VS 여러분! 반갑습니다.    [로그인]   
  
키워드 :
  메인화면 (다빈치!지식놀이터)  
지식놀이터
지식자료
지식자료 구독
구독 내역
게시판
게시판
작업요청
최근 작업 현황
지식창고
지식창고 개설 현황
자료실
사용자메뉴얼
about 지식놀이터

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6.03. 11:58 (2026.06.03. 11:58)

검 착용 일본 순경, 난동소식 듣고 치열하게 칼싸움 벌여 6명 사망 72명 부상...마젠중 외교관, 대원군 청 강제압송 주도

 
1886년 8월 나가사키 淸國 水兵 사건
1886년 7월 청국 북양함대 소속 군함 「定遠」, 「鎮遠」, 「済遠」, 「威遠」, 「超勇」, 「揚威」 6척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 동해안의 원산항에 기항했다. 북양함대는 귀로에 올라 「定遠」, 「鎮遠」, 「済遠」, 「威遠」 4척이 8월 1일 나가사키 항구에 들려 석탄 연료의 보급하고 군함 「定遠」과 「鎮遠」은 정비를 하였다.
1886년 8월 나가사키 淸國 水兵 사건
 
 
1886년 7월 청국 북양함대 소속 군함 「定遠」, 「鎮遠」, 「済遠」, 「威遠」, 「超勇」, 「揚威」 6척이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조선 동해안의 원산항에 기항했다. 북양함대는 귀로에 올라 「定遠」, 「鎮遠」, 「済遠」, 「威遠」 4척이 8월 1일 나가사키 항구에 들려 석탄 연료의 보급하고 군함 「定遠」과 「鎮遠」은 정비를 하였다.
 
8월 13일, 청나라 수병 500명이 일본 당국의 허가 없이 무단으로 상륙했다. 술에 취한 일부 병사가 거리를 배회하며 여성들을 쫓아다니는 등 난폭한 행동을 하였다. 수병 중에 한 무리는 유곽을 방문했는데, 등루(登樓) 예약이 모두 잡혀 있고, 대기 순서를 두고서 오해가 생겨 화가 난 한 수병이 난동을 부리며 비품을 파괴했다. 신고를 받은 나가사키현 경찰부의 마루야마마치 파출소 순경 2명이 수병 진압에 나서, 난동 주모자 2명을 체포해 파출소로 연행했다. 함께 외출했던 수병들은 체포된 동료 수병을 구하기 위해 다른 수병들을 호출하여 파출소를 포위했다. 일부 수병은 인근 골동품가게에서 구입한 칼로 무장한 상태였다. 위협을 느낀 순경은 상급 경찰서에 급히 지원을 요청하고 경찰봉으로 맞섰다. 지원 나온 경찰관은 일부 수병들을 체포해 하마마치 경찰서로 연행했다.
 
8월 14일, 나가사키현 지사 구사카 요시치요(日下義雄, 1852~1923)는 수병들의 난동에 심히 고심했다. 지사는 청국 영사 차이쉬안과 회담을 가져 청국 측 군함은 집단으로 수병이 상륙하는 것을 금지하고, 상륙을 허용할 경우 반드시 감독할 수 있는 장교를 동행하도록 합의했다. 이에 따라 경찰은 전날 구금한 수병들을 청국 측에 인도했다. 그러나 8월 15일 날이 밝자 약속한 협정을 지키지 않고 오후 1시경에 300명의 군함 수병이 몰래 상륙을 감행했다. 곤봉과 칼로 무장한 수병도 있었다. 수병들은 순경 3명이 근무하는 파출소를 찾아가 고의로 파출소 주변에 방뇨하며 행패를 부렸다. 순경이 이를 제지하자, 수병이 순경을 주먹으로 때려 난투극이 벌어졌다. 이를 지켜보던 인력거꾼들이 격앙해 순경들을 구하려고 수병에게 달려들었다.
 
나가사키 시민들이 수병 난동 소식을 듣고 달려 나와 집단 난투극이 벌어졌다. 폭동을 저지하러 출동했던 경찰관은 청나라 수병들의 숫자가 많고 칼 등 무기를 소지하고 있다고 판단했다. 요시다 경부보(吉田警部補)는 순경들을 본서로 귀환시키고나서 순경에게 검을 허락했다. 곤봉 대신 검을 착용한 순경들은 현장에 나가 청나라 수병들과 치열하게 칼싸움을 벌여 양측은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이 충돌로 청나라 장교 1명 사망, 수병 3명 사망, 장교 3명 부상하고. 수병 50여 명이 부상했다. 일본 측도 순경 2명 사망, 경감 3명 부상, 순경 16명 부상. 나가사키 시민 10명이 부상했다.
 
