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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천 사기 강의 자료 요약김영환교수의 지식창고 2026.06.28. 14:28 (2026.06.28. 14:14)

동양고전 아카데미 428강 강의자료 요약(2026.6.25)

 
司馬遷《史記》 原文 강독, 부수적으로 (1)唐詩 〈春望〉과 작자 杜甫 및 주요 단어(國破,感時,花濺淚,恨別,家書,抵萬金,搔更短,不勝簪 등)과 망국의 비애와 애국심, 정경교융(情景交融) 감정+경치=交融, 국난 속 가족애 등 감상포인트에 대해서 설명 ; (2)城濮之戰과 踐土之盟에 대하여 설명 ; (3)《論語》〈公冶長〉「或曰:“雍也仁而不佞。”子曰:“焉用佞?禦人以口給,屢憎于人。不知其仁,焉用佞?”」의 여러 판본 비교와 給,口給,佞,辯의 의미와 유사어, 孔子가 싫어한 말재주와 좋아하는 말재주 등에 대하여 설명 : (4)《論語》를 중심으로 공부의 5단계 과정과 공부하는 방법(지식의 확대)에 대하여 설명 ; (5)周代의 교육장소, 교과과목, 학습의 나이, 계절, 일상 시간별 구분에 대하여 설명 ; (6)斯文亂賊의 중국과 한국에서의 의미 비교와 조선의 黨派, 宋時烈(朱子學 체제)과 尹鑴(反朱子學 사상)및 嶺南學派와 畿湖學派, 虛學과 實學 등의 구분과 해방 이후의 FRAME에 대하여 설명 ; (7)財, 貨, 殖과 竊, 盜, 賊의 구분 설명 ; (8)賄(물건)와 賂(행위)에 대한 《周禮》와 《左傳》에서의 쓰임새를 설명하였습니다.
동양고전 아카데미 428강 강의자료 요약(2026.6.25)
 
2026년 6월 25일 서울시 50+센터 중부캠퍼스(마포구 공덕동)
 
 
 
 
 
* 濺(천)~ 뜻: (물방울이) 튀다, 솟구치다, 물려 뿌리다
* 淚=泪=눈물 루
* 抵= 價値 相當
* 俑= 목우 용
 
 
 
 
 
 
 
 
1. 당시제목: 춘망
2. 작자: 두보(杜甫, 712~770 )
 
427강 참조
 
 

 
김영환교수의 동양고전아카데미 제364강(2024,10,24) 강의 교안
 
*《論語》〈公冶長〉
5-5. 或曰:“雍也仁而不佞。” 子曰:“焉用佞? 禦人以口給,屢憎于人。 不知其仁,焉用佞?”
"옹(雍, 제자 염옹)은 어질기는(仁) 한데 말 잘하는 재주가 없습니다(不佞)."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말재주를 어디에 쓰겠는가? 뛰어난 말솜씨(口給)로 사람을 상대하면(禦), 항상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게 될 뿐이다(屢憎于人). 그(옹)가 참으로 어진지(仁)는 내가 다 알지 못 하나, 말재주를 부려 어디에 쓰겠는가?"
 
(주석)
(1) 或 - 어떤 사람;
(2) 雍 - 冉雍,字仲弓(前522年-?),12哲, 고대 최고 家門, 一門三賢(1冉耕(12哲, 德行), 2冉雍(12哲, 德行), 3冉求(得意門生, 12哲, 72賢(×), 政事)
(3) 佞(nìng) - 아첨, 재능(영, 녕),본래는 花言巧語, 諂媚
(4) 焉用 - 어디에 쓰겠는가?
(5) 禦人 - 타인에게 말로 대응하다
(6) 口給 - 말 잘하다, 말재간, 口才敏捷 能言善辩, 佞과 같은 의미
(7) 屢 - 여러 번, 屢憎于人은 항상 타인에게 미움을 받는다, 於는 被動口에 사용.
(8) 不知其仁 - 말재간이 있는 사람이 仁함이 있는지는 알 수 없다. 공자는 要以德服人,不以口服人을 설명하고 있음.
 
