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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4.13. 16:04 (2026.04.13. 16:04)

윈슬로, 포경 산업 부흥을 원한 프랑스 왕국의 초청으로 르아브르에 정착...포경업의 황금기를 이끈 인물

 
프랑스의 포경산업은 루이 16세(1754~1793)가 통치하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말기인1780년대부터 시작되어, 루이 필리프 1세가 즉위한 ‘7월 왕정(Monarchie de Juillet)’ 시기인 1830년대까지 대서양 무역의 핵심 산업이었다.
프랑스의 고래잡이 산업
 
 
프랑스의 포경산업은 루이 16세(1754~1793)가 통치하던 앙시앵 레짐(Ancien Régime) 말기인1780년대부터 시작되어, 루이 필리프 1세가 즉위한 ‘7월 왕정(Monarchie de Juillet)’ 시기인 1830년대까지 대서양 무역의 핵심 산업이었다.
 
1775년부터 1783년까지 이어진 미국 독립전쟁의 간접적이고 예상치 못한 결과로, 프랑스 포경산업은 화려하게 부활했다. 반면에 신생국 미국은 엄격한 영국의 보호무역주의 정책으로 고래기름(Cetacean oil, 鯨油)과 고래수염(baleen)의 주요 시장을 잃게 되었다. 이런 과정에서 미국 동부 매사추세츠주 뉴베드퍼드(New Bedford) 출신의 경험 많은 선주와 잘 훈련된 선원들, 그리고 낸터킷 섬(Nantucket Island) 출신의 퀘이커 교도들이 자본, 기술, 무역 관행을 프랑스 서북부의 됭케르크와 르아브르(Le Havre) 항구로 이전하는 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874년 클로드 모네가 그린 유화, 르 아부르 큰 부두(사진:위키백과)
 
르아부르 항구는 프랑스 발루아-앙굴렘왕조 초대 국왕 프랑스와 1세(1494~1547)가 1517년 군사적 목적과 더불어 노르망디 지방의 중심도시 루앙 상인들의 요구를 충족시키려고 새로운 항구를 건설하였다. 당시 인근 항구 옹플뢰르(Honfleur)가 계속되는 퇴적 현상으로 항구 기능이 점차 상실해 가고 있어 증가하는 해상 교통 수요를 감당할 새로운 항구 건설이 절실했다.
 
프랑스와 1세(사진:위키백과)
 
옹플뢰르(Honfleur)는 센강 하류와 영국 해협이 만나는 700년 역사의 아름다운 항구 도시로 노르망디의 진주라고 불린다. 17세기 프랑스 재상 콜베르(1661~1683)의 중상주의 정책에 힘입은 항구는 ‘비유 바생(Vieux Bassin, 구 항구)’의 15세기 반목조 주택들과 정박한 요트가 잘 어우러져 화가 외젠 부댕(Eugène Boudin, 1824~1898) 등 많은 인상파 화가들이 영감을 받아 그림을 그렸다. 파리에서 약 2~3시간 거리의 인기 관광지로 성 카트린 성당이 유명하다.
 
비유 바생(Vieux Bassin)(사진:위키백과)
 
1847년에 이르러 철도가 연결되면서 르아부르는 도시가 팽창하고 세관과 창고가 들어서면서 비약적인 발전을 하여 프랑스에서 두 번째 도시로 성장하고 세계에서 8번째로 물동량이 많은 항구로 성장하였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도시 전체가 파괴되는 아픔을 겪었지만, 건축가 오귀스트 페레에 의해 재건되어 현대적인 도시로 재탄생되어 2005년에 풍부한 해양 유산과 현대건축물은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등재되었다.
 
