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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 신화 별전가담항설의지식창고 2026.07.20. 18:27 (2026.07.20. 18:27)

키르케 – 아이아이에의 마녀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자 아이아이에 섬의 마녀 키르케의 이야기. 그녀는 자연과 약초의 힘을 다루는 강력한 마법사였으며, 사랑과 질투, 연민과 지혜를 모두 지닌 복합적인 존재였다. 글라우코스를 사랑하여 스킬라를 괴물로 만들었고, 오디세우스를 시험한 뒤 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되었으며, 훗날 텔레고노스의 어머니가 되어 여러 신화를 하나로 이어 주는 중심 인물로 남게 된다.
목   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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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르케 – 아이아이에의 마녀
 
 
 

개요

 
태양신 헬리오스의 딸이자 아이아이에 섬의 마녀 키르케의 이야기. 그녀는 자연과 약초의 힘을 다루는 강력한 마법사였으며, 사랑과 질투, 연민과 지혜를 모두 지닌 복합적인 존재였다. 글라우코스를 사랑하여 스킬라를 괴물로 만들었고, 오디세우스를 시험한 뒤 그의 가장 중요한 조력자가 되었으며, 훗날 텔레고노스의 어머니가 되어 여러 신화를 하나로 이어 주는 중심 인물로 남게 된다.
 
 
 

제1장 태양의 딸

1.1 헬리오스의 딸
 
키르케는 태양신 헬리오스와 오케아니스 페르세이스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콜키스의 왕 아이에테스와 크레타의 왕비 파시파에가 그녀의 형제자매였으며, 이들의 혈통에서는 마법과 기이한 운명에 얽힌 인물들이 계속해서 등장하였다. 아이에테스의 딸 메데이아는 강력한 마법사가 되었고, 파시파에는 미노타우로스 탄생의 비극과 연결되었다. 키르케 역시 태양의 혈통과 신비로운 힘을 물려받은 존재로 그리스 신화에 나타난다.
 
그러나 신화는 키르케의 어린 시절이나 그녀가 누구에게 마법을 배웠는지는 자세히 전하지 않는다. 다만 그녀가 약초와 주문을 섞어 강력한 약물을 만들고, 인간의 모습을 짐승으로 바꾸며, 변신한 존재를 다시 본래 모습으로 되돌릴 수 있었다는 사실은 여러 이야기에서 반복된다. 그녀의 능력은 전쟁이나 번개처럼 직접적인 파괴를 일으키는 힘과 달리, 생명과 형태를 바꾸는 신비로운 기술에 가까웠다.
 
이 때문에 키르케는 올림포스의 다른 신들과 구별되는 독특한 위치에 놓이게 되었다. 그녀는 분명 신의 혈통을 지녔지만, 궁전이나 신전보다 외딴섬과 약초, 주문과 변신의 세계에 속한 존재로 그려졌다. 후대에는 흔히 마녀라고 불렸지만, 고대 신화 속 키르케는 인간과 신, 짐승의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드는 강력한 여신이자 마법사였다.
 
헬리오스와 페르세이스, 아이에테스와 파시파에 사이에 선 어린 키르케
 
 
1.2 마법을 다루는 여신
 
키르케가 사용하는 마법의 중심에는 약초와 주문이 있었다. 그녀는 식물과 뿌리, 물과 포도주에 신비로운 약물을 섞어 사람의 몸과 정신에 변화를 일으켰다. 글라우코스와 스킬라의 이야기에서는 물에 독초를 풀어 님프의 모습을 괴물로 바꾸었고,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에게는 음식과 포도주에 약을 타 돼지의 모습으로 변신시켰다. 키르케의 힘은 언제나 자연에서 얻은 재료와 말로 외우는 주문을 통해 나타났다.
 
그녀가 만든 약은 단순히 생명을 해치는 독이 아니었다. 어떤 약은 사람의 모습을 다른 존재로 바꾸었고, 또 다른 약은 이미 일어난 변신을 되돌리는 힘을 지녔다.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이 인간으로 돌아왔을 때 이전보다 더 젊고 아름다워졌다는 묘사에서도 키르케의 약이 파괴와 회복이라는 두 얼굴을 모두 지니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녀의 마법은 같은 힘이 어떻게 사용되느냐에 따라 저주가 되기도 하고 구원이 되기도 하였다.
 
