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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6.04. 19:34 (2026.06.04. 19:34)

임진왜란 남원 전투때 패배해 포로로 잡혀가 힘들게 탈출해 복주 거쳐 조선 귀국...피로인 정희득과 기적처럼 편지 교환, 금계일기 남겨

 
일본과 명나라를 다녀온 노인(魯認)
2026년 5월, 가족과 함께 일본 시코쿠 도쿠시마 지역으로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왔다. 여행하며 여러 명소를 둘러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내내 무거웠다. 이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많은 사람이 강제로 끌려와 힘들게 거주했던 회한의 땅이라 겉으로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남모를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일본과 명나라를 다녀온 노인(魯認)
 
 
2026년 5월, 가족과 함께 일본 시코쿠 도쿠시마 지역으로 문화유적 답사를 다녀왔다. 여행하며 여러 명소를 둘러보았지만, 마음 한구석은 내내 무거웠다. 이 지역이 임진왜란 당시 조선의 수많은 사람이 강제로 끌려와 힘들게 거주했던 회한의 땅이라 겉으로 태연하게 행동했지만, 속으로는 남모를 피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나루토 해협(사진;궁인창)
 
지난 10여 년간 일본의 한적한 소도시 여행을 통해 임진왜란 당시 피로인(被擄人)의 흔적을 찾아 발품을 팔아왔다. 예전에 나루토 해협을 배를 타고 몇 번 지나갔지만, 위에서 본 물살은 대단했다. 격렬한 바다를 오가며 살던 사람들은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이 되어 조선 문화재 약탈을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도쿠시마 시립 도쿠시마 성 박물관은 에도 시대의 유물로 가득 차 있었다., 박물관 내부 촬영이 금지되어 역사적 흔적을 보려고 전시장에서 오래 머물렀다. 답사 여행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 몇 년 전에 집필한 노인(魯認, 1566~1622)에 관한 글을 다시 펼쳐 들었다. 그동안 글을 완성하지 못한 것은, 노인의 여정을 완벽하게 추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노인은 남원전투에서 패해 일본에 포로로 잡혀갔다가 힘들게 탈출하여 명나라 福州를 거쳐 조선에 돌아왔다. 노인의 필사적인 탈출을 따라가 보았다.
 
19세기 도쿠시마 선박(사진;궁인창)
 
울산대 노성환 교수는 〈일본 시코쿠 지역의 임란 포로에 관한 일고찰 -가가와, 도쿠시마, 고치 지역을 중심으로-〉 논문을 2015년 《일본문화학보》 제66집에 게재하였다. 노 교수의 논문은 일본 시코쿠 지역의 사누키(讃岐), 아와(阿波), 도사(土佐)로 연행된 사람들의 삶과 흔적을 상세히 추적해 여러 번 반복해서 읽었다. 이 도시는 현재 가가와현(香川県), 도쿠시마현(德島県), 고치현(高知県) 지역이다. 논문 속에 흥미로운 내용이 있었다. 노인이 포로로 도사(土佐)에 머물고 있을 때 도쿠시마에 있던 선비 정희득(鄭希得, 1573~1623)과 편지를 몇 차례나 주고받았는데, 그것은 정말 놀라운 편지 왕래였다. 일본 사람이 피로인의 편지를 전달했다.
 
정희득은 조일전쟁(丁酉再亂) 1597년 8월 27일에 일본군에 잡혀 끌려갔다가 1599년 7월 20일 기적같이 고국에 돌아왔다. 그는 약 2년여에 걸친 피로인(被虜人) 생활을 통해 일본의 문물을 직접 보고 들은 것을 적어 1612년 《萬死錄》을 편찬하였다. 이 책을 1723년 증손인 鄭德林이 《月峯海上錄》으로 개칭하였고, 1847년 6대손 鄭潤이 2권 2책의 활자본으로 간행하였다. 정희득의 《萬死錄》에 의하면 무술년 9월 9일의 일기에 “어떤 왜인의 전하는 말에 선비 노인이 도사(土佐)에 산다고 하기에 그 왜인의 편에 편지를 한 통을 부쳤더니 뒤에 그 답을 보았었다.”라고 적혀 있다.
 