유네스코 세계유산 르아부르(사진:위키백과)
 
미국 뉴잉글랜드 퀘이커 교도였던 로치 가문(Rotch family)은 18세기와 19세기에 난터켓에서 미국 포경산업을 개척하고, 이후 뉴베드퍼드를 ‘세계 포경 수도’로 성장시켰다. 윌리엄 로치(1734~1828)와 같은 인물들이 이끄는 이 가문은 거대한 해양 제국을 건설했다. 1773년 12월 16일에 영국의 지나친 세금 징수에 분노한 주민들이 인디언으로 위장한 후 보스톤 항구에 정박한 배에 올라 실려있던 홍차 상자를 바다에 던져버렸다. 이때 로치 가문 소유의 다트머스호와 비버호가 ‘보스턴 차 사건’에 연루되기도 했다. 조셉 로치는 낸터킷 섬에서 배, 고래잡이, 양초 공장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1765년 뉴베드포드로 이전하여 포경 허브로 만들었다.
 
14m의 향고래 (사진:New Bedford Whaling Museum)
 
윌리엄 로치는 독립혁명기에 경제적 손실을 당했지만, 극복했다. 메리 로치는 선원의 베델을 설립하는 데 도움을 주었다. 로치 가문의 유산은 1834년에 매사추세츠주에 지어진 뉴베드포드의 로치-존스-더프 하우스 앤 가든 박물관(Rotch-Jones-Duff House & Garden Museum)에 보존되어 있다.
 
초기 박물관은 아들 로치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부지에 윌리엄 로치 주니어(William Rotch Jr.)를 기리기 위해 건축가 리처드 업존(Richard Upjohn)에게 설계를 부탁하여 그리스 복고풍(Greek Revival) 건축 양식으로 지었다. 박물관과 관련된 세 가문은 모두 뉴베드퍼드를 지배했던 고래잡이 산업과 밀접한 관련이 있어 그 역사적 가치를 인정받아 박물관은 2005년 국가사적지로 지정된 뉴베드퍼드 포경 국립역사공원의 일부로 운영되고 있다.
 
Rotch-Jones-Duff House and Garden Museum(사진;위키백과)
 
뉴베드포드의 황금기 역사와 당시의 주거 문화를 보여주는 로치-존스-더프 하우스는 단순한 건축물을 넘어 19세기 포경산업을 보여주는 중요한 건축물이다. 1880년에 설립된 로치 트래블링 장학금을 통해 건축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로치 가문(the Rotch family)과 함께 19세기 최초의 프랑스 고래잡이 선주였던 제레미아 윈슬로(Jeremiah Winslow, 1781~1858)의 활약을 통해 프랑스 고래잡이 산업은 대서양을 넘나드는 인적 자원, 사회경제적 자원, 기술의 교류로 산업을 발전시켰다.
 
제레미아 윈슬로는 1781년 미국 매사추세츠주 팰머스에서 태어났다. 그는 난터켓에서 보험업에 종사하다 1817년 1월, 포경 산업 부흥을 원하던 프랑스 왕국의 초청으로 르아브르에 정착해 프랑스 포경업의 황금기를 이끈 인물이다. 프랑스는 수년간 침체한 고래잡이 산업을 활성화하기 위해 1816년 2월 8일 외국에서 건조된 선박의 프랑스 항구 입항과 3년간 외국인 선원 고용을 허용하는 법령을 발표했다. 고용 조건은 선원 3분의 2가 외국인이어야 했으며, 원정에는 선박 톤당 50프랑의 보너스가 지급되었다. 윈슬로는 400톤급 포경선을 이끌고 르아브르 항구에 도착했고, 이후 여러 척의 배가 그 뒤를 따랐다. 윈슬로는 1821년 프랑스 시민으로서의 시민적, 정치적 권리를 부여받았다.
 
프랑스 포경선(사진;위키백과)
 
그가 주도한 고래잡이 사업은 새로운 법령 덕분에 번성하여 상당한 규모로 성장했다. 1829년부터 보조금이 톤당 90프랑을 지급하여 17척의 미국 포경선이 프랑스로 선적 국가를 옮겼다. 윈슬로는 1830년 이후 8척으로 구성된 포경선단을 운영하며 수백 명의 선원과 많은 선박을 운영하며 프랑스의 고래기름 공급을 주도했다.
 