다만 고대의 신화는 키르케가 자연의 균형을 지키기 위해 마법을 사용했다고 설명하지 않는다. 그녀의 힘은 때로는 질투와 분노를 위해 사용되었고, 때로는 자신을 찾아온 영웅을 시험하거나 돕는 데 쓰였다. 따라서 키르케의 마법은 선하거나 악한 힘이라기보다, 그것을 사용하는 그녀의 감정과 선택에 따라 전혀 다른 결과를 만들어 내는 능력으로 보는 것이 적절하다.
 
약초와 포도주를 섞으며 주문을 외우는 키르케
 
 
1.3 아이아이에의 섬
 
키르케는 바다 저편의 외딴섬 아이아이에에 살고 있었다.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그 섬을 울창한 숲으로 둘러싸인 신비로운 장소로 묘사한다. 숲 한가운데에는 잘 다듬은 돌로 지은 키르케의 궁전이 있었고, 그녀는 그 안에서 베틀을 짜며 아름다운 목소리로 노래하고 있었다. 섬은 인간 세계와 떨어져 있었지만, 폭풍과 표류에 시달리던 항해자들이 운명처럼 다다르는 장소이기도 하였다.
 
궁전 주변에는 키르케의 약에 홀린 늑대와 산사자들이 돌아다녔다. 맹수들은 낯선 사람을 공격하지 않고 길들여진 개처럼 꼬리를 흔들며 다가왔으며, 이러한 모습은 궁전을 찾아온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에게 두려움과 놀라움을 동시에 안겨 주었다. 그들이 본래부터 짐승이었는지, 아니면 키르케에게 변신당한 인간이었는지는 원전에서 분명하게 밝혀지지 않는다.
 
아이아이에는 현실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지 않는 경계의 공간이었다. 인간은 그곳에서 짐승으로 변할 수 있었고, 신의 도움을 받은 영웅은 마법을 이겨 낼 수 있었다. 또한 이 섬은 오디세우스가 지친 몸을 회복하는 안식처이면서, 명계와 죽음의 해협으로 나아가기 위한 출발점이 되었다. 따라서 아이아이에는 단순한 마녀의 거처가 아니라 변화와 시험, 새로운 길이 시작되는 신화적 공간이었다.
 
아이아이에의 궁전에서 베틀을 짜는 키르케와 늑대·산사자
 
 
1.4 아이아이에의 마녀
 
키르케는 흔히 ‘아이아이에의 마녀’라고 불리지만, 고대 신화에서 그녀는 인간 마법사가 아니라 불사의 여신에 가까운 존재였다. 그녀는 인간을 짐승으로 바꾸는 힘과 바다의 위험을 꿰뚫어 보는 지혜를 지녔으며, 자신의 섬을 찾아온 이들의 운명에 깊이 개입하였다. 항해자들에게 아이아이에는 풍요로운 휴식처가 될 수도 있었지만, 키르케의 뜻을 거스르면 인간의 모습마저 잃을 수 있는 위험한 장소이기도 하였다.
 
그녀가 사람을 변신시키는 이유는 이야기마다 명확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은 특별한 잘못을 저질렀다는 설명 없이 돼지가 되었고, 스킬라는 키르케의 질투 때문에 괴물이 되었다. 그러므로 키르케의 변신 마법을 언제나 인간의 탐욕이나 오만을 벌하는 정의로운 힘으로 해석하기는 어렵다. 그녀는 때로 감정에 휘둘렸으며, 자신의 강대한 능력을 타인의 운명을 바꾸는 데 사용하였다.
 
그럼에도 키르케는 단순한 악녀로 머물지 않는다. 오디세우스와 대결한 뒤에는 선원들의 모습을 되돌려 주고, 그들에게 음식과 휴식을 제공했으며, 명계와 귀향의 길을 자세히 알려 주었다. 이처럼 그녀는 위협적인 마녀와 현명한 조언자라는 서로 다른 모습을 함께 지닌다. 이러한 모순과 변화가 바로 키르케를 그리스 신화에서 가장 복합적인 여성 인물 가운데 하나로 만든다.
 
