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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폴론 – 트로이의 수호신
아폴론은 트로이 전쟁에서 가장 꾸준하고 적극적으로 도시를 수호한 올림포스의 신이었다. 오래전 포세이돈과 함께 트로이의 성벽을 세운 인연을 간직한 그는 전쟁이 시작되자 역병과 예언, 은빛 활과 신성한 힘으로 도시를 도왔다. 헥토르를 보호하고 아이네이아스를 구했으며, 파리스의 화살을 이끌어 아킬레우스의 운명을 완성하는 등 전쟁의 결정적인 순간마다 인간의 삶과 죽음에 개입하였다. 트로이의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마지막까지 도시를 떠나지 않았던 그는 영원한 트로이의 수호신으로 기억된다.
1.1 신이 세운 성벽
아폴론은 빛과 예언, 음악과 궁술을 다스리는 올림포스의 신이었지만, 트로이와는 다른 어떤 도시보다도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다. 오래전 제우스의 명령으로 포세이돈과 함께 인간 세상에 내려온 그는 트로이 왕 라오메돈을 섬기게 되었다. 어떤 전승에서는 포세이돈이 거대한 성벽을 쌓는 동안 아폴론이 이다산에서 왕의 가축을 돌보았다고 하며, 다른 전승에서는 두 신이 힘을 합쳐 트로이의 성곽을 완성했다고 전한다. 어느 이야기에서든 아폴론의 손길과 기억은 도시의 탄생과 깊이 연결되어 있었다.
그러나 성벽이 완성되자 라오메돈은 약속한 보수를 내놓지 않았다. 그는 자신을 위해 일한 존재들이 신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들을 모욕하며 내쫓았다. 포세이돈은 바다의 괴물을 보내 트로이 해안을 황폐하게 하였고, 아폴론은 역병을 퍼뜨려 왕의 오만을 벌하였다. 아폴론에게 그 재앙은 도시 전체를 향한 증오가 아니라, 신과의 약속을 저버린 통치자에게 책임을 묻는 심판이었다.
세월이 흘러 라오메돈은 사라지고 프리아모스가 왕위에 올랐지만, 아폴론은 자신이 바라보았던 성벽과 그 안에 살아가는 사람들을 잊지 않았다. 그는 왕의 죄와 백성의 삶을 같은 것으로 여기지 않았다. 트로이는 배신자의 도시이기 이전에 자신의 힘과 기억이 남아 있는 장소였으며, 수많은 인간이 삶을 이어 가는 터전이었다. 훗날 거대한 전쟁이 시작되었을 때 아폴론은 오래 고민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한때 세우고 지켜본 도시의 편에 다시 서기로 선택하였다.
포세이돈과 함께 트로이 성벽을 세우는 아폴론
1.2 크리세스의 기도
트로이 전쟁이 이어지는 동안 그리스 군은 주변 도시들을 약탈하며 수많은 전리품과 포로를 차지하였다. 그 가운데에는 아폴론의 사제 크리세스의 딸 크리세이스도 있었다. 크리세스는 막대한 몸값과 신의 표지를 지닌 지팡이를 들고 그리스 진영을 찾아가 딸을 돌려보내 달라고 간청하였다. 대부분의 장수들은 사제의 신분을 존중하여 그의 요청을 받아들이자고 하였지만, 아가멤논은 노인을 모욕하며 다시 나타나면 목숨을 잃을 것이라고 위협하였다.
쫓겨난 크리세스는 파도 소리만 들리는 해변으로 걸어가 두 손을 들었다. 그는 자신이 오랫동안 신전을 돌보고 제단에 향을 피우며 아폴론을 섬겨 왔음을 되새기고, 짓밟힌 명예와 빼앗긴 딸을 위해 신이 응답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멀리서 모든 것을 듣는 아폴론에게 그 목소리는 결코 작지 않았다. 사제를 모욕한 행위는 곧 그가 섬기는 신의 권위까지 짓밟은 것이었으며, 아폴론은 인간의 오만이 신성한 질서를 무너뜨리는 모습을 침묵 속에서 바라보았다.