 
 
《論語》〈爲政〉「知之爲知之,不知爲不知,是知也」
"아는 것을 안다고 하고, 모르는 것을 모른다고 하는 것, 이것이 진짜 아는 것이다."
 
《論語》〈述而〉「默而識之,學而不厭,誨人不倦,何有於我哉?」
"묵묵히 마음속으로 기억하고, 배우기를 싫어하지(지치지) 않으며, 남을 가르치는 데 게으르지 않는 것, 이 중에 내게 있는 것이 무엇이겠느냐?"
 
《論語》〈述而〉「不憤不啓,不悱不發。舉一隅不以三隅反,則不復也」
"앎에 답답해서 애타하지 않으면 열어주지 않고, 말문이 막혀 표현하지 못해 쩔쩔매지 않으면 터뜨려 주지 않는다. 한 모퉁이를 들어 보였을 때 나머지 세 모퉁이를 깨닫고 돌아오지 않으면, 다시 더 일러주지 않는다."
 
《論語》〈里仁〉「吾道一以貫之」
"나의 도(道)는 하나의 이치로 관통되어 있다."
 
《論語》〈憲問〉 「古之學者爲己,今之學者爲人」- [修身 - 節慾 - 利他
"옛날에 공부하던 사람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 배웠는데, 오늘날 공부하는 사람들은 남에게 보이기 위해 배운다."
먼저 자신의 몸과 마음을 닦고(修身), 자신의 욕망을 절제하며(節慾), 나아가 타인을 이롭게 하는(利他) 사회적 실천으로 나아가는 과정입니다.
 
《論語》〈顏淵〉 「己所不欲,勿施於人」
"내가 당하고 싶지 않은 바를 남에게도 행하지 말라."
 
《論語》〈雍也〉 「己欲立而立人,己欲達而達人」
"내가 일어서고자 할 때 남을 먼저 일어서게 해주고, 내가 발달하고자 할 때 남을 먼저 발달하게 해준다."
 
《論語》〈雍也〉 「如有博施於民而能濟眾,何如? 可謂仁乎? 子曰: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諸!」
"만약 백성에게 널리 베풀고 대중을 구제할 수 있다면 어떻습니까? 인(仁)하다고 할 수 있습니까? 공자께서 말씀하셨다. '어찌 인(仁)에만 머무는 일이겠느냐! 반드시 성(聖, 성인)의 경지일 것이다! 요임금과 순임금도 오히려 그렇게 하지 못할까 봐 늘 마음을 졸이셨다!'"
 
 
* 신라의 교각(敎覺) 스님(696년~794년)은 한국 불교사와 중국 불교사에서도 매우 독보적이고 신성시되는 위대한 고승입니다. 중국에서는 그를 불교의 4대 보살 중 하나인 지장보살(地藏菩薩)의 화신으로 우러러보며, 오늘날까지도 거대한 신앙의 대상이 되고 있습니다.
 
1. 출생과 당나라 유학
• 신라 왕족 출신: 교각스님의 속명(본명)은 김교각(金喬覺)으로, 신라의 왕족(성덕왕의 아들 혹은 서자라는 설이 유력)이었습니다.
• 지조 높은 출가: 부귀영화가 보장된 왕족의 신분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세속의 덧없음을 깨닫고 24세의 나이에 과감히 출가를 결심합니다.
• 당나라로의 구법 여행: 성덕왕 시절(719년경), 스님은 흰 삽살개(지청) 한 마리와 신라의 차(茶) 종자, 벼 종자 등을 챙겨 들고 당나라로 건너가 본격적인 구법(求法) 길에 올랐습니다.
 
2. 구화산(九華山)에서의 고행과 도량 개창
당나라 곳곳을 유람하던 교각스님은 안휘성 청양현에 위치한 구화산(九華山)의 수려한 풍광에 매료되어 이곳을 수행처로 삼았습니다.
 