약이 든 잔과 지팡이를 든 키르케
 
 
 

제2장 사랑과 저주

2.1 글라우코스의 부탁
 
바다의 신이 된 글라우코스는 아름다운 님프 스킬라를 사랑했지만, 그의 달라진 모습을 본 스킬라는 두려움에 사로잡혀 달아났다. 글라우코스는 자신의 진심만으로는 그녀의 마음을 얻을 수 없다고 생각하고, 약초와 주문에 능한 키르케를 찾아갔다. 그는 자신의 사랑을 이루어 줄 묘약을 만들어 달라고 부탁하며, 스킬라가 더 이상 자신을 두려워하지 않도록 도와 달라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글라우코스를 본 키르케는 도리어 그에게 마음을 빼앗겼다. 그녀는 자신을 거부하는 여인을 위해 애쓸 필요가 없다며, 스킬라 대신 자신을 선택하라고 직접 구애하였다. 키르케는 자신이야말로 글라우코스의 달라진 모습과 외로움을 이해할 수 있다고 말했지만, 그의 마음은 흔들리지 않았다. 글라우코스는 키르케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고 자신이 원하는 이는 오직 스킬라뿐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키르케는 자신의 마법으로도 한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글라우코스가 자신을 거절한 까닭을 그의 변함없는 사랑에서 찾기보다, 스킬라가 자신에게서 그를 빼앗았다고 여기기 시작하였다. 글라우코스는 사랑을 이루기 위해 도움을 청했지만, 그의 부탁은 오히려 키르케의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그렇게 사랑을 위한 묘약을 부탁한 만남은 스킬라를 향한 저주의 시작으로 바뀌었다.
 
묘약을 부탁하는 글라우코스와 키르케
 
 
2.2 질투가 된 사랑
 
글라우코스가 떠난 뒤 키르케의 마음에는 거절당한 상처와 스킬라를 향한 질투가 남았다. 자신이 신의 혈통과 아름다움, 누구도 쉽게 맞설 수 없는 마법을 지녔음에도 글라우코스의 마음을 얻지 못했다는 사실은 그녀의 자존심을 흔들었다. 하지만 키르케는 글라우코스의 선택을 인정하기보다, 자신이 입은 상처와 분노를 그가 사랑하는 스킬라에게 돌리기 시작하였다.
 
키르케는 글라우코스를 직접 벌하지 않았다. 사랑하는 사람의 마음을 강제로 바꾸는 대신, 그의 사랑을 받고 있던 스킬라에게 분노를 향하게 하였다. 그녀는 강력한 독초를 모아 즙을 내고, 주문을 외워 저주의 약물을 만들었다. 사랑을 이루어 주는 묘약을 부탁받았던 그녀의 손에서 이제는 한 여인의 삶을 뒤바꿀 독약이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선택은 키르케가 지닌 힘과 감정의 위험성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 준다. 그녀는 자신의 상처를 아무 잘못도 없는 스킬라에게 돌렸고, 질투를 마법으로 실현하였다. 사랑은 상대의 선택을 존중하는 마음이 아니라 경쟁자를 향한 증오로 변하였다. 키르케가 준비한 독초는 한 여인의 모습뿐 아니라 글라우코스와 스킬라, 그리고 자신의 운명까지 돌이킬 수 없는 방향으로 바꾸게 된다.
 
독초로 저주의 약을 만드는 키르케
 
 
2.3 스킬라의 변신
 
키르케는 스킬라가 자주 찾아와 더위를 식히고 몸을 씻던 바닷가의 작은 물웅덩이로 향하였다. 그녀는 그곳의 물에 자신이 만든 독초의 즙을 붓고, 여러 차례 불길한 주문을 외웠다. 겉으로 보이는 물은 이전처럼 맑고 평온했지만, 그 안에는 키르케의 질투와 마법이 뒤섞인 강력한 변신의 힘이 숨어 있었다. 모든 준비를 마친 그녀는 조용히 그 자리를 떠났고, 물웅덩이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고요함을 되찾았다.
 
