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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리세이스 – 아폴론의 분노를 부른 여인
트로이 인근에서 살아가던 아폴론 사제의 딸 크리세이스는 전쟁으로 인해 하루아침에 포로가 되어 아가멤논의 전리품이 된다. 딸을 되찾으려는 아버지 크리세스가 많은 몸값을 가지고 그리스군의 진영을 찾아오지만, 아가멤논은 그의 간청을 오만하게 거절하고 모욕한다. 이에 아폴론은 충직한 사제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리스군에 무서운 역병을 내린다.
결국 크리세이스는 아버지의 품으로 돌아가지만, 그녀의 귀환을 둘러싼 보상 문제는 또 다른 갈등을 불러온다. 자신의 전리품을 잃었다고 여긴 아가멤논이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진 포로 브리세이스를 빼앗으면서, 그리스군의 총사령관과 가장 위대한 영웅은 돌이킬 수 없는 충돌에 빠진다.
크리세이스는 전쟁의 주역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한 인물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를 둘러싸고 벌어진 사건은 아폴론의 역병에서 아킬레우스의 분노로 이어지며 《일리아스》 전체를 움직이는 출발점이 되었다. 이 이야기는 한 사제의 딸의 존엄을 짓밟은 권력자의 오만이 어떻게 신과 인간의 질서를 뒤흔들었는지를 보여 준다.
1.1 아폴론의 사제의 딸
트로이와 가까운 해안 지역에 자리한 크리세는 아폴론을 깊이 숭배하던 신성한 도시였다. 이곳에는 신에게 바쳐진 성소와 제단이 있었고, 향기로운 제물과 찬가가 끊이지 않았다. 제사를 주관하던 사제 크리세스는 오랫동안 아폴론을 충실히 섬겨 온 경건한 인물로, 트로이와 주변 도시 사람들에게도 존경받았다. 그의 딸 크리세이스 역시 아버지 곁에서 신전의 의식과 제사를 가까이하며 성장하였다. 왕족이나 영웅의 혈통은 아니었지만, 사람들은 그녀를 신의 보호 아래 살아가는 사제의 딸로 여겼다.
크리세이스의 일상은 전쟁과는 멀어 보였다. 새벽이면 그녀는 아버지와 함께 제단의 불을 살피고, 축제가 열리는 날에는 신에게 바칠 꽃과 월계수 가지를 준비하였다. 순례자들이 찾아오면 제사를 돕고 아폴론의 은혜를 기원했으며, 하루가 저물면 바다 위로 붉게 번지는 석양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신을 섬기며 이어지는 평온한 나날이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트로이를 둘러싼 전쟁은 이미 주변 도시들의 평화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모인 그리스 연합군은 트로이를 고립시키기 위해 동맹 도시들을 차례로 공격했고, 그 선봉에는 아킬레우스와 미르미돈 전사들이 있었다. 크리세이스는 멀리서 전해지는 전쟁 소식이 자신의 삶까지 뒤흔들 것이라고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전쟁의 불길은 이미 그녀가 살아가던 세계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아폴론의 성소에서 아버지 크리세스와 함께 제물을 준비하는 크리세이스
1.2 전쟁의 포로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서는 견고한 성벽만 공격해서는 부족했다. 그리스군은 트로이로 이어지는 보급과 지원을 차단하기 위해 주변의 동맹 도시들을 차례로 무너뜨렸다. 그 가운데 하나가 에에티온 왕이 다스리던 성스러운 도시 테베였다. 안드로마케의 고향이기도 한 이 도시는 트로이 왕국과 가까운 관계를 맺고 있었다. 아킬레우스와 미르미돈 전사들의 거센 공격 끝에 도시는 함락되었고, 살아남은 사람들과 재물은 승리한 그리스군의 손에 넘어갔다.
크리세이스가 어떤 사정으로 테베에 머물고 있었는지는 분명하게 전해지지 않는다. 다만 그녀 역시 도시가 함락되는 과정에서 붙잡혀 다른 포로들과 함께 그리스군의 진영으로 끌려갔다. 전리품을 분배하는 자리에서 총사령관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자신의 몫으로 받았다. 아름다운 포로를 거느리는 것은 당시 전쟁에서 승자의 권위와 명예를 드러내는 표시였다. 그 순간 크리세이스는 신을 섬기는 사제의 딸에서 승자의 소유물로 취급되는 전쟁 포로가 되었다.
