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궁인창의 독서여행궁인창의 지식창고 2026.07.19. 21:01 (2026.07.19. 21:01)

의사 이태준, 105인 사건 체포 위기 몰려 난징 망명해 독립군 부상자 치료...황제 중병 치료 어의 임명 후 독립운동하다가 밀정 제보로 처형

 
프랑스 파리의 조선 유학생-2
민원식(閔瑗植, 1898~ ?)은 구한말 우국지사인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6촌이자 판서를 지냈던 민영철(閔泳喆, 1864~1911)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외교관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했다. 그는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했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가 없게 되자,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자결하여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했다.
프랑스 파리의 조선 유학생-2
 
 
민원식(閔瑗植, 1898~ ?)은 구한말 우국지사인 민영환(閔泳煥, 1861~1905)의 6촌이자 판서를 지냈던 민영철(閔泳喆, 1864~1911)의 삼남으로 태어났다. 외교관 민영환은 1905년 11월 을사늑약이 강제로 체결되자 박제순, 이지용, 이근택, 이완용, 권중현 등 을사오적의 처형과 조약 파기를 요구했다. 그는 끝까지 항쟁할 것을 주장했으나 대세를 뒤집을 수가 없게 되자, 세 통의 유서를 남기고 조선을 망국의 길로 이끈 책임을 지고 자결하여 황제와 백성에게 사죄했다.
 
민영환의 자결은 연쇄적인 순국 투쟁을 불러와 홍영식(洪英植)의 형인 전 참판 홍만식(洪萬植, 1842~1905), 전 좌의정 조병세(趙秉世, 1827~1905), 전 대사헌 송병선(宋秉璿, 1836~1905), 학부주사 이상철(李相喆), 평양대(平壤隊) 일등병 김봉학(金奉學) 등도 따라 순절했다.
 
한성부윤 등을 지낸 민영철은 경술국치 이후 일제가 회유책으로 주었던 작위를 마다하고 1910년 가족을 이끌고 상하이(上海)로 망명했다. 이때 민원식이 나이는 12세였다. 민원식은 상하이에서 임기를 마치고 본국으로 돌아가는 가톨릭 주교를 따라 큰형 민유식과 함께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민원식은 1918년 프랑스에서 고등학교를 마치고 툴루즈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19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에서 통역을 담당하며 큰 활약을 하였다.
 
민원식(閔瑗植) 교수(사진:연희전문)
 
청년 민원식은 1921년 툴루즈 대학 이과를 졸업했다. 후원자인 파리 주교가 사망하자, 미국으로 건너가 사촌 형 민희식(閔熙植, 초대 교통부 장관)이 다니던 미국 서부의 네바다 대학에 입학해 1928년 졸업했다. 그는 시카고로 옮겨가 대학원에서 공부하다가 학업을 중단하고 고국으로 돌아와 동아교통공사 경성지사 고문을 하고, 연희전문학교 불어과 교수가 되어 학생들을 지도했다.
 
1945년 해방 후에는 동아교통공사를 인수하여 초대 조선여행사 사장이 되었다. 남정린, 백남진 등과 함께 영자 일간 신문인 《서울타임스》(The Seoul Times)를 창간했으며, 1948년 정부 수립 직후에는 장택상(張澤相) 초대 외무부 장관 밑에서 차관보를 지냈다. 1949년 11월 30일에는 연합통신을 설립하여 AP, INS, AFP 통신 등과 계약을 체결하고 활동 범위를 넓혀갔다. 그는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 인민군에게 납북되었다. 민원식의 아내는 윤보선 대통령의 당숙 윤치오(尹致旿, 1869~1950)의 딸 서양화가 윤시선으로, 두 사람은 1922년 4월 26일 종현성당(현 명동성당)에서 결혼했다.
 
1918년 8월, 상하이에 있던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단(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중화민국(中華民國)에 망명한 김규식(金奎植, 1881~1950)을 초빙하여 대표로 추대했다. 김규식은 영어에 능숙해 한국(KOREA) 대표로 자주독립을 알리고, 일본제국의 탄압을 폭로할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인물이었다.
 
