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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정보 수집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5.11.03. 15:09 (2025.11.03. 15:05)

매죽헌 성삼문 일가에 대한 파주지역 연관성 고찰 - 성희모 -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충절은 첫 번째 덕목이었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윤리사상이었다. 조선 건국시 공을 많이 세웠거나 단종복 위의 충절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충의지사들이야말로 충절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매죽헌 성삼문 일가에 대한 파주지역 연관성 고찰
- 성희모 -
 
 
1. 들어가는 말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삼았던 조선왕조에서 충절은 첫 번째 덕목이었고, 아무리 강조해도 모자람이 없는 윤리사상이었다. 조선 건국시 공을 많이 세웠거나 단종복 위의 충절로 목숨을 초개같이 버린 충의지사들이야말로 충절에 있어서는 두말 할 나위가 없을 것이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나 살다 죽으면 자기가 온 곳, 즉 지수화풍 의 본래 모습으로 돌아간다고 하는데, 충의를 목숨과 맞바꾼 그들은 지금 본래 온 곳으로 돌아가 있는 것일까.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 관모봉아래(성부터, 성깃터) 묻혀있는 성달생은 조선 최초 로 이루어진 무과시험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세종조에 육진개척등에 많은 공을 세웠 으며, 전국의 도 관찰사, 도절제사, 공조판서, 사은사, 판중추원사등 당대의 중임을 역임하였다. 그랬음에도 아들(승)과 손자(삼문)가 병자사화에 연루되어 역신의 아버지, 할아버지로 고신(告身)을 추탈당하고, 묘소마저 파헤쳐 평토하여 묘수호도 못 한채 수백년을 실전되어 내려오게 된다. 그러다가 300여년이 지나서야 신원이 되어 비석과 석물들을 찾아내어 오늘날과 같은 모양을 찾게 되었지만 파주에 워낙 인물 들이 많아서인지 이정표 하나 없이 자리하고 있다. 이번 논고에서는 단종복위운동의 가장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던 성삼문과 그의 가 족, 일가의 파주지역과의 연관성을 살펴보기로 하겠다. 성삼문과 부친 성승, 조부 성달생과 단종복위운동 사건으로 벼슬과 멀어지는 재종지간 성담수, 조카 때문에 충청도에서 죽은 후에야 고향으로 돌아온 성희, 그의 큰아들인 생육신 성담수, 성담년의 궤적을 살펴보며 충절의 삶을 살았던 그들의 흔적을 재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아울러 신원과 신주의 발견과 이동경로를 아울러 더듬어 살펴보기로 한다.
 