크리세에 있던 크리세스는 딸이 아가멤논의 포로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러나 군대도 무기도 없는 그가 힘으로 딸을 구할 수는 없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보물과 황금을 모아 충분한 몸값을 마련하고, 아폴론의 사제임을 나타내는 지팡이와 신성한 화관을 들었다. 그리고 신을 섬기는 사제이자 한 사람의 아버지로서, 사랑하는 딸을 되찾기 위해 그리스군의 진영으로 향하였다.
함락된 테베에서 다른 여인들과 함께 그리스군에게 붙잡히는 크리세이스
1.3 아버지의 간청
며칠 뒤 크리세스는 몸값으로 바칠 황금과 값비싼 예물을 가지고 그리스군의 진영을 찾았다. 그의 손에는 아폴론의 사제임을 나타내는 지팡이와 신성한 화관이 들려 있었고, 흰 머리카락은 해안의 바람에 조용히 흔들렸다. 그는 수많은 함선과 천막 사이를 지나 그리스 장수들이 모여 있는 자리로 나아갔다. 적군의 한가운데에 홀로 서 있었지만, 그의 얼굴에는 두려움보다 딸을 되찾아야 한다는 간절함이 더 짙게 드러나 있었다.
크리세스는 아트레우스의 두 아들과 모든 그리스 장수들에게 신들의 가호가 함께하기를 기원한 뒤, 자신이 가져온 몸값을 받고 딸을 돌려보내 달라고 청하였다. 또한 아폴론을 공경하는 마음으로 자신의 부탁을 받아들인다면, 신께서 그리스군이 트로이를 함락하고 무사히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울 것이라고 축원하였다. 그의 말을 들은 장수와 병사들은 사제를 존중하고 몸값을 받는 것이 옳다며 동의하였다.
그러나 아가멤논은 사람들의 뜻을 따르지 않았다. 그는 크리세이스를 내놓는 것이 자신의 권위를 손상시키는 일이라 여기고, 크리세스에게 다시는 진영에 나타나지 말라고 위협하였다. 이어 그의 딸은 고향에서 멀리 떨어진 아르고스의 집에서 베를 짜고 자신의 시중을 들며 늙어 갈 것이라고 모욕하였다. 크리세스는 왕의 위협 앞에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돌아섰다. 그러나 인간에게서 희망을 잃은 그는 이제 평생 섬겨 온 신에게 도움을 청하기로 결심하였다.
황금과 예물을 들고 아가멤논 앞에 무릎 꿇어 딸의 귀환을 청하는 크리세스
1.4 신에게 올린 기도
그리스군의 진영을 벗어난 크리세스는 인적이 드문 바닷가를 따라 천천히 걸었다. 뒤를 돌아보면 수백 척의 함선과 병사들의 천막이 해안을 가득 메우고 있었고, 그 어딘가에는 붙잡힌 딸이 머물고 있었다. 그는 밀려오는 파도 앞에 무릎을 꿇고 아폴론의 지팡이를 두 손으로 붙들었다. 평생 신을 섬기며 수많은 기도를 올려 왔지만, 지금처럼 절박한 마음으로 아폴론을 부른 적은 없었다.
크리세스는 자신이 신의 성소를 정성껏 돌보고 수많은 제물을 바치며 아폴론을 섬겨 온 날들을 기억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봉사가 신에게 조금이라도 기쁨을 주었다면, 딸을 돌려보내지 않고 사제를 모욕한 그리스군에게 합당한 벌을 내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충직한 사제의 부름은 올림포스에 닿았다. 분노한 아폴론은 은빛 활과 화살통을 어깨에 메고 산을 내려왔으며, 걸음을 옮길 때마다 화살들이 서로 부딪혀 서늘한 소리를 냈다.
