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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고전 아카데미 403강 강의자료 요약 (2025.11.13.)
2025년 11월 13일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1. 唐詩 300首
1) 당시제목 : 서변사 2) 작자 : 장교(張喬) 生沒年 : 미상 (당나라 말기 활동) - 활동 시기 : 당 의종(懿宗) 함통(咸通) 연간(약 860년~874년) 무렵 진사(進士) 시험에 급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 특징 : 당나라 말기의 격변기, 특히 황소의 난을 피해 구화산(九華山)에 은거하며 생을 마쳤습니다. 허당(許棠), 유탄지(喩坦之) 등과 함께 함통 십철(咸通十哲)로 불리며 문장력을 인정받았습니다. 구화사준(九華四俊) 중 한 명으로도 불립니다.
◈ 주요 활동 및 평가 - 문학적 교류 : 신라 출신 유학생이었던 최치원과도 교류했는데, 최치원이 장교에게 보낸 시가 우리나라의 문집인 《동문선(東文選)》에 수록되어 있어 한중 문학 교류의 일면을 보여줍니다. - 작품 : 장교의 시는 《전당시(全唐詩)》에 여섯 수의 전별시(이별하며 지은 시)를 포함하여 다수 수록되어 있습니다. 대표작으로는 칠언절구 시인 「연변장(燕邊將)」 등이 알려져 있습니다. - 시대적 배경 : 당나라가 쇠퇴하고 혼란했던 시기에 살았기에, 그의 삶과 문학은 이러한 시대상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장교는 당나라 문단에서 명성이 높았던 시인 중 한 명으로, 특히 신라의 최치원과의 교류가 한국 문학사에서도 의미 있게 다루어지고 있습니다.
* 구화사준(九華四俊)은 당나라 말기, 특히 늦은 당 시대에 활동한 네 명의 시인 그룹을 지칭합니다. 이들은 허당(許棠), 장교(張喬), 장빈(張蠙), 그리고 주요(周繇)로 구성되어 있으며, 모두 중국 안후이성의 구화산(九華山) 주변 지역 출신입니다. 이들은 모두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과거 시험에서 오랜시간 동안 고생하며 어려운 삶을 살았습니다. 구화사준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같은 지역 출신이며, 비슷한 시기에 과거 시험에 응시하여 서로 교류하며 문학적 영향을 주고받았기 때문에 붙여졌습니다. 이들은 '함통 십철(咸通十哲)'이라는 더 큰 그룹의 일원으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 그룹은 당나라의 여러 문인들 중에서 특히 뛰어난 인물들로 평가받았습니다. 이들의 시는 주로 개인의 감정과 사회적 현실을 반영하고 있으며, 서로의 시에 대한 교류와 영향을 통해 당대 문학의 중요한 흐름을 형성했습니다. 구화 사준은 그들의 시적 재능과 함께, 당나라 문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 함통 십철(咸通十哲)은 당나라 말기, 특히 함통 연간(860-874) 동안 활동한 시인 그룹을 지칭합니다. 이 그룹은 주로 하층 출신의 시인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그들의 시는 주로 사회적 고난과 개인의 감정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함통 십철의 주요 구성원으로는 허당(許棠), 장교(張喬), 유탄지(喻坦之), 극연(劇燕), 임도(任涛), 오한(吳罕), 장빈(張蠙), 주요(周繇), 정곡(鄭谷), 이서원(李栖遠), 온헌(溫憲), 그리고 이창부(李昌符) 등이 있습니다. 이들은 모두 과거 시험에서 어려움을 겪으며, 그들의 시는 주로 다섯 자로 구성된 시가 많고, 내용은 당대의 전쟁과 사회적 혼란을 반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들은 서로 교류하며 문학적 영향을 주고받았고, 그 결과로 독특한 고난과 고뇌를 표현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함통 십철이라는 이름은 이들이 같은 시기에 과거 시험을 준비하며 서로의 시를 교환하고 소통했던 것에서 유래되었습니다. 이들은 문학적 성취에도 불구하고, 당대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 그들의 이름이 잊혀지기도 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의 시는 후대 문학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45강(2024,04,04) 강의 교안
*《論語》〈里仁〉 4-16. 君子喻于義,小人喻于利
*《史記》〈周本紀〉4-023 1. 是 - 金文, 본래 의미는 바르다(正) 《說文解字》「直也。从日正。凡是之屬皆从是」
(1) 바르다, (2) 맞다, (3) 概括, 凡是, 任何, every, any, (4) 此,這, this, that, (5) 찬동, 긍정하다,
(6) 정정하다, 颜元, 〈上征君孫鍾元先生書〉「某不自揣,撰有《存性》、《存學》二編,欲得先生一是之,以挽天下之士習而復孔門之舊」 제가 주제 파악을 못하고, 존성 존학 2편을 썼습니다. 저가 쓴 책을 정정해 주기를 원합니다. 천하의 학풍을 잡아 주시어 공자 파의 옛 제도를 회복 시켜 주세요.