김규식의 아버지 김용원(金鏞元, 개명 이름 김지성〔金智性〕, 1842~1892)은 1876년 김기수(金綺秀)가 이끄는 수신사의 수행화원으로 일본의 근대화된 문명을 보았다. 김용원은 1879년 일본공사 하나부사 요시모토의 권유로 1883년 지운영 등과 함께 사진술을 배워온 뒤, 그해 여름에 저동 자택에 사진관을 열었다. 그는 기계, 총포, 아연, 화학, 양잠, 광산채굴술, 금은분석술을 배워 이를 활용할 줄 아는 전문가였다. 김용원은 1884년 12월 제1차 조·러 밀약 추진하러 외교관 권동수, 김광훈, 신선욱과 함께 블라디보스토크에 파견되어 6가지 밀약을 체결했다. 그러나 러시아를 다녀와 밀약 사건의 파장으로 인해 1885년 6월 유배를 갔다가 1891년 해배되었다.
 
어린 김규식은 아버지가 유배되고 1885년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면서 고아가 되어 1886~1887년 사이 미국 선교사 호러스 그랜트 언더우드(Horace G. Underwood, 1859~1916)가 운용하는 고아원에 보내졌다.
 
5살 때 김규식(사진:돌베개, 스미소니언 박물관)
 
어머니를 잃고 고아가 된 어린 규식은 언더우드가 운영하는 고아원 학교(민로아학당)에서 구원을 받아 성장하며 생존법과 영어를 배워 원어민처럼 영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소년은 1886년 세례를 받고 16세에 요한이라는 이름을 가졌다. 김규식은 아버지와 만나 홍천으로 내려갔으나 부친이 1892년 폐결핵으로 사망해 서울로 올라와 1894년 관립영어학교에 입학해 1896년 최우등으로 졸업했다. 16세인 1896년, 고종의 둘째 아들 의화군(李堈, 1877~1955, 의친왕)이 일본에 머물다 미국 유학을 떠날 때 통역 겸 시종으로 선발되어 도쿄로 갔다.
 
의화군은 박용규, 신성구와 함께 5월 22일 콥팁호에 승선해 미국으로 건너가고, 김규식은 40여 일 후인 6월 27일 朴潤奎, 강운식과 함께 요토하마를 출발했다. 김규식은 버지니아주의 로녹대학(Roanke College)을 다니며 1900년 대한제국의 외교관으로 주미 공사관에서 일했다. 김규식은 1904년 귀국 후 YMCA에서 기독교 지도자로 활약하고, 흥화학교 총교사, 경신학교 교사, 한글학자로 국어 문법을 기술한 《대한문법》을 저술했다. 그는 1905년 8월에 고종의 밀사로 상하이를 거쳐 미국 포츠머스 강화 회담에 가려고 했지만, 실패해 11월에 귀국했다.
 
이화여대 사학과 정병준 교수는〈김규식과 의친왕: 미국 유학시절을 중심으로〉 논문을 2023년 11월 한국사학회에서 발간한 《사학연구》 152권에 발표했다.
 
1910년 대한제국이 일본제국에 강제 병탄되고, 1913년경 일제의 ‘105인 사건’ 조작 등 독립운동 탄압이 점점 심해지자, 우사(尤史) 김규식은 국내에서의 활동을 중지하고 일제의 감시와 탄압을 피해 “호주로 인삼을 팔러 간다.”라며 조선총독부로부터 여권을 발급받아 중화민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상하이 동제사(同濟社)에 가입해 본격적인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며, 제2차 중국혁명(계축농민전쟁)에도 참여하고, 몽골에서 사관학교 설립을 모색했다. 김규식은 1917년 신채호, 조소앙 등이 발표한 ‘대동단결선언’에도 이름을 올렸다. 이후 상하이에서 여운형 등과 함께 1918년 신한청년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 기틀을 마련했다.
 
醫師 대암(大岩) 이태준(사진:연세대)
 
1883년 경남 함안에서 태어난 이태준(1883~1921)은 1907년 김필순의 권유로 세브란스 의학교에 입학해 에비슨에게 의학을 배우고 1911년 6월에 제2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세브란스 재학 때 도산 안창호의 권유로 항일 비밀 청년 단체인 청년학우회에 가입했다. 청년학우회는 비밀결사 신민회의 자매단체로 최남선이 조직한 단체했다.
 
안창호는 당시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처단 후 일제에 체포됐다 석방된 후 세브란스병원에 입원해 있었다. 도산은 안중근 대한의군 참모중장의 배후로 지목되어 경찰에게 모진 고문을 당해 이태준이 치료를 도맡았다. 이태준은 세브란스 졸업 후 세브란스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며 독립운동에 뛰어들 기회를 엿보던 그해 겨울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선배 김필순이 국권을 상실한 조선을 떠나 중화민국으로 망명했다.
 
