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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6.23. 17:31 (2026.06.23. 17:04)

동학농민군, 전주함락 후 전봉준 제시한 27조 폐정개혁안 수용 ...청군 파병 요청하자, 일본군 청 함대 기습공격으로 청일전쟁 발발

 
동북아시아전쟁과 풍도해전(楓島海戰)-1
1893년 음력 3월 11일, 3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모여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신원운동 집회를 평화적으로 개최하고 해산했다. 1894년 음력 3월 25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고부 백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세력을 전라도 일대로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다.
동북아시아전쟁과 풍도해전(楓島海戰)-1
 
 
1893년 음력 3월 11일, 3만 명의 동학교도들이 충청도 보은 장내리에 모여 교조 최제우의 억울한 누명을 벗겨달라는 교조신원운동 집회를 평화적으로 개최하고 해산했다. 1894년 음력 3월 25일 전봉준을 중심으로 동학농민군이 고부 백산에서 무장봉기를 일으키고 세력을 전라도 일대로 점차 확장하기 시작했다.
 
고종은 동학농민군의 기세가 심상치 않음을 감지하고, 이를 제압하기 위한 어전회의를 열었다. 이 자리에서 고종은 청나라가 1850년에서 1864년까지 일어난 ‘태평천국의 난’ 당시 영국군을 차용한 점을 들어 청나라 군대 차용설을 처음 꺼냈다. 그러나 대신들은 이 방책을 모두 반대했다. 4월 2일 병조판서 민영준은 무신 홍계훈(洪啟薰, 1842~1895)을 양호초토사(兩湖招討使)로 임명하고, 위안스카이(袁世凱)와 군대 파병을 긴밀히 협의하였다. 양력 5월 11일(음력 4월 7일) 전라감사 김문현이 이끄는 전라감영군과 보부상 연합군 700명은 황토현(黃土峴)에서 전봉준이 지휘하는 동학농민군 4,000명과 싸워 대패했다.
 
황토현 동학농민군(사진: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초토사 홍계훈이 이끄는 중앙군(300명)은 5월 9일 전라도 군산포에 상륙해 전주에 입성했다. 중앙군은 5월 27일(음력 4월 22~23) 장성 황룡촌(월평리 일대) 전투에서 패한 후, 초토사 홍계훈은 동학농민군(8,000명)의 세력이 너무 커 청군의 내조를 요청한다는 전보를 조정에 보냈다. 당시 고종은 회의를 통해 결론을 내려고 했지만 성사하지 못했다. 5월 31일(음력 4월 27일) 동학농민군이 전주성에 입성했다.
 
고종은 전주 함락 소식을 보고 받고 마음이 심하게 흔들렸다. 1894년 6월 10일(음력 5월 7일), 초토사 홍계훈은 전봉준이 제시한 27개조 폐정개혁안을 받아들여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성립되어 농민군은 평화롭게 철수하였다. 폐정개혁안의 핵심 내용은 신분제 철폐, 토지의 공평한 분배, 노비 문서 소각, 과부의 재가 허용. 백정의 평량갓(패랭이) 폐지, 탐관오리 처벌 및 횡포한 부호 엄벌, 조세 개혁을 통한 평등하고 공정한 사회 건설이었다.
 
당시 조선 정부는 병조판서 민영준의 주도로 6월 3일 청군 군대 파병 요청을 확정했다. 이에 따라 북양대신 이훙장에게 군대 파병을 문서로 요청해 청은 1,500명의 군사를 조선에 파견했다. 청은 6월 7일, 일본 외무대신 무츠 무네미츠(陸奥宗光)에게 조선 정부로부터 받은 파병 요청 통지문의 내용을 상세히 전달했다. 그러나 사전에 조선 정부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본 메이지 정부는 청나라가 조선을 무력으로 점령하려 한다는 명분으로 “조선에 병력을 파견하고, 대본영(大本營)을 설치한다.”라고 결정한 뒤, 6월 12일 청나라에 제물포조약에 따라 군대를 파견한다는 통지문을 보냈다. 당시 일본 외교관은 한성에 공사관을 두고, 부산과 인천 등 개항장에 영사관을 설치했다. 스기무라 후카시(杉村濬) 인천 영사는 당시 공사관 서기관을 겸임하며 오토리 게이스케 공사를 보좌했다. 부산 영사는 무로타 요시후미(室田義文)였다.
 