북양함대(사진:나무위키)
 
도시를 뒤흔든 수병 사건은 심각한 외교적 마찰로 이어졌다. 사태 수습을 위해 청일 양국은 나가사키에서 영국과 프랑스인 변호사가 참여하는 위원회를 소집했다. 도쿄에서는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 외무대신과 서승조(徐承祖) 청나라 주일 공사가 협상을 진행하며, 영국, 독일 등의 중재를 거쳐 1887년 2월 최종 합의에 도달했다. 합의 내용은 사건 당사자들은 각자 소속 국가의 법률로 처벌하며, 피해자에 대한 위로금으로 일본은 52,500엔, 청은 15,500엔을 상호 지급하기로 정했다. 당시 일본의 개항 지역에서는 치외법권이 있어 나가사키 사건의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 상호 군함 왕래에 대해 규칙을 제정하고, 양국의 군함이 상대국을 방문할 때 상대국의 현지 규칙을 철저히 지키고, 상륙하는 사병의 숫자를 엄격히 제한하도록 약속했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청나라는 일본에 사과하지 않고, 오히려 압도적인 해군력을 배경으로 고압적인 태도로 임했다. 심지어 “나가사키에 함포 사격을 가하겠다.”라고 위협까지 했다. 힘의 열세를 절감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저자세를 취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청나라는 「定遠」 함을 비롯한 최신식 전함들을 보유하고 있어 일본 해군을 이길 수 있다고 믿었다. 수병 난동 사건은 단순한 사건이 아니었다. 일본제국 해군력 군비 확장의 결정적 도화선이 되었다. 메이지 천황이 직접 나서 내탕금을 하사하며 해군 선박 건조를 위한 성금을 모아 기동력이 뛰어난 속사포 중심의 함대를 구축하는 계기가 되었다.
 
征韓論者 도야마 미쓰루(頭山 滿)(사진:위키피디아)
 
한국-일본 관계사와 독도 주권 문제를 연구하는 역사학자 황용섭(黃瓏燮) 박사는 2019년 강원대학교 사학과 대학원에 제출한 박사학위 논문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 1866~1914)를 통해 본 日本의 ‘大陸政策’과 獨島侵奪〉에서 겐요사의 사상덪 전환과 대륙 침략을 깊이 있게 분석했다. 황 박사는 논문에서 “극우 사상가 도야마 미쓰루(頭山 滿, 1855~1944)는 1879년 동지들과 코요사(向陽社)를 결성하고 1881년 向陽社을 겐요샤(玄洋社, 흑해협회)로 명칭을 바꾸고 국회 개설 청원운동에 주력하였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1886년 8월 나가사키 수병 사건 등을 계기로 차츰 국권주의와 아시아주의로 전환하게 되었으며 한반도와 대륙 침략의 첨병 거두로 암약하게 되었다.”라고 분석했다.
 
황 박사는 외교관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 1866~1914)의 행적을 주목했다. 야마자 엔지로는 1892년 제국대학 법학과 졸업하고 외무성에 입사했다. 그는 조선 부산에 건너와서 경부선 철도 부설 예정지를 미리 조사하며 침략의 발판을 마련했다. 이후 코무라 주타로(小村寿太郎, 1855~1911) 외무대신 밑에서 日英同盟、日露交渉、対露開戦外交 등에 깊숙이 간여했다. 그리고 대한제국의 병합과 독도 불법 편입, 일본의 대륙 침략 정책을 막후에서 기획하고 주도한 핵심 인물로 추정했다.
 
외교관 야마자 엔지로(山座円次郞)(사진:일본국립국회도서관)
 
1888년 북양대신 이훙장(李鴻章)의 주도로 창설된 북양함대는 동양 최강의 전력을 자랑했다. 함대는 딩루창 제독의 지휘 아래 편제하고, 류부찬을 제독으로 승진시켜 주력함을 이끌게 했다. 딩루창 제독은 함대를 창설한 1888년부터 청일전쟁이 발발한 1894년까지 북양함대 사령관을 역임하고, 1894년에는 해군 부대신으로 승진했다. 북양함대 딩루창 제독은 사전에 일본 정부의 양해를 구한 뒤, 1891년 북양함대를 이끌고 두 번째로 일본을 공식 방문해 북양함대의 수행원들이 조선소와 관공서를 시찰했다. 당시 군함이 한국에 도착하면 관행으로 선박을 공개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극동함대는 이에 맞추어 주력함 정원에 일본의 황족이나 장관, 해군 장교들을 모두 초청해 내부를 공개했다. 청나라가 일본 측 인사를 군함에 초대한 것은 북양함대의 위엄을 과시하며 일본의 도발 의지를 꺾으려는 속셈도 있었다. 당시 일본 해군 측은 첩보원들을 모두 동원해 정원함의 선내 구조, 북양함대 사병들의 군기, 무기 체계, 업무 숙련도까지 세세하게 파악했다. 북양함대는 이듬해인 1892년에도 일본을 방문했다.
 
