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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6.20. 10:57 (2026.06.20. 10:48)

1883년 한일 양국 42조 장정 체결 후 공식연회 장면 그림 남겨... 조선, 관세권 설정 및 방곡령 시행근거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1883년 음력 6월 22일(양력 7월 25일)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은 조선왕조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 1826~1884)과 일본제국 변리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2~1917)가 양국 대표로 회담하여 조인한 총 42조의 장정이다. 정식 명칭은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이다.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1883년 음력 6월 22일(양력 7월 25일) 체결된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은 조선왕조의 독판교섭통상사무(督辦交涉通商事務) 민영목(閔泳穆, 1826~1884)과 일본제국 변리공사 다케조에 신이치로(竹添進一郞, 1842~1917)가 양국 대표로 회담하여 조인한 총 42조의 장정이다. 정식 명칭은 〈재조선국일본인민통상장정(在朝鮮國日本人民通商章程)〉이다. 이 장정은 1876년에 강화도에서 체결된 〈조일통상장정〉 〈조일무역규칙(朝日貿易規則)〉(총 11조)을 개정하여 양국 간의 문제가 되었던 통상 현안을 해소하려고 노력했다. 그 결과 조선은 관세권 설정과 방곡령 시행 근거를 마련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화가 안중식 그림(사진;숭실대박물관)
 
 
조일통상장정 조인 후 열린 공식연회에 민영목, 洪英植, 김옥균(金玉均, 1851~1894), 閔泳翊, 조영하(趙寧夏, 1845~1884), 이조연(李祖淵, 1843~1884), 변원규(卞元圭)와 조선 왕실 통리아문의 ‘교섭통상사무(交涉通商事務)’를 맡은 독일인 묄렌도르프(목인덕, 穆麟德, 1848∼1901)와 부인, 조선 주재 다케조에 신이치로 일본공사 등 12명이 참석했다.
 
당시 20대의 젊은 도화서(圖畫署) 화원 심전(心田) 안중식(安中植, 1861~1919)은 연회에 참석한 인물들과 식탁 위의 조선 요리와 서양 요리, 5개의 유리잔, 식기가 놓인 식탁을 자세하게 기록해 〈조일통상장정 체결 기념연회도〉을 완성했다. 오원 장승업(張承業, 1843~1897)의 화풍을 계승한 심전은 1911년 근대 미술 기관인 ‘서화미술회’를 설립해 후진을 양성하는 등 근대 미술의 기틀을 마련했다. 그는 1919년 3·1 독립투쟁 당시 민족대표 33인을 지원한 혐의로 경찰에 체포되어 극심한 고초를 겪고, 후유증으로 그해 가을 세상을 떠났다.
 
1884년 부산전신국(사진;국제신문)
 
 
일본 외교관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한학자로 이름이 점(漸), 자는 광홍(光鴻, 미쓰아키), 호는 정정(井井)이다, 그는 1882년 11월 6일 조선국 변리공사가 되어서 조선으로 파견되어 1883년(고종 20년) 3월 3일에 외무독판 민영목과 조선과 일본 사이에 체결된 해저 전선 가설에 관한 〈조일해저전선부설조약(朝日海底電線敷設條約)〉을 체결했다. 당시 이 조약은 일본이 해저 전선의 부설 및 운영권을 획득하고, 전선의 운영 기한은 25년으로 하되 부지의 지조(토지세)는 면제한다는 내용이 골자이다. 이 조약에 따라 1884년 부산-나가사키 간 해저 전선이 부설되고, 1885년에 조일해저전선부설조관속약(朝日海底電線敷設條款續約)을 체결하여 조약의 세부 내용을 보완했다.
 
일본 외교관 다케조에 신이치로는 1884년 음력 10월 17일(양력 12월 4일) 벌어진 갑신정변 당시 조선 주재 일본공사로 조선의 개화파를 지원하고, 갑신정변의 사후 수습을 담당하고 1885년 1월 특명전권대사가 된 이노우에 가오루와 함께 일본에 귀국했다.
 
