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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조선 유학생 - 1
1919년 3월, 한반도 전역에서는 조선의 독립을 외치는 만세 투쟁이 일어났다. 조선총독부와 일제 경찰은 만세 투쟁에 참여한 사람들을 무차별 체포해 투옥했다. 구속된 많은 사람들은 재판을 받아 옥고를 치르고, 약 10만 명의 사람들이 장형(杖刑, 笞刑)에 처해져 모진 매를 맞았다. 당시 함흥에서 서기로 일하던 이용제(李容濟, 1898~1986)는 친한 친구에게 건네받은 3·1 독립투쟁선언서를 후배에게 건넸다가 일제의 엄중한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때 선언서가 발각된 탓에 후배는 철창에 갇힌 신세가 되었다.
이용제는 삼엄한 감시를 피해 조선 땅을 떠날 기회를 엿보던 차에 한 친구가 “프랑스에 가자. 상하이까지만 가면 프랑스로 데려다주는 조직이 있다고 하네”라며 뜻밖의 소식을 알려주었다. 당시 중화민국과 프랑스 제3공화국은 중국의 청년 지식인과 학생들이 프랑스에서 낮에는 노동하고 밤에 공부하며 자립해 신지식을 습득하며 학교에 진학할 수 있는 근로장학생(勤勞工讀) 제도를 추진했다. 이용제와 한수룡은 1920년 6월 11일 경성역에서 희망을 품고 기차에 몸을 실었다.
경의선 기차(사진:위키피디아)
3·1 독립투쟁 이후 조선총독부의 통치 방침에는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일제는 이른바 ‘문화정치’를 표방하며 경찰제도의 상징인 헌병 경찰제를 폐지하고 ‘보통경찰제’를 시행했다. 1919년 8월 조선총독부 관제 개정을 통해 경무총감부와 각도의 경무부를 없애는 대신, 조선총독부 직속으로 경무국을 두어 경찰업무를 총괄하게 했다. 1918년 당시 경찰기구 751개, 경찰관 5,402명이던 경찰 조직은 1929년 12월에는 경찰부는 각도에 1개씩 13개, 경찰서 250개, 경찰관주재소 2,311개, 경찰관파출소 188개, 경찰관출장소 164개로 총 2,926개였다. 경찰 인력은 경찰부장 13명, 경시 60명, 경부 435명, 경부보 820명, 순사 17,483명 총 18,811명으로 무려 3배나 늘렸다.
이용제와 한수룡은 일본인 형사들의 감시망을 피해가며 신의주를 거쳐 온갖 어려움을 겪으며 6월 20일 상하이에 도착했다. 당시 중화민국은 제1차 세계대전(1914~1918)을 겪은 프랑스 제3공화국의 요청에 따라 부족한 산업 인력난을 보충하기 위해 300명의 청년을 ‘근로공독’ 제도로 프랑스로 보냈다. 조선인들은 일제의 감시를 피하려고 중화민국 여권을 발급받고, 중국식 이름을 사용하는 위장 전술을 펼치며 프랑스 유학에 합류했다.
프랑스 여객선 르 포르토스(사진:MM)
프랑스 해운사 여객선 르 포르토스(Le Porthos) 호는 아시아 항로를 왕래하기 위해 1914년 1월 25일 보르도에서 진수되었다. 대형 여객선의 제원은 길이가 161.7m, 폭이 18.8m. 총톤수는 13,000톤, 1등석 112명, 2등석 96명, 3등석 90명, 9개의 석탄 연소 보일러로 가열되는 2개의 3단 팽창 증기 엔진 출력이 9000hp, 속도는 17노트로 신형 배였다. 쌍 굴뚝을 가진 포르토스 호는 1915년 11월 28일에 취역했다. 르 포르토스호는 전쟁 중에는 마르세유에서 있었고, 1917년부터는 수에즈에서 극동으로 우편 서비스를 제공했다. 이 선박은 1939년까지 극동 항로를 운항했다.
파리의 조선 유학생(사진:한겨레)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조국의 미래를 내다보며 장차 외교 인재가 절실하다고 판단해 상하이로 몰려드는 조선 청년들에게 프랑스 ‘근로공독’ 유학 프로그램을 권유하고 희망자를 선발했다. 르 포르토스호는 11월 7일 상하이를 출항해 12월 4일 프랑스 마르세이유항에 입항했는데, 21명의 조선인 청년이 배에 타고 있었다. 긴 항해를 마친 유학생들은 파리의 한 사진관에서 프랑스 도착을 기념하는 사진을 찍었다. 유학생 중 7~8명은 생활비가 비교적 싼 독일로 떠났다. 이용제, 정석해, 김법린, 민원식, 허정, 한수룡 등은 파리에 남고 다른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져 지방으로 갔다.