도쿄여자대학 국제사회학과 모리 마유코(森万佑子) 준교수는 2024년 11월에 발표한 〈1894년 조선 정부의 청나라 군대 파병 요청에 이르게 된 정책 결정 과정 재고〉 논문에서 “고종은 청군 군대를 요청을 확정한 후, 일본과 러시아의 출병을 몹시 우려해 두 나라의 움직임을 논의했다.”라고 주장한다.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대장(사진:위키백과)
 
 
1894년 6월 5일(음력 5월 2일), 일본 제국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조선 공사의 귀임 보호 명목으로 육군 혼성 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1850~1926, 아베 외고조부) 소장이 이끄는 병력 5,000명이 제물포에 상륙하고, 이어서 6월 28일과 7월 10일에 대부대가 상륙했다. 특히 7월 10일에 상륙한 병력에는 혼성여단 전투 요원과 전선가설대, 군악대, 운송선 승조원 등이 포함되어 일본군 병력은 약 8,000여 명으로 늘어났다. 이후 일본군은 본격적인 무력 도발을 감행해 7월 23일 용산에 있던 1,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경복궁을 강제로 점령했다. 27일에는 김홍집을 수반으로 하는 군국기무처를 발족하고, 조선 정부를 압박해 7월 30일에 기존의 조청 관계를 폐기하도록 압박하였다.
 
풍도해전 대영제국 상선 고승호(사진:인천시 사이버도서관)
 
 
1894년 7월 25일(음력 6월 23일) 오전 7시 20분경, 조선 아산만 부근 풍도(안산시 단원구 풍도동) 해역은 유리알처럼 맑고 잔잔했다. 당시 일본 해군은 첩자 등을 동원해 청나라 해군의 동향을 완벽하게 꿰뚫고 있었다. 일본 해군은 선전포고도 없이 고요한 바다의 정적을 사정없이 깨버렸다. 오전 7시 45분경 양국의 군함이 3,000m로 좁혀지자, 일본의 방호순양함 요시노(吉野) 호의 함포가 먼저 불을 뿜어 청나라 해군 함대를 기습 공격했다. 당시 청나라 군함 2척 제원호와 광을호는 텐진항을 출항해 조선의 충청도 아산만으로 항해해 아산에 있는 청나라 육군과 합류해 자국 병사를 보호할 예정이었다.
 
일본제국 해군 연합합대 순양함 요시노, 나니와, 아키스시마 3척은 청나라 군함의 항해 경로를 파악한 후, 풍도 인근 해역에서 숨어 있다가, 청나라가 독일에서 1884년 구입한 군함 제원호(濟遠號, 2,355t)와 청에서 건조한 국산 1호인 경순양함 광을호(廣乙號, 1,000t)에게 기습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일본 순양함 요시노 호(4,150t)는 1893년 건조한 배로 강력한 함포를 장착하여 전력이 아주 탁월했다. 일본 군함에서 쏜 포탄이 배에 마구 쏟아지자, 청국 군함 광을호는 화약고가 폭발해 좌초되어 침몰하고, 제원호는 전장을 빠르게 빠져나갔다.
 
청나라는 군대를 수송하기 위해 대영제국 상선 고승호(高陞號, 2,134t)를 4만 파운드를 내고 빌려 1,116명의 청나라 수병이 승선했다가 1,000여 명이 수장되었다. 청국 군함 1척 조강호(操江號)는 해상에서 나포됐다.
 
일본제국은 풍도 해전으로 서해(黃海) 제해권을 장악하고 조선 내 군사적 주도권을 확보했다. 7월 25일 용산에 주둔한 육군 혼성 제9여단장 오시마 요시마사(大島義昌) 소장은 4,000여 명의 병력을 이끌고 아산으로 출병하여 진격 속도를 높여 7월 28일 정오에 제9 여단은 평택의 소사장(素沙場)에 도달했다. 이곳은 청군 진지의 시야에 들어가는 성환 월봉산 청군 진지와는 8km 불과 거리였다.
 
청국 親兵營旗와 조선국왕깃발(사진:安徽壽縣博物館)
 
 
청군 총병 섭사성(聶士成, 1836~1900)은 일본 육군의 예습을 사전에 예견했다. 그는 해전에서 패전하여 바다 쪽 퇴로가 불리한 아산을 떠나 성환 일대에 방어 요새를 구축했다. 논 주변에 물을 넣어 습지로 만들었다. 일본군은 청군의 동향과 파악하기 위해 두 명의 장교를 조선인으로 변장시켜 청군 진지 가까이 다가가 비밀리에 지형 정찰을 감행했다.
 