위안스카이(袁世凱) 1882년 사진
 
1882년 조선에서 임오군란이 발생하자, 청나라 조정은 당시 광동수사제독(廣東水師提督)으로 있던 우창칭(吳長慶, 1829~1884)을 조선에 파병했다. 우창칭은 이훙장(李鴻章)을 수행하며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해 공로를 인정받아, 1880년에 浙江提督, 廣東水師提督으로 연이어 승진했다. 그는 산둥반도 덩저우(登州)에서 북양수사 군함 4척을 이끌고 조선 남양만 마산포(현재 화성시 송산면 고포리, 시화방조제 안쪽)로 출항할 때 자신의 심복이자 믿을만한 참모로 23세의 위안스카이(袁世凱)를 선발했다.
 
조선에 도착한 후 군무(軍務)를 담당하게 된 위안스카이는 청나라 군사 3,000여 명을 이끌고 한성에 입성했다. 그리고 임오군란 중심지인 이태원과 왕십리 등지를 공격해 조선의 구식 군대를 무력으로 진압했다. 위안스카이 군사부 차장은 한성에 입성 혼란 통에 재물을 약탈하고 민가의 여인을 탐해 군율을 어지럽힌 청나라 병사를 과감히 즉결 처형하여 군기를 확립했다. 그는 신건친군(新建親軍)을 창설해 훈련을 주도하며 청나라 영향력을 확대했다.
 
우창칭(吳長慶)列傳(사진:위키백과)
 
1882년 8월 26일 오전, 청나라 해군 사령관 우창칭은 군부 반란 세력을 등에 업고 약 8년 4개월 만에 대권을 장악한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과 운현궁에서 마주 앉아 필담을 나누었다. 이후 우창칭은 한성에 주둔하는 동안 친청파(親淸派)들을 앞세워 조선의 내정에 깊이 관여하고 청국 상인의 조선 진출에 막강한 영향력을 주었다. 조선에서 정세를 좌우하던 우창칭은 1884년(광서 10년) 4월 청불전쟁이 일어나자, 李鴻章의 명을 따라 병력 1,500명을 이끌고 요동 지역 금주(金州)에 주둔했다. 그런데 1884년 7월 13일 주둔지에서 갑작스럽게 병사하여 사후에 청나라 조정은 무보(武寶)라는 시호를 내렸다.
 
청나라 외교관 마젠중(馬建忠, 1845~1900)은 프랑스로 유학해 변호사가 된 인재이다. 그는 정치 감각이 뛰어나 양무운동(洋務運動)을 추진했던 이훙장의 막하에서 활동하며 인도, 조선 등에서 중요한 외교 교섭을 담당했다. 그는 외교현장에서 조선의 자주적인 근대화 노력을 방해하고, 견제하며 속국화(屬國化) 정책을 밀어붙였다. 그는 외교 현안마다 청나라의 종주권과 개입을 명문화하는데 앞장섰다. 그는 광서(光緖) 8년(1882, 고종 19년) 3월에 조선을 방문하여 조선과 미국, 영국, 프랑스와의 수호통상조약을 막후에서 중재하고 체결하는데, 깊게 관여했다. 그는 조선과 프랑스 제3공화국과의 수호통상조약에 관해 조언한 뒤 4월 23일 귀국해 수교 과정을 《東行三錄》에 남겼다. 《東行三錄》은 1897년에 청나라 대규모 지리총서인 《小方壺齋輿地叢鈔再補編》에 수록되어 출간되었다.
 