김필순은 독립운동가인 김규식의 처남이자 김마리아의 삼촌으로 세브란스병원 부근에서 형제들과 ‘김형제상회’를 운영했다. 이태준은 이 상회에 취업해 기거했다. 김필순은 안창호와 의형제 관계였다. 신민회원이었던 이태준은 일제가 조작한 1911년 105인 사건으로 체포 위기에 내몰렸다. 데라우치 총독 암살미수 사건 후 총독부가 신민회원을 비롯해 많은 애국지사를 대거 검거했다. 김필순을 경성역에서 배웅한 이태준도 신변의 위협을 느껴 곧바로 신해혁명의 본거지인 난징(南京)으로 망명해 기독교 선교사가 설립한 기독회의원에서 2년 가까이 일하면서 조선 독립군 부상자도 돌봤다.
 
의사 이태준은 1914년 김규식의 권유로 몽골 후레(庫倫, 현 울란바토르)에서 동의의국(同義醫局) 병원을 개업했다. 그는 휴머니스트로 병원 이름을 ‘같은 뜻을 지닌 사람들의 병원’이라고 지어 이 소문을 들은 가난하고 힘없는 몽골인들이 끊임없이 병원 앞에 줄을 섰다. 1918년 김규식을 따라 몽골에 온 사촌 누이 김은식은 이태준을 처음 만나 서로에게 의지하며 부부의 연을 맺고 몽골인 치료와 함께 한인 독립운동가들의 활동 거점과 은신처를 제공하며 독립군 양성을 위한 비밀군관학교 설립에 조력했다. 그러나 조선에서 보내기로 약조한 설립자금이 오지 않아 비밀군관학교 설립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규식과 이태준 두 사람은 몽골과 중화민국을 무대로 긴밀히 협력한 동지이다.
 
도시명 후레(庫倫, 몽골어 발음, 쿠룬)는 청나라 시대에 ‘울타리를 친 초지, 성벽, 사원’이라는 한자어에서 유래되었다. 후레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국제도시로 번창하기 시작하였다. 당시 원주민들은 면역력이 취약해 70~80%가 매독(梅毒)에 감염된 상태였다. 이태준은 탁월한 의술로매독을 퇴치하였다. 무서운 병에서 완쾌된 몽골인들은 신통한 의술을 지닌 고려인 의사에 감복하여 그를 신인(神人), 극락세계에서 강림한 여래불(如來佛)’이라고 부르며 존경했다. 이러 동정이 上海 《독립신문》 1919년 11월 11일 자에 기사화되었다. 이태준은 뛰어난 의술로 중병을 앓던 몽골의 마지막 황제 보그드 칸도 완쾌시켜 황제는 의사의 공적을 높이 평가해 국가훈장 ‘에르데니-인 오치르(금강석, 金剛石)’을 수여하고 어의(御醫)로 임명했다.
 
醫師 대암(大岩) 이태준(사진:국가보훈부)
 
의사 이태준은 몽골에서 근대적 의술을 펼치면서 얻은 부와 명성을 바탕으로 독립운동 자금을 아낌없이 남모르게 지원했다. 이태준은 1919년 김규식이 임정의 파리강화회의의 대표가 되자, 김규식의 파리강화회의 활동 자금으로 당시 큰돈인 2,000원을 지원했다. 이태준은 독립투사들에게 숙식과 교통을 비롯한 온갖 편의를 제공했으며, 1920년 레닌의 러시아 소비에트 정부가 대한민국 상해임시정부에 지원키로 한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 중 1차분인 40만 루블 상당의 금괴를 상해로 옮기는 일에 위험한 임무에 나서기도 하고, 8만 루블을 임정에 전달하는데 기여했다. 1920년, 이태준은 베이징에서 김원봉을 만나 의열단에 가입하고 폭탄 제조 기술자를 김원봉에게 소개했다.
 
약산 김원봉(사진;중앙포토)
 
당시 김원봉은 의열단의 폭탄을 제조하고 있었으나 불발탄이 많아 크게 고심을 하였다. 이때 이태준의 운전기사 마쟈르가 헝가리 군인으로 폭탄 제조 기술자였다. 그는 세계1차대전 당시 헝가리 포로 출신이었다. 의사 이태준은 마쟈르를 의열단과 연결해주고 몽골 병원으로 곧장 돌아갔다. 이듬해인 1921년 2월 러시아 반혁명파 백위군 부대가 몽골을 점령해 살육과 약탈를 자행했다. 이 부대는 악명이 높은 ‘미친 남작’이라 불리던 운게른 슈테른베르크의 부대였다. 그 무렵 러시아에선 볼셰비키혁명파와 왕정복고를 노린 반혁명파 백위군이 내전을 벌였다.
 