1894년 7월 29일 새벽, 일본군 혼성 제9여단은 청군을 기만하려고 부대를 좌우 양로로 나누어 우회 진격 전술을 펼쳤다. 일본군 선봉 부대는 안성천 도하지점(安城渡)에서 메복한 청군과 교전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개전 직후에는 청국이 유리해 일본군 마츠자키 나오미(松崎直臣, 1856~1894) 대위가 총에 맞아 전사하고, 도키야마 중위 등 23명이 잇달아 쓰러졌다. 새벽 5시 30분경 혼성 제9여단은 청국군을 공격해 오전 7시에 월봉산 고지를 장악했다. 이 전투에서 청군은 병력 3,500명 중 500여 명이 전사해 공주 방면으로 퇴각했다. 일본 제국은 육상과 해상에서 승리를 거둔 뒤 뒤늦게 8월 1일에 청국에 선전포고를 발표했다. 청국도 같은 날 대일 선전포고를 했다.
 
마츠자키 나오미 대위 木版 우키요에(浮世絵)(사진:aucfan)
 
 
1894년 9월 15일 새벽, 일본 제국 육군 17,000명이 평양성에 주둔한 청군 14,000명을 기습 공격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사망자 180여 명을 포함해 약 500명으로 사상자가 발생한 반면, 청군은 2,000여 명이 전사하고 4,000여 명이 부상해 퇴각하여 9월 17일 안주에 도착했다.
 
청나라 조정은 압록강 국경을 사수하기 위해 75세의 名將 송칭(宋慶, 1820~1902) 장군을 전격 기용했다. 그는 태평천국의 난을 진압한 노장으로 뤼순(旅順)을 방어하는 의군(毅軍)을 이끌고 압록강 변으로 급히 이동했다. 청나라 조정은 의군(毅軍)외에 흑룡강장군 이크탕가(伊克唐阿)의 동북연군을 합류시켜 일본군의 압록강 도하를 저지하려 했다. 그런데, 이후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황해해전(사진:오카타 켓케이)
 
 
1894년 9월 17일, 북양함대 해군 제독 딩루창(丁汝昌)은 조선 평양에 지원군 호송 임무를 마치고 뤼순항으로 돌아가려던 중 압록강 하구 단둥 해상에서 일본 해군 함대와 만나 치열한 해상 전투를 벌였다. 청나라 북양함대는 방호순양함 7척 등 12척의 군함이 있고, 일본 해군도 12척의 전함으로 전세(戰勢)가 비슷하고 양측의 무장력이 상당했다. 해상 전투가 시작되자 일본 전함에서 날아온 포탄 파편에 청나라 북양함대 딩루창 제독이 중상을 입었다.
 
민족영웅 덩스창(邓世昌)(사진:CCTV)
 
 
이때 덩스창(邓世昌, 1849~1894)은 즈위안호(致遠艦)의 함장으로 앞장서서 자발적으로 함대 작전을 지휘하는 중책을 맡아 적의 주력함인 요시노호와 전력을 다해 싸우다 적함에 충돌할 것을 명령하며 전진했지만, 속도가 느려 즈위안호는 요시노호가 발사한 어뢰에 맞아 함선에 있던 240명의 군인과 함께 장렬히 전사했다. 이 해전에서 북양함대는 5척의 군함이 침몰하고 850명의 병사가 전사, 500명의 병사가 부상했다. 북양함대는 전투에서 신형 주력함이 온전하게 보전되었지만, 평소 해상 훈련의 부족과 오래된 외국산 탄약과 불량한 중국산 탄약이 많았던 탓에 훨씬 더 피해가 컸다.
 
청일전쟁 진행도(사진:위키백과)
 
 
일본 해군은 90여 명이 전사하고 300여 명이 부상했다. 방호순양함 요시노, 비루이, 아카조, 후소가 대파되고 니시쿄마루와 장감합 1척이 타격을 받았다. 청나라 북양함대는 요동의 뤼순항을 겨우 빠져나와 산둥의 웨이하이(威海)로 이동했다.
 
1894년 10월 24일, 일본군은 2개 방향으로 공격을 개시해 제1군(사령관: 오야미 이와오)은 압록강을 돌파해 천천히 심양으로 향하고. 제2군(사령관: 야마지 모토사네, 1841~1897)은 해군의 호위하에 방비가 허술한 요동 화원구(花園口)로 긴급하게 상륙했다. 상륙 보고를 받은 리훙장과 송칭(宋慶)은 일본군의 진의를 전혀 간파할 수가 없었다. 일본 제2군은 수비군이 전혀 없는 요동의 중요 도시 金州를 공략해 탈취하고 旅順 공략에 나섰다.
 