• 지독한 용맹정진: 스님은 구화산의 깊은 동굴 속에서 돌을 갈아 쌀에 섞어 먹으며(위토석, 胃土石) 수십 년간 지독한 고행을 이어갔습니다.
• 가사 한 장의 기적: 스님의 높은 덕망에 감동한 그 지역의 대지주 '민양화(閔讓和)'가 스님에게 도량을 지을 땅을 보시하겠다고 제안했습니다. 스님이 "가사(승복) 한 장을 펼칠 만한 땅이면 족하다"고 하자, 가사를 공중에 던졌는데 그 가사가 구화산 전체를 덮어버렸다는 유명한 일화가 전해집니다. 이에 탄복한 민공과 그의 아들은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 화성사(化城寺) 건립: 스님은 민공이 보시한 땅에 '화성사'라는 사찰을 짓고 구화산을 지장보살의 도량으로 일구었습니다. 스님의 명성을 듣고 신라에서도 수많은 유학 승려들이 구화산으로 건너와 스님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3. 열반과 '지장보살' 화신이 된 배경
교각스님은 99세의 나이로 구화산 화성사에서 가부좌를 튼 채 고요히 열반에 들었습니다. 스님이 돌아가신 후 다음과 같은 신이한 현상들이 일어났습니다.
 
• 썩지 않는 육신(육신불): 스님이 열반에 든 지 3년이 지나 지장탑을 세우기 위해 관을 열었을 때, 스님의 모습은 마치 살아있는 사람 같았고 피부는 부드러웠으며 뼈 마디마디에서는 금빛 쇄골 소리(금빛 체인 소리)가 났다고 합니다. 불교에서는 이를 성불(成佛)의 증거로 봅니다.
• 지장보살의 형상과 일치: 불교 경전에 묘사된 지장보살의 모습(삭발한 승려의 모습, 자비로운 풍모)이 교각스님의 살아생전 모습 및 육신불의 형태와 완벽하게 일치했습니다.
• 지장보살의 화신으로 공인: 중국 불교계와 대중들은 김교각 스님을 '김지장(金地藏)'이라 부르며 지장보살이 중생을 구제하기 위해 신라 왕족의 몸을 빌려 이 땅에 나툰 것이라 굳게 믿게 되었습니다.
 
4. 교각스님의 역사적·문화적 가치
중국 불교 4대 성지가 된 구화산 중국 불교에는 4대 성지(오대산-문수보살, 아미산-보현보살, 보타산-관세음보살, 구화산-지장보살)가 있습니다. 신라의 승려 한 명이 중국 거대 불교 성지 중 한 곳의 주인이자 성인으로 자리 잡은 것입니다.
 
• 한중 문화 교류의 상징: 교각스님은 고대 한중 불교 교류사에서 가장 독보적인 인물입니다. 오늘날에도 매년 수많은 한국과 중국의 불교 신도 및 관광객들이 스님의 육신보전(肉身寶殿)이 있는 구화산을 찾고 있습니다.
• 차(茶) 문화의 선구자: 스님이 신라에서 가져가 구화산에 심은 차 나무는 훗날 '구화불다(九華佛茶)'라는 명차로 발전하여, 중국 차 문화 역사에도 신라의 흔적을 깊게 남겼습니다.
 
교각스님은 한국 역사상 해외(중국)에서 이토록 거대한 종교적 성인(보살)으로 추앙받고 수천 년간 신앙의 대상이 된 유일무이한 인물입니다.
 
 
 
 
* 고대의 小學과 大學에서의 교육 과목과 학습시기
 
《論語》〈學而〉「學而時習之, 不亦說乎」와 관련하여 설명
 
1. 學(무엇을 배우나?)
1) 小學에서는
(1) 3節 4道
3節 - 灑掃, 應對, 進退; 4道-愛親, 敬長, 隆師, 親友
(2) 六德
智(智爲夫德); 信(信爲婦德); 聖(聖爲父德); 仁(仁爲子德); 義(義爲君德); 忠(忠爲臣德)
(3) 六行
孝(孝順父母); 友(對人友善); 睦(鄰里和睦); 姻(婚姻美满); 任(任賢與能); 恤(體恤百姓)
 
2) 大學에서는
(1) 六藝
書-書法(書寫, 識字, 文字); 禮-禮儀(涵養德行); 樂-音樂(音樂, 詩歌, 舞蹈...)
射-射箭(弓箭技術) 御-馬車(駕御技術); 數-算數(算法, 計數)
 
2. 時(언제?)
1) 歲數 - 六歲始學習字; 八歲入小學, 教以日常簡單禮節; 十歲教書寫計算; 十三歲教歌詩舞蹈
2) 季節 - 春夏學詩樂弦歌; 秋冬學書禮射獵
3) 朝夕 - 溫習, 進修, 遊散, 休息, 以時爲之
 
 

 
* 《史記》〈周本紀〉4-023
1. 賄 - 財貨, 財物
회는 재화이다, 재물이다.
 
