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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에서 찾은 삶의 질문덕이야기의 지식창고 2026.06.27. 17:41 (2026.06.27. 17:41)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 - 《아이네이스》를 읽고

 
만약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이네아스는 바로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이었다. 트로이가 함락되던 날, 그는 처음부터 도망치려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가 마지막까지 싸우려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도시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영웅의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
― 《아이네이스》를 읽고
 
 
《오디세이아》를 읽었을 때 가장 오래 남았던 생각은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행복인가 하는 점이었다. 아무리 멀리 떠나더라도 언젠가는 돌아갈 집이 있고, 기다리는 가족이 있으며, 다시 시작할 수 있는 고향이 있다는 사실은 생각보다 큰 위로가 된다.
 
그런데 《아이네이스》는 전혀 다른 질문을 던진다.
 
만약 더 이상 돌아갈 곳이 없다면 사람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
 
아이네아스는 바로 그런 운명을 받아들여야 했던 사람이었다.
 
트로이가 함락되던 날, 그는 처음부터 도망치려 했던 사람이 아니었다. 무기를 들고 거리로 뛰어나가 마지막까지 싸우려 했다. 자신이 태어나고 살아온 도시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영웅의 의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헥토르의 혼령과 어머니 비너스는 그에게 더 이상 싸움으로 바꿀 수 있는 것은 없다고 말한다. 신들조차 멸망을 막지 않는 이상, 남은 것은 죽음뿐이었다.
 
그제야 아이네아스는 현실을 받아들인다.
 
그는 용기가 없어서 떠난 것이 아니었다. 더 이상 지킬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였기 때문에 떠난 것이었다. 그리고 그 떠남은 끝이 아니라 또 다른 시작이었다.
 
신들은 그에게 트로이의 정신을 새로운 땅에서 이어 가라는 사명을 맡긴다. 그는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등에 업고, 어린 아들 아스카니우스의 손을 잡은 채 불길을 빠져나온다. 무너진 것은 도시였지만,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기억과 전통, 그리고 공동체의 정신은 그의 발걸음과 함께 새로운 길을 향해 나아간다.
 
이 장면을 읽으며 문득 '고향'이란 무엇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예전에는 고향이란 태어난 장소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아이네아스에게 고향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트로이는 불타 사라졌고, 그곳으로 다시 돌아간다고 해서 예전의 삶을 되찾을 수도 없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이 어디에서 왔는지를 한 번도 잊지 않는다.
 
그는 고향을 잃었지만, 자신의 정체성까지 잃지는 않았다.
 
가장 오래 마음에 남았던 장면은 카르타고에서 디도와 헤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도 있었다. 디도는 아이네아스를 사랑했고, 아이네아스 역시 그녀를 사랑했다. 긴 방랑을 끝내고 그곳에서 평온한 삶을 살아가는 것이 어쩌면 가장 인간적인 선택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런데도 그는 다시 길을 떠난다.
 
처음에는 그 선택이 너무 냉정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생각해 보니 그는 사랑을 버린 사람이 아니라, 자신에게 맡겨진 사명을 끝까지 외면하지 않은 사람이었다. 그가 떠난 이유는 과거를 잊었기 때문이 아니라, 과거를 이어 갈 미래를 선택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우리의 삶도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살아가다 보면 다시 돌아갈 수 없는 순간이 찾아온다. 익숙했던 직장을 떠나야 할 수도 있고, 오래 살아온 도시를 떠날 수도 있으며, 소중했던 관계가 끝나는 날도 있다. 우리는 그럴 때 자꾸만 과거를 붙잡으려 한다. 하지만 현실은 언제나 과거로 돌아갈 수 있는 길만 남겨 두지는 않는다.
 
그럴 때 필요한 것은 과거를 잊는 일이 아니라, 과거를 품은 채 앞으로 걸어가는 용기인지도 모른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고향의 기억과 사람들, 그리고 그 안에 담긴 가치를 품은 채 길을 떠났다. 도시는 사라졌지만, 그가 지키려 했던 정신은 새로운 땅에서 다시 이어진다. 그는 새로운 나라를 세운 사람이기 전에, 사라진 공동체를 미래로 이어 간 사람이었다.
 
그래서 《아이네이스》는 내게 떠남의 이야기가 아니라 계승의 이야기로 읽혔다.
 
《오디세이아》가 돌아갈 곳이 있다는 희망을 이야기한다면, 《아이네이스》는 돌아갈 곳을 잃은 사람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이야기한다. 하나는 귀향을 통해 삶을 완성하는 이야기이고, 다른 하나는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이야기다. 서로 다른 길처럼 보이지만, 두 작품 모두 결국 삶에서 가장 소중한 것이 무엇인지를 묻고 있다.
 
《아이네이스》를 읽고 가장 오래 남은 것은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장면이 아니었다. 불타는 고향을 뒤로한 채 묵묵히 앞으로 걸어가는 아이네아스의 모습이었다. 그는 뒤를 돌아볼 수 없었지만, 그렇다고 과거를 버리지도 않았다. 오히려 과거를 가슴에 품었기에 앞으로 걸어갈 수 있었다.
 
돌아갈 곳이 없다는 것은 모든 것을 잃었다는 뜻이 아니었다. 때로는 더 이상 돌아갈 수 없는 현실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끝까지 지켜야 할 가치를 품은 채 새로운 삶을 만들어 가는 것이 또 다른 용기일 수 있다. 아이네아스는 트로이를 떠났지만, 트로이를 버리지는 않았다. 그가 미래로 가져간 것은 무너진 성벽이 아니라, 그 안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삶과 기억, 그리고 트로이라는 이름이 지닌 정신이었다.
 
어쩌면 《아이네이스》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들려주는 것은, 돌아갈 곳을 잃더라도 끝내 자신을 잃지 않는 삶의 용기인지도 모른다.
 
- 2026.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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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