뤼순(旅順) 성채 포격하는 일본군(사진:위키백과)
 
 
1894년 11월 18일, 일본군의 뤼순 공격 당시 청군의 완강한 저항으로 일본군에 사상자가 일부 발생했다. 일본군은 11월 21일 자정이 지나자마자 돌격을 감행하여 다음 날 북양해군의 군항 뤼순(旅順)를 함락하고 진지를 접수했다. 이후 일본군은 패잔병 소탕을 명분으로 36명의 포로만 남기고 24일까지 사흘간 뤼순의 수비군과 민간인 약 2만 명을 무차별 학살하였다. 이 비극적인 사건을 중국은 ‘旅順大屠殺’이라고 하고, 일본은 ‘여순학살사건(旅順虐殺事件)’이라 부른다. 이 만행은 1894년 11월 28일 자 미국 ‘타임즈’와 12월 12일 ‘뉴욕월드’에 상세하게 보도되면서 일본 제국이 국제적인 비난을 받는 계기가 되었다.
 
여순학살사건(旅順虐殺事件)(사진:위키백과)
 
 
한편 조선에서는 동학농민군 2만 명이 궐기하여 1894년 11월 20일(음 10월 23일)부터 12월 7일(음 11월 11일)까지 이규태가 이끄는 관군과 치열한 전투를 하였다. 동학농민군은 일본군 2개 대대와 조선군 2,200명의 강력한 저지를 뚫고 공주시 이인(利仁)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효표 전투를 치르며 우금치(牛禁峙)로 진격할 수 있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했다.
 
개틀링 기관총(사진:위키백과)
 
 
조선 관군 2,500명과 일본군 200명은 공주 금학동에서 주미동에 걸친 ‘배꼬리산’이라는 주미산(舟尾山, 381m) 우금치(牛禁峙)를 차지하고 밑에서 올라오는 동학농민군과 양력 12월 4일(음력 11월 8일)부터 6일간 50여 차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당시 관군과 일본군은 신형 무기로 무장한 신식 군대로 개틀링 기관총(회선포)과 일본제 무라타 소총, 영국제 스나이더 소총, 독일제 ‘크루프 포(Krupp gun)’ 등을 보유하고 전봉준 장군이 이끄는 조총과 죽창 등 구식 무기로 무장한 동학농민군을 공격해 농민군은 대부분 전사했으며, 살아남은 일부 병력은 흩어지고 말았다.
 
보은 동학농민혁명기념탑(사진;이영천)
 
 
동학농민군은 1894년 음력 12월 18일(양력 1895년 1월 13일) 보은 속리산면 ‘북실전투’에서 일본군과 조선 관군에게 패해 2,600여 명이 전사했다. 북암리 주민들은 동학농민군의 시신을 수습해 이병골(의병골)에 안장하였다. 동학군은 충주 외서촌(外西村)에서 마지막 전투를 치르고, 괴산 화양동을 거쳐 음성군 금왕으로 이동했다. 12월 24일, 손병희 통령은 전력이 크게 상실된 동학군에게 “즉각 해산하라. 그리고 끝까지 살아남아라!”라는 마지막 군령을 내렸다.
 
필자는 수암 염상철(廉尙澈, 1956~ ) 선생이 평생에 걸쳐 천도교 유적지를 답사하고 저술한 《동학만리》(2025년 5월 발간)를 통해 수운 최제우(崔濟愚, 1824~1864) 대신사(大神師)와 해월 최시형(崔時亨, 1827~1898) 신사의 위대한 여정을 따라갔다. 책의 사진은 최시형 신사의 고손자인 최인경 선생이 전국의 천도교 유적지를 빠짐없이 기록한 것으로 동학농민군의 행적을 파악하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염상철 著 《동학만리》(사진;궁인창)
 
 
일본 제국 제물포 ‘육군묘지’는 인천시 답동 인근 언덕에 자리를 잡았다. 1884년 갑신정변 때 희생된 일본인들을 매장하면서 조성되어 ‘탁계(坼溪) 육군묘지’라고 불렀다. 한편, 초기 일본 제국 ‘해군묘지’는 개항 초기 개항장 부근인 탁계현 인근 서쪽 능선 해안가(현 신생동, 항동 부근)에 위치했다. 이곳에는 제물포에 거류지를 조성하면서 청일전쟁 중 사망한 일본 해군과 영사관 관련자들을 매장하였고 임오군란, 갑신정변, 러일전쟁, 제물포 해전 등에서 전사한 일본 군인들과 초기 인천 거주 일본인들이 묻혔다.
 
제물포 신흥동 일본 해군묘지(사진;이사벨라 버드 비숍, 1897)
 
 
이후 1946년 1월 ‘대중일보’ 보도에 율목동 언덕 묘지 등을 이전하라는 내용이 있어 해방 직후까지 묘지가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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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