* 征君 = 徵士 = 隱士~ 벼슬 거절하고 은둔 생활 하는 선비 * 士習 ~ 학풍 * 손기봉(孫奇逢, 1584~1675)은 중국 명나라 말기와 청나라 초기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학자입니다. 그의 자는 계태(啓泰)이며, 호는 종원(鍾元)입니다. 손기봉은 주로 화북 지역에서 활동하며, 수양과 실천의 중요성을 강조한 학문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명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학문을 지속하며, 여러 저서를 남겼습니다. 주요 저서로는 《사서근지(四書近指)》와 《이학종전(理學宗傳)》이 있습니다. 이들 저서는 유교 사상을 바탕으로 한 그의 철학적 견해를 담고 있으며, 당시 학계에서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손기봉은 또한 명말 청초의 사상가 중 한 명으로, 그의 사상은 후에 많은 유학자들에게 영향을 주었습니다. 그는 명나라의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학문을 통해 사회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했던 인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그의 사상은 유교의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현실적인 문제 해결을 지향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 《존성》과 《존학》의 저술 목적과 핵심 사상 1) 《존성(存性)》 : 성리학 인성론(人性論)의 재해석 《존성》은 성리학의 핵심 개념인 “성(性)과 기질(氣質)의 이분법”을 비판한 저작입니다. 주희의 성리학에서는 본성(本性)은 순선(純善)하지만 기질(氣質)이 이를 가려 악(惡)이 발생한다고 보았습니다. 이에 따라 수양(修養)의 목표는 기질의 악을 제거하고 본연지성(本然之性)을 회복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원은 이러한 이분법적 인성론이 인간의 자연스러운 욕구와 감정을 억압하고, 결과적으로 실천 의지를 약화시킨다고 비판했습니다. 그는 “인간의 본성은 선하되, 기질 또한 악함이 아니다”라고 주장하며, 기질 역시 자연스러운 것으로 이를 조화롭게 발전시키는 것이 진정한 수양이라고 보았습니다. 이는 인간의 신체적·정서적 측면을 긍정하고, 실천을 통한 수양의 가능성을 강조한 것입니다.
2) 《존학(存學)》 : 실천 중심 학문론의 확립 《존학》은 안원의 실학 사상이 가장 체계적으로 드러난 저작입니다. 그는 학문의 본질을 “실행(實行)“으로 규정하고, 유학의 전통인 육예(六藝 : 禮·樂·射·御·書·數)를 통해 수기치인(修己治人)의 도를 실현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안원은 육예 교육의 회복을 강력히 주장했습니다. 공자 시대의 교육은 예(禮)·악(樂)·사(射)·어(御)·서(書)·수(數)의 육예를 가르쳤으며, 이는 단순한 지식 교육이 아니라 실제 능력을 기르는 실천 교육이었습니다. 예악(禮樂)은 사회 질서와 인간관계를 다스리는 법이고, 사어(射御)는 군사적 능력이며, 서수(書數)는 행정 실무 능력입니다.
그는 《존학편》에서 “말타기·활쏘기를 익히지 않으면, 어찌 무예를 알겠는가?“라고 하며, 신체적 실천을 동반하지 않는 학문은 공허할 뿐이라고 강조했습니다. 또한 그는 학당(學堂)에서 군사 훈련, 농업 기술, 예법 실천을 가르쳐야 하며, 《주례(周禮)》에 나오는 육예 교육을 현실에 적용해야 한다고 구체적으로 제안했습니다.
* 이옹(李顒, 1627~1705)은 중국 명말 청초의 저명한 유학자이자 사상가로, 자는 중부(中孚)이며, 호는 이곡(二曲)입니다. 그는 현재의 중국 산시성(陝西省) 주지(周至) 출신으로, 청나라 초기의 세 주요 유학자 중 한 명으로 손기봉(孫奇逢)과 황종희(黃宗羲)와 함께 '삼대 유학자'로 불립니다. 이옹은 어린 시절 아버지를 잃고 가난한 환경에서 성장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명나라 군대에 소속되어 있었고, 이옹은 어머니의 도움으로 자립적인 학습을 통해 학문을 쌓았습니다. 그는 정규 교육을 받지 못했지만, 독학으로 많은 고전과 문헌을 탐독하며 뛰어난 학자로 성장했습니다. 그의 학문적 사상은 '반신자성'(反身自省)과 '경세치용'(經世致用)이라는 개념에 중점을 두고 있습니다. 그는 학문이 단순히 이론에 그쳐서는 안 되며, 실제 사회와 경제에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습니다. 특히 농업과 수리(水利)와 같은 실용적인 분야에 대한 연구와 실천을 강조했습니다. 이옹은 청나라의 통치에 대해 비판적인 입장을 취했으며, 명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자신의 학문적 신념을 지키며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거부했습니다. 그는 여러 차례 관직 제의를 받았으나 이를 거절하고, 학문과 후학 양성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저서로는 《사서반신록》(四書反身錄)과 《이곡집》(二曲集) 등이 있으며, 이들 작품은 그의 사상과 학문적 성취를 잘 보여줍니다. 이옹은 1705년에 사망했으며, 그의 학문적 유산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해내 대유'(海內大儒)로 불리며, 그의 사상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 황종희(黃宗羲) (1610년 ~ 1695년)는 중국 명나라 말기부터 청나라 초기에 활동한 대학자이자 사상가입니다. 저장성 여야현 출신으로, 자는 태충(太沖), 호는 남뢰(南雷), 이주(梨州)입니다. 그는 명나라 말기의 혼란스러운 정국과 부친 황존소가 환관 위충현의 탄압으로 옥사한 사건 등을 겪으며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복사(復社)'라는 문학 결사에 참여하며 정의로운 인물로 활동했으나, 명나라 멸망 후에는 항전 활동이 실패로 돌아간 뒤 학자 생활에 전념했습니다. 