중화민국 사령관 가오 시린은 자신의 주치의인 이태준에게 庫倫에서 철수하자고 피신할 것을 여러 차례 강권했지만, 이태준은 아직 몽골에서 남은 일이 있다고 제의를 완곡하게 거절했다. 이태준이 몽골에 남은 것은 상하이 임시정부에 지원키로 한 독립자금 40만 루블을 운송하고, 폭탄 기술자 마쟈르를 약산 김원봉 대장에게 무사히 데려다줘야 한다는 책임감 때문이었다. 이태준은 가택 수색에도 집에 보관하던 금괴를 무사히 보호했지만, 1921년 군자금을 상하이로 운반하다 밀정에 고발로 러시아 반혁명군 슈테른베르크 부대 사형 집행조에 의해 38세의 나이로 잔인하게 교살당해 순국했다. 운게른이 밝힌 이태준 살해 이유는 “그가 평상시 공산주의자들과 긴밀히 협력했다.”라는 혐의였다. 당시 러시아 백위군은 일본제국과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어 그의 순국에 대해선 일본제국이 사주한 밀정설도 떠돌았다. 이태준이 순국하자, 마쟈르가 홀로 베이징에 있는 김원봉을 만나 당시 비극 상황을 전했다.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사진;위키백과)
 
몽양 여운형(呂運亨, 1886~1947)은 1921년 가을 이르쿠츠크에서 열리는 극동민족대회에 참석하기 위해 1921년 11월 말 몽골을 방문해 8일간 후레(庫倫)에서 머물렀다. 그는 당시 보그드산에 묻힌 애국지사 이태준의 묘를 찾아가 “이 땅에 있는 오직 하나의 이 조선사람 무덤은 이 땅의 민중을 위해 일생을 바친 한 조선 청년의 거룩한 헌신과 희생의 기념비다.”라고 뜨겁게 절규했다. 이 비장한 일화는 여운형이 1936년 종합잡지 《중앙》 5월호에 기고한 〈나의 回想記〉에 애국지사 이태준의 삶을 소개하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졌다.
 
독립투사 이강훈(李康勳, 1903~2003)의 증언에 의하면, 이태준이 운영하던 병원에는 독립운동가들이 매일 40~50명이 병원에서 숙식을 함께 했다. 극동민족대회는 정치적 상황으로 장소를 모스크바로 옮겨 1922년 1월 21일부터 2월 22일까지 개최되었다. 한국 대표는 여운형, 김단야, 김상덕, 김시현, 김승학, 김재봉, 장덕진, 정광호, 조동호, 최고려, 최진동, 현순, 홍범도 등 총 56명이었다. 단국대 부설 몽골연구소 오미영 연구교수는 2016년 《몽골학》 제46호에 〈여운형의 ‘몽골여행기’에 나타난 한·몽 교류사적 의미〉 논문을 기고했다.
 
울란바토르 도시 명칭은 1921년 7월 11일 몽골의 독립을 선언하며 몽골의 무장독립투쟁을 이끌었던 담딘 수하바타르(1893~1923) 장군을 기리기 의해 제정되었다. 1924년 몽골 인민공화국이 수립되면서 기존의 수도 명칭이었던 ‘우르구’에서 ‘붉은 영웅’이란 뜻의 울란바토르로 명칭이 변경되었다.
 
2019년 8월 몽골의 역사를 되짚어보고, 이태준 열사의 숨결을 느끼고자 몽골을 방문해 호스테이 국립공원, 초타이하르발가스 유적, 키탄왕국 유적, 오기호수, 투르크 박물관, 카라코롬, 에르덴죠사원, 체제르렉, 호르고 화산, 골드체어산, 타이촐로 바위, 불칸산 자야사원, 아이막 박물관, 테르한차강노르, 슈틴허덕 캠프장, 한가이 산맥, 타르바카트산, 자르칼란트 마을, 이더르강 야영지, 므릉 박물관, 하트컬, 셀렝가강 등을 탐방하였다.
 