필자는 당시 국제 정치 정황과 조선의 전선 실태를 연구하다 부경대 김윤미 HK연구교수가 《숭실사학》 제43집(2019.12)에 발표한 〈일본의 한반도 군용 해저통신망 구축과 ‘제국’ 네트워크〉 논문을 통해 전선 실태를 상세히 파악할 수 있었다.
 
한성우체총사(사진;우표박물관)
 
 
1876년 강화도조약을 체결한 일본은 조선에 통신 수단 개설을 계속 요청해 조약을 체결하고 1884년 부산에 전신국을 열고 통신 업무를 시작하며 4월에 한성 우정총국(郵政總局)이 설립되어 조선은 일본 전신망을 통해 해외연락을 하게 되었다. 청나라와 일본제국은 동북아 패권을 장악하려고 육상 전선 사업에 총력을 기울여 청나라는 조선에 통신 시설 가설을 요청해 1885년 7월 〈조청전선조약〉을 맺고 인천-한성-의주 간 전선을 연결해 북경을 통신으로 연결했다. 조선은 자구책으로 조선전보총국을 신설하고 1887년 한성-부산을 연결하는 ‘남로전신선’을 설치하기 시작해 1888년 5월 27일 개통했다. 1891년 6월에는 한성-원산 간 ‘북로전신선’을 연결했다.
 
1902년 한성전화소 전경(사진;KT)
 
 
〈조일통상장정〉 제1관부터 8관까지는 일본 상선이 조선의 통상항에 입항한 이후 밟아야 할 각종 수속 및 화물 운반과 관련된 조항으로 일본 상선이 조선의 통상항에 입항하면 먼저 해관의 조사를 받은 다음 48시간 이내에 상선의 선장이나 대리인이 일본 영사관에 서류를 제출하여 입항 수속 절차를 밟았다. 일몰 이후 일출 때까지 해관의 허락 없이 화물을 육지에 내리거나 배에 싣는 행위를 금지하였고, 허가 없이 혹은 정해진 장소가 아닌 곳에 옮긴 물품은 모두 몰수하도록 규정하였다.
 
〈조일통상장정〉 제9관부터 25관은 주로 수출입품 통관 시의 관세 납부, 관세 산정, 면세 등과 관련된 규정들이다. 관세와 관련된 물품 가격의 산정은 해관 감정사의 감정에 따른다거나, 수입화물에 손상이 있을 때 그 파손금액에 따라 감세를 한다거나, 화물 목록에 없는 물품을 숨겨서 관세를 포탈하려고 하거나 화물의 품종 수량을 속이는 경우 물품 압수 및 벌금을 부과한다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26관부터 30관까지는 일본 상선의 출항 절차에 관련된 규정으로 배에 필요한 물품을 구하거나 재난을 피하려고 조선의 통상 항구에 들르는 상선과 어선은 입항 수속 및 출항 수속을 하지 않아도 된다는 규정 등이 포함되어 있다.
 
제31관에는 ‘통상항구의 수리 및 등대 설치를 위해 일본 상선에 톤세를 징수할 수 있다.’라는 규정이 있어 항구와 연안에 간이등대인 등간(燈竿) 및 등대를 설치하기 시작했다. 상선의 화물 육양 및 선적 원칙 등을 자세히 규정하여 통상체제가 자리 잡게 되었다. 그러나 군함이나 측량선 등 특수한 목적 배에 대해서는 조선이 조사할 수 없도록 제한을 두었다.
 
제32관에서는 군함 및 일본 정부에 속한 상품을 탑재하지 않은 선박이 조선국 통상 항에 입항한 경우에는 입항과 출항을 수속하지 않고, 톤세를 물지 않고, 조선의 해관 관리가 이를 조사할 수 없도록 문서화 하였다. 밀무역과 아편 수입을 금지하고, 자연재해나 병란 등의 사고로 식량이 부족할 가능성이 있어 곡식의 수출을 금지할 때는 1개월 전에 미리 지방관이 일본 영사관에 먼저 통보해야 한다는 단서가 붙었다. 이는 조선 측의 방곡령 시행과 관련하여 일본이 통보 시기나 작황 등을 근거로 배상을 요구한 방곡령 사건의 발단이 된 규정이 바로 이 통상장정 속에 포함되어 있었다.
 