《萬死錄》(사진:국립중앙박물관)
 
노인은 “호접(胡蝶)은 황홀하여 참이 아니라 말하지 말라, 너 아니면 어떻게 내 어버이 뵈울 수 있으리, 밤마다 물결 넘어 고국으로 돌아가노니, 여창에 찾아온 졸음 못내 사랑하노라”라는 시를 정희득에게 보냈다. 밤마다 꾸는 꿈을 통하여 자신이 나비가 되어 바다를 건너 조선으로 돌아간다고 했다. 이에 정희득은 “봉함을 뜯으매 마치 친구 얼굴 보는 것 같은데, 두 늙은 어버이를 생이별한 그대가 오히려 부러워라. 다 함께 나그네 되어 서로 만나지 못하니, 그리운 마음 한밤의 꿈만 바쁘네!”라고 화답했다.
 
정희득은 왜군에게 잡힐 때 모친, 형수, 아내, 누이 일가족 4명이 모두 바다에 몸을 던져 목숨을 거두었다고 적었다. 이에 노인은 “만 번 죽다가 살아남은 나그네, 타향에서 외로이 슬퍼하네, 어버이 생각에 피눈물 흘리며, 임금님 그리워 타는 간장, 입 연들 그 누가 말을 알며, 회포 적은 들 누가 재주 사랑하리, 의의히 쓸쓸한 그림자 괴로운데, 바람과 별마저도 시름을 중매하네!”라며 글을 적어 보내고 고국을 그리워하며 도사에서 힘든 생활을 이어 나갔다.
 
금계(錦溪)일기(사진:국립광주박물관)
 
조선왕조 중기의 무신 노인(魯認, 1566~1622)의 자(字)는 공식(公識), 호(號)는 금계(錦溪)이며 본관은 함풍(咸豐)이다. 그는 1566년(명종 21) 전남 나주 노안면(老安面) 하의리에서 아버지 노사증(魯師曾)과 전주이씨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훗날 노인의 공훈과 생전의 무공을 인정받아 사후에 贈吏曹參議 벼슬이 내려졌다. 노인은 나항(羅恒), 김광운(金光運), 이이(李珥)의 문하에서 수학했으며, 이정구(李廷龜), 이덕형(李德馨), 강항(姜沆) 등과 교유했다.
 
《금계일기》는 아쉽게도 앞부분과 뒷부분이 완전히 사려져 1599년 2월 22일부터 同年 6월 27일까지 4개월간의 일기만 전한다. 포로 생활 동안 조선의 문물제도를 그들에게 전하고 일본의 풍속과 습관을 적고, 중국에서의 생활문화를 구체적으로 기록했다.
 
錦溪 노인(魯認, 1566~1622)
 
《금계집》에 의하면 노인(魯認)은 선조(宣祖) 5년에 태어나서 1582년(선조 15) 진사시에 합격하고, 17년에 사마(司馬)하고 18년에는 빙고별제(氷庫別提)가 되었다. 20세에 추천으로 내수사(內需司) 별제(別提)에 제수되었다. 잠시 고향 나주에 내려가 있던 중 임진왜란(壬辰倭亂)이 발발해 아버지의 명령(親命)으로 의병을 모집했다. 가동(家童)을 거느리고 권율(權慄) 장군에 휘하에 들어가 의병으로 전공을 세웠다, 권율을 따라 막의사(幕義使)로서 이치(梨峙)에서 싸우고 행주(幸州)에서 왜군 수천 명을 목을 베었다. 진주(晋州)가 함락되자, 권율을 따라 의녕(宜寧)에서 전첩(戰捷)을 이루었다. 1597년(선조 30) 6월 남원전투에서 필마단과(匹馬單戈)로 적세(賊勢)를 살피던 중 성이 함락되자, 명나라 장수 양원(楊元)은 도망가고 노인(魯認)은 적병(敵兵)을 만나 싸우다가 때마침 안개로 인하여 적탄에 맞고 말에서 떨어져 거의 죽게 되었다. 그는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1535~1619) 병사에게 포로로 잡혀 순천 방납호에서 왜군에게 결박되어 일본의 치쿠젠(筑前, 후쿠오카), 후젠(豊前)의 나카쓰(中津)로 연행되었지만, 끝까지 왜인들에게 굽히지 않았다.
 