홍종희는 청나라 조정의 회유와 초빙을 거절하며 절개를 지켰으나, 점차 청나라의 연호를 사용하고 제자들이 관직에 나아가는 것을 막지 않는 등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는 '절동학파(浙東學派)'를 이끌며 만사동, 전조망 등 뛰어난 사학자를 배출했습니다. 그의 대표적인 저서로는 《명이대방록(明夷待訪錄)》, 《명유학안(明儒學案)》, 《송원학안(宋元學案)》 등이 있습니다. 《명이대방록》에서는 전제군주제를 비판하고 백성을 위한 정치를 강조하며, 군주는 주인(主)이 아닌 객(客)이라고 주장했습니다. 이는 당시로서는 혁명적인 사상으로 평가받으며, 후대에 '중국의 루소'라고 불리기도 했습니다. 《명이대방록》(明夷待访录)은 명말 청초의 저명한 사상가인 황종희(黄宗羲)가 저술한 정치적 저작으로, 1661년에 집필을 시작하여 1662년에 완성되었습니다. 이 책은 중국의 절대 군주제를 비판하고, 민주적 정치 체제를 요구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황종희는 이 작품을 통해 민본 사상과 군주에 대한 비판을 제시하며, "天下为主,君为客"라는 주장을 통해 국민이 주인이고 군주는 그에 종속되어야 한다는 민주적 원칙을 강조했습니다
* 왕부지(王夫之, 1619~1692)는 명말 청초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학자로, 후난성 헝양 출신입니다. 그의 자는 이농(而農), 호는 강재(薑齋)이며, 만년에는 석선산(石船山)에서 은거하며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왕부지는 황종희(黃宗羲)와 고염무(顧炎武)와 함께 명말 청초의 삼대 유학자로 꼽힙니다. 그는 젊은 시절부터 뛰어난 재능을 인정받았으나, 명나라의 멸망 이후에는 관직에 나아가지 않고 고향에서 학문 연구에 몰두했습니다. 왕부지는 반청 저항운동에 참여했으나, 명나라 회복의 희망이 없음을 깨닫고 은퇴하여 학문에 전념했습니다. 그의 저서 중 하나인 《영력실록》(永曆實錄)은 그가 경험한 역사적 사실을 기록한 것입니다. 왕부지의 철학은 주로 기철학(氣哲學)에 기반하고 있으며, 그는 '리(理)'와 '기(氣)'의 관계를 탐구했습니다. 그는 '리'가 구체적이고 역사적인 '기'의 과정 속에서 드러나는 질서라고 주장하며, 주희의 이원론적 관점에 반대했습니다. 그의 사상은 구체적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자 하는 실용적인 접근을 강조했습니다. 그의 저작은 100여 종에 달하며, 《주역외전》(周易外傳), 《독통감론》(讀通鑑論), 《송론》(宋論) 등이 있습니다. 특히 《독통감론》은 역사적 사실을 논평하며 정치와 경제, 문화 전반에 걸친 탁월한 사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왕부지는 청나라에 대한 저항의 상징으로 여겨지며, 그의 사상은 후에 청말의 개혁파 및 혁명파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그는 학문 연구에 몰두하며 고고한 삶을 살았고, 그의 철학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연구되고 있습니다. 왕부지는 사서대전설에서 사서의 내용을 단순히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철학적 의미와 역사적 맥락을 분석합니다. 그는 주자학의 해석을 비판하며, 사서가 지닌 본래의 의미와 가치를 재조명하려고 했습니다. 이를 통해 그는 독자들에게 사서의 깊은 이해를 제공하고, 유교 사상의 발전에 기여하고자 했습니다. 이 책은 왕부지의 사상과 학문적 기여를 보여주는 중요한 저작으로, 후대의 유학자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사서대전설은 유교 경전의 해석과 교육에 있어 중요한 참고자료로 여겨지며, 왕부지의 학문적 업적을 이해하는데 필수적인 작품입니다.
* 고염무(顧炎武, 1613년 ~ 1682년)는 명말 청초의 저명한 사상가이자 학자로, 주로 경세치용(經世致用)과 고증학(考證學)의 발전에 기여한 인물입니다. 본명은 강(絳)이며, 자는 충청(忠淸), 후에 염무(炎武)로 개명하였습니다. 그는 강소성 곤산에서 태어나 청나라 강희 연간에 사망했습니다.
- 생애 고염무는 어린 시절부터 학문에 매진하였으며, 14세에 제생 자격을 취득한 후 명나라의 멸망까지 고전과 정치, 경제에 대한 깊이 있는 학습을 이어갔습니다. 그는 명나라가 멸망한 후에도 반청 활동에 참여하며, 여러 지역을 여행하며 역사와 지리, 음운학 등을 연구했습니다. 청나라의 관직 제의를 여러 차례 거절하고, 주로 민간에서 학문에 전념하였습니다.
- 사상 고염무는 주자학의 전통을 따르면서도, 공허한 담론을 비판하고 실용적인 학문을 강조했습니다. 그는 경학과 사학의 연구를 통해 학문이 실제 사회에 기여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경세치용의 신학풍을 열었습니다. 그의 저작은 경학, 사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걸쳐 있으며, 대표적인 저서로는 《일지록》(日知錄), 《천하군국이병서》(天下郡國利病書), 《음학오서》(音學五書) 등이 있습니다.
- 고증학의 개조 고염무는 청대 고증학의 개조로 평가받으며, 그의 연구 방법론은 실증적이고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역사적 자료를 철저히 검토하고, 이를 통해 진실을 추구하는 학문적 태도를 견지했습니다. 이러한 접근은 후대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 평가 및 영향 고염무는 명나라 유학자의 대표적 인물로, 그의 학문적 태도와 기개는 동시대의 황종희, 왕부지와 유사한 점이 많아 청초의 3대 유학자로 불립니다. 그의 사상과 저작은 후에 청나라의 실학적 기풍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현대 중국의 학문적 전통에도 중요한 기여를 하였습니다.
《일지록(日知錄)》 : 명말청초 실학사상의 정수
서론 : 시대적 배경과 저자 고염무(顧炎武, 1613-1682)는 명말청초(明末清初)의 격변기를 살았던 대표적 학자로, 명나라의 멸망을 직접 목격하고 청나라의 지배를 받아들이지 않았던 유민(遺民) 지식인이었습니다. 그는 과거제도를 통한 출세를 거부하고 평생을 학문 연구와 실지 답사에 바치며, 망국의 원인을 철저히 분석하고 국가 재건의 방도를 모색했습니다. 《일지록》은 바로 이러한 그의 평생에 걸친 학문적 성과와 정치적 문제의식이 집약된 대표작입니다.