제35관은 벌금 몰수 및 기타 벌칙에 관한 사건의 경우 조선 해관장의 고소에 따라 일본 영사관에서 이를 재판한다고 규정하여 영사재판권을 인정하였다.
 
제41관은 일본 어선은 조선의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함경도 연해에서 조업하고, 조선 어선은 일본의 히젠(肥前: 현 사가현과 나가사키현), 지쿠젠(筑前: 현 후쿠오카의 북서부), 나가토(長門), 이와미(石見), 이즈모(出雲), 쓰시마 연안에서 포어(捕魚)할 수 있다는 규정이다.
 
조일통상장정(朝日通商章程) 체결로 일본 어민이 전라도, 경상도, 강원도 연안에서 조업할 수 있도록 허용하여 조선 어민과 갈등이 야기되었다. 당시 조선의 어업은 발달하기 전 상태라 먼바다에 출어할 수 있는 배가 한 척도 없었다. 일본 어민들은 조일통상장정 체결 이후 이 조약의 맹점을 파고들어 근대식 어구와 잠수기 어선을 동원해 무력을 앞세우고 제주도 영해 및 연안을 자주 침탈해 서귀포와 가파도 일대의 전복, 소라 등 수산 자원을 남획해, 어민 및 해녀들과의 생존권 갈등이 극에 달해 제주 해녀가 생계를 위해 육지로 나가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제주도 배령리(盃令里: 挾才, 金陵) 소원알물(사진;고병련)
 
 
《고종실록》 27권, 1890년(고종 27) 6월 20일 원문 인용
 
의정부(議政府)에서 아뢰기를, “제주 목사(濟州牧使) 조균하(趙均夏)의 장계(狀啓)를 보니, ‘일본 배가 1890년(고종 27) 5월 배령리(盃令里: 挾才, 金陵)에 와서 정박하였다가 갑자기 뭍에 내려 마음대로 마을에 들어와서는 엿보다가 작간을 부렸습니다. 마을의 백성들이 황급히 금지하자 일본사람이 골이 나서 환도(環刀)를 빼들고 해당 포유사(浦有司) 양종신(梁宗信)을 찔러 죽이고 즉시 달아났습니다. 상명(償命)에 처하는 형전을 묘당(廟堂)에서 품처(稟處)하게 하소서.’ 하였습니다. 근래 섬의 백성들이 생업을 잃고 청원을 한다는 것은 본 제주목(濟州牧)의 여러 번에 걸친 계문(啓聞)에 의하여 이미 잘 알고 있었으나, 갑자기 뭍에 내려가지고 마을에 달려 들어와 집짐승을 약탈하고 남녀를 혼잡하게까지 하였으니 주민들이 현장에서 금지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그런데 도리어 칼을 빼들고 사람을 마구 찔러 숨지게 했으니 참혹하고 지독하기 그지없어 차마 말할 수가 없습니다. 빨리 교섭아문(交涉衙門)에서 일본 공사(日本公使)와 처리 대책에 대해 담판하도록 하고, 법을 적용하여 살인자를 사형에 처하게 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라고 하니, 윤허하였다.
 
제주도 서귀포항(사진:이효웅)
 
 
1891년 7월에 일본 선박 43척이 제주도 서귀진(西歸津)에서 불법 조업하고 서귀포 앞바다 섬 여성도(如城島)에 5개의 불법 막사를 지었다. 총검으로 무장한 일본 선원들은 서귀진에 불법으로 상륙하여 제멋대로 민가에 침입하여 가축과 양식을 약탈하고, 이에 항의하는 주민들을 집단 폭행하고 살상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참다못한 서귀진 주민들은 일본인들의 불법 막사 건축 철거와 무단 조업을 엄금해 달라고 제주 관가에 강력한 대책을 건의했지만, 1890년 4월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조균하(趙均夏)는 일본 어민들의 불법 만행을 막지 못하고 치안을 안정시키지 못했다는 책임를 지고, 1891년 8월에 파직되었다.
 