파리에 남은 이용제는 제철소 노동자, 벽돌공장 인부, 병원 잡역부 등 허드렛일을 전전하며 파리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해 유럽 내 한인 유학생들의 리더로 활동했다. 그는 파리에 정착해 1936년 마들렌 쾨클랭과 결혼해 앙투안을 비롯한 3남 3녀를 낳았고, 항일투쟁을 병행해 서영해 등과 함께 프랑스어 잡지 《조선과 광명(La Corée et sa Lumière)》을 발간하였다. 그는 잡지의 주필로서 논설을 작성하고 편집을 주도하며, 프랑스 지식인 사회에 조선 독립의 정당성을 법적·논리적으로 호소하며 당시 국제사회의 중심지였던 파리에서 언론 활동을 통해 조선의 독립 의지를 피력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파리위원부와 긴밀히 협력하며 유럽 내 독립운동의 거점 역할을 확실하게 수행했다. 이용제는 아들 앙투안에게 자신을 키워준 작은할아버지와 시베리아에서 벌목 노동 일을 했던 아버지를 자주 들려주었다.
알렉상드르 기유모즈(Alexandre GUILLEMOZ) 프랑스 사회과학고등연구원(EHESS) 교수는 프랑스 국립사회과학연구소에서 20년간 한국학연구소장으로 재임하며 한국학 발전을 위해 힘썼다. 그는 1983년에 85세의 ‘리롱치(이용제)’를 인터뷰하여 생생한 구슬을 기록할 수 있었다. 문화체육관광부는 2015년 제34회 세종문화상 수상자로 알렉상드르 기유모즈 교수를 선정했다. 2019년 4월에 이용제 가족에게 ‘리롱치 녹취록’을 전달해 아들 앙투안을 비롯한 가족들이 이용제의 삶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알렉상드르 기유모즈 교수(사진:문화체육관광부)
범산(梵山) 김법린(金法麟, 1899~1964)은 1899년 경북 영천 신녕면 치산리에서 태어났다. 열두 살 때 조선이 일본제국에 병탄되어 비분 통곡하는 어른들의 모습을 보고 성장했다. 집안 형편이 어렵고 학업을 지속하려고 14세가 되던 1913년에 은해사 양혼허(楊渾虛, 1880~ ?)를 은사로 출가했다. 그의 본명은 김진린(金振隣), 법명은 법윤(法允) 호는 범산(梵山)이다.
1915년 범어사 중학과정 명정학교 보습과(補習科)를 다니며 비구계를 수지(受持)하였다. 그는 스승인 국어학자 권덕규(權悳奎, 1891~1950)와 독립투사 서상일(徐相日, 1885~1962)에게 가르침을 받았다. 범어사 인재 양성에 힘입어 1917년에 서울로 올라와 휘문의숙에 진학했다. 1918년 불교중앙학림(佛敎中央學林)에 편입하여 만해 한용운의 영향을 받았다. 법윤은 만해가 불교 잡지를 발간하자, ‘쇠로 만든 벙어리’란 뜻의 철아(鐵啞)라는 필명으로 기고하기도 했다.
그는 스승 만해의 지시를 받아 1919년 2월 28일 밤 10시경 3.1 독립선언서 3,000매를 각 지역 사찰에 배포하고, 김상헌과 함께 범어사를 중심으로 한 시위를 조직해 1919년 3월 18일 동래시장 만세 운동을 주도했다. 피신했던 법윤은 4월 하순에 上海 임시정부가 수립된다는 소식을 듣고 신상완, 백성욱, 김대용과 함께 임시정부를 방문해 안창호와 이동휘를 만나 불교계 독립운동을 논의하고 그해 7월 초에 국내에 돌아와 활동했다. 法允은 만주 독립군과 유학을 두고 고민하다 1920년 3월 중국 난징 진릉대학(金陵大學)에 입학해 영어와 중국어를 공부하며 학업을 재개했다.