2. 매죽헌 성삼문의 생애와 출생지
 
1) 매죽헌 성삼문의 생애
 
성삼문은 조선시대 문신으로 자는 근보謹甫, 호는 매죽헌梅竹軒 으로 아버지는 도총관 승이며 어머니는 현감 박첨의 딸이다. 1418년(태종18)에 홍주 외가에서 태어났는데 태어날 때 하늘에서 “나았느?”하는 소리가 세 번째 들릴 때 낳았다 고하여 삼문이라 지었다한다. 매죽헌의 본고향은 조부 달생의 별업지지였던 충남 연산(현 논산)의 햔양촌이었다. 외가는 죽산 박씨가로서 안협현감 박첨의 외손이다. 출생한 집터는 확실치 않으나 현재 노은단 관리인 황맹수씨가 살고 있는 집터라 전한다. 생가 앞마당에 오동나무 한그루가 있었는데 과거에 급제한 후 이 나무에 북을 달고 축하연을 베풀었다는 기록이 있으며, 1936년 이 오동나무 를 수호하기 위하여 담장을 축조했다는 사실이 비문에도 실려 있으나 지금은 흔적 이 없다. 한양의 살던 집터는 경복궁 동쪽에서 계동으로 넘어가는 나지막한 둔덕 일대의 화동이다. 장원서가 있던 곳이다. 그 뜰에 매죽헌이 심었다는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고도 했다.1)(종로구 화동 23번지. 옛 경기중 고등학교 뒤) 1447년 문과중시에 장원으로 급제하였다. 세종의 신임과 총애를 받으면서 집현전 박사를 거치며, 1442년 사가독서 하였고 임금의 명에 의하여 <예기대문언독>을 펴 냈다. 세종이 훈민정음을 만들 때 정인지, 최항, 박팽년, 신숙주, 이개등과 함께 공이 컸다. 특히 신숙주와 같이 요동에 유배 중이던 유명한 한림학사 황찬에게 자문을 구하러 여러 번 왕래하여 1446년 10월 9일에 역사적인 훈민정음을 반포하는데 공이 컸다. 이후의 관직생활은 충직한 성격 탓에 시련이 많았다. 1453(단종1)년 좌사간으로 있을 때 수양이 계유정난을 일으켜 황보인 김종서 등을 죽이고 스스로 정권과 병권을 잡으면서 그에게 정난공신 3등의 칭호를 내렸으나 사양하는 상소를 올렸다. 1455년 예방승지가 되었으나 그해 세조의 왕권찬탈과정을 보면서 국새를 끌어안고 통곡하였다. 박팽년이 경회루 못에 빠져 죽으려하자 이를 말리며 “이제 왕위는 비록 옮겨졌으나, 임금께서 아직 상왕으로 계시니 다시 도모하다가 이루지 못하면 죽어도 또한 늦지 않다.”고 말렸다. 아버지 승의 지시에 따라 박중림, 박팽년, 유응부, 허조, 권자신, 이개, 유성원 등을 포섭해 거사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거사일 전날에 집현전에서 비밀회의를 열고 그의 아버지 승과 유응부등 무신들에게는 운검(雲劒)으로 세조와 윤사로(尹師 路)·권람(權擥)·한명회(韓明澮)를, 병조정랑 윤영손(尹鈴孫)에게는 신숙주를 각각 제거하도록 분담을 시켰다. 그리고 김질에게는 그의 장인인 정창손(鄭昌孫)으로 하여금 상왕복위를 주장하도록 설득하라 하였다. 그러나 당일 아침에 갑자기 연회장소가 좁다는 이유로 운검의 시립이 폐지되자 그날의 거사는 일단 중지되고, 차질이 생기자 함께 모의했던 김질이 그의 장인 정창손과 함께 세조에게 밀고를 하였으므로 모의자들이 모두 잡혀갔다. 그는 세조를 가리켜 ‘진사(進賜:종친에 대한 호칭)’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하나도 손대지 않았다고 하였는데 나중에 집에 보니 그대로 있었다. 그는 모진 고문을 당하였으나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또한 신숙주에게도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격노한 세조가 무사를 시켜 쇠를 달구어 그의 다리를 태우고 팔을 잘라냈으나 그는 안색도 변하지 않았다. 그러면서도 그 사건에 연루되어 문초를 받고 있던 강희안(姜希顔)을 변호해주어 죽음을 면하게 하였다. 1456년(세조2년)에 아버지 승과 이개. 하위지.박중림.·김문기.·유응부. 박정 등과 함께 군기감 앞에서 능지처사(凌遲處死)를 당하였다. 그 때 동생들과 아들들이 모두 죽음을 당하여 혈손이 끊겼다. 그가 형을 당한 뒤 그의 집을 살펴보니 세조가 준 녹이 고스란히 쌓여 있었을 뿐 가재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으며, 방바닥에 거적자리가 깔려 있었다고 한다. 글에 능했으며, 병자(丙子)년 6월 8일 수레에 실려 형장으로 끌려 갈 때, 대여섯 살 밖에 안된 그의 딸이 따라오며 울부짖으니 “사내아이는 다 죽어도 너만은 죽지 않으리라.”하고는 목이 매어 더 이상 말을 잇지 못했다고 한다. 그 딸이 나중 에 친정부모 제사를 지내게 된다.(효옥) 그의 대표로 회자되는 “이몸이 죽어가서 무엇이 될고하니, 봉래산 제일봉에 낙 락장송 되었다가 백설이 만건곤할 제 독야청청하리라.” 하는 단가에 그의 충절을 보는 듯 잘 나타나 있다. 마음의 여유를 잃지 않는 가운데 항상 웃음을 머금었고 누구도 흉내낼 수 없는 강직한 지조를 간직했다고 한다. 그 한 예로 북경에 사신으로 갔을 때 백이․ 숙제의 사당에서 “말머리를 두들기며 그르다고 말한 것은 대의가 당당하여 일월같이 빛났건만, 풀 나무도 비, 이슬에 자랐는데 그대 어찌 고사리는 먹었는고”하였다고 한다. 이를 본 중국 사람들이 충절이 높은 이로 알아보았다는 일화도 전한다. 그는 조선시대의 대표적인 절신으로서 오늘에 이르기까지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 이 되고 있는 사육신의 한 사람일 뿐 아니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으며, 조정의 경연(經筵)과 문한(文翰)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또한 그가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것은 민족문화의 차원에서도 그 의 높은 절의에 뒤지지 않는 큰 업적이라 할 수 있다. 뒷날 남효온(南孝溫)이《추강집 秋江集의 육신전에 대의를 위하여 흔연히 죽음의 길을 택한 그의 절의를 기록하여 후세에 전하고 있다. 1691년(숙종 17) 신원(伸寃)되고, 1758년(영조 34)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1791년(정조 15) 단종충신어정배록(端宗忠臣御定配食錄)에 올랐다. 묘는 서울 노량진 사육신 묘역에 있으나 그의 일지(一肢)를 묻었다는 묘가 충청남도 은진에도 있다. 영월 장릉의 충신단(忠臣壇)에 제향되었으며,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노량진의 의절사(義節祠), 공주 동학사의 숙모전(肅募殿), 창녕의 물계서원에 모셔져있다. 시 호는 충문忠文이며 저서로는『매죽헌집』이 있다.
 
 
2) 성삼문 가족과 재산의 상황
 
세조는 성삼문의 아우들까지도 죄를 씌워 죽인다. 그에 관한 기사는 세조 2년 6월 21일 조에 나타난다. 신문을 당한 사람은 17명이 되었다. 의금부에서는 이들에게도 능지처사 적몰 연좌의 형을 내려야 한다고 하였다. 물론 이들도 군기감 앞에서 거열형車裂刑2)을 당하였다. 1456년 세조 2년 6월조의 기사 83건 가운데 거의가 단 종복위와 관련한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거사직전에 실행계획의 차질과 누설로 인 하여 모의 자가 처형됨으로서, 조선왕조 500백년 역사상 최대의 정치적 숙청 작업이며 가장 잔인하게 사람을 죽인 사건이었다. 세조가 왕위찬탈을 위하여 계유정난, 병자사화, 정축 즉 3년간 236명의 충신들을 죽였다고 승정원일기는 명단을 기록하고 있다. 성삼문의 순절후 가족들의 처리 전말은 다음과 같다. 6월 27일 역모에 연좌된 가족의 여자들은 공신의 집에 주어 여종이 되게 하였고, 9월 7일에는 역모로 사형당한 분들의 부녀들은 수양측 공신들에게 종으로 하사하였다.
 
