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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찾은 삶의 질문덕이야기의 지식창고 2026.06.27. 16:34 (2026.06.27. 15:30)

두려움을 안고도 나아간다는 것 - 《일리아스》를 읽고

 
처음 《일리아스》를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이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누구도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자꾸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성문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헥토르의 뒷모습이었다. 이상하게도 승리하는 사람보다 패배를 앞둔 사람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두려움을 안고도 나아간다는 것
― 《일리아스》를 읽고
 
 
헥토르는 자신이 살아 돌아오지 못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성문을 나섰다.
 
처음 《일리아스》를 읽었을 때는 이 작품이 아킬레우스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다. 실제로 그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누구도 정면으로 맞설 수 없었다. 그런데 이야기를 따라갈수록 자꾸 다른 사람이 눈에 들어왔다. 성문 밖으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헥토르의 뒷모습이었다. 이상하게도 승리하는 사람보다 패배를 앞둔 사람이 더 오래 마음에 남았다.
 
헥토르는 자신의 운명을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아킬레우스가 전장으로 돌아왔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는 이미 모든 것이 끝을 향해 가고 있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성문 안으로 들어가지 않는다. 뒤돌아 도망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 그랬을까.
 
그 질문은 이야기가 끝난 뒤에도 오래도록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오래도록 마음에서 떠나지 않았던 장면은 안드로마케와 헤어지는 순간이다. 그녀는 남편에게 싸우러 나가지 말라고 부탁한다. 이미 아버지와 형제들을 전쟁으로 잃었고, 이제 헥토르마저 잃게 된다면 자신과 어린 아들은 홀로 남게 된다. 그녀의 말은 너무도 현실적이다. 살아남는 것이 가족을 위한 일이라면 굳이 죽음을 향해 걸어갈 이유는 없어 보인다.
 
그런데 잠시 뒤 예상하지 못한 장면이 나온다.
 
헥토르가 아들을 안으려 하자 아이가 투구를 보고 울음을 터뜨린다. 그는 아무 말 없이 투구를 벗어 내려놓고 아이를 품에 안는다. 아주 짧은 장면이지만 오래 기억에 남았다. 조금 전까지 수많은 병사를 이끌던 장수는 그 순간 한 아이의 아버지가 된다. 화려한 갑옷도, 번쩍이는 창도 사라지고 평범한 가장의 모습만 남는다.
 
아마 그래서 지금도 헥토르를 쉽게 잊지 못하는 것 같다.
 
그는 싸움을 좋아해서 전장으로 나간 사람이 아니었다. 명예를 위해 가족을 버린 사람도 아니었다. 오히려 누구보다 가족을 사랑했기 때문에 더 괴로워했다. 그럼에도 그의 뒤에는 부모가 있었고, 아내가 있었으며, 어린 아들이 있었고, 무엇보다 트로이가 있었다. 자신이 물러서는 순간 누군가는 대신 그 자리를 지켜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용기란 무엇일까.
 
예전에는 두려움을 모르는 사람이 용감한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헥토르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죽음을 두려워했고 가족과의 이별도 두려워했다. 그래서 안드로마케와 헤어지는 장면은 더욱 아프게 다가온다. 그는 두려움이 없어서 앞으로 걸어간 것이 아니라, 두려움을 안고도 걸어갔다. 어쩌면 그것이 진짜 용기인지도 모른다.
 
반대로 아킬레우스는 분노에 이끌려 움직인다. 친구 파트로클로스를 잃은 뒤 그의 분노는 멈출 줄 모른다. 헥토르를 쓰러뜨리는 것만으로는 부족했고, 시신을 전차 뒤에 묶어 끌고 다니며 끝까지 분노를 거두지 않는다. 그 모습을 보며 처음에는 영웅이라기보다 슬픔을 이기지 못한 한 인간이 보였다.
 
그런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멈추게 한 사람은 뜻밖에도 프리아모스 왕이었다. 아들의 시신을 돌려달라며 적진까지 찾아온 늙은 왕은 아킬레우스 앞에서 무릎을 꿇는다. 그 모습을 본 아킬레우스는 자신의 아버지 펠레우스를 떠올리고, 두 사람은 함께 눈물을 흘린다. 그 순간 아킬레우스와 프리아모스는 적이 아니라, 소중한 사람을 잃은 두 인간으로 마주하게 된다. 《일리아스》의 마지막에 남는 것은 승리의 환호가 아니라 인간의 슬픔이다.
 
살아가다 보면 누구에게나 이길 수 없을 것 같은 일이 찾아온다. 아무리 노력해도 결과가 바뀌지 않을 것 같고, 차라리 포기하는 편이 더 현명해 보이는 순간도 있다. 그럴 때마다 사람은 스스로에게 묻게 된다.
 
'그래도 계속 걸어가야 할까.'
 
헥토르는 그 질문에 긴 연설을 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의 삶으로 답한다. 결과를 알면서도 물러서지 않았고, 승리를 확신해서가 아니라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떠날 수 없었기에 앞으로 걸어갔다. 결국 그는 패배한다. 그런데도 《일리아스》를 읽고 가장 오래 마음에 남는 사람은 승자인 아킬레우스가 아니라 패배한 헥토르다.
 
왜 우리는 강한 사람보다 책임을 끝까지 감당한 사람을 더 오래 기억하는 것일까.
 
성문을 나서기 전 어린 아들을 안기 위해 조용히 투구를 벗던 모습이 자꾸 떠오른다. 그 장면에는 영웅도, 전설도 없다. 한 사람의 남편이 있고, 한 아이의 아버지가 있을 뿐이다. 그리고 자신의 운명을 알면서도 한 걸음 앞으로 내딛는 인간이 있다.
 
《일리아스》는 전쟁을 이야기하지만, 오래 남는 것은 승리의 함성이 아니라 물러설 수 없는 자리를 끝까지 지킨 한 사람의 선택이다. 헥토르는 결국 패배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승리한 영웅 못지않게 오랫동안 기억되고 있다. 그가 오래 기억되는 이유는 가장 강했기 때문이 아니라, 가장 두려운 순간에도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끝내 떠나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영웅이란 끝까지 살아남은 사람이 아니라, 끝까지 자신의 자리를 지킨 사람에게 붙는 이름인지도 모른다.
 
- 2026.4.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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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