법윤은 중국에 망명하여 이름을 법린(法麟)으로 바꾸었다. 국내에 들어와 활동하던 신상완은 상하이 임시정부의 찬동을 얻어 의용승군(義勇僧軍)을 조직하려고 군자금을 모집하다 4월 6일에 종로경찰서에 붙잡혔다. 이에 위기감을 크게 느낀 김법린은 임시정부가 주선한 ‘留法儉學會’ 장학회의 후원으로 1921년 2월 마르세이유에 무사히 도착했다. 그는 약 1년간 어학 공부를 하며 고등교육과정을 준비했다. 마침내 1923년 11월 소르본느 파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해 1926년 7월에 졸업하고 대학원에 진학했다. 그는 보탱병원(Felix Botin Clinique)에서 간병인으로 일하며 학비를 벌었고, 은행에 취업하며 자립 기반을 마련했다.
에그몽 궁전 본당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전체회의(사진:위키백과)
1926년 12월 15일, 재독일조선글방의 후신인 유학생 단체 전진회(前進會)는 이듬해 1927년 2월에 개최 예정인 세계약소민족대회에 관하여 실무 협의를 진행하고 준비위원에 이영(李英) 외 6인을 선출했다. 조선 국내 대표로 베를린 대학에 재학하는 이극로(李克魯, 1893~1978), 황우일(黃祐日), 독일 유학생 대표 이미륵(李儀景, 이의경), 프랑스 유학생 대표로 28세 청년 김법린을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허헌이 신문기자 자격으로 동행하고, 대표단 단장에 이극로(李克魯, 1893~1978) 선생을 선출했다.
황우일, 허헌, 김법린, 강타야세느, 이미륵, 이극로(사진:조준희)
1927년 2월 10일 벨기에 브뤼셀 에그몽 궁전 본당에서 열린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 세계 31개국, 134개 단체, 174명이 참여하였다. 예비회의는 2월 5일에서 9일까지 5일간 개최되고, 정식회의는 10일부터 14일까지 5일간 열렸다. 김법린은 2월 10일 정식대회 첫날 “조선은 일제의 도움 없이 스스로 발전할 수 있다.”라는 취지로 34분 격정적으로 연설했다.
Das Flammenzeichenvom Palais Egmont(사진:인터넷 아카이브)
조준희 국학인물연구소장은 항일 독립투사에 관한 연구를 하면서 국내외에서 새로운 사료 발굴을 시도하였지만 허사였다. 당시 김법린에 관한 연구도 부실하고 국내에 전해진 연설문 전문이 없었다. 조준희 소장은 일제강점기 유럽 유학생들의 행적을 연구하며, 이극로 선생의 연구를 위해 독일을 방문해 2006년 11월 독일 브레멘의 한 고서점에서 김법린의 연설문 전문이 실려있는 ‘에그몽 궁전의 봉화(Das Flammenzeichenvom Palais Egmont)’라는 제목의 독일어 단행본을 발견하고, 프랑스 파리 국립문서보관소에서 김법린 학적부 사본을 입수하였다. 단행본 책에는 당시 ‘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했던 한국 대표단의 명단과 직책, 이 대표단의 결의안, 연설 전문이 그대로 수록돼 있었다.
또한,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소재 국제사회사연구소(IISG)에 김법린 선생이 연설한 원고 ‘킨 파 린의 연설문(texte de discours de Kin Fa Lin)이 설명과 함께 보관된 채 원문이 소장됐다는 사실을 확인해 전문을 확보했다. 원고는 A4 크기로, 표지를 제외하면 총 7쪽 분량, 프랑스어로 된 전문을 그대로 낭독할 경우 34분이 소요된다. 연설 제목은 ‘한국에서 일본 제국주의 정책 보고’였다. 연설 전문은 주한프랑스대사관 공보과 심영섭 공보참사 보좌관이 한국어로 번역했다.
인터넷 아카이브 설립자 브루스터 케일(Brewster Kahle)
필자는 브리티시 컬럼비아 대학교 도서관(The University of British Columbia Library)의 인터넷 아카이브를 통해 귀중한 ‘피압박민족대회’ 자료를 확보했다. 디지털 사서(Digital Librarian)인 브루스터 케일(Brewster Kahle, 1960~ )은 MIT 출신의 컴퓨터 엔지니어로 인터넷의 방대한 정보를 보존하고 누구나 접근할 수 있도록 하려고 1996년 비영리 디지털 도서관 인터넷 아카이브(Internet Archive)를 창립했다. 그는 수십 년간 “모든 지식에 대한 보편적인 접근(Universal Access to All Knowledge)” 목표를 실천하며 웹페이지, 책, 영상, 음원 등 디지털 자료를 수집, 저장하는 아카이브를 설립했다.