윈슬로 포경선단 14척이 1818년부터 1868년 사이에 포획한 고래 수는 총 2,975마리였다. 그는 1817년부터 1830년까지 46회 이상의 항해를 주도하고 여러 선박을 보유하며 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아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가 소유한 주요 선박으로 1821년 윈슬로가 피셔(Fisher) 선장과 모파(Maupas) 부선장에게 항해 지침을 내린 기록이 남아 있는 조지 앤 앨버트(Georges & Albert)호는 281마리를 포획했다. 1830년 윈슬로가 남해(South Seas) 포경을 위해 무장시킨 메릴랜드(Maryland)호에는 33명의 승무원이 탑승해 246마리의 고래를 잡았다. 가문의 이름을 딴 선박 윈슬로(Winslow)호는 1828년에 건조되어 90마리의 고래를 잡았고, 1868년 르아브르로 돌아오며 프랑스 포경 시대의 종말을 알린 상징적인 선박이다.
 
범선 우표(사진:LH Archives)
 
프랑스 포경선 선주들은 1817년부터 1868년까지 약 50년 동안 고래잡이에 참여했다. 고래잡이 선원들은 바다 직업 중 가장 힘들고 위험한 일을 했다. 포경선은 200~350톤급의 3개 돛대를 가진 배로, 5~7척의 사냥용 카누를 갖추고 있었다. 이 카누는 작살잡이, 선장, 그리고 4명의 선원, 총 6명이 노를 저어 조종했다. 남극해를 항해하는 포경선에서는 5척의 카누를 구명정 발사대에 매달아 운반했다. 그러나 북극해를 항해하는 배는 카누를 갑판에 보관했다가 어장에 도착하면 준비했다. 르아브르 항구는 1826년부터 1830년까지 매년 60척의 배가 이곳 부두를 출항했다. 60척 중 1836년에는 35척만이 남아 있었고, 선원은 1,165명이었다. 그 수는 이후 계속 감소하여 1841년에는 21척, 1847년에는 13척, 1857년에는 5척, 그리고 1862년에는 3척이 되었다.
 
1840년대와 1850년대의 긴 항해 동안, 포경선들은 계절의 흐름에 따라 태평양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여러 번 횡단했다. 남반구의 여름에는 뉴질랜드에 정박했다가, 북반구의 빙하가 녹고 낮이 가장 길어지는 시기인 짧은 여름철을 활용하기 위해 베링 해협으로 향하는 길에 다시 적도를 건넜다. 당시 하와이는 프랑스 포경선의 기항 및 보급 기지 역할을 했다. 어업 활동은 주로 호주 남쪽과 뉴질랜드에서 이루어졌다.
 
북대서양과 남대서양에서 고래류가 부족해지자 어선들은 호주 어장, 뉴질랜드 어장으로 향하게 되었다. 1837년부터 1844년까지 8년 동안 프랑스 고래잡이 선단의 4분의 1이 이 지역에 집결했다. 수개월에 걸친 고된 항해 동안에 거친 바다에서 포경선은 손상되고 난파되어 항해 일지에 기록된 글을 보면 선원들이 사람이 살지 않는 해안이나 적대적인 원주민이 거주하는 섬에 고립되기도 했다. 선원들은 사기가 저조하고, 항해 기간이 길고 노동이 힘들어 포경선을 자주 벗어났다.
 