아무것도 모르는 스킬라는 평소처럼 물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몸에서 이상한 변화가 일어나는 것을 느꼈다. 허리와 배 주변에서 사나운 개들의 머리가 돋아나 그녀의 몸을 에워쌌고, 날카로운 이빨과 울부짖는 소리가 사방에서 터져 나왔다. 스킬라는 괴물들이 자신을 공격한다고 생각해 달아나려 했지만, 곧 그것들이 자신의 몸에 붙어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공포와 절망에 빠졌다.
 
아름다운 님프였던 스킬라는 그렇게 누구도 가까이할 수 없는 괴물이 되었다. 그녀는 바닷가의 절벽과 해협으로 물러났고, 훗날 지나가는 배에서 선원들을 낚아채는 무서운 존재로 알려졌다. 스킬라의 변신은 자신의 의지나 잘못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 그녀는 글라우코스의 사랑을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이유가 아니라, 키르케의 질투가 빚어낸 비극에 희생된 존재였다.
 
물웅덩이에서 괴물로 변하는 스킬라
 
 
2.4 돌이킬 수 없는 선택
 
변해 버린 스킬라를 본 글라우코스는 깊은 슬픔에 빠졌다. 그는 스킬라의 마음을 얻기 위해 키르케를 찾아갔지만, 자신의 부탁이 오히려 사랑하는 여인을 괴물로 만드는 결과를 낳았다는 사실에 절망하였다. 오비디우스의 전승에서 글라우코스는 자신의 능력을 잔인하게 사용한 키르케에게서 돌아선다. 키르케는 스킬라의 아름다운 모습을 빼앗았지만, 그토록 원했던 글라우코스의 사랑을 얻지는 못하였다.
 
키르케의 마법은 스킬라의 모습과 운명을 바꾸었지만 글라우코스의 마음까지 바꾸지는 못했다. 사랑을 차지하려고 사용한 힘은 오히려 글라우코스를 영원히 떠나게 만들었고, 아무 잘못도 없는 스킬라에게 끝없는 고통을 안겼다. 키르케가 자신의 행동을 뒤늦게 후회했는지는 고대 전승에 분명히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그 결과만큼은 누구도 되돌릴 수 없는 비극으로 남았다.
 
이 사건은 키르케의 마법이 지닌 위험을 보여 주는 대표적인 이야기이다. 강력한 힘을 가졌다고 해서 타인의 사랑과 선택까지 마음대로 지배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스킬라는 괴물이 되었고, 글라우코스는 사랑하는 이를 잃었으며, 키르케는 끝내 그를 차지하지 못하였다. 결국 질투에서 시작된 저주는 세 사람 모두에게 상처를 남기고, 훗날 죽음의 해협을 지키는 스킬라의 전설로 이어지게 되었다.
 
괴물이 된 스킬라를 바라보는 글라우코스
 
 
 

제3장 영웅과 마녀

3.1 돼지가 된 선원들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고향 이타카로 돌아가던 오디세우스는 수많은 시련을 겪은 끝에 아이아이에 섬에 도착하였다. 그는 선원들을 두 무리로 나누고, 에우리로코스가 이끄는 일행을 숲속으로 보내 섬을 살피게 하였다. 선원들은 돌로 지은 키르케의 궁전을 발견했고, 그 안에서 베틀을 짜며 아름다운 노래를 부르는 여인의 목소리를 들었다.
 
키르케는 선원들을 궁전 안으로 불러들여 치즈와 보릿가루, 꿀을 섞은 포도주를 내놓았다. 그러나 음식에는 사람의 고향과 귀향에 대한 기억을 흐리게 하는 약물이 섞여 있었다. 선원들이 음식을 먹자 키르케는 지팡이로 그들을 치고 돼지우리로 몰아넣었다. 그들의 머리와 목소리, 털과 몸은 돼지로 변했지만, 정신만은 인간일 때와 같아 자신들에게 일어난 일을 모두 알아차리고 있었다.
 
에우리로코스만은 궁전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밖에서 상황을 지켜보았다. 동료들이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자 그는 급히 배로 돌아가 오디세우스에게 모든 일을 알렸다. 오디세우스는 무기를 들고 홀로 키르케의 궁전으로 향했다. 이로써 인간을 짐승으로 바꾸는 강력한 여신과 수많은 위기를 지혜로 넘어온 영웅의 대결이 시작되었다.
 