그는 온라인 검색 엔진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인터넷 아카이브를 통한 디지털 보존 및 오픈 액세스 분야에서 탁월한 공로로 실리콘밸리에 위치한 컴퓨터역사박물관(The Computer History Museum, CHM) ‘2026년 The CHM Fellow Awards’로 선정되어 2026년 4월 25일 공로상을 수상했다. 컴퓨터역사박물관(CHM)이 주관하는 CHM 펠로우 어워드(CHM Fellow Awards)는 디지털 시대를 획기적으로 크게 변화시킨 선구적인 업적을 이룬 인물을 기념하는 행사로 수십 년에 걸쳐 이어져 왔다. 이 상은 컴퓨팅, 하드웨어, 소프트웨어, 네트워킹, 현대 AI 분야에서 평생에 걸친 업적을 이룬 뛰어난 인물들을 선정하여 그 공로를 치하한다.
2026년 펠로우 수상자는 휴대용 컴퓨터 및 스마트폰 개발에 공로가 있는 팜(Palm) 팀(제프 호킨스, 도나 두빈스키, 에드 콜리건), 오디오 FM 합성 기술 발명 공로가 있는 존 초우닝(John Chowning, 1934~ ) 교수, 온라인 검색 엔진 개척에 공로가 큰 브루스터 케일(Brewster Kahle)을 선정했다. 2024년 펠로우 수상자는 초기 비디오 게임 산업 발전에 에 공헌한 아타리(Atari) 팀(앨런 알콘, 놀런 부시넬, 스티븐 마이어), 인터넷의 기틀을 마련하는데 중추적인 역할을 한 엘리자베스 ‟제이크‟ 페인러(Elizabeth ‟Jake‟ Feinler), 엔비디아의 창립자로 가속 컴퓨팅 분야 혁신을 주도한 젠슨 황(Jensen Huang)이 수상했다.
CHM 펠로우 어워드(CHM Fellow Awards)(사진;컴퓨터역사박물관)
김법린은 1927년 ‘세계피압박민족대회’ 연설을 통해 일본 제국주의의 실체를 유럽인들에게 널리 알려 각인시키고자, KOREA의 교육 문제를 중점으로 연설을 펼쳤다. 대외적으로 지속해 온 일제의 억지 주장에 대해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대며 논리적으로 반박하여 일제 만행을 폭로하고, 각국 참가자들에게 일제의 침략상을 객관적으로 판단할 수 있게끔 유도하고 설득했다. 실제 연설은 서론(일본 제국주의 개념, 역사, 목표), 본론(불평등한 한일 관계의 역사 및 행정, 사법, 교육, 경제, 노동 정책의 각 실상), 결론(일제 정책은 가장 범죄적인 처벌 대상이라는 확인)으로 구성돼 그 구조가 매우 탄탄하다. 필자는 라이덴 대학교 출판부에서 2020년 발행한 미셸 루로(Michele Louro), 캐롤린 스톨테(Carolien Stolte), 헤더 스트리츠-솔터(Heather Streets-Salter), 사나 타누리-카람(Sana Tannoury-Karam)의 《제국주의에 반대하는 연맹: 삶과 그 후의 삶》을 읽고 당시 ‘세계피압박민족대회’에서의 진행, 발표 내용, 참석자, 국제대회 이후의 변하는 국제사회의 변화상을 폭넓게 이해했다.
【출전】 《The League Against Imperialism: Lives and Afterlives》
1929년 1월 조선불교 승려대회(사진:법보신문)
김법린의 유럽에서의 큰 활약은 동아일보를 통해 국내에 상세하게 보도되었다. 김법린이 브뤼셀 대회를 마치고 파리에 돌아와 얼마 지나지 않아 한 통의 편지가 도착했다. 조선불교 중앙종단이 보낸 편지에는 “귀국해서 조선 불교계를 위해 일해 달라.”라는 내용과 6,000원이 동봉되어 있었다. 이 자금은 항일과 불교 청년 운동을 이끌고, 上海 임시정부를 지원한 승려 김상호(金尙昊, 1889~1965)가 전국을 돌며 간곡히 호소하여 교구 본사 주지가 각 10원씩 내고 수많은 승려가 동참한 금액이었다. 이 돈은 현재 가치로 환산하면 1.5억~ 3억 원에 해당하는 거액이었다.