성삼문의 아내 김차산金次山, 딸 효옥 孝玉: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성삼문의 어머니 죽산 박씨: 이홍상에게
성승의 소실: 신숙주에게
성삼문의 아우 부사 삼빙의 부인: 권개에게
성삼문의 아우 정랑 삼성의 부인: 홍달손에게
성삼문의 아우 장신 삼고의 부인, 1년생 딸: 김질의 장인 정창손에게
 
이렇게 각각 종이 되어 갔다고 왕조실록에 나와 있다. 그런데 옛 장릉지에는 성삼문의 아들이 다섯 있었는데 맏아들이 성원이고 며느리는 관비가 되어 평생 동안 수 절하였다고 하였고, [숙모지]와 [연려실기술]에는 삼문의 아들이 맹첨, 맹평, 맹종, 헌, 택, 무명으로 나와 있어 아들들 이름이 틀리게 기록되어있는데, 이는 그때의 상황과 이름이 비슷하여 구분하기가 어려워서였을 것이다. 성삼문가의 땅(공신전)은 1457년(세조3) 순절 1년 뒤 토지를 몰수하여 수양측 공신들에게 하사하였다.
 
성삼문의 당진 밭: 임영대군 구에게
양주 밭: 임영대군 구에게
함열 밭: 우의정 강맹경에게
예산 밭: 판원사 이계전에게
평산 밭: 우참찬 박중손에게
 
성승의 고양 밭: 계양군 증에게
홍주 밭: 의창군 각에게
양주 밭: 이조판서 권람에게
천안 밭: 군자운에게
낙안 밭: 한계미에게
 
각각 하사했다. 위의 토지 몰수는 3년 3월 23일에 단행했고 상왕(단종)은 6월 2일 노산군으로 강등되고 영월로 비출하기로 하였다. 22일 노산군이 영월로 떠나고, 그 래 10월 24일 영월에서 시해 당하였다. 사육신이 순절한 후 15년이 지난 1471(성 종2)년에 세조실록이 완성되었다.
 
3) 매죽헌 성삼문 신주의 발견과 봉안
 
현종13(1672)년 호조의 서리書吏 엄의룡은 우연히 인왕산 기슭 허물어진 벼랑에서 옹기하나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는 밤나무로 만든 신주 세개가 들어있었다. 하나는 승지 성삼문의 것이고, 두개는 곧 선생의 외손 참찬 박호 부부의 것이었다. 성선생의 신주앞면에는 [成三門戊戌生]이라 씌어져있었는데, 신주함 가운데에도 또한 그와 같이 씌어져 있었다. 엄의룡은 놀랍고도 신기해서 여러 사대부들에게 말을 하였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과 일반선비들이 다투어 와서 절을 하였다고한다. 그리고 즉시 신주를 모셔서 선생의 외후손 엄찬의 집에 봉안했다가 홍성에 사는 외후손에게 통고하여 신주를 모시고 홍주로 가게 했다. 노은동에는 아직 선생의 오래된 집이 있고, 그의 부모 성승 부부의 묘가 있고, 그 가까운 곳에 선생의 처인 연안김씨의 묘가 있기 때문이었다. 순절 후 200여년만의 일이었다. 선비들은 감흥하여 선생의 생가 옆에 사당을 세우고 숙종2년(1676)에 녹운서원 綠雲書院이라고 했다. 그리고 사육신 전원을 봉향하고 별묘를 세워 부친 충숙공 성승도 봉사했다. 사료를 살펴보면 병자사화(1456)때 선생이 순절하자 부인 연안김씨가 손수 신주를 써서 종에게 부탁하여 제사를 지내게 했다. 세조 2년 9월 7일에 수양측 공신들의 집으로 가게되었는데 이때 선생의 아내와 딸은 운성부원군 박종우에게 노비로 갔으므로 노비에게 제사를 지내게 했을 것이다. 그러다가 선생의 부인이 죽자 신주는 외손 박호에게 돌아갔는데 박호 또한 자손이 없었으므로 선생의 신주와 박호 부부의 신주를 인왕산 기슭 아래에다 묻었다고 한다. 신주를 묻은 사람은 선생의 외 방손이 묻었는지, 박호의 외손이 묻었는지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그런데 이백여년이 지나 사람에 의해 신주가 발견되어 제자리로 갔으니 옛말에 [사람이 죽어도 그 혼령은 신주에 의지하여 자기 본가로 돌아간다.]는 신반실당神 返室堂3)의 말처럼 되었으니 참으로 신기하다 할 것이다. 녹운서원은 숙종 18년 (1692)에 사액되고 그 후 노운서원으로 개칭되었다가 고종5년에 철폐되었다. 철폐 될 때 배향되었던 육신의 축판을 공의 생가 집터 뒷산에 매안하였다. 그 무덤을 노은단魯恩壇이라 한다. 고종 때 사육신의 방손으로 봉사손을 정하여 제사를 받들도록 윤음하여 달전리에 거주하는 성주영(성하진 조부)을 봉사손으로 정했다. 광무 7년에 달전리에 사우를 건립하고 성삼문의 신주를 홍성에서 이곳 달전리로 이안하여 매년 6월 7일에 향사 한다. 그리고 1967년 박정희 대통령이 사우를 중수하여 [문절사文節祠]라 명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지금은 삼대 봉사손 성하진 씨가 87년 사망하여 서울에 살고 있는 그의 아들 성인모가 4대 봉사손이 되었다.
 