그는 왜승(倭僧), 倭官들에게 詩를 지어주고 적정(敵情)을 자세히 탐지했다. 승려 희안(希安)이 그 충절(忠節)에 느껴 밥과 고기반찬을 제공했으나, 인(認)은 아버지와 임금의 생사(生死)를 몰라 죄인(罪人)으로 자처(自處)하여 어육(魚肉)을 먹지 않고 백의(白衣)를 입고 매양 밥을 대하여 눈물을 흘리니 승려 희안은 감탄하여 말하기를 “법(法)을 지키는 사람이자.”라고 말하며 항상 친절히 대하였다. 노인은 일본(日本)의 풍토기(風土記)를 보기를 원하니 승려 희안은 그의 안서당(安西堂)에 소장(所藏)한 그림을 보여주었다. 노인은 그 산천(山川)의 험함과 평탄함을 모사(摸寫)하고 적정(賊情)의 허실(虛實)을 기록하며 지형과 병세를 기록하여 귀국(歸國)할 것을 도모하였다.
 
이듬해 정월 보름에 조선 포로 수십 명과 함께 몰래 배를 타려다가 붙들렸다. 이요(伊豫州) 아케나(浮穴, 에이메현)에서 억류 생활 중 한 차례 배를 타고 탈출하려다 또 실패했다. 도사(土佐, 고치현)로 연행되고 和天州 日根(오사카) 지역 동굴로 이송되었다. 화천주에서 중국 차관 천핑산(陳屛山)과 리위안청(李源澄)을 알게 되었다. 사쓰마(薩摩, 가고시마)로 이송되었을 때 마침 福建省의 관리인 명나라 차관(差官) 임진혁(林震虩)이 일본에 도착했다. 노인은 명나라 사신을 찾아가서 자기의 뜻을 하소연하니 사신이 그 충절(忠節)에 느껴 성찬(盛饌)을 대접했다.
 
노인은 부모와 임금의 안부(安否)를 듣지 못한 것으로 해서 먹지 않고 눈물만 흘리니 명나라의 사대부(士大夫)들이 모두 감탄하기를 “조선을 예의(禮義)의 나라로 일컬음이 과연 허언(虛言)이 아니다.”라고 말하면서 채소와 과일 등으로 접대하고 흰옷과 흰 갓을 만들어 주며 춘추전국시대 초나라의 신포서(申包胥)와 기원전 100년 흉노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가 억류되어 19년간 北海(바이칼 호수)에서 양을 치며 포로 생활을 했던 漢나라 충신 소중랑(蘇中郞, 蘇武)에게 비유하였다.
 
노인은 명나라 사신 임진혁(林震虩) 등과 함께 탈출을 계획하여 1599년 3월 17일 동료 기효순(奇孝淳) 외 조선인 2명, 중국인 4명과 함께 작은 배를 훔쳐 타고 탈출에 성공하여 3월 18일 새벽에 명나라 사신 임진혁(林震虩)아 탄 배에 무사히 승선해 11일 후인 28일 상오 중국 푸젠성(福建省) 浯縣(金門島) 수채(水寨, 성채)에 도착했다.
 
금문도 고량 수수(사진:金門縣) )
 
浯縣은 진먼현(金門縣)의 옛 이름이다. 필자는 2001년 푸젠성(福建省) 福州에서 샤먼(廈門)으로 가는 남방항공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 창밖으로 진먼도(金門島)를 내려다보았다. 金門島의 면적은 151.7㎢로 울릉도의 두 배 정도 되는 큰 섬으로 인구는 14만 명이 거주하고 있다. 샤먼(廈門)에는 세계문화유산 구랑위(鼓浪嶼, 고랑서)가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는다. 안내하는 가이드가 샤먼에서 약 10km 해상에 있는 타이완의 金門島의 아픈 역사를 설명해 주었다. 그리고 지역 특산품인 고량주를 여러 번 언급하며 “금문도 고량은 특산품으로 수수의 표피가 두껍고 사시사철 해무(海霧)가 자욱해 점성이 강한 수수가 자란다.”라고 설명했다.
 