아폴론은 그리스군의 진영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 앉아 활시위를 당겼다. 처음에는 노새와 사냥개들이 차례로 쓰러졌고, 이어 죽음의 화살은 병사들을 향하였다. 진영 곳곳에서 병든 사람들이 쓰러지고, 시신을 태우는 장작더미의 불길이 밤낮없이 타올랐다. 창과 방패로는 막을 수 없는 신의 벌 앞에서 그리스군은 속수무책이었다. 한 왕의 오만이 충직한 사제의 기도를 신의 분노로 바꾸면서, 트로이 전쟁의 흐름을 뒤흔들 재앙이 시작되었다.
해변에서 아폴론의 지팡이를 붙들고 눈물로 기도하는 크리세스와 은빛 활을 든 아폴론
2.1 죽음의 화살
아폴론이 쏜 죽음의 화살은 그리스군의 진영을 빠르게 뒤덮었다. 처음에는 짐을 나르던 노새와 진영을 지키던 사냥개들이 이유 없이 쓰러졌다. 병사들은 피로와 더위 때문에 생긴 질병이라 생각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같은 재앙이 사람들에게도 번졌다. 갑작스러운 고열과 고통에 시달리던 전사들은 며칠을 넘기지 못하고 목숨을 잃었다. 어제까지 함께 식사하고 전투를 준비했던 동료가 다음 날이면 차가운 시신이 되어 장작더미 위에 놓였다.
희생자가 늘어나면서 해안 곳곳에서는 시신을 화장하는 불길이 밤낮없이 타올랐다. 검은 연기와 타는 냄새가 함선과 천막 사이를 뒤덮었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서로 가까이 다가가는 것조차 두려워하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승리한 장수들도 눈에 보이지 않는 죽음 앞에서는 아무런 힘을 쓰지 못했다. 사람들은 마침내 이것이 평범한 질병이 아니라 누군가 신의 분노를 불러온 결과라고 생각하기 시작하였다.
아폴론의 화살은 아홉 날 동안 그리스군을 괴롭혔다. 열흘째가 되자 죽어 가는 병사들을 불쌍히 여긴 헤라는 아킬레우스의 마음에 회의를 열어 재앙의 원인을 밝혀야 한다는 생각을 불어넣었다. 아킬레우스는 장수와 병사들을 모두 모으고, 예언자나 사제 또는 꿈을 해석하는 사람에게 신의 뜻을 물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역병을 멈추기 위해 열린 이 회의는 곧 그리스군 최고의 왕과 영웅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자리가 되었다.
밤낮없이 타오르는 장작더미와 역병에 쓰러지는 그리스 병사들의 진영
2.2 밝혀진 원인
아킬레우스의 부름에 따라 그리스 장수들과 병사들은 해안에 모여 긴급한 회의를 열었다. 모두가 역병의 원인을 밝혀 줄 사람을 기다리는 가운데, 아폴론에게 예언의 능력을 받은 칼카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는 과거와 현재, 미래를 내다보며 새의 움직임과 신들이 보내는 징조를 해석하는 뛰어난 예언자였다. 또한 신들의 뜻을 밝혀 그리스 함대가 트로이로 향하는 길을 이끈 인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이번에는 자신이 알고 있는 진실을 곧바로 말하지 못하였다.
칼카스는 자신이 밝힐 진실이 모든 그리스인을 다스리는 강력한 왕의 분노를 살 것이라며 먼저 아킬레우스에게 보호를 요청하였다. 아킬레우스는 자신이 살아 있는 한 누구도 예언자에게 손을 대지 못할 것이며, 설령 그 상대가 아가멤논이라 해도 칼카스를 지키겠다고 맹세하였다. 그제야 칼카스는 아폴론이 제물이 부족하거나 맹세가 지켜지지 않아 노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사제 크리세스가 모욕당했기 때문에 분노한 것이라고 밝혔다.
신의 노여움을 풀려면 아무런 몸값도 받지 않고 크리세이스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했다. 또한 정결한 희생 제물을 크리세로 보내고 아폴론에게 용서를 구해야만 역병이 멈출 것이라고 칼카스는 선언하였다. 예언이 끝나자 회의장은 무거운 침묵에 잠겼다. 모두가 그의 말이 옳다는 것을 알았지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해야 하는 아가멤논의 얼굴에는 부끄러움이 아니라 거센 분노가 번지고 있었다.