 
3. 성삼문 일가와 창녕성씨 가계
 
창녕성씨는 성인보(成仁輔)를 시조로 2세(世) 송국(松國), 3세 공필(公弼), 4세 군미(君美), 5세 여완(汝完), 6세 석용(石瑢)으로 내려오는데, 석용의 호가 회곡(檜谷)이고, 회곡공파(檜谷公派)의 파시조가 된다. 석용 이후 7세 달생(達生), 8세 승(勝1)으로 이어지는데 승은 삼문(三問),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의 4남을 두었다. 장남 삼문은 원(元), 맹첨(孟聸), 맹평(孟平), 맹종(孟終), 헌(憲), 택(澤)과 작명도 못한 간난아들 등 7남을 두었다. 삼문의 동생 삼빙은 하(河), 한(漢)을 두었는데 세조2년 병자사화(단종복위 추진)의 주모 자로 승의 직계 13명 가족이 전원 순절(殉節)되었다. 성달생의 차자이며 승의 동생, 삼문의 숙부 증(塍)과 증의 자이며, 승의 조카, 삼문의 종제인 9세 삼석(三錫)과 삼구(三鉤)는 병자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되어 원방에 영속(永屬) 폐칩불사 되어 멸문지화에 이른다. 석용의 2남이며 달생의 동생은 7세 개(槪), 그의 자 8세 희(熺), [조(照), 연(然)], 9세 담수(聃壽:생육신). 담년(聃年), 담명(聃命), 담령(聃齡), 담중(聃仲), 담노(聃老) 담기(聃紀)로 이어져 내려오고, 석용의 3자이며 달생의 동생인 7세 허(栩), 허의 자 8세 구연(九淵), 9세 습지(習之)로 회곡파의 가계도가 이어지며, 이글을 쓰고 있는 필자는 회곡파 개(槪)의 후손으로 성인보 시조로부터 25세손이다. 여완(汝完: 政堂文學 文靖公)의 아들 3형 장남 石璘, 이남 石瑢, 삼남 石珚, 삼형제는 호(號)가 독곡(獨谷), 회곡(檜谷), 상곡(桑谷) 이고 고려말과 조선초에 명망이 높이 올 라 세상에서 말하기를 [三谷]이라고 칭하였다. 넷째 아들 石磻은 낭장(郎將)이다.
 
시조의 현손 여완(汝完)은 공양왕 4년인 1392년 정몽주가 죽음을 당하는 것을 보고 고려의 국운이 기울었음을 한탄 하며, 포천 왕방산으로 들어가 스스로 왕방거사라 자처하며 세상에 나오지 않았다. 조선 건국 후 태조는 원로라 하여 검교문하시중으로서 창성부원군의 벼슬과 품계를 내렸으나 끝내 사양하고 벼슬에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는 맏아들 석린에게 이르기를 “너는 네 임금을 잘 섬겨라. 나는 고려의 옛 신하이니 두 나라 임금을 섬길 수 없다.”며 끝내 충절을 지켰다. 그 아들들이 독곡(石璘), 회곡(石瑢), 상곡(石因), 낭장(石璠)으로 나뉘는데, 독곡, 회곡, 상곡은 당대의 문장과 벼슬이 막힘이 없는 집안으로 번성하게 된다. 독곡공 석린(石璘)은 문정공 여완의 장자로 함흥차사로 유명한 이태조를 찾아갈 때 송아지를 울게 하여 부모 마음을 돌리게 한 [함흥차사] 사건으로 유명하다. 조선 최초의 한성판윤, 우의정 좌의정 영의정을 지냈다. 문경(文景)이란 시호를 받았 으며, 태조의 오랜 친구로서 동구릉에 있는 태조의 신도비문을 썼다.
 