【출전】魯認在三月十八日早晨從日本出發,三月二十八日上午到達福建浯嶼。
 
 
노인이 푸젠성에 도착하고 나서, 4월 1일에 리위안칭(李源淸, 이원청)이 찾아와 반갑게 감사 인사를 하였다. 노인이 자기를 찾아온 이유를 물어보았더니, 놀랍게도 바다에 나갔다가 표류해 조선을 방문했던 일을 자세하게 말해주었다.
 
1596년(명나라 萬曆 24) 리위안청(李源澄)의 사촌인 리위안칭(李源淸)이 50여 명의 사람과 항해 중에 심한 폭풍우를 만나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는데, 제주도의 군인과 백성들의 극진한 환대를 받아 수레와 말을 타고 북쪽 요동(遼東)까지 호위해주고 무사히 가족의 품에 돌아갈 수 있게 해주었다고 자세하게 말했다. 그는 “귀국의 은덕에 감사드리며 절대로 그 은혜를 잊지 않겠다.”라고 말하며 긴 금박지(金绵紙百長)를 선물했다. 이는 푸젠 사람들이 풍습뿐 아니라 의리와 의로움, 감사하는 마음에도 있어 소박하고 정직함을 보여주는 선물을 의미했다. 노인은 깊은 감명을 받아 즉시 시를 써서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출전】
李源澄之同姓從弟李源淸一行五十餘人於一五九六年(明萬曆二十四年)漂流到濟州島,但是不僅受到當地軍民的款待,而且由車馬護送到遼東,終于平安回到家人的懷抱。由此,四月一日,李源淸特地來找魯認表示謝意。從“貴國恩德,粉骨難忘”八個字上了解到福建人民的敦厚民風。而且他還備著“洒金綿紙百丈”(四月一日),把它贈送于魯認,由此表示謝意。可見,當地的民淳俗厚,不仅風俗純樸,人民也誠實篤厚、義氣相挺、不忘恩德。總的來說,福建民風質樸敦厚。對此,魯認感動不已,他亦馬上寫了一首絕句 《謝李源淸來見贈金綿紙》來表示謝意。
 
 
노인은 일본에서 18개월 동안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石蔓子) 무장 밑에서 피로인 생활을 하였다고 기록했다.
 
【출전】 押送到日本之後在薩摩州的島津義弘度過了十八個月的俘虜生活。
 
경남 사천 선진리 왜성(사진:사천tv)
 
시마즈 요시히로는 일본 센고쿠 시대부터 에도 시대까지 사쓰마 번(가고시마현)을 이끈 시마즈 가문의 제17대 당주로 壬辰戰爭에 출전하여 칠천량 해전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키는 데 앞장을 섰다. 그의 부대는 사천 선진리성에 주둔하며 오랜 기간 농성전(籠城戰)을 하였는데, 조명연합군의 대규모 공격을 방어하며 대승을 거두었다. 그의 악착같고 용맹한 전투 성향으로 명나라 역사서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여러 차례 ‘귀석만자(鬼石曼子)’라 기록되고 명과 조선 진영에 공포의 대상이 되었다. 시마즈 요시히로가 이끄는 수군은 노량해전에서 충무공 이순신이 이끄는 조명연합군과 맞붙어 함대의 모두 잃고 일본으로 패주했다.
 
노인이 명나라 사신 李源澄과의 인연으로 무이산(武夷山) 회암서원(晦庵書院)에 들어가니 원유(院儒)와 제생(諸生)들 수백 명이 상좌(上座)에 앉히고 정주(程朱)의 학문(學問)과 강목(綱目) 춘추(春秋) 시서(詩書) 백가어(百家語)를 토론하는데 막히는 데가 없음에 학사(學士)들이 칭찬하고 굴복하여 이르기를 “노선생(魯先生)은 해동(海東)의 공자(孔子)이다.”라고 하였다.
 