돼지로 변한 오디세우스의 선원들
 
 
3.2 마법을 이긴 영웅
 
오디세우스가 숲길을 지나 궁전으로 향하던 중 신들의 전령 헤르메스가 젊은이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헤르메스는 키르케의 마법을 그대로 맞으면 오디세우스 역시 동료들과 같은 운명을 피할 수 없다고 경고하였다. 그는 검은 뿌리와 우유처럼 흰 꽃을 지닌 신비한 약초 몰리를 건네며, 이것을 몸에 지니면 키르케의 약물이 효력을 잃을 것이라고 알려 주었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에게도 선원들과 같은 음식과 포도주를 내놓고 지팡이를 휘둘렀다. 그러나 몰리의 힘으로 마법은 통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가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들자 키르케는 그가 헤르메스가 예고했던 영웅임을 알아보았다. 그녀는 오디세우스에게 무기를 거두고 자신과 함께 머물 것을 제안했지만, 그는 먼저 자신을 해치지 않겠다는 신들의 이름을 건 맹세를 요구하였다.
 
키르케가 맹세한 뒤에도 오디세우스는 음식을 먹지 않았다. 그는 동료들이 돼지우리 안에 갇힌 상황에서 자신만 편안히 먹고 마실 수 없다고 말하며, 먼저 그들을 인간으로 되돌려 달라고 요구하였다. 키르케는 마침내 우리로 가서 선원들에게 또 다른 약을 발랐다. 돼지의 모습은 사라졌고, 선원들은 이전보다 더 젊고 크며 아름다운 인간의 모습으로 돌아와 오디세우스와 눈물로 재회하였다.
 
칼을 든 오디세우스와 키르케의 대결
 
 
3.3 머물렀던 일 년
 
선원들을 되찾은 오디세우스는 배에 남아 있던 동료들까지 궁전으로 불러왔다. 키르케는 그들에게 목욕과 깨끗한 옷, 풍성한 음식과 포도주를 제공하였다. 오랜 전쟁과 항해로 지쳐 있던 선원들은 아이아이에에서 몸과 마음을 회복하며 편안한 시간을 보냈다. 처음에는 적으로 만났던 키르케와 오디세우스도 서로의 힘을 인정하며 가까운 관계를 맺게 되었다.
 
그들은 아이아이에에서 하루나 며칠이 아니라 꼬박 한 해를 머물렀다. 풍요로운 음식과 평온한 생활 속에서 오디세우스는 귀향을 잠시 미루었고, 선원들 또한 처음에는 휴식을 즐겼다. 여러 후대 전승에서는 키르케와 오디세우스 사이에서 텔레고노스를 비롯한 아들들이 태어났다고 전하지만,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는 두 사람의 자녀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는다.
 
한 해가 지나자 선원들은 오디세우스에게 고향을 다시 떠올리게 하였다. 이타카로 돌아갈 운명이 남아 있다면 이제는 키르케의 궁전을 떠나야 한다는 것이었다. 오디세우스 역시 아내 페넬로페와 가족을 잊지 않았기에 키르케에게 귀향을 허락해 달라고 청하였다. 키르케는 그를 억지로 붙잡지 않았지만, 고향으로 향하기 전에 반드시 먼저 가야 할 곳이 있다고 말하며 명계로 향하는 길을 알려 주었다.
 
아이아이에 궁전에서 함께하는 키르케와 오디세우스
 
 
3.4 귀향을 위한 조언
 
키르케는 오디세우스가 곧바로 이타카를 향해 항해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였다. 그는 먼저 세계의 끝에 있는 명계로 내려가 죽은 예언자 테이레시아스의 영혼을 만나야 했다. 키르케는 명계로 가는 항로와 도착한 뒤 파야 할 구덩이, 죽은 자들에게 바칠 음료와 제물의 순서를 자세히 가르쳐 주었다. 오디세우스는 살아 있는 몸으로 죽은 자들의 나라를 찾아가야 한다는 말에 두려워했지만 결국 그녀의 지시를 따랐다.
 