 
회곡공 석용(石瑢)은 문정공 여완의 차자로 각도의 도관찰사, 유후, 대사헌, 대제학을 역임하고 문숙(文肅)의 시호를 받았으며, 달생, 개, 허의 세 아들을 둔다. 회곡(석용)파의 장자 달생(達生)의 가계는 승(勝) - 삼문(三問), 삼빙(三聘), 삼고(三顧), 삼성(三省)이나 모두 순절하여 대가 끊기었고, 삼문 등의 신원이 274년(숙 종17년. 1691)이 지나서야 모두 풀리게 되었다. 승(勝)의 동생이며, 삼문의 숙부 증(塍)과 승의 조카이며 삼문의 종제 삼석(三錫)과 삼구(三鉤)도 단종복위 병자사화에 연루되어 삭탈관직(削奪官職) 폐칩불사(廢蟄不仕) 되었다가 329년이 지난 정조 9년에야 삼석(三錫) 등에 게 관직이 복관(復官)되었다. 오랜 세월의 풍파에 문적이 끊기어 묘소마저 실전(失傳)되었으므로, 광복 후 양혜공 달생 묘 아래에 우참찬 증(塍)과 한성판관 삼석(三錫) 부자의 단(壇)을 만들어 모셨다. 회곡의 차자 개(槪)의 가계는 희(熺), [조(照)·연(然)]- 담수(聃壽:생육신), 담년(聃年) 형제들이고, 회곡의 삼자 허(栩)의 가계는 구연(九淵) - 습지(習之)로 내려가는 데, 승의 4촌이며 삼문의 당숙인 희(熺)는 삭탈관직되어 김해 등에 안 치되었다가 3년만에 풀려나 부모의 고향근처인 두포리로 돌아와 부모의 묘소 를 돌보며 살고 싶었으나 서울 3백리 안에는 들어올 수 없다 하여, 현 연기군 달전리에서 살다가 15년이 지난 성종2년 9월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죽어서야 파주 파 평산 부친 개(槪)의 묘하에 안장하였다. 성희(成熺)의 동생 성조(照), 성연(然)은 병자피화(丙子被禍)로 삭탈관직(削奪官職) 되고 고신첩(告身帖) 안치원방(安置遠方) 되었다.
 
구연(九淵)도 삭탈관직(削奪官職)되어 남해에 영속되었다가 역시 15년이 지나 성종 2년 9월에 희와 함께 복관(復官)되었으나, 회곡의 직계 손들은 모두 병자사화에 화(禍)을 당하는 멸문지화의 수난을 겪었으나, 신원(伸寃)이 된 후에는 후손들 중에 많은 인재들이 나온다.
 
<성삼문 일가의 가계도>
 
成仁甫(始祖) - 成松國 - 公弼 - 君美 - 汝完 - 石瑢 - 達生 - 勝 - 三問 (三聘 / 三聘 / 三顧 / 三省)
三問의 子 (元 / 孟瞻 / 孟平 / 孟終 / 憲 / 澤 / 갓난이)
 
상곡공 석연(石珚)은 문정공 여완의 삼자로 예조판서를 거쳐 예문관대제학을 지냈다. 상곡(石珚)파는 문정공 여완의 3남인 석연(石珚)- 엄(揜)- 염조(念祖)- 임(任), 간(侃), 현(成俔)으로 이어지는 내포리 세거의 계보와, 석연의 2남인 억(抑)- 득식(得識)- 충달(忠達)- 세순(世純)- 수침(守琛)- 혼(成渾)으로 이어지는 동방 18현의 한사람으로 율곡과 평생지기였던 우계 성혼(牛溪 成渾)의 계보와 또 여러 계보가 있는데 여기서는 생략하기로 하겠다.
 
 
4. 성삼문 일가의 파주지역 연관성
 
1) 법원읍 금곡리 선영의 인물들
 
성씨의 파주와의 연관은 여완의 둘째아들인 석용(회곡파)과 석연(상곡파桑谷派)이 파주로 와 살기 시작하면서부터이다. 회곡은 성여완의 둘째 아들 성석용의 호이다. 자는 백옥 白玉, 영의정을 지낸 석린의 아우이다. 고려 우왕 때 문과에 급제하여 동지경연사를 비롯하여 밀직제학 등을 역임하였다. 조선 건국에 공이 있어 원종 공신의 녹권을 받아 대사헌을 거쳐 개성유후. 보문각대제학에 이르렀다. 사람됨이 순박하고 맑으며 말이 없이 벼슬에 마음을 다하여 봉직하였다. 글씨를 잘 썼다. 회곡공파의 파시조이다. 달생- 승- 삼문/ 개- 희- 담수(생육신), 담년으로 내려가면서 삼문의 단종복위를 밀고 당하면서 직계손은 멸문지화를 입게 되고, 후세에 추앙받는 삼촌 희熺의 가문도 큰 벼슬과는 멀어지게 되지만 조선말까지 많은 인재들이 나온다. 삼문을 비롯하여 사육신들의 신원이 복직되는데는 235년(숙종17년. 1691)의 세월이 걸리게 된다. 달생達生(1376년~1444년)은 보문각대제학을 지낸 석용의 아들이며 매죽헌 삼문 의 조부이다. 공양왕 2(1390)년 생원시에 급제하였다. 태종2(1402)년 조선시대 처음으로 실시된 무과에서 장원으로 급제하고 대호군으로 승진되었다. 1407년 흥덕진병마사로서 그곳에 침입한 왜구를 격퇴하였고, 성주목사등을 역임하였다. 사은사로, 진응사로 명나라를 두 번 다녀왔다. 함길도병마도절제사. 세종 때 지중추원사, 판중추원사 등을 역임하였으며 1444년 안질을 치료하기위해 충청도 초수리에 행차하는 세종을 수행하였다가 거기서 죽었다. 능숙한 무예로 북변의 진수와 시위에 공헌함이 많았고, 필법이 뛰어났다. 시호는 襄惠이며, 법원읍 금곡리에 묘와 신도비가 있다. 기축옥사때 묘가 파헤쳐지는 참변을 당한다.
 