청나라 외교관 마젠중(馬建忠)이 저술한 《東行三錄》을 연구한 학자는 전남대 정해리 선생으로 2020년 중국인문학회에서 발간한 중국인문과학 제76집에 〈근대 중화질서의 재편과 조선 인식의 변용〉이란 제목으로 논문을 발표하며 근대 동아시아 역사에서 청나라 지식인이 조선을 어떻게 인식하고 재편하려 했는지를 규명했다. 필자는 어렸을 때 서대문에 건립된 독립문이 왜 건립되었는지 유래를 전혀 모르고 성장했다. 중학생이 되어 청일전쟁이 끝난 후 청나라 사신을 맞이하던 영은문(迎恩門)을 허물고 청나라와의 사대 관계를 청산하기 위해 건립한 독립문이 청나라에 대한 독립을 뜻하는 유적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외교관 마젠중(馬建忠)(사진:위키백과)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청나라 외교관 마젠중은 세 번째로 조선을 방문해 군란의 수괴로 지목된 흥선대원군(1820~1898)을 청나라로 강제 연행하는 밀명을 수행했다. 마젠중은 흥선대원군에게 임오군란(음력 6월 5일, 양력 7월 19일)의 책임자로 몰며 느닷없이 “남양만을 건너 황제의 유지(諭旨)를 받는 것이 어떠냐?”라고 강하게 압박했다. 대원군이 이에 대한 거부할 틈도 주지 않았다. 청나라 병사들은 대원군을 납치해 가마에 태운 뒤 청나라 군함이 대기하고 있는 남양만 마산포로 강제 압송했다. 외교관 마젠중은 조선에서 청나라의 종주권을 강화하는 데 앞장서고, 철도 부설과 이금(釐金: 중국 근대 물품세) 감면을 통한 상공업 정책을 주도했다. 귀국 후에는 중국 최초의 근대적 문법서인 마씨문통(馬氏文通) 책을 저술했다.
 
텐진의 대원군(1882년 양력 9월 말 촬영)
 
흥선대원군은 대권을 잡은 지 불과 33일 만에 청나라로 끌려가는 초라한 비운의 신세가 되었다. 대원군은 청나라 북양수사 소속 군함 등영주(登瀛州, 1,258t) 함을 타고 북양대신 이훙장이 있는 청나라 텐진(天津)으로 압송되어 9월 1일 밤늦게 항구에 도착했다. 열흘이 지나 처음 이훙장과 마주 앉아 조사를 받으며 항변을 하였다. 대원군은 이번 군란의 괴수가 아님을 말했다. 대원군은 오랜 시간 혹독한 조사를 받고, 형식적인 재판 절차를 거쳐 텐진에서 서쪽으로 약 180km 떨어진 직례성 성도 바오딩부(保定府) 칭허다오수(淸河道署)로 이송되어 9월 27일 최종 유폐되었다.
 
대원군은 칭허다오수에서 3년 동안 그림을 그리며 복잡한 마음을 달랬다. 분노와 고통의 세월을 그대로 삼켰다. 그러던 중 고종이 러시아 세력을 끌어들여 복잡한 정세를 만들자, 청나라는 고종을 견제시킬 인물로 대원군을 주목해 석방을 결정해 3년 2개월 만에 억류에서 풀려났다. 대원군은 위안스카이의 삼엄한 호위 아래 1885년 음력 8월 25일 제물포를 통해 조선 땅을 밟았다. 고종은 직접 숭례문 밖까지 나아가 아버지 대원군을 영접했다.
 
조선에 돌아온 대원군은 파란(波瀾) 많은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며 ‘一樹梅前一老儂’라고 시구로 묘사했다. 이는 한 그루 매화 앞의 한 늙은이라는 뜻이다. 그는 운현궁 이로당(二老堂)에 칩거하다 1898년 79세로 생을 마감했다. 대원군을 조선으로 호위한 위안스카이는 감국대신(監國大臣)으로 9년간 조선에서 총독처럼 군림하며 조선의 내정에 깊이 간여했다. 도봉산 망월사에는 위안스카이의 붓글씨가 남아있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유바다 교수는 2017년 고려대학교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학위 논문 2부의 내용을 보완하여 고려대 역사연구소에서 발행한 사총(史叢)에 논문 〈1885년 駐紮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袁世凱의 조선 파견과 지위 문제〉를 발표했다.
 
바오딩부(保定府) 칭허다오수(淸河道署)(사진:위키피디아)
 
중국 정부는 허베이성(河北省) 바오딩(保定市)에 위치한 흥선대원군이 유폐 당해 머물던 칭허다오수(淸河道署, 바오딩시 난스취(南市區) 싱화루(興華路) 7-17)라는 청나라 지방 하급기관을 청나라 실록에 근거하여 1993년 허베이성 문물보호단위(文物保護單位)로 지정했다. 인천광역시는 2001년 자매도시 중국 텐진시에 대원군 유폐 장소의 공개를 정식 요청해 텐진시는 허베이성 당국에 협조를 얻어내 2001년 3월 초 언론에 처음 공개되었다. 당시에는 민간인들이 거주하며 방치가 되었으나, 이후 주변이 정비되어 문화재 지정 안내판이 설치되었다.
 