ㅇ 《일지록(日知錄)》의 명칭과 학문적 지향 책의 명칭인 “일지록(日知錄)“은 《논어(論語)》 자장편(子張篇)의 “군자는 날마다 그가 모르던 바를 알고, 달마다 그가 할 수 있는 바를 잊지 않으면 배우기를 좋아한다고 할 수 있다(日知其所亡 月無忘其所能 可謂好學也已矣)“는 구절에서 유래했습니다. 이는 단순히 매일 깨달은 바를 기록한다는 의미를 넘어, 날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고 이를 실천으로 연결하여 성인(聖人)의 경지에 이르고자 하는 고염무의 실학적(實學的) 태도를 명확히 드러냅니다. 그는 공허한 이론 탐구가 아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으로 실제 문제 해결에 도움이 되는 학문을 추구했습니다.
ㅇ 저술의 배경과 목적 고염무가 《일지록》을 저술한 직접적 계기는 1644년 명(明) 왕조의 멸망이라는 민족적 비극이었습니다. 그는 나라가 망한 근본 원인을 당시 지배적이었던 송명이학(宋明理學), 특히 공리공담(空理空談)에 치우친 공소한 성리학(性理學)과 심학(心學)에서 찾았습니다. 이러한 학풍이 경세치용(經世致用)의 실용적 학문 전통을 약화시켜 통치 기제의 실패를 초래했다고 판단한 것입니다.
따라서 《일지록》은 단순한 학술서가 아니라, 명 왕조 부흥을 위한 정치 개혁론이자 국가 재건의 청사진을 담은 경세서(經世書)의 성격을 강하게 띠고 있습니다. 고염무는 경학(經學)을 중심으로 하는 실용적 학문 태도로의 복귀를 주장하며, 이를 통해 훈련된 실무형 인재를 등용해야 한다고 역설했습니다. 이는 공자(孔子) 이래의 고전 유학 정신으로 돌아가 경전의 본래 의미를 실증적으로 탐구하고, 이를 현실 정치에 적용하자는 복고유신(復古維新)의 학문 운동이었습니다.
ㅇ 내용 구성과 범위 《일지록》은 고염무가 평생 동안 독서하고 연구하며 수시로 기록한 내용을 집대성한 것으로, 전체 32권(卷)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통행본(通行本) 기준으로 1,021개 조목(條目) 또는 1,015개 항목으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내용은 극히 광범위하며, 크게 다음의 일곱 가지 영역을 포괄합니다.
첫째, 경학 해석(經學解釋) : 《시경(詩經)》, 《서경(書經)》, 《역경(易經)》, 《예기(禮記)》, 《춘추(春秋)》 등 유교 경전의 문자 훈고(訓詁)와 의미 해석을 다룹니다. 고염무는 한대(漢代)의 고문경학(古文經學) 전통을 계승하면서도 송대(宋代) 주희(朱熹)의 해석을 비판적으로 검토했습니다.
둘째, 고증학적 방법론(考證學的 方法論) : 경전과 역사 문헌의 자구(字句)를 실증적으로 분석하고, 음운학(音韻學), 문자학(文字學), 금석학(金石學) 등을 동원하여 객관적 고증을 시도합니다. 이는 청대 고증학(考證學)의 선구적 방법론이 되었습니다.
셋째, 정치제도론(政治制度論) : 봉건제(封建制)와 군현제(郡縣制), 과거제도(科擧制度), 관료제도(官僚制度), 부세제도(賦稅制度) 등 역대 정치제도의 득실을 분석하고 개혁 방안을 제시합니다.
넷째, 사회경제제도(社會經濟制度) : 전제(田制), 병제(兵制), 세제(稅制), 염철(鹽鐵) 등 경제 정책과 사회 제도를 다루며, 특히 토지제도 개혁과 민생 안정을 강조합니다.
다섯째, 역사의식(歷史意識) : 역대 왕조의 흥망성쇠를 분석하고, 특히 명나라 멸망의 원인을 역사적으로 고찰합니다. 여기서 그의 유명한 망국(亡國)과 망천하(亡天下)의 구분론이 제시됩니다.
여섯째, 전통과 풍속(傳統과 風俗) : 예악제도(禮樂制度), 관혼상제(冠婚喪祭), 지방 풍속, 민간 신앙 등 사회문화 전반을 다룹니다.
일곱째, 박문잡지(博聞雜識) : 천문(天文), 지리(地理), 물산(物產), 어학(語學) 등 백과전서적 지식을 광범위하게 수록합니다.
ㅇ 학문적 의의와 영향 1. 청대 고증학의 개산조(開山祖) 고염무는 경전 연구에서 송명 성리학자들의 주관적 해석을 배격하고, 한대(漢代) 훈고학(訓詁學)의 실증적 방법론을 부활시켰습니다. 그는 “광정박고(廣徵博考)”, 즉 널리 증거를 구하고 많은 자료를 고증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음운학(音韻學)과 문자학(文字學)을 경학 연구의 기초로 삼았습니다. 특히 그의 《음학오서(音學五書)》는 고대 음운 체계를 복원하여 경전의 정확한 독해를 가능케 했습니다.
이러한 고증학적 방법론은 18세기 건가학파(乾嘉學派)의 대휴(戴震), 단옥재(段玉裁), 왕념손(王念孫) 등에게 계승되어 청대 학술의 주류를 형성했습니다. 고염무는 “경학즉이학야(經學卽理學也)”, 즉 경학이 곧 이학이라는 명제를 제시하여, 경전의 객관적 연구를 통해 도덕적 진리에 도달할 수 있다고 보았습니다.