삼문의 당숙인 희熺는 학식과 소행이 출중하여 1450(문종1)에 식년문과에 급제 승무원교리가 되고 부윤에 이르렀다. 병자사화 때 성삼문의 친척이라 하여 10여 차 례의 국문을 받았으나 끝내 함구하였다. 김해로 유배를 갔는데 그곳은 그렇게 심한 유배지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데 성희의 인물이 아까워서 그랬을 것이라고 한다. 그때 성희를 호송하게 된 금부도사 윤교영은 평소 성희를 존경했을 뿐 아니라 사건 의 배경이 충정에서 비롯된것인 만큼 대접은 깍듯했다고 한다. 그때 차남 담년은 열다섯이었는데 호송행렬을 도보로 뒤따라갔다고 한다. 국법으로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나 나이어리고 게다가 금부도사가 모른체했으므로 그럴 수 있었다는데, 근처에서 아버지를 보살폈다고 한다. 김해부사도 성희의 명성을 들어 알고있는 터라 의식에 불편이 없도록 조처하여 주었다고 한다. 3년 만에 풀려났으나 도성 300리 안에는 들어올 수 없다하여 현 연기군 금남면 달전리에서 살며 고향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렸다. 수양의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뺏은 사건은 세상에서 이야기 거리가 되었다. 거기에 대항하다 피해를 당한 복위사건은 더욱 큰 화젯거리가 되었다. 이런 이야기의 살아있는 주인공인 성희의 존재는 그 당시 달전인근에서 존경을 받기에 충분한 우뚝한 존재였다. 당시 유교정치 윤리관으로서는 당연한 일, 인근 토호들이나 권력 있는 세력가들은 물론 서민층까지도 잘 정착할 수 있도록 협력해주는 사람들이 많았다고 한다. 이웃 청주목사 이치우 마저 사람을 보내 성희의 달전에서의 정착을 도와주었다고 한다. 그리하여 터를 잡고 살기시작한곳이 지금 삼대 봉사손 성하진 씨가 살고 있는 성희 고가이다. 그로부터 6년 후인 1464(세조10) 성희는 죽어서야 그리운 고향 파주 부친의 묘가 있는 파평산으로 올 수 있었다. 묘비는 조선조 말에 태어나 항일투쟁을 벌렸던 학자 성기운이 썼다. 성담수成聃壽(?~1456년)는 생육신으로 자는 이수, 호는 문두, 승문원 교리 희의 큰 아들이며 사육신 삼문과는 제종제이다. 천성이 조용하고 담박하여 세간의 명리에 욕심이 없었다. 계유정난으로 부친 희가 혹독한 국문을 받고 김해에 안치되었다가 풀려나서도 고향에 오지 못하고 공주 달전에서 죽는 것을 보고 진사에 합격하였으 나 벼슬을 단념하고 파주 두포리에서 은거하였다. 단종복위와 관련된 자제에게는 전례에 따라 참봉벼슬을 제수하여 그들의 거취를 살폈는데, 거의가 고개를 숙이고 직역에 복무하였으나 끝내 벼슬에 나가지 않았으며 후사가 없다. 조카 몽정이 경기도 안찰사가 되어 찾아올 때는 어찌나 가난한지 방안에 자리도 없었다. 출사를 종용했으나 끝내 응하지 않았다. 몽정이 돌아가서 깔 자리를 보내니 가난하고 천한 집에 어울리지 않는다고 굳이 사양하고 받지 않았다. 1782(정조 6)년에 김시습, 이맹전, 원호, 조려, 남효온 등과 함께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함안의 서산서원, 창녕물계서원에 성송국, 삼문, 수침, 운, 제원, 혼등 성씨일문의 여러 현인들과 함께 제향되고 있다. 묘는 파평 선산에 있으며, 시호는 정숙靖肅이다. 상곡桑谷은 石珚으로 王자가 붙어 있었으나 임금과 이름이 같다 고하여 王변을 뗀 인因자를 썼다. 파주에 많이 거주하는 창녕성씨 상곡공파의 파시조이다. 성석연의 큰 아들인 성엄-성염조(임, 간, 현)으로 이러져 내려간다. 용재총화로 유명한 현이 석연의 증손이다. 파주 내포리에 묘가 있다. 석연의 둘째 아들은 성억-득직- 충달- 세순- 수침-혼(동방18현)-문준으로 이어 지는 우계 계보이다. 수침은 중종 때 조광조의 갑자사화로 서울 순화동에서 살다 파주 처가가 있는 우계로 내려온다. 동생 성수종도 학자로 유명하며 아들 혼은 율 곡과 평생지기로 지내며 많은 후학들을 배출한다. 혼은 벼슬보다 후학을 가르치는데 더 뜻을 두었다. 혼의 여식은 적성부사 윤황에게 출가하여 아들 윤선거를 낳게 되며, 외손이 숙종 때에 백의 정승으로 유명한 윤증이다. 파산학파라는 말이 나오게 된 배경이 바로 파평면 우계리의 파산서원에서 제자들을 가르쳤기 때문이었다.
 