《爾雅》「賄, 財也」
회는 재이다.
 
《說文解字》「賄,財也」
회는 재이다.
 
《左傳》文公十八年「竊賄爲盗」
"재물을 훔치는 것을 도둑(盗)이라 한다.
 
杜預(晉)注「賄,財也」
회는 재이다.
 
《周禮》〈太宰〉「商賈阜通貨賄」
"상(돌아 다니는)고(앉아서 파는)들은 재화를 유통하여 증식한다."
 
注「金玉曰貨, 布帛曰賄」
"주석에 이르기를, '금(金)과 옥(玉)은 화(貨)라 하고, 베(布)와 비단(帛)은 회(賄)라 한다'고 했다."
 
《儀禮》〈聘禮〉「賓裼迎大夫,賄用束紡」
"사신(賓)은 옷소매를 걷어 겉옷 안의 옷을 드러내는 예복 차림(裼)으로 대부를 맞이하며, 이때 주는 예물(賄)은 한 묶음의 방사(紡, 길쌈한 실로 짠 비단)를 사용한다."
 
注「賄予人財之言也」
회(賄)라는 것은, 남에게 재물을 준다는 말이다."
 
《左傳》文公十二年「襄仲曰:不有君子,其能国乎? 国無陋矣! 厚賄之」
"양중이 말했다. ' 군자가 없다면, 그 나라가 어찌 나라를 유지할 수 있었겠는가? 진나라는 참으로 위태함이 없었으니 그에게 뇌물을 주었다.'"
 
《左傳》襄公二十四年「先諸侯之賄, 聚于公室」
"여러 제후국들이 (진나라에) 바친 공물(賄)이 먼저 국가 창고(公室)에 들였다."
 
 
(1) 타인에게 재물을 보내서 청탁하다, 즉 行賄
《左傳》宣公九年「孟献子聘于周, 王以爲有禮, 厚賄之」
"맹헌자가 주(周)나라에 사신으로 가니, 천자(王)가 그를 예의가 있다고 여기고 뇌물을 많이 주었다."
 
 
 
 
* 尹鑴(윤휴, 1617년~1680년)
윤휴(尹鑴,)는 조선 후기 남인(南人)의 핵심 인물이자, 당대 최고의 천재이자 파격적인 사상가였습니다. 서인(西人)의 영수였던 송시열과는 격렬한 사상적·정치적 대립을 벌였으며, 결국 숙종 대 발생한 경신환국(1680년)으로 사약을 받고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인물입니다.
 
1. 사상적 대립: "독자적 경전 해석" vs "주자학 절대주의"
송시열과 윤휴가 돌이킬 수 없는 원수가 된 가장 결정적인 원인은 학문과 사상을 바라보는 태도의 차이였습니다.
 
• 송시열의 주자학 절대주의: 송시열은 주희(주자)의 성리학만을 절대적인 진리로 보았습니다. 주자의 해석에서 한 치라도 벗어나는 것은 유교에 대한 반역이라고 생각했습니다.
• 윤휴의 파격적 경전 해석: 윤휴는 천재적인 학자였습니다. 그는 주자의 주석에만 얽매이지 않고, 《독서기(讀書記)》 등을 저술하며 사서삼경을 자신만의 시각으로 독자적으로 해석했습니다. 그는 "천하의 이치를 어찌 주자만 알고 우리는 모른단 말이냐?"라며 주자의 권위에 정면으로 도전했습니다.
• 사문난적(斯文亂賊) 규정: 이에 격분한 송시열은 윤휴를 유교의 도리를 어지럽히는 도적이라는 뜻인 '사문난적'으로 몰아붙였습니다. 이는 당시 지식인 사회에서 목숨을 위태롭게 하는 가장 무서운 종교적·사상적 낙인이었습니다.
 