2. 실사구시(實事求是) 정신의 확립 고염무는 “공리공담(空理空談)“에 빠진 명대 학풍을 신랄히 비판하며,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 방법론을 확립했습니다. 이는 반한서(班固의 《漢書》)에 나오는 하간헌왕(河間獻王) 유덕(劉德)의 학풍을 본받은 것으로, 사실에 입각하여 진리를 추구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는 “독서필선유용지학(讀書必先有用之學)”, 즉 독서는 반드시 유용한 학문을 우선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학문은 경세제민(經世濟民)에 기여해야 한다는 실용주의적 학문관을 천명했습니다. 또한 “군자위학이명도야비위독서야(君子爲學以明道也非爲讀書也)”, 즉 군자가 학문하는 것은 도를 밝히기 위함이지 단순히 책을 읽기 위함이 아니라고 하여, 경세치용의 학문 목적을 분명히 했습니다.
3. 천하흥망론(天下興亡論)과 사회적 책임의식
고염무의 가장 유명한 명제는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입니다. 그는 《일지록》 권13 “정시(正始)“조에서 망국(亡國)과 망천하(亡天下)를 명확히 구분했습니다. 망국은 단순히 왕조가 바뀌고 성씨(姓氏)가 변경되는 것을 의미하지만, 망천하는 인륜(人倫)과 도의(道義)가 무너지고 백성이 금수(禽獸)와 같이 되는 상황을 뜻합니다.
고염무는 왕조의 교체는 군주와 신하의 책임이지만, 천하의 존망은 천하 모든 사람, 즉 필부필부(匹夫匹婦)에게도 책임이 있다고 보았습니다. 이는 전통적인 군신론(君臣論)을 넘어서 일반 백성에게도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참여를 요구한 혁신적 주장이었습니다. 이러한 사상은 후대 민족주의 운동과 시민의식 형성에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4. 조선 실학(朝鮮 實學)에 미친 영향 《일지록》은 18세기 초 조선에 전래되어 조선 후기 실학자들에게 지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성호 이익(星湖 李瀷, 1681-1763)의 《성호사설(星湖僿說)》은 내용 구성과 서술 방식에서 《일지록》과 유사한 백과전서적 특징을 보입니다. 이익은 고염무의 실증적 고증 방법과 경세치용의 학문 태도를 수용하여 조선의 현실 문제를 분석했습니다.
다산 정약용(茶山 丁若鏞, 1762-1836)도 경전 연구에서 고염무의 방법론을 적극 활용했습니다. 정약용의 《경세유표(經世遺表)》, 《목민심서(牧民心書)》, 《흠흠신서(欽欽新書)》 등은 고염무의 경세치용 정신을 계승한 작품들입니다. 또한 정약용은 《상서고훈(尙書古訓)》, 《시경강의(詩經講義)》 등 경학 연구에서도 고염무의 실증적 고증 방법을 따랐습니다.
북학파의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과 초정 박제가(楚亭 朴齊家) 등도 《일지록》의 영향을 받아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학 사상을 발전시켰습니다. 이처럼 《일지록》은 18-19세기 조선 실학의 이론적 토대를 제공한 중요한 텍스트였습니다.
ㅇ 《일지록》의 역사적 위상 《일지록》은 명말청초의 격변기에 전통 유학을 재건하고 새로운 학문 방법론을 제시한 기념비적 저작입니다. 고염무는 이 책을 통해 공허한 의리론(義理論)에서 벗어나 실증적 고증과 실용적 경세론으로 학문의 방향을 전환시켰습니다. 그의 “실사구시(實事求是)”, “경세치용(經世致用)”, “천하흥망 필부유책(天下興亡 匹夫有責)“의 정신은 청대 학술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아시아 지식인 사회 전반에 심대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특히 《일지록》은 학문이 단순한 지식 습득이나 개인 수양에 그치지 않고, 반드시 사회 개혁과 민생 안정에 기여해야 한다는 실학적 이념을 확립했다는 점에서 근대 전환기 동아시아 사상사의 중요한 전환점을 마련한 저작으로 평가됩니다.
(7) 따르다, 《荀子》〈非十二子〉「不法先王,不是禮義」 요, 순, 우, 탕, 무왕, 주공(선왕)의 제도를 본받지 않고, 예의와 의리도 따르지 않았다.
* 앞문장 : "尚法而无法,下修而好作,上则取听于上,下则取从于俗,终日言成文典,反紃察之,则倜然无所归宿,不可以经国定分;然而其持之有故,其言之成理,足以欺惑愚众:是慎到、田骈也。“
(8) 視와 通, 살피다, 《老子》第二十二章「不自見, 故明, 不自是, 故彰」 자기 고집을 주장하지 않으면 즉 선입견을 제거하면 사물 분석이 명쾌해지고, 스스로를 살피면 즉 스스로 옳다고 여기면 앞에서는 수그리는 것 같지만 뒤에서는 손가락질 한다.
《逸周書》〈周祝〉「是彼萬物必有常,國君而無道以微亡」 만물이 반드시 항상 규율이 있는 것을 살피면, 임금이라도 무도하면 쇠망한다.
*微亡 = 衰亡
(9) 왜냐하면, 《逸周書》〈常訓〉「夫禮非克不承,非樂不竟,民是乏生」 무릇 예는 극기수신 않으면 전승될 수가 없다. 음악은 실천을 통해서 화합하지 않으면 완성되지 않는다. 그래서 백성들은 이로 인해서 그런 도덕 교합 그런 마음이 생겨 나길 바란다.