2) 개묵이 지명유래와 ‘성부터’ 이야기
 
성달생의 묘를 쓴 그곳에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 하나가 있다. 달생의 부인을 모신 상여가 선조들의 묘가 있는 곳, 즉 파평산으로 가는 길이었다. 조금만 더 가면 파평산인데 바람이 몹시 불었다고 한다. 그때 앞에 가던 만장이 날아올라 산 위에 가 꽂혔는데 그 자리가 바로 지금의 묘를 쓴 자리이다. 그래서 그곳에 묘가 있게 되었고, 근처의 땅들은 그때 하사를 받았는지 아니면 근처가 세거지가 있었으니 묘 막을 짓고 묘지기가 살게 되면서 가끔 들렀을는지 모르겠다. 파주시 법원읍 금곡리에서 적성방향으로 가다 오른쪽 동네를 개묵이라 부른다. 관모산중턱 성달생의 묘가 자리하고 있는 곳에서 바로 옆으로 있는 동네이다. 그 묘에 올라 오른쪽을 보면 버섯을 기르는 공장과 과수원이 있는 편편한 산골짝이 있다. 그곳에서 시작된 작은 개울물이 흘러 개묵이 동네로 흘러 내려가면 생육신 성담수가 살았던 몽구정터가 나오고, 1사단에서 놓은 진동면으로 건너가는 전진대교를 만난다. 그 개울이 시작되는 곳, ‘성부터’는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에 의하면 삼문이 어릴 때 그곳 성부터에 살았는데 얼마나 글씨를 많이 썼는지 붓으로 글씨를 쓴 먹물이 개울로 흘러내리며 먹물빛이었다고 한다. 그때부터 그 개울을 “개묵이”라고 불러왔고, 성씨네가 살았던 집터를 “성부터, 혹은 성깃터”라고 불러왔다고 한다. 그 산 위가 바로 성달생의 묘이니 근거없는 얘기는 아닐 것이다. 세종대왕은 32년을 왕위에 있었다. 말년에는 건강이 좋지 않아 치료차 온천으로 행행하는 일이 종종 있었다. 그러다가 세종 26년 충청도 초수리 온천에 나갈 때 성달생도 함께 가던 길에 죽음을 맞이한다. 그때 성달생의 나이는 68세, 손자인 삼문의 나이는 26세였다. 세종은 성달생의 상을 치루는데 무척 신경을 썼다고 한다. 장례를 국장급으로 치루었다고 한다. 세종 26년에 죽었고 세종은 그 후 6년을 더 왕 위에 있었으니 많은 관심과 하사를 받았을 것이다. 그러다가 손자 성삼문과 아들 성승이 단종복위에 연루되어 죽음을 당하자 묘까지 파헤쳐지는 일을 당하게 된다. 그때 석물도 땅에 묻히고 아마도 ‘성부터’는 풍비박산이 났을 것이다. 지금 그곳에서 버섯을 기르고 있는 장유씨의 진술을 들어보면
 
저 묘에서 북쪽으로 내려다보이는 동네가 ‘성부터’예요. 왜 ‘성부터’인지 아마 이곳 에 있는 묘와 연관이 있을꺼란 생각은 해 보았어요. 그리고 우리 집자리가 옛날 벼슬이 높았던 누군가가 살았던 건 확실해요. 건물을 지으려고 땅을 파헤치면 돌칼이나 자기나 사기 그릇 따위 일반인 집에서 볼 수 없는 물건들과 깨진 것들이 많이 나왔거든..급하게 무슨 일을 당했음을 짐작해 볼 수 있었죠..
 
금곡리에 사는 거의 모든 주민들은 이곳이 성삼문 할아버지 묘라는 것은 말을 들어 알고 있었지만 주인공은 어떤 분이었으며 무슨 일을 하시다가 이곳에 묻혀 계실까 자세한 내용을 알 수가 없어 아쉬웠다고 한다. 또한 그 주위에 살고 있는 김교화님이 성삼문 할아버지 묘라면 후손들은 있을까 궁금해 하다 성묘와 세일사 지내러오는 후손들이 있다는 얘기를 듣고, 성묘하러 온 양혜공(성달생) 종중회장을 지낸 성기문님을 만나 물어보게 되었다고 한다. 그 인연으로 자료를 보내주어 이글을 쓰게 된 것이다.
 