그리스 장수들의 회의에서 아킬레우스의 보호를 받으며 진실을 밝히는 칼카스
2.3 왕들의 충돌
칼카스의 예언을 들은 아가멤논은 분노로 얼굴을 붉혔다. 그는 칼카스가 언제나 자신에게 불길한 예언만 전한다고 비난했지만, 군대를 살리기 위해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겠다고 마지못해 인정하였다. 그러나 자신만 전리품을 잃어 명예가 줄어드는 일은 받아들일 수 없다며 다른 장수들이 새로운 보상을 내놓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전리품이 이미 모두 분배되었다는 아킬레우스의 대답에 아가멤논은 그의 몫인 브리세이스를 직접 빼앗겠다고 위협하였다.
아킬레우스는 언제나 가장 앞에서 싸웠지만 자신이 받은 몫은 아가멤논보다 적었다고 반박하였다. 그는 직접적인 원한도 없는 트로이인들과 싸우는 것은 아가멤논과 메넬라오스의 명예를 되찾아 주기 위해서인데, 이제 총사령관이 자신의 명예마저 빼앗으려 한다며 격분하였다. 두 사람은 병사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서로를 탐욕스러운 왕과 오만한 전사라고 비난하였고, 마침내 아킬레우스는 분노를 참지 못한 채 허리에 찬 칼자루에 손을 얹었다.
그 순간 헤라의 뜻을 받은 아테나가 나타나 아킬레우스의 머리카락을 붙잡았다. 여신은 칼을 거두고 말로만 분노를 드러내라며, 훗날 이 모욕으로 인해 지금보다 세 배나 많은 선물을 받게 될 것이라고 약속하였다. 이어 노장 네스토르도 아가멤논에게는 아킬레우스의 전리품을 빼앗지 말고, 아킬레우스에게는 총사령관에게 맞서지 말라고 충고하였다. 그러나 두 사람은 그의 중재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아킬레우스는 더 이상 아가멤논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선언하였다.
아가멤논과 맞선 아킬레우스가 칼자루를 잡는 순간 머리카락을 붙드는 아테나
2.4 아버지의 품으로
아가멤논은 마침내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기 위해 오디세우스가 지휘하는 배를 준비하게 하였다. 배에는 크리세이스와 함께 아폴론에게 바칠 정결한 희생 제물들이 실렸다. 그리스 진영에서도 병사들은 몸을 씻고 자신들에게 묻은 부정을 바다에 흘려보낸 뒤, 황소와 염소를 희생 제물로 바쳐 신에게 용서를 구하였다. 크리세이스는 포로로 끌려왔던 해안을 떠나며 두려움과 안도감이 뒤섞인 마음으로 점점 멀어지는 함선과 천막들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크리세이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동안에도 그리스 진영의 갈등은 끝나지 않았다. 자신의 전리품을 잃었다고 여긴 아가멤논은 아킬레우스에게 했던 위협을 실행할 준비를 하였다. 한 여인이 자유를 되찾아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순간, 또 다른 여인 브리세이스는 영웅들의 명예 다툼 속에서 새로운 이별을 앞두고 있었다. 아폴론의 분노를 가라앉히기 위한 크리세이스의 귀환은 인간들 사이에 더욱 깊은 분노와 상처를 남기고 있었다.
크리세에 도착한 오디세우스는 크리세이스의 손을 잡아 아버지에게 돌려주었다. 딸을 다시 품에 안은 크리세스는 아폴론에게 감사하며 그리스 사절단과 함께 정결한 제사를 올렸다. 사람들은 제물을 바치고 함께 음식을 나눈 뒤, 온종일 찬가를 부르며 신을 기쁘게 하였다. 아폴론은 마침내 역병을 거두었지만, 신의 분노가 끝난 자리에는 아킬레우스의 분노가 남았다. 그리스군은 질병에서 벗어났으나 가장 강한 영웅이 전투에서 물러나는 더 큰 위기에 빠져들고 있었다.