이에 조선 정부는 고종의 외교 고문이었던 샤를 르장드르를 일본에 파견하여 ‘서귀진 사건’을 외교적 항의를 통해 강하게 압박했다. 이에 일본 외무성은 이례적으로 서귀포 주민 폭행 및 불법 조업 사건에 대해 조선 정부에 공식 사과를 표명했다. 조선 정부는 ‘서귀진 사건’을 계기로 일본 어민의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제주도 연해 73개 마을에 수색 및 경비를 담당하는 순포(巡砲) 제도를 신설하고 병사를 배치하여 자체 방어 태세를 구축했다.
 
우도 올레길의 작품(사진;궁인창)
 
 
2026년 5월 가족과 함께 제주도를 방문해 서귀포, 성산포, 우도를 방문했다. 아름 일찍 일출을 보고 하우목동항에서 해안도로를 따라 우도 올레 1-1 코스를 걷어 오봉리를 지나 ‘복여네 왕돈까스’ 집을 방문해 우도 왕돈까스를 먹고 성산포로 돌아와 버스를 타고 135년 전인 1891년에 발생한 일본 어민의 서귀포 불법 조업 자료를 찾기 위한 해녀박물관을 방문했다. 해양학자대회를 비롯해 여러 번 해녀박물관을 방문했지만, 기대했던 자료나 관련 전시물을 아직 찾지 못했다. 2층에서 탐험가 채바다 선생의 전통 떼배인 테우를 구경하고, 1층에 있는 기념품 가게로 가다가 진주아 작가의 설치 작품 〈Becoming-With (함께 되어지는 것)〉를 감상했다.
 
해녀박물관 진주아 작가 작품(사진;궁인창)
 
 
진주아 작가의 〈함께 되어지는 것〉 작품은 홍익대 미술대학원에서 조각을 전공한 작가가 육십 평생을 해녀로 살다 치매에 걸린 85세 어머니의 유산인 해녀복으로 만든 작품이다. 작가는 수명을 다해 이제 사용할 수 없게 된 어머니의 헌 고무 잠수복에서 여성의 노동과 공동체의 기억, 역사와 시간이 축적된 매체로 바라보며 인간과 자연, 지역의 이야기를 함께 담아내려고 고심했다. 작가는 어머니가 평생 거친 제주 바다를 누비며 해녀들의 몸을 지켜주었던 낡은 해녀복에 고유의 예술적 영감을 더해 새로운 생명으로 풀어냈다. 작품은 해녀의 삶이 녹아든 새로운 시간성과 서사를 부여하는 과정을 담고 있었다. 묵직한 질감의 검은 해녀복의 형태를 해체하고 재조합하여 벽면에 입체적으로 고정하고, 제주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색 계열의 배경 요소를 곳곳에 조화롭게 배치하여 제주 해녀의 강인한 삶을 상징적으로 보여주었다.
 
일본 쓰시마 마가리 마을의 해녀(사진;궁인창)
 
 
제주도 해녀박물관은 일본 쓰시마박물관이 소장한 미쓰시마마치(美津島町) 마가리(曲) 마을의 1960년대 해녀 사진 10점과 영도 해녀 사진 10점, 제주 해녀 사진 10점 총 30점으로 개관 20주년 기념행사 〈섬에서 태어나 해녀로 산다 - 제주, 영도, 쓰시마〉 공동 기획전을 개최했다. 특별 전시를 통해 해녀 문화의 역사적 흐름과 섬 문화의 연대성을 조명했다. 일본 대마도 마가리(曲) 마을은 이즈하라(厳原) 시내에서 차량으로 북쪽으로 약 20~30분 거리에 위치하며 아소만(浅茅湾)을 끼고 있어 자연경관이 아름답기로 유명한 고즈넉한 어촌 마을이다. 예전에는 자원이 풍부해 해녀도 많았지만, 이제는 수온 상승으로 인해 전설로만 남았다.
 