 
5. 나오는 말
 
성리학을 통치이념으로 한 조선왕조에 있어서 충절을 강조하는 것은 당연한 인간 윤리였다. 우리나라가 유교국가가 되면서 부모에게 효도하고 임금께 충성을 다하라는 것이 사람으로서의 첫번째 덕목이었다. 그러나 우리 역사를 들여다보면 그것보다 남자에게 더 중요한 일이 벼슬하는 일이었다. 벼슬은 개인영달을 위해서 뿐 아니라 가문을 일으키는 통로였으니 말이다. 그러나 그것이 의리와 절개를 저버리면서까지 그래야했던 사실 앞에서 역사의 평가는 무색해질 때가 있다. 풍부한 학식의 세계를 잘 펼치면서도 삶도 중요하고 타협도 필요한 것 같다. 그러나 역사는 절대 한길로 가지 않는다. 이글을 쓰면서 솔직히 그때 우리 선조들이 조금만 강직하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이글을 쓰는 나는 창녕성씨로서 성삼문과 무관하지 않은 하마터면 세상에 태어나지 못하였을지도 모르는 존재였었다. 사건을 따져 올라가보니 당숙뻘인 성희가 김해로 유배를 갈 때 울면서 그 길을 따라갔다던 열다섯 살 아들, 그곳 달전리에서 살다 죽어서야 고향 파평산으로 돌아왔다는 매죽헌의 당숙뻘인 성희가 나에겐 18대 선조가 된다. 선대 왕과의 약속과 받은 사랑에 신의를 따랐던 길이 멸문지화, 어린아이까지 씨를 말리는 사건까지 가야 할 일이었을까... 여기서 동양역사의 한계와 아이러니를 느낀다. 그리고 역사란 늘 승자의 기록이란 점에도 한계를 느낀다. 그래도 옳게 살다간 끝은 있어 역사는 조선 최고의 충신하면 떠오르는 인물이 성삼문일 것이다. 오늘날의 한국인이라면 다 아는 사건이고 긴 이이야기를 쓸 필요도 없을 것 같다. 창녕성씨로서 나의 선대의 뿌리에 대한 것을 살펴본 것만으로도 파 주에 살고 있는 내가 언젠가 한번 해야 할 일을 한 것 같은 기분이다. 사실 선조의 이야기라 속으로 울분은 끓어오르는데 글로 쓰기가 쉽지 않았다. 그러나 금곡리에 사시는 몇몇 분들과 향토사업가 김교화님의 열의를 보면서 이 글을 쓰는 기회가 되 었음을 밝힌다. 충절과 효가 바탕이 되는 사건, 사육신이야기, 그 조부의 묘인 성달 생과 성삼문의 평가가 파주에서 재조명 되기를 바래본다.
 
 

 
◎ 참고자료
• 『파주군지』, 파주시.1995.
• 박종관, 「    」『충남지역 향토사연구 사료집』,전국문화원연합회,2006.
• 박영규,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
 
◎자료제공
• 성기문(당진향교 전교 및 양혜공(성달생) 종중회장)
 
 
성삼문 관련 유적지
○ 성삼문선생유허비(成三問先生遺墟碑)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있는 조선시대의 석비(石碑)로 1984년에 충남 문화재자료 제164호로 지정되었으며 송시열선생(宋時烈先生)이 찬(撰)하고 김진상 (金鎭商)이 썼으며 유탁기(兪拓基)가 두전(頭篆)을 썼다.
 
○ 노은단(魯恩壇)
1668년(현종8) 성삼문이 태어난 충청남도 홍성군 홍북면 노은리에 그를 추모하기 위하여 세운 비이다.비문은 송시열이 지었으며 1984년 5월 17일 충청남도문화재자 료 제164호로 지정되었다.
 
○ 노은서원 유허비(魯恩書院 遺墟碑)
이범익(李範益)이 찬(撰)하고 신창섭(申昌燮)이 썼다.
 
○ 성삼문의 사당(祠堂) 충문사(忠文祠)
2008년 11월 12일(음10월15일) 충문사라 현판하고 위패를 봉안(奉安)하였다.
 
○ 서 울 노량진(露梁津)에 있는 육신묘(六臣墓)
 
○ 일지총(一肢塚)
은진(恩津)의 가야곡(可也谷) 가경자(嘉鏡子)에 있으며 묘갈(墓碣)은 송환기(宋煥箕)가 찬(撰)하였다.
 
○ 문절사(文節祠)
고종(高宗) 39년에 교서(敎書)를 내려 족후손(族後孫) 주영(周英)으로 제사(祭祀) 를 받들게 하고, 정려문(旌閭門)을 세웠으며, 정미년 봄에 보수하여 영정을 봉안하 고 문절사(文節祠)라 현판하였다.
 
○ 육신사(六臣祠)
건국후(建國後) 을사(乙巳)에 국비보조(國費補助)에 의하여 육신사(六臣祠)를 달성군 하빈면 묘동(達城郡 河濱面 妙洞)에 세우니 옛날 낙빈서원(洛濱書院)의 유지(遺址)이다.
 
 
성삼문의 저서와 문집
 
○ 매죽헌선생문집(梅竹軒先生文集)
영조때 간행된 것으로 의장고낭청 윤유후(儀仗庫郎廳 尹裕後)가 찬(撰)한 몇 줄의 발문(跋文)이 있는데 실은 참판 성천주(參判 成天柱)가 영동관찰사(嶺東觀察使)로 있을 때에 발간(發刊)한 것으로 성근보선생집(成謹甫先生集)이라 이름 하였다. 실국후(失國後) 기유(己酉)년에 족후손(族後孫) 기운(璣運)이 추가보정하여 중간하고 매죽헌선생문집(梅竹軒先生文集)이라 개칭하였다.
 
○ 성삼문의 저서(著書) :육권삼책
성근보집(成謹甫集) : 四卷四冊.  직해동자습(直解童子習) : 一.
중국어학습(中國語學習) : 三.   훈세평화(訓世評話) : 一.
동국정운(東國正韻) : 三.     홍무정운(洪武正韻) : 三.
역대병요(歷代兵要) : 二.     동문수(東文粹) : 三.
매죽헌집(梅竹軒集) : 二.     예기대문안독(禮記大文顔讀) : 一.
 
○ 훈민정음(訓民正音)
세종대왕의 어명(御命)으로 집현전학사(集賢殿學士)들이 창제 하여 서기1446년 9월 29일세종대왕(世宗大王) 어명(御命)으로 반포(頒布)하다.
 
【출처】 네이버 블로그 昌寧成氏 / 작성자 아산 ( 2016. 3. 12)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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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