크리세 항구에서 오디세우스에게 인도되어 아버지 크리세스와 재회하는 크리세이스
3.1 빼앗긴 브리세이스
크리세이스를 태운 배가 크리세를 향해 떠난 뒤, 아가멤논은 회의에서 했던 위협을 실행에 옮겼다. 그는 전령 탈티비오스와 에우리바테스를 불러 아킬레우스의 천막으로 가서 브리세이스를 데려오라고 명령하였다. 두 사람은 왕의 명령이 두려웠지만, 그보다 아킬레우스 앞에 서야 한다는 사실을 더 두려워하였다. 그들은 천막 앞에 도착한 뒤 말없이 서 있었고, 아킬레우스는 그들이 어떤 일로 찾아왔는지 곧바로 알아차렸다.
아킬레우스는 전령들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다며 두 사람을 꾸짖지 않았다. 그는 파트로클로스에게 브리세이스를 데리고 나오게 한 뒤, 전령들 앞에서 아가멤논이 언젠가 자신의 도움이 필요할 때 이 모욕을 기억하게 될 것이라고 선언하였다. 브리세이스는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다시 다른 사람의 천막으로 옮겨져야 했다. 그녀에게 전쟁은 영웅들이 명예를 겨루는 무대가 아니라, 패배한 사람들의 삶과 몸을 승자들이 마음대로 나누는 폭력이었다.
브리세이스가 떠난 뒤 아킬레우스는 동료들을 피해 바닷가에 홀로 앉았다. 그는 끝없는 바다를 바라보며 어머니 테티스를 불러 자신의 짧은 생애에 명예마저 빼앗겼다고 호소하였다. 테티스가 바닷속에서 올라오자 그는 제우스에게 부탁하여 한동안 트로이군을 승리하게 하고, 그리스군이 자신을 모욕한 대가를 깨닫게 해 달라고 간청하였다. 크리세이스의 귀환은 그렇게 또 다른 여인의 슬픔과 영웅의 분노로 이어졌다.
아킬레우스의 천막을 떠나 두 전령을 따라가는 브리세이스와 침묵하는 아킬레우스
3.2 분노가 만든 전쟁
아킬레우스가 전투에서 물러나자 미르미돈 전사들 역시 그의 명령에 따라 싸움에 나서지 않았다. 그리스군은 가장 강력한 영웅과 정예 병력을 동시에 잃었고, 트로이군은 헥토르를 중심으로 성문 밖까지 진격하기 시작하였다. 제우스 또한 테티스의 간청을 받아들여 한동안 트로이군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그리스 장수들은 아킬레우스의 빈자리를 메우려 했지만, 전세는 점차 트로이 쪽으로 기울었다.
헥토르는 그리스군의 방벽을 무너뜨리고 함선 가까이까지 진격하였다. 오디세우스와 디오메데스, 아가멤논을 비롯한 여러 장수가 부상을 입었고, 트로이군의 불길이 함선에 옮겨붙을 위기까지 닥쳤다. 이를 지켜보던 파트로클로스는 더 이상 동료들의 죽음을 외면하지 못하고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은 채 미르미돈을 이끌고 전장에 나섰다. 그는 트로이군을 성벽 가까이 몰아붙였지만, 아폴론의 공격으로 무장을 잃고 에우포르보스의 창에 부상당한 뒤 끝내 헥토르에게 치명상을 입고 쓰러졌다.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아킬레우스의 분노를 깊은 슬픔과 복수심으로 바꾸었다. 그는 아가멤논과 화해하고 다시 전장으로 돌아와 헥토르를 쓰러뜨렸다. 이처럼 크리세이스를 둘러싸고 시작된 갈등은 아킬레우스의 이탈과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헥토르의 최후로 이어지는 연쇄 비극의 출발점이 되었다. 한 왕이 자신의 명예가 손상되었다고 여기며 내린 오만한 선택은 그리스와 트로이의 수많은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입고 싸우다 헥토르 앞에서 쓰러지는 파트로클로스
3.3 시인이 노래한 이야기
호메로스는 《일리아스》를 헬레네가 트로이로 떠난 순간이나 그리스 함대가 출정하는 장면에서 시작하지 않았다. 서사시는 전쟁 10년째, 크리세스를 모욕한 아가멤논 때문에 아폴론이 그리스군에 역병을 내리는 사건으로 문을 연다. 그리고 첫머리에서 여신에게 펠레우스의 아들 아킬레우스가 품은 파괴적인 분노를 노래해 달라고 청한다. 크리세이스를 둘러싼 사건은 트로이 전쟁의 수많은 일화 가운데 하나가 아니라, 서사시 전체를 움직이는 출발점이었다.
