 역할을 하고 집마다 지붕에 태양열 발전을 하고 있었다. 관광버스가 오기를 기다리면서 그늘에 있다가 소백기보촌의 농업회사를 보았다. 마당에는 아무도 없이 대문이 열려있어 멀리서 사진을 찍다 창고 천장을 구경하고 싶어 들어가니 강아지 두 마리가 나를 보고 좋아해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창고 천장을 구경하고 나오는데 할머니 한 분이 나와 어디서 온 사람이냐고 물었다. 시골 동네에 관광버스가 오고 외국 관광객이 많이 와 신기했던지 회사에서 일하던 8명 직원이 나와 우리 일행을 구경했다. 한 젊은 여성분이 한국어를 해 언어 소통이 되었다. 소백기보촌의 비석을 구경하러 한국에서 왔다고 말씀드리니 모두 신기해하며 반겨주었다.
 
 
▲ 《열하일기》 관광버스(사진:궁인창)
 
 
관광버스는 시원하게 달렸다. 도로변 풍광이 조금씩 새롭게 변하며 음식점도 보이고, 커다란 돌을 가공하는 공장이 보였다. 버스가 秦沈고속도로에 진입하는데 공사로 막혀 국도로 계속 달렸다. 도로가 혼잡해 오후 늦게 고속도로에 올라탔다. 운전기사 장카이(张凯)가 얼마나 고생하는지 생생하게 보고 경험했다. 여러 날 묵묵히 운전하는 그가 한없이 고마웠다.
 
 
▲ 국도변 신민시 恩州飯店(사진:궁인창)
 
 
신민 농촌 지역 팔기군 유적지는 팔기군 주둔지 중 하나로 이곳에서 팔기군의 군사적 활동이 있었음을 알려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이 유적은 청나라의 군사적 역사와 만주족의 문화적 유산을 이해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하며 청나라의 역사적 맥락을 탐구하는 데 중요한 장소로 여겨져 연구자와 관광객들에게 관심을 받고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