르 아브르 그랜드 극장(1844년 10월 19일, 주춧돌)우표(사진:LH Archives)
 
토마스 윈슬로의 기록물은 그가 활동했던 프랑스 르아브르와 고향인 미국 낸터킷에 보존되어 있다. 프랑스 르아브르 시립기록보관소(Archives municipales du Havre)에는 윈슬로가 1821년 프랑스 시민권을 얻고 포경선을 무장시키며 활동한 비즈니스 기록, 포경 규제 관련 서류, 서신 등이 보관되어 있다. 1985년부터 투르네빌 요새에 르아브르에 설치된 시립기록보관소는 2025년 3월 28일에 보수를 마치고 재개관했는데, 기록물의 길이가 약 12km이다.
 
프랑스 르아브르 시립 기록보관소(사진: FTV/ Kanwaljit Singh)
 
미국 낸터킷역사협회는 윈슬로 가문의 뿌리가 있는 곳으로 가문 관련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뉴베드포드 고래잡이박물관은 고래잡이 관련 데이터를 보유한 곳으로, 윈슬로가 프랑스로 가기 전 활동했던 시절의 기록과 항해 일지(Logbooks) 등을 볼 수 있다.
 
르아브르 자연사박물관(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르아브르 자연사박물관(Muséum d'histoire naturelle du Havre)은 르아브르의 해양 및 포경의 역사가 상설 전시되고 있다. 또한, 윈슬로가 이 항구 도시의 경제에 미친 영향과 당시의 포경 장비 등을 관람할 수 있다. 미국 낸터킷 포경박물관은 낸터킷 출신 선주들이 어떻게 유럽으로 건너가 산업을 확장했는지에 대한 역사적 맥락과 유물들을 전시하고 있다.
 
1690년 화가 아브라함 스토크가 그린 고래잡이(사진:위키피디아)
 
프랑스 포경산업의 황금기는 1830년에서 1844년 사이로 주 어장이 뉴질랜드 근처 남태평양이었다. 1845년부터 포경산업이 쇠퇴하기 시작해 1860년대 초반에 북태평양과 조선 연안을 떠난 이후 1868년에 완전히 몰락했다. 포경선이 출항하면 3년간 대서양을 지나 아프리카 남단을 돌아서, 인도양에서 중국, 한반도, 일본, 오오츠크해를 지나 태평양 건너 하와이, 남미 칠레를 지난 뒤 다시 대서양을 건너서 르아브르 항구에 입항했다.
 
독도(Dokdo, 獨島)(사진:이효웅)
 
범선 리앙쿠르호는 1832년 르아브르 조선소에서 건조되었다. 배는 돛대 두 개, 대포 두 개를 갖춘 431톤 규모로 1838년부터 5차례 걸쳐 포경선으로 활동했다. 특히 1847년에 르아브르 항구에서 출항해 1849년 1월 27일에 한반도 동해를 항해하면서 독도를 발견하고 ‘리앙쿠르 암초(Îlots Liancourt)’라고 명명했다. 포경선은 1850년에 르아브르 항구로 돌아왔다가 다시 출항하여 2년 후 1852년 오호츠크해에서 좌초되었다.
 
리앙쿠르호의 이름은 프랑스 최초의 기술학교를 1780년 설립한 과학자이며 정치가로 유명한리앙쿠르(1747~1827) 백작의 이름을 따서 명명하였다. 리앙쿠르호의 선장 기록을 살펴보면 카스퍼(Asa Bullard Casper, 1798~1850) 선장은 1833~1834년, 로몽(Frédéric Romon) 선장은 1834~1835년, 라폰첸느(Pierre Nicolasa Lafontaine) 선장은 1835~1836년, 넬(Etienne Sebastian Kernelle(Knell)de La Rochelle) 선장은 1836~1840년에 승선했다.
 
갈로트 드 수자(Galotte De Souza, 1804~1883) 선장은 로페즈(Jean Lopez)로 알려져 있다. 그는 1830년에 르아브르에 도착하여 1833년 리앙쿠르호의 일등항해사, 1836년 부선장이 되었다. 1838년 프랑스 국적을 취득하고 선장이 되어 5회(1840~1842, 1842~1844, 1844~1847, 1847~1850, 1850~1852) 항해를 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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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