이 이야기에서 호메로스가 보여 주는 것은 단순한 포로 반환의 갈등이 아니다. 아가멤논은 최고 사령관의 권위를 지키려다 신의 사제를 모욕하고 자신의 군대를 위험에 빠뜨렸다. 아킬레우스는 명예를 침해당한 분노로 전투를 거부하여 동료들이 죽어 가는 모습을 지켜보게 되었다. 반면 크리세스는 군대나 무기가 아닌 신앙과 기도로 딸을 되찾았다. 서사시는 세 인물의 서로 다른 선택을 대비시키며 권력과 명예, 정의가 무엇인지 묻는다.
크리세이스는 작품 속에서 직접 말하거나 자신의 뜻을 드러낼 기회를 거의 얻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의 포로 생활과 귀환을 둘러싼 사건은 신과 인간의 관계, 왕과 영웅의 충돌, 전쟁이 약자에게 남기는 상처를 모두 드러낸다. 그녀는 전장에 나가 싸운 영웅도, 나라의 운명을 결정한 왕비도 아니었다. 그럼에도 그리스 문학을 대표하는 서사시의 첫 갈등을 움직인 인물로, 그녀의 이름은 《일리아스》의 시작과 함께 오래 기억되었다.
두루마리에 《일리아스》의 첫 구절을 기록하는 호메로스와 배경에 펼쳐진 영웅들의 갈등
3.4 아폴론의 분노를 부른 여인
트로이 전쟁을 떠올릴 때 사람들은 헬레네와 아킬레우스, 헥토르와 오디세우스 같은 인물들을 먼저 기억한다. 그러나 《일리아스》의 첫 장면에는 전쟁의 주역이 아니었던 한 여인이 놓여 있다. 크리세이스는 자신의 뜻으로 전쟁에 참여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생각과 바람을 드러낼 기회조차 얻지 못한 채 포로가 되었다. 그녀의 삶은 승리한 왕의 전리품으로 취급되었고, 아버지가 몸값을 가지고 찾아왔을 때에도 자신의 운명을 스스로 결정할 수 없었다.
그러나 아폴론의 분노를 실제로 불러온 것은 크리세이스가 아니었다. 딸을 되찾으려는 사제를 모욕하고 신성한 질서까지 무시한 아가멤논의 오만이 재앙의 원인이었다. 크리세이스는 신의 분노를 일으킨 사람이 아니라, 전쟁과 권력이 한 인간의 존엄을 어떻게 짓밟는지를 드러낸 희생자였다. 브리세이스가 전쟁이 빼앗아 간 여인을 상징한다면, 크리세이스는 약자의 존엄을 무시한 권력이 얼마나 큰 파국을 불러올 수 있는지를 보여 주는 인물이었다.
크리세이스를 둘러싼 사건이 없었다면 오늘날 전해지는 《일리아스》의 첫 갈등과 아킬레우스의 분노도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시작되지 않았을 것이다. 아폴론의 사제 곁에서 평온하게 살아가던 한 여인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폴론의 역병과 영웅들의 분열을 잇는 인물이 되었다. 그래서 그녀는 ‘아폴론의 분노를 부른 여인’으로 기억되지만, 그 이름 뒤에는 전쟁 속에서 아무런 선택권도 갖지 못했던 한 인간의 두려움과 상처가 함께 남아 있다.
아폴론의 성소 앞에 선 크리세이스와 뒤편에 겹쳐 보이는 역병의 진영과 다투는 영웅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