명계에서 테이레시아스를 만난 오디세우스는 다시 아이아이에로 돌아왔다. 그는 명계로 떠나던 날 키르케의 궁전 지붕에서 떨어져 목숨을 잃은 엘페노르의 시신을 화장하고 무덤을 만들어 주었다. 장례를 마친 뒤 키르케는 앞으로 기다리고 있는 위험을 새롭게 설명하였다. 세이렌의 노래를 듣고 싶다면 자신의 몸을 돛대에 묶어야 하며, 선원들의 귀에는 밀랍을 막아야 한다고 일러 주었다.
 
또한 스킬라와 카리브디스가 마주한 해협에서는 모든 선원을 잃는 것보다 여섯 명을 희생하더라도 스킬라 쪽으로 지나가는 편이 낫다고 충고하였다. 마지막으로 트리나키아섬에 있는 헬리오스의 신성한 소 떼를 절대로 해치지 말라고 경고하였다. 이 조언들은 오디세우스가 이후의 항해에서 맞닥뜨릴 위험을 미리 보여 주는 지도가 되었다. 키르케가 스킬라를 만들었다는 전승까지 고려하면, 죽음의 해협에 대한 경고에는 복잡한 의미가 담겼다고도 해석할 수 있다.
 
항로를 가리키며 조언하는 키르케와 오디세우스
 
 
 

제4장 영원한 아이아이에

4.1 텔레고노스의 탄생
 
호메로스의 《오디세이아》 이후의 이야기를 다룬 소실 서사시 《텔레고네이아》에 따르면, 키르케는 오디세우스와의 사이에서 텔레고노스라는 아들을 낳아 아이아이에에서 길렀다고 한다. 이 작품의 원문은 오늘날 전해지지 않으며, 후대 작가들이 남긴 짧은 줄거리와 단편을 통해 이야기의 내용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텔레고노스의 이야기는 호메로스와는 다른 후대 전승에 속한다.
 
텔레고노스는 성장한 뒤 자신의 아버지가 트로이 전쟁의 영웅 오디세우스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는 한 번도 만나지 못한 아버지를 찾아 나서기로 결심하였고, 키르케는 그의 출발을 허락하였다. 일부 전승에서는 키르케가 아들에게 바다의 독가오리 가시를 끝에 단 창을 주었다고 하며, 또 다른 이야기에서는 그 창을 대장장이 신 헤파이스토스가 만들어 주었다고 전한다.
 
키르케가 건넨 창은 텔레고노스를 지켜 줄 강력한 무기였지만, 동시에 오디세우스의 죽음을 가져올 운명의 도구가 되었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떠난 아들이 어머니에게서 받은 무기로 그 아버지를 죽이게 된다는 설정은 《텔레고네이아》의 비극적 핵심이다. 키르케는 오디세우스가 수많은 위험을 피해 고향으로 돌아가도록 도왔지만, 정작 두 사람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그의 마지막 운명이 되리라는 사실까지는 막지 못하였다.
 
독가오리 가시 창을 건네는 키르케와 텔레고노스
 
 
4.2 아버지를 죽인 아들
 
텔레고노스는 아버지를 찾아 여러 바다를 떠돌다가 폭풍에 밀려 낯선 섬에 도착하였다. 그는 그곳이 오디세우스가 다스리는 이타카임을 알지 못하였다. 식량이 부족해지자 텔레고노스와 동료들은 해안 부근의 가축을 약탈하였고, 소란을 들은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재산과 나라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들고 나왔다. 서로의 정체를 모르는 아버지와 아들은 전장에서 맞서게 되었다.
 
싸움이 벌어지자 텔레고노스는 키르케에게서 받은 독가오리 가시 창으로 오디세우스를 찔렀다. 치명상을 입은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과 신분을 밝히자 텔레고노스는 자신이 평생 찾아 헤매던 아버지를 죽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는 깊은 슬픔과 죄책감에 빠졌지만 이미 창에 밴 독은 되돌릴 수 없었다. 트로이 전쟁과 수많은 괴물, 바다의 시련을 모두 이겨 낸 오디세우스는 결국 아들의 손에 목숨을 잃었다.
 