김법린은 조선 승려들의 간곡한 편지를 받고 고뇌한 끝에 안일한 은행원 생활을 청산하고 귀국을 결심했다. 그는 1928년 1월 고국에 귀국해 민족 운동에 적극적으로 뛰어들어 1929년 1월에 조선불교 승려대회를 개최하여 교단 개혁을 주도했다. 1930년에는 중앙불교전문학교에서 서양철학을 강의하며 인재 양성에 몰두했다. 1930년 5월에는 만해 한용운의 항일 정신을 계승하여 불교계 비밀결사조직인 만당(卍黨)을 이용조, 조학유, 김법린, 김상호 4인이 발기인으로 모여 결성하고 전국 사찰로 확대하였다. 만당은 1933년에 내분으로 승려 최범술이 공식 해체하였지만, 다솔사 등에서 자주 활동을 유지했다.
김법린은 1931년 2월 일본 도쿄 고마자와(駒澤) 대학에 유학하여 2년간 불교학을 연구하고 1932년 3월 귀국해 다솔사, 해인사, 범어사에서 불교의 교학을 강의했다. 일제의 탄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1938년 비밀결사조직 만당(卍黨) 당원이 일제에 검거되고 김법린이 진주에서 검거되어 진주경찰서에서 조사받고 3개월간 수감되었다. 만당 당원은 전국 사찰에서 6차에 걸쳐 80여 명이 검거되어 혹독한 고문과 시련을 받고 감옥에 투옥되었다. 김법린은 1942년 10월에는 조선어학회 사건에 연루되어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에 참여하고 우리말 한글 보급에 앞장섰다는 이유로 검거되어 재판을 통해 징역형을 선고받아 함흥형무소에서 2년 3개월간 모진 옥고를 치르고 1945년 1월 18일 만기 출옥했다.
조선어학회 십일회 회원 22명(사진:권한솔, 1949.6.12)
학자 김법린은 1945년 1월 동국학원(東國學園) 이사장에 취임하고, 8월에는 동국대학 교수로 부임하여 민족 인재 양성과 대학 발전을 이끌었다. 同年 8월에 종단 혁신 운동에 참여하여 조선불교혁신준비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22일 조선불교승려대회를 개최했다. 9월 24일 조선불교 중앙총무원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는 불교계의 발전과 혁신 운동을 주도하며 미 군정 하지 사령관을 찾아가 설득해 일본 승려들이 남긴 적산 사찰의 인수를 끈질기게 협의해 사찰을 인수하기에 이른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1952년에 제3대 문교부 장관에 취임하여 전쟁 후 교육 재건에 힘쓰고, 1953년 초대 유네스코 한국위원장이 되어 1954년 1월 30일에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1954년 5월 20일 총선을 통해 제3대 민의원으로 당선되어 국회에 진출하였다.
1954년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창립총회(사진:궁인창)
1959년에는 원자력원 상임위원 및 원자력 병원장에 취임했다. 그는 해방 직후의 불교 교단을 선두에서 견인하며 “새 입장, 새 방법으로서 시대의 새 정신과 대중의 새 의식에 적응하고 이해되도록 교학을 새롭게 천명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문헌학적 연구방법론이 필요하다.”라고 대중불교를 제창하면서 전통방법을 뛰어넘어 불교학 연구의 문헌학적 연구방법론 도입을 강조했다. 1962년에 동국대학교에서 명예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1963년 3월 동국대학교 제4대 총장에 취임하여 학문 제일주의를 표방하며 헌신하다가 안타깝게 1964년 3월 14일 심장마비로 타계(他界)하였다. 대한민국 정부는 평생을 독립운동과 교육 발전, 국가발전에 헌신한 김법린 동국대 총장의 공로를 기려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했다.
범산 김법린 선생(사진:국가보훈부)
범산 김법린의 치열했던 삶과 사상은 사학계와 불교학계에서 오랜 기간 연구 발표되었다. 조준희 소장은 독일과 프랑스에서의 사료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2009년 《한국불교학》에 〈김법린의 민족의식 형성과 실천 – 1927년 브뤼셀 연설을 중심으로〉을 발표했다.
동국대 사학과 김상현(1947~2013) 교수는 〈金法麟의 한국 근대불교〉 논문을 발표했다. 동국대 이봉춘 교수는 〈법산 김법린의 사상과 활동〉, 석보원 동국대 응용불교학 박사는 2025년 《불교와 사회학》에 〈식민지적 근대성과 불교지식인의 사회운동적 대응: 김법린의 만당(卍黨) 결성과 독립운동을 중심으로〉을 발표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