* 《일주서(逸周書)》는 중국 주나라(周, BC 1046년경~BC 256년) 시대의 역사 역사 기록과 정치 문서를 집대성한 중요한 문헌입니다. 이 책은 유교 경전인 《상서(尙書)》, 즉 《서경(書經)》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으면서도, 《상서》에 수록되지 않은 별도의 주나라 관련 문헌들을 포괄하고 있어 주대(周代) 역사와 문화를 연구하는 데 있어 《상서》를 보완하는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1. 명칭 및 유래 본래 명칭 : 본래는 《주서(周書)》라고 불렸는데, 이는 상서(尙書) 중 주나라 관련 기록을 모은 부분과 동일합니다. 현재 명칭 : 한나라 시대에 유향(劉向) 등이 고대 문헌을 정리할 때, 이미 공자가 편집했다고 전해지는 《상서》에 포함된 '주서' 부분 외의 나머지 문서들을 구별하기 위해 '일(逸)' 자를 붙여 《일주서》로 부르게 되었습니다. 즉, 《상서》에 수록되지 않은 주나라의 남겨진 기록이라는 의미입니다.
2. 내용과 특징 《일주서》는 다양한 성격의 문서를 포함하고 있으며, 주로 주(周) 왕조 초기의 정치, 군사, 외교, 제도 등에 관한 기록입니다.
- 주요 내용 : 역사 기록 :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나라(商)를 정복한 이후부터의 왕실 사적 및 주요 사건 기록. 정치/제도 : 관제(官制), 봉건 제도, 법률 등 주나라의 통치 시스템과 관련된 기록. 군사/전쟁 : 군사 작전, 전술, 무기에 대한 기록. 철학/윤리 : 군주가 갖추어야 할 덕목이나 통치 철학에 대한 논의. 문체 : 대부분의 편이 사관(史官)이나 대신들이 왕에게 올린 보고나 명령, 혹은 기록을 바탕으로 한 연설문 형태로 되어 있어, 간결하고 강직한 고대의 문체를 보여줍니다. 가치 : 주나라의 초기 역사와 문화, 제도를 연구하는 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며, 《상서》를 보완하는 역할을 합니다. 다만, 일부 내용에 대해서는 후대인의 첨삭이나 위작(僞作) 가능성 등 학술적 논란이 존재합니다.
3. 편제와 전승 편수 : 현재 전해지는 《일주서》는 보통 70편(篇)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고대에는 71편으로 전해지기도 했으나, 1편이 실전되었습니다. 전승 : 이 책은 수많은 전란과 혼란을 거치며 일부 내용이 유실되었지만, 위진남북조(魏晉南北朝) 시대에 이르러 비로소 지금과 같은 형태로 정리 되어 전승되었습니다. 특히 한나라 이전부터의 고대 문자(고문)로 쓰인 부분들이 많아, 문헌학적으로도 중요한 연구 대상입니다.
* 《일주서(逸周書)》는 《상서》에 수록되지 않은 주나라의 남겨진 기록이라는 설과, 또 다른 학설은 전국시대 사람들이 한 세대가 지나간 후 첨가한 것이라는 설도 있습니다.
(10) 비록~일지라도, 《戰國策》〈魏策一〉「吳起對曰:河山之險,信不足保也., 是伯王之業,不從此也」 오기가 대답하기를 강과 산이 험준한 것은 족히 믿을 수 없고, 비록 패왕의 업적을 완수했을 지라도 이것을 따를 수 없다.
(11) 임무, 《後漢書》〈桓譚馮衍列傳〉「人君或至失國而不悟,士或至飢寒而不進。君臣不合,則國是無從定矣。庄王曰善。願相國與諸大夫共定國是也。 蓋善政者,視俗而施教,察失而立防,威德更興,文武迭用,然後政調于時,而躁人可定」 임금 중에 나라를 잃고도 깨닫지 못하는 경우가 있고, 선비 중에 굶주리고 추위에 이르러도 공부하지 않는다.(進) 임금과 신하가 화합하지 않으면 나라는 그 중요한 임무가 확립될 수 없다. 초나라 장왕은 좋은 내용입니다. 원컨대 재상은 제 대부들과 더불어 함께 나라를 안정시켜 주세요. 대개 정치를 잘하는 사람은 풍속을 살펴 가르침을 베풀고, 잘못을 살펴서 방비를 세우고, 위엄과 덕이 교차해서 일어나고, 학문과 무술을 번갈아 사용한 연후에 정치는 시대의 요구에 부합되고, 떠돌아 다니는 백성도 가히 안정될 수 있다.
(12) 시기, 《史記》〈項羽本紀〉「于是大風從西北而起,折木發屋, 揚沙石,窈冥晝晦,逢迎楚軍。楚軍大亂,壞散,而漢王乃得與數十騎遁去。欲過沛,收家室而西;楚亦使人追之沛,取漢王家;家皆亡,不與漢王相見。漢王道逢得孝惠、魯元,乃載行。楚騎追漢王,漢王急,推墜孝惠、魯元車下,滕公常下收載之,如是者三。曰:雖急,不可以毆!奈何騎之! 于是遂得脱。求太公、呂后不相遇。審食其從太公、呂后間行,求漢王,反遇楚軍。楚軍遂與歸報項王,項王常置軍中」 그래서 큰 바람이 서북쪽에서 불어 와 나무를 부러뜨리고, 집을 훼손하고, 모래와 돌을 날려 보내고,천지가 어둡고 침침해 잘 안보이는데 초군이 밀어 닥쳐 난리를 치니,유방의 군대가 패배하고 흩어지니 이에 한왕이 수십 기병과 함께 도망갔다. 패현을 지나 가족을 수습해서 서쪽으로 가려 했다. 초나라 군사도 패현까지 좇아 와서, 한왕의 식솔을 잡았다. 가족은 모두 도망가서 한왕과 마나지 못햇다. 한왕은 도로에서 효혜와 노원을 만나 수레에 태웠다. 초나라 기병이 한왕을 추격해 오자 한왕이 급해지니 효혜와 노원을 수레에서 밀어 떨어 뜨렸다. 등공이 항상 내려서 그들을 태워 주었다. 이렇게 3번이나 반복되었다. 비록 급하더라도 채찍질해서 수레를 빨리 몰면 안되는가. 어쩔수 없어 탔다. 그래서 드디어 위기를 벗어 났다. 태공과 여후를 찾았으나 만나지 못했다. 심이기(審食其)가 태공과 여후를 잠행하여 한왕을 찾았으나 초군을 만나게 되었다. 초군은 돌아가서 드디어 항우에게 보고 하니, 항우는 항상 군중에 구류시켰다.