2. 정치적 대립: 예송논쟁(禮訟論爭)과 북벌론
두 사람은 조정의 권력을 두고도 사사건건 맞부딪쳤습니다.
 
• 예송논쟁 (효종의 상복 문제): 효종 임금이 승하했을 때, 인조의 계비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가를 두고 서인과 남인이 정면충돌했습니다. 송시열(서인)은 효종이 차남이라는 점을 강조하며 1 년(기년설)을 주장했고, 윤휴와 허목(남인)은 효종이 왕위를 계승했으므로 장남과 다름없다며 3년설을 주장했습니다. 이 논쟁은 단순한 옷 입기 싸움이 아니라, 왕권을 강화하려는 남인(윤휴)과 신권을 강화하려는 서인(송시열)의 권력 투쟁이었습니다.
• 적극적 북벌론 추진: 남인이 정권을 잡은 후, 윤휴는 효종의 못다 이룬 꿈인 '북벌(청나라 정벌)'을 매우 구체적이고 적극적으로 추진했습니다. 군대를 개편하고 대포를 주조하며 전쟁 준비를 서둘렀는데, 이는 서인들에게 큰 정치적 부담과 위협으로 다가왔습니다.
 
3. 경신환국(1680)과 비극적 최후
윤휴의 거침없는 성격과 파격적인 개혁은 결국 독이 되어 돌아왔습니다.
 
• 숙종의 분노와 경신환국: 남인의 영수였던 허적의 가마 차양 사건(유악 사건)을 계기로 숙종은 서인들을 대거 등용하고 남인들을 몰아내는 '경신환국'을 단행합니다. 이때 평소 왕권마저 능가하려 든다는 오해를 받던 윤휴 역시 직격탄을 맞았습니다.
• 송시열 계열(서인)의 처벌 요구: 정권을 잡은 송시열과 서인 세력은 윤휴를 대역죄로 몰아 강력한 처벌을 요구했습니다. 결국 윤휴는 거제도로 유배되었다가 사약을 받게 됩니다.
• "방을 보라"는 마지막 유언: 사약을 마시기 직전, 윤휴는 조정의 관리를 향해 "나라에서 유학자를 쓰기 싫으면 안 쓰면 그만이지, 어찌 사약까지 내린단 말이냐? 대저 내 방에 가득한 책들을 보라!"며 학자로서 자부심과 억울함을 토로하고 숨을 거두었습니다.
 
후대의 평가
윤휴가 제거된 후 조선은 송시열의 일당 전제화(일당독재) 체제로 굳어지며 성리학 교조주의의 늪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과거에는 서인 중심의 역사관에 의해 윤휴가 그저 '사문난적'이자 부정한 정치가로 폄하되기도 했으나, 현대 역사학계에서는 주자학의 틀에 갇히지 않고 주체적인 학문을 추구했던 선구적인 사상가이자, 서인 중심의 기득권 체제에 도전했던 개혁적 정치가로 재평가 받고 있습니다.
 
 
* 파평 윤씨: 권력의 정점, 수많은 왕비(외척)와 영수들을 배출한 거대 가문
해평 윤씨: 명품 정승과 판서, 구한말과 근 현대 지도자를 배출한 엘리트 가문
해남 윤씨: 문학과 미술(윤선도), 실학(정약용의 외가)을 꽃피운 예술 가문
칠원 윤씨: 변치 않는 지조와 국방을 책임진 충절·무관의 가문
 
 
《北史》〈隋煬帝本紀〉「政刑弛紊,賄貨公行」
정치와 형벌(법도)은 해이해 지고 문란해 져서, 뇌물(賄貨)이 공공연히 행해졌다.
 
沈括(宋), 《夢溪筆談》卷二三〈謬誤〉「溥晚年以賄敗,窜謫海州」
"임부(任溥)는 말년에 뇌물 사건(賄)으로 인해, 해주(海州) 땅으로 도망갔다."
 
 
 
* 조선의 사색 당파
 
 
 
 
 
 
 
 
 
 
 
 
 
 
 
 
 
2026.6.25 주정봉 강의 요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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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