1882년 임오군란이 발발하자, 일본제국은 군함 3척을 제물포로 파견했다. 청나라의 위안스카이는 일본 군대의 선제 상륙을 우려해 조선 정부에 일본과의 신속한 협상을 하라고 종용했다. 임오군란 진압 이후 조선 정부는 일본제국과 1882년 8월 30일(음 7월 17일) 제물포 조약을 체결하고 피해보상금 55만 엔을 지급하며, 일본 공사관 수비에 경비병 200명 주둔을 허용했다. 1882년 양력 10월 4일(음력 8월 23일)에 조선과 청나라는 조선을 청의 속국으로 명문화시킨 청상민수륙무역장정(朝淸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했다. 이 조약 장정 8조 안에는 재판 관할권이 大淸에 부여되고, 외교관 임용도 大淸의 동의를 얻도록 규정했다. 이후 조선은 조일수호조규 속약, 조일통상장정 등을 체결해 청국과 일본 상인이 왜관이나 차이나타운 거주 구역을 넘어 조선 영토로 진출하게 되어 1891년에는 청나라인 거류민은 2,000명, 일본인 거류민은 8,600여 명에 육박하게 되었다.
 
갑신정변(甲申政變) 개화당파(사진:국사편찬위원회DB)
 
청나라의 잦은 내정간섭으로 조선의 개화 정책이 점점 느려지자,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 서광범, 홍영식 등 급진개화파들은 자주 회동하였다. 불만이 증폭되자, 대책을 논의한 끝에 1884년 양력 12월 4일(음력 10월 17일)에 개화파 세력이 청나라에 의존하는 수구당을 몰아내고 개화 정권을 수립하려고 우정총국 개국 축하연에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 그러나 청나라 군대의 신속한 개입으로 정변은 3일 만에 실패하고 주동자들은 일본제국으로 망명했다. 1970년대 이후 이 변란은 역사학계의 중립적인 시각에서 갑신전란, 갑신반란, 갑신혁명당의 난(甲申革命黨의 亂) 등으로 불리다 현재는 갑신정변(甲申政變)으로 통칭되고 있다.
 
청나라는 1884년 조선에서 갑신정변이 일어나자, 일본과의 전면적인 충돌을 염려해 북양통상대신 이훙장에게 사후 처리에 대한 모든 권한을 위임했다. 이에 이홍장은 1884년 베이징(北京) 및 청나라 북부 지역 국방책임자로 임명된 흠차회판북양사의(欽差會辦北洋事宜) 우다청(吳大澂, 1835~1902)을 조선에 급파해 진상 조사를 하게 한다. 우다청은 500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조선에 들어와 한 달 넘게 체류하면서 갑신정변에 대한 조사, 조선 정부 및 일본과의 교섭을 주도했다. 이후 1885년 청나라와 일본은 톈진조약(天津條約)을 체결하였다. 이 조약에는 조선 내 세력 균형을 맞추기 위해 조선에서 청·일 양군 철수, 조선 왕의 군대 훈련 권고, 향후 조선에 변란 발생 시 파병할 경우 상대국에 통지하기로 하는 내용이 있다.
 
固安縣 청년인재역참(靑年人才驛店)(사진:궁인창)
 
필자는 2023년 11월 중국 타이항산(太行山) 지역 문화유적 답사에 참여했다. 11월 20일 구안현(固安縣) 청년인재역참(靑年人才驛店)에서 하룻밤을 묵은 뒤, 다음 날 아침 관광버스에 올라 바오딩(保定市)시로 향했다. 바오딩시는 청나라 말기 이훙장이 직례총독(直隷總督)으로 28년간 집정하며 권력의 중심지로 삼았던 역사 도시이다. 바오딩시는 수도 베이징을 방어하는 군사 요충지로 베이징에서 직례총독이 파견되어 상주했던 이곳은 구한말 임오군란의 소용돌이 속에서 조선의 흥선대원군이 청나라 군대에 납치되어 유폐 당했던 비극의 현장이기도 하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 참조 지식지도
▣ 다큐먼트
▣ 참조 정보 (쪽별)
◈ 소유
◈ 참조
©2004 General Libraries

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