* 여후와 척부인 간의 암투와 권력 다툼 여후(呂后)와 척부인(戚夫人)은 한나라의 창업자인 유방(劉邦)의 두 아내로, 그들 사이의 권력 다툼은 역사적으로 매우 잔혹하고 복잡한 사건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여후는 유방의 정실부인으로, 유방의 사후 권력을 장악하게 되며, 척부인은 유방의 총애를 받던 측실로서 여후와의 갈등이 극심했습니다.
- 여후의 권력 장악 유방이 사망한 후, 여후는 아들 혜제(惠帝, 유영)를 즉위시키고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의 친족인 여씨 일족을 고위 관직에 앉히며 여씨 정권을 수립합니다. 여후는 유방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과 그 아들 유여의(劉如意)를 제거하기 위해 잔인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는 독살당하고, 척부인은 감금되어 극심한 고문을 당하게 됩니다.
- 척부인의 비극적 운명 척부인은 유방의 사후 여후의 복수극의 주요 대상이 됩니다. 여후는 척부인 을 감옥에 가두고,그녀의 손과 발을 자르고, 눈을 뽑아 귀머거리로 만들며, 결국 '인간돼지(人彘)'라는 끔찍한 상태로 만들어 버립니다. 이러한 잔혹한 처벌은 여후가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척부인을 제거 하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 정치적 배경과 갈등 여후와 척부인 간의 갈등은 단순한 개인적 원한을 넘어서 정치적 권력 다툼으로 발전했습니다. 유방은 척부인의 아들 유여의를 태자로 삼으려 했으나, 여후는 이를 반대하며 자신의 아들 유영을 지키기 위해 척부인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여후는 척부인과 그 아들을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권력을 더욱 공고히 하려 했습니다.
- 결론 여후와 척부인 간의 암투는 한나라 초기의 정치적 혼란과 권력 투쟁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여후의 잔혹한 복수와 권력욕은 역사적으로 악명 높은 사례로 남아 있습니다. 이 사건은 권력의 본질과 그로 인해 발생하는 비극을 잘 보여 주는 예로, 후세에 많은 교훈을 남겼습니다.
* 중국 역사에서의 혜(惠)가 들어가는 왕들 중국 역사에서 "혜(惠)"라는 시호가 붙은 왕들은 다음과 같습니다 : 한나라의 혜제, 서진의 혜제, 그리고 명나라의 혜제입니다. 각 왕의 특징과 역사적 배경을 살펴보겠습니다.
1. 한나라의 혜제 (효혜제, 漢惠帝) 이름 : 유영(劉盈) 재위 기간 : 기원전 195년 ~ 기원전 188년 배경 : 한 고조 유방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어머니는 여치(여태후)입니다. 유영은 17세에 즉위했으나, 실질적인 권력은 그의 어머니 여태후가 장악했습니다. 정치적 상황 : 혜제는 성격이 유약하여 정치적 결정에 큰 영향력을 미치지 못했습니다. 여태후는 자신의 권력을 강화하기 위해 여러 정치적 음모를 꾸몄고, 혜제는 이러한 상황 속에서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하지 못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한나라는 비교적 평화로웠으나, 이는 여태후의 정치적 수완 덕분이었습니다. 사망 : 혜제는 24세의 나이에 사망하였고, 자손이 없이 죽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여태후의 영향력 아래에서 한나라의 기틀을 다지는 데 기여했습니다.
2. 서진의 혜제 (서진 혜제, 西晋惠帝) 이름 : 사마충(司馬衷) 재위 기간 : 290년 ~ 307년 배경 : 서진의 제2대 황제로, 무제 사마염의 아들입니다. 혜제는 지적 장애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서진은 내전과 권력다툼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정치적 상황 : 혜제는 실질적인 정치적 권력을 행사하지 못하고, 외척과 귀족들에 의해 조종당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 동안 팔왕의 난과 같은 내전이 발생하여 서진의 국력이 약화되었습니다. 혜제는 "쌀이 없으면 고기라도 먹지!"라는 유명한 일화로도 알려져 있으며, 이는 그의 무능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사망 : 혜제는 307년에 사망하였고, 그의 통치 기간은 서진의 몰락을 가속화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습니다.
3. 명나라의 혜제 (명 혜제, 明惠帝) 이름 : 주윤문(朱允炆) 재위 기간 : 1398년 ~ 1402년 배경 : 명나라의 제2대 황제로, 태조 홍무제의 아들입니다. 혜제는 건문제라는 연호를 사용했습니다. 정치적 상황 : 혜제는 즉위 후, 아버지의 정책을 이어가려 했으나, 숙부인 영락제 주체와의 권력 다툼에서 패배하여 실종되었습니다. 그의 통치 기간은 짧았지만, 명나라 초기의 정치적 혼란을 상징하는 인물로 남아 있습니다. 사망 : 혜제는 숙부의 반란으로 인해 권좌에서 물러나고, 이후 그의 운명은 불확실하게 남아 있습니다. 전해지는 바에 따르면, 그는 자살했거나 숙부에 의해 제거되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혜(惠)"가 들어가는 왕들은 각기 다른 시대와 상황 속에서 통치하였으며, 그들의 통치 방식과 결과는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습니다.
* 혜릉(惠陵)은 중국 역사에서 중요한 인물인 한나라의 혜제(惠帝), 즉 유영(刘盈)의 능입니다. 혜제는 한나라의 두 번째 황제로, 그의 통치 기간은 기원전 194년부터 기원전 188년까지입니다. 혜릉은 그가 사망한 후 그의 묘소로 조성되었습니다.