몇 개월 동안 무이서원(武夷書院)에서 정주학(程朱學)을 강론했다. 노인은 황제에게 포로로 잡혀있던 동안에 탐지했던 왜적의 실정을 알리고 부모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해 상소(上疏)하여 귀국(歸國)의 뜻을 催歸文을 써 하소연하였다. 이백의 시로 유명한 여산폭포와 시인 임포(林逋)가 살던 서호를 방문했다.
 
명나라 만력제(사진:위키백과)
 
명나라 신종(神宗, 萬曆帝) 황제(皇帝)가 특별히 칙령을 내려 명하기를 “너의 충성은 문천상(文天祥)과 같고 너의 절개는 소무(蘇武)와 같다. 귀국(歸國)하려는 뜻도 가상(嘉尙)하다.”라고 칭찬하고는 7월 16일 노인(魯認)의 귀국을 허락하고 달마(獺馬) 한 필을 주어 원외랑사(員外郞史) 여매(汝梅)를 시켜 베이징까지 호송(護送)하게 하였다. 福州를 떠날 때 학사(學士)들이 각각 노래와 시(詩)를 지어 전별하며 황조유운(皇朝遺韻)이라 하였다. 명나라 민학(閩學)의 대표 인물인 쉬지등(徐即登, 1545~1626)은 호가 匡岳으로 노인에게 백금십양(白金十兩)과 《명종록(明宗錄)》 팔권(八券), 《闽中答问》, 《心性制策》 등 민학(閩學) 경전을 선물하며 종지(宗旨)를 설명했다. 그는 남송 시대의 陸九淵이 창시하고 명나라 시대의 王守仁(王陽明, 1472~1528)이 집대성한 육왕(陸王) 사상은 유학의 한 갈래로, ‘마음이 곧 이치’라는 심학(心學)은 주자학과 달리 외부 사물 탐구보다 내면의 도덕적 자각을 최우선으로 삼는데, 이는 공자의 학문을 사칭한 것으로 사실 道佛 양가의 사상이 뒤섞인 것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양현사(兩賢祠) 서원의 니스허(倪士和)와 셰자오선(谢兆申, ?~1629) 등 10여 명의 문인이 산해관까지 찾아와 그를 배웅하며, 술을 마시고 시를 선물하니 이별의 아쉬움에 감정이 벅차올라 무한한 감회를 느꼈다. 노인(魯認)은 불과 몇 달 안 되는 생활 동안에 무이서원(武夷書院)의 여러 뛰어난 학자(秀才)들과 깊은 우정을 쌓았다.
 
【원문】 《錦溪日記》
《錦溪日記》到六月二十七、八日就結束了。據《錦溪集》載,六月二十六日,軍門以公疏本轉達皇帝的詔書:“皇帝特下忠如祥,節如武之詔”。這就是說魯認的忠誠如文天祥、氣節操守如蘇武,是萬曆皇帝對他的肯定與褒揚。七月十六日,朝廷同意魯認回國,軍門都督以夫馬護送他到北京。離開福州“各衙諸相一院生徒,作序贈詩,又以閩學宗旨(講程朱,斥陸王)”,兩賢祠書院的倪士和與謝兆申等十餘人到山海關為他餞行,飲酒贈詩,別懷無窮。短短的幾個月生活,魯認和武夷書院的諸秀才們結下了深厚的友情。
 
武夷山 武夷精舍(사진;궁인창)
 
필자는 2001년 11월 1일 武夷山 武夷精舍를 방문하고 근처 호텔에서 하루를 묵었다. 무이정사는 주희(朱熹)가 53세 되던 해인 1183년에 건립하여 10여 년간 머물며 性理學을 집대성하고 제자들을 가르친 유학의 성지로 1999년 유네스코 세계복합유산으로 등재되었다.
 
노인(魯認)은 무이서원에서 셰자오선(谢兆申)을 비롯한 많은 지식인과 교류하였다. 셰자오선(谢兆申)은 푸젠성 출신으로 산시성(山西省)의 정평부 태수를 역임하며 唐侯羲, 中帝, 杜元害과 교류했다. 대문장가는 여행을 무척 좋아했으며 기이한 사람들과 어울리고 희귀 서적을 수집하는 것을 즐겨 약 6만 권에 달하는 장서를 소유했다. 그는 16권 분량의 수필집과 8권 분량의 시집을 남겼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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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