몽골 므릉 우쉬긴 우웨르 사슴돌 유적(사진:궁인창)
 
므릉(Mörön) 우쉬긴 우웨르 (Uushigin Uver) 사슴돌 유적은 약 4,000년 전 청동기 시대에 조성된 유적으로 돌기둥마다 사슴, 태양, 달, 벨트 등의 문양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다. 마두금을 듣고 홉스굴 호수에서 유람선을 타고 소원바위(드림락)을 방문했다. 12km 트레킹 코스를 걷고, 차탕족 마을을 방문해 순록을 구경하고 원주민과 대화를 하였다. 차탕족 여인 중에 한국어를 유창하게 하는 분이 있어 정말 놀랐다. 볼간, 오르혼강, 부르한 가이, 우란 터거 화산(1637m)를 지나 저녁 늦게 울란바토르 보야지 호텔로 가면서 지인에게 전화를 걸어 귀국 인사를 하였다. 잠시 후 전화가 걸려왔다. “내일 광복절이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인데, 몽골에 거주하는 한인 교포들이 많지 않아 참여 인원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다. 한인이 많이 없으면 몽골 사람들에게 창피하니 일정을 변경하여 이태준 기념관 행사장에 꼭 동참해 달라.”라고 간곡하게 부탁해 우리 대원들은 행사 일정을 변경했다.
 
몽골 시내 도로가 아침 일찍 막힌다는 소식에 광복절 74주년 행사장에 1시간 전에 도착하여 이태준 열사 기념관을 돌아보았다. 기념식이 시작할 무렵에는 약 250여 명 이상의 동포가 모여 준비한 의자가 모자랐다. 국민의례를 하고 대통령 경축사를 들었다. 대형화면을 보며 태극기를 흔들고 힘차게 애국가와 광복절 노래를 부르고 만세 삼창을 하였는데. 타국 땅에서 처음으로 느끼는 가슴 벅찬 감동에 광복절 기념식 행사 내내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몽골 울란바토르 광복절 74주년 대통령 경축사(사진:궁인창)
 
대한민국 정부는 이태준 선생의 공훈을 기려 19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이후 2000년 외교통상부가 몽골 정부로부터 약 2,200평 부지를 무상으로 기증받았다. 초기에 민간 기념관으로 조성할 때는 주변에 아무것도 없는 허허벌판 황무지 땅이었다. 2010년 몽골주재 대한민국대사관이 주도하여 이태준 열사 기념관을 6평 규모로 건립하고 대통령, 정부 고위 인사가 몽골을 방문할 때마다 자주 방문했다. 2001년 7월 연세의료원과 한몽친선협회 등이 주도하여 기념공원을 조성했다. 그러나 울란바토르 도시가 개발되고, 자이승전망대 주변이 신흥 고급 아파트촌으로 급격히 개발되면서 이태준 열사 기념관의 노후화된 시설물이 문제가 되었다.
 
울란바토르 시내 전경(사진:궁인창)
 
자이승 전망대는 몽골이 구소련과 함께 연합국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일본 관동군에 승리한 것과 몽골 사회주의 혁명 50주년을 기념하기 위해 1971년 구소련이 몽골에 기증한 탑이다. 이곳에 오르면 2차 세계대전의 동아시아 지역의 핵심 전투인 1939년 할힌골 전투((Халхын голын байлдаан)에서의 구소련-몽골 연합국이 일본 관동군을 물리치고 대승을 거두는 장면이 있다. 몽골 정부는 자이승 전망대 근처에 있는 이태준 열사 기념관을 외곽으로 이전하려는 계획을 수립해 몽골한인회는 여론을 조성하며 이전 반대 운동을 펼쳤다. 국가보훈처는 2017년 9월에 이태준 독립투사 부부의 위패를 국립서울 현충원에 봉안했다. 필자는 몽골 여행을 다녀와 이태준 열사 기념관이 처한 복잡한 상황을 SNS로 알렸다.
 
이태준 기념관 개관(사진:국가보훈부)
 
대한민국 정부는 몽골공화국과의 수교 35주년을 맞이하여 오래된 이태준 기념관을 허물고 건물을 신축했다. 새 건물은 지하 1층, 지상 2층 규모의 현대적 전시・교육 공간으로 이태준 열사의 인공지능(AI) 복원 영상과 한·몽 교류를 알리는 디지털 시설로 재탄생되었다.
 
2025년 9월 4일(목) 오후 한·몽 우호 관계의 상징인 이태준 선생 기념관 개관식이 주몽골 대한민국대사관과 몽골한인회의 공동주관으로 개최하였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작성】 궁 인창 (생활문화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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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