《漢書》〈陳勝傳〉「數日,號召三老豪桀會計事。皆曰:將軍身被堅執銳,伐無道,誅暴秦,復立楚之社稷,功宜爲王。勝乃立爲王,號張楚。于是諸郡縣苦秦吏暴,皆殺其長吏,將以應勝。以廣爲假王,監諸將以西擊滎陽」 여러 날이 지나고 교화 담당 지방관(三老)과 호걸을 소집하여 어떤 대책을 의논했다. 모두가 말하기를 장군은 굳센 갑옷을 입고 무기를 들고 무도한 자를 징벌하고 난폭한 진나라를 처벌하고, 다시 초나라의 시직을 세우셨으니 공로로 왕이 되는 것이 마땅하다.이게 진승이 왕으로 세워지고, 나라 이름을 장초라 불렀다. 이에 여러 군현에서 진나라 관리의 폭정에 고통 받던 사람들이 모두 지방관(장리)들을 죽이고 장차 진승에게 호응했다. 오광을 가왕으로 세우고, 여러 장군을 감독하게 하고 서쪽으로 형양을 공격했다.
* 假王 ~전쟁주이나 권력 투쟁중 세운다. 자식이 왕위 계승권이 없다. 眞王 ~자식이 왕위 계승권이 있음.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46강(2024,04,11) 강의 교안
* 義利之辨 義利는 道義와 利慾의 생략이다. 義는 사상 행위가 일정한 도덕 표준에 부합하는 것을 가리킨다. 利는 利益, 功利 등을 가리킨다. 義利之辨(義와 利의 분별)은 도덕적 행위와 물질적 이익의 관계에 관한 문제에 대하여 논쟁한 것으로, 도덕적 행위와 물질적 이익의 관계에 대해서 어떤 관점을 가지는 것을 가리킨다. 義利之辨에 대하여 아래에 중요 인물과 학파의 주장을 소개하였다.
1) 孔子(春秋) - 孔子의 義利之辨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見利思義」이다. 《論語》〈里仁〉「君子喻于義, 小人喻于利」에 보인다. 즉 君子는 道義에 대해서 분명히 알고, 小人은 利慾에 대해서 분명히 안다. 다만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君子와 小人의 개념이다. 君子는 후대의 도덕이 고상한 사람이 아니고 勞心者 즉 마음을 쓰는 자로 통치계급 구성원이며 士를 포함한다. 小人은 후대의 비열하고 몰염치한 사람이 아니고 勞力者 즉 힘을 쓰는 자로 피통치계급 구성원이며 평민과 노예를 포함한다.
* 견위수명(見危授命)의 의미 견위수명(見危授命)은 공자의 가르침에서 유래한 성어로,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친다"는 뜻입니다. 이 표현은 공자의 제자 자로(子路)가 성인의 품격에 대해 질문했을 때, 공자가 답한 내용 중 하나로, 위험한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헌신하는 자세를 강조합니다.
출처와 해석 이 성어는 《논어·헌문편(論語·憲問篇)》에서 유래하였으며, 원문은 다음과 같습니다 : "见利思义,见危授命,久要不忘平生之言,亦可以为成人矣." 이 문장은 "이익을 보면 의로움을 생각하고, 위험을 보면 목숨을 바치며, 오래된 약속을 잊지 않는다면, 그 사람은 성인이라 할 수 있다"는 의미입니다.
의미와 중요성 위험에 대한 헌신 : 견위수명은 단순히 개인의 안전을 넘어, 국가나 공동체의 위기 상황에서 자신의 생명을 기꺼이 내놓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충성과 희생의 상징으로, 특히 역사적으로 중요한 순간에 자신의 목숨을 바친 인물들과 연결됩니다. 도덕적 기준 : 이 성어는 개인의 도덕적 기준을 세우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공자는 사람에게 이익을 추구할 때 의리를 먼저 생각하고, 위기 상황에서는 두려움 없이 행동할 것을 요구했습니다. 이는 현대 사회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가치로 여겨집니다.
역사적 사례 안중근 의사는 이 성어를 자신의 좌우명으로 삼아,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친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는 일본의 침략에 맞서 싸우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희생한 사례로, 견위수명의 정신을 잘 보여줍니다.
결론 견위수명은 단순한 성어가 아니라, 개인의 도덕적 책임과 사회적 의무를 강조하는 중요한 개념입니다. 공자의 가르침을 통해 우리는 위기 상황에서의 용기와 헌신의 중요성을 다시 한번 되새길 수 있습니다. 이 성어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많은 이들에게 영감을 주며, 정의로운 행동을 촉구하는 메시지로 남아 있습니다.
2) 孟子(戰國) - 孟子는 孔子의 사상을 계승하였고 특별히 義를 중시하였으며 한마디로 정의하면 「何必曰利」이다. 孟子의 義利之辨은 《孟子》〈離婁上〉「仁, 人之安宅也., 義, 人之正路也。曠安宅而弗居, 舍正路而不由, 哀哉!」 즉 仁은 사람이 편안히 거주하는 정신적 안식처이고 義는 사람이 행하는 행위의 가장 바른 길이다. 편안히 거주하는 정신적 안식처를 비워놓고 거주하지 않는 것은 인간 행위의 가장 바른 길을 버리고 그곳으로 가지 않는 것과 같으니 얼마나 슬픈 일인가! 또 《孟子》〈告子上〉「生, 亦我所欲也., 義, 亦我所欲也。二者不可得兼, 舍生而取義者也」라고 하였다. 즉 生命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고 道義 또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만약 두 가지를 겸해서 소유할 수 없다면 차라리 道義를 선택하고 生命을 버릴 것이다. 生命과 義 두 가지를 모두 겸비할 수 없으면 義를 위해서는 생명까지 포기할 수 있음을 표시하였다.
(2025.11.13. 주정봉 강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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