해녀박물관에서 바다를 바라보니 백사장 끝에 2개의 검은 돌로 쌓은 ‘불턱’이 있었다. 불턱은 해녀들이 물질할 때 이용한 장소로 과거 수백 개의 자연형 불턱과 현무암 돌로 쌓은 불턱이 있었으나 해안 매립과 현대식 탈의장 도입으로 대부분 사라져 약 48곳이 남았다. 해녀들은 물질 후 체온이 많이 떨어져 불을 피워 몸을 보호했다. 해녀들은 불턱에서 물질 요령 등 바닷속 정보를 공유하고 마을공동체 이야기를 하였다. 제주도는 2018년부터 자연재해로 훼손된 불턱을 복원해 관광객은 불턱 공간을 출입하며 해녀들의 애환과 정을 느낀다. 세화 바닷가에서 재미나게 놀다 해녀박물관으로 걸어오니 1시간 전에 있던 택시가 그대로 있어 차를 타고 2026년 5월 30일 개장한 세계유산 만장굴로 가서 내부 공간을 끝까지 걸었다.
 
세화해수욕장 불턱(사진;궁인창)
 
 
필자는 소년 시절이던 1968년 1월, 겨울 방학을 맞아 제주도 서귀포시 한라산 중턱 서호리를 방문하여 1달 간 머물렀다. 아침 일찍 일어나 진돗개와 포인터를 데리고 드넓은 들판을 돌아다니고, 고근산(396m)과 붉은오름 정상에 올라 바다 위에 있는 범섬을 구경했다. 이후 제주도 향토사와 민속을 꾸준히 공부했다. 2014년 제주특별자치도교육청에서 발간한 《학교가 펴낸 우리 고장 이야기》 책을 읽으며 흥미로운 역사저 사실도 알게 되었다. 서호리 지역은 ‘막동산’으로도 불렸는데, 이는 고려말 1374년에 최영 장군이 범섬에 배수의 진을 치고 저항하는 목호 토벌에 나섰을 때, 군사들을 숙영시키기 위해 이곳에 군막을 지었다는 데서 유래한 명칭이었다. 서귀포(西歸浦)는 ‘서귓개, 서귀개’의 한자 표기로 ‘서귓’에 관한 근거를 아직 찾아내지 못했다. 정방폭포 절벽에 있는 ‘서불과지(徐市過之)’의 마애명(磨崖銘)과 불교의 서방극락정토(西方極樂淨土)의 이상향을 추구(追求)한다는 뜻에서 서귀포가 유래했다는 설도 있지만, 역사학자들은 학술적인 근거가 부족하다고 말한다.
 
고근산(396m) 굼부리(사진:山)
 
 
제주해녀문화협회는 제주해녀문화 유네스코 인류무형문화유산 등재 10주년을 기념하여 2026년 6월 11일 스위스 제네바 국제자연보전연맹(IUCN) 본부 전시홀에서 「숨, 바다를 잇다(Breath of the Sea) – 가문해녀(家門海女, Lineage Haenyeo)의 기록」 사진전을 성황리에 개최하고 해녀 노동요, ‘숨비소리’, 창작 무용 및 전복죽 시식 행사로 호평을 받았다. 50년 경력의 강옥래 상군 해녀와 김보람 새내기 해녀가 ‘가문해녀’ 주인공으로 참석해 동행한 해녀들과 ‘오돌또기’, ‘서우젯소리’, ‘해녀 노젓는소리’ 등 제주 민요를 제네바 시민들에게 들려주었다.
 
제네바 전복죽 시식 행사(사진:제주의소리)
 
 
고종의 외교 고문 샤를 르 장드르는 1894년 갑오개혁(甲午改革) 때 궁내부에서 있으면서 군국기무처(軍國機務處) 會議員인 김가진과 함께 개혁 사업을 추진하고, 일본 메이지 정부의 내정 간섭을 막고 일본 어민들의 제주도 조업과 전라도 개항을 금지했다. 절영도(絶影島) 일본인 조계지 선정 등 힘든 어업협상에 나서기도 했고, 미국과 유럽 열강을 이용해 러시아 제국과 일본 메이지 정부를 견제하려는 고종의 균형 외교 정책을 기획하고 자문하였다.
 
샤를 르 장드르 외교관 묘소(사진:위키백과)
 
 
그는 의정부찬무 겸 법규교정소 의정관으로 근무하다 1899년 9월 한성부에서 별세하여 ‘양화진 외국인 선교사 묘원’ B-34에 안장되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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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