이 결말은 《오디세이아》에서 테이레시아스가 오디세우스에게 들려준 평온한 노년의 죽음과는 다른 후대 전승이다. 《텔레고네이아》는 죽음이 ‘바다로부터’ 찾아온다는 테이레시아스의 모호한 예언을, 바다의 독가오리 가시가 달린 창으로 새롭게 해석하였다. 아버지를 만나기 위해 떠난 텔레고노스의 여정은 만남이 아니라 살해로 끝났으며, 키르케와 오디세우스의 인연도 예상하지 못한 비극 속에서 막을 내렸다.
 
쓰러진 오디세우스와 절망하는 텔레고노스
 
 
4.3 신화를 잇는 마녀
 
텔레고노스는 오디세우스의 시신과 페넬로페, 텔레마코스를 배에 태워 아이아이에로 돌아왔다. 《텔레고네이아》의 전승에 따르면 키르케는 아들이 불러온 비극을 받아들이고, 남겨진 사람들을 새로운 운명으로 이끌었다. 그녀는 텔레고노스와 텔레마코스, 페넬로페를 불사의 존재로 만들었다고도 전해진다. 죽음과 상실로 시작된 귀환은 아이아이에에서 기묘한 화해와 새로운 결합으로 바뀌었다.
 
이후 텔레고노스는 아버지의 아내였던 페넬로페와 결혼하고, 텔레마코스는 키르케와 결혼하였다. 오늘날의 관점에서는 매우 낯설고 받아들이기 어려운 결말이지만, 이는 호메로스가 아니라 소실된 후대 서사시가 전하는 이야기이다. 이 결혼들은 오디세우스에게서 갈라진 두 가족을 다시 하나로 연결하고, 죽음으로 끊어진 관계를 새로운 형태로 이어 주는 결말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키르케는 글라우코스와 스킬라의 비극, 오디세우스의 귀향, 텔레고노스가 아버지를 죽이게 된 비극까지 서로 다른 신화를 이어 주는 중심 인물이 되었다. 그녀는 저주를 내리는 마녀로 등장했다가 영웅을 돕는 조언자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죽음으로 갈라진 사람들을 아이아이에로 불러 모으는 존재가 되었다. 키르케의 섬은 여러 신화의 끝이 서로 만나 새로운 운명으로 이어지는 경계의 장소로 남았다.
 
오디세우스의 가족을 맞이하는 키르케
 
 
4.4 영원한 아이아이에의 여신
 
키르케는 하나의 성격이나 역할만으로 설명하기 어려운 인물이다. 그녀는 스킬라를 괴물로 만든 질투의 여신이었고, 오디세우스의 선원들을 돼지로 바꾼 두려운 마법사였다. 그러나 동시에 변신을 풀어 주고 지친 항해자들을 돌보았으며, 명계와 귀향의 길을 알려 준 현명한 안내자이기도 했다. 서로 다른 전승 속에서 그녀는 위협과 구원이라는 상반된 모습을 함께 드러낸다.
 
후대의 문학과 미술은 이러한 키르케를 시대마다 다른 모습으로 해석하였다. 어떤 작품에서는 남성을 유혹하고 타락시키는 위험한 마녀로 그려졌고, 다른 작품에서는 자연과 약초의 비밀을 알고 스스로의 섬을 다스리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재해석되었다. 약이 든 잔과 지팡이, 베틀과 맹수들은 키르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요소가 되었으며, 그녀는 서양 문화에서 마법을 다루는 여성의 중요한 원형으로 자리 잡았다.
 
키르케의 이야기는 강력한 힘을 가졌더라도 타인의 마음과 운명을 완전히 지배할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 그녀의 마법은 스킬라의 몸을 바꾸고 선원들을 짐승으로 만들었지만, 글라우코스의 사랑이나 오디세우스의 귀향 의지까지 없애지는 못하였다. 키르케는 사랑과 질투, 위협과 도움, 죽음과 새로운 시작을 모두 품은 채 아이아이에에 남았다. 그래서 그녀는 단순한 마녀를 넘어, 인간과 신화의 경계를 지키는 영원한 아이아이에의 여신으로 기억된다.
 
아이아이에를 내려다보는 키르케
【작성】 가담항설 - 떠도는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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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이지 최종 수정일: 2017년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