아폴론은 인간의 전쟁에 무턱대고 개입하려 한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권력을 가진 왕이 신의 사제를 모욕하고도 아무런 대가를 치르지 않는다면, 앞으로 누구도 신전과 제단의 약속을 두려워하지 않을 것이었다. 그는 은빛 활과 화살통을 메고 올림포스를 내려왔다. 이번에 그가 겨누려는 것은 한 사람의 목숨만이 아니었다. 아폴론은 오만한 왕의 선택이 얼마나 많은 사람에게 재앙을 가져오는지 보여 주고, 인간의 권력에도 넘어서는 안 될 경계가 있음을 알리려 하였다.
해변에서 두 손을 들어 아폴론에게 기도하는 크리세스
1.3 은빛 활의 역병
아폴론은 그리스 진영에서 멀지 않은 곳에 내려앉아 조용히 은빛 활을 꺼내 들었다. 《일리아스》는 그의 어깨에 멘 활과 화살통이 걸음을 옮길 때마다 서로 부딪혀 울리는 소리가 신의 분노를 알렸다고 전한다. 인간 앞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그는 홀로 자리를 잡고 활시위를 당겼다. 그의 화살은 한 병사를 겨누는 무기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역병이 되어 진영 전체를 덮쳤다. 인간의 상처를 치유하는 신은 동시에 질병의 화살로 수많은 생명을 거둘 수 있는 두려운 존재이기도 했다.
역병은 가장 먼저 노새와 개 같은 짐승들에게 퍼졌고, 곧 병사들에게까지 번져 나갔다. 진영 곳곳에서는 열병에 쓰러진 이들의 신음이 끊이지 않았으며, 죽은 자를 태우는 장작더미의 불길과 연기가 아침부터 저녁까지 하늘로 피어올랐다. 아폴론은 강대한 군대가 자신의 화살 앞에서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면서도 분노를 거두지 않았다. 아가멤논이 크리세스를 모욕하고 빼앗은 딸을 돌려주지 않는 한, 신성한 질서가 회복되었다고 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아홉 날 동안 재앙이 이어지자 아킬레우스는 군의를 소집하여 그 원인을 밝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예언자 칼카스는 아폴론이 노한 까닭이 크리세스를 모욕하고 크리세이스를 돌려보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밝혔다. 그녀를 아무런 대가 없이 아버지에게 돌려보내고 아폴론에게 정결한 제물을 바쳐야만 역병이 끝날 수 있었다. 신의 뜻이 모든 장수 앞에서 드러나자 아가멤논도 더 이상 자신의 잘못을 감출 수 없었다. 아폴론의 화살은 그리스 군을 쓰러뜨렸을 뿐 아니라, 총사령관의 오만을 세상 앞에 드러내는 심판이 되었다.
그리스 진영을 향해 은빛 활을 당기는 아폴론
1.4 분노한 영웅, 기울어진 전쟁
아가멤논은 크리세이스를 아버지에게 돌려보내야 한다는 칼카스의 말을 마지못해 받아들였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전리품을 잃어 권위가 손상되었다고 여기고, 그 대가로 아킬레우스에게 주어진 브리세이스를 빼앗겠다고 선언하였다. 모욕을 참지 못한 아킬레우스는 총사령관을 향해 칼을 뽑으려 했지만 아테나의 제지를 받았고, 끝내 더 이상 그리스 군을 위해 싸우지 않겠다고 맹세하였다. 그가 미르미돈 군대와 함께 전투에서 물러나자 그리스 진영의 힘과 사기는 크게 흔들리기 시작하였다.
아폴론은 자신이 내린 역병이 인간들 사이에 감추어져 있던 갈등을 드러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그는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에게 서로 다투라고 명령한 적이 없었다. 다만 크리세스의 명예를 짓밟은 죄에 책임을 물었을 뿐이었다. 그러나 신의 심판 앞에서도 잘못을 인정하지 못한 아가멤논은 또 다른 영웅의 명예를 빼앗았고, 인간의 오만은 새로운 분노를 낳았다. 아폴론의 화살은 병사들의 몸을 쓰러뜨렸지만, 그보다 더 깊은 곳에서는 그리스 군의 균열을 열어 놓았다.
아킬레우스가 전장을 떠나자 헥토르와 트로이군은 다시 기회를 얻었다. 아폴론은 무너지려는 전열에 용기를 불어넣고, 그들이 그리스 군을 향해 반격할 수 있도록 힘을 보탰다. 《일리아스》에서 전쟁의 흐름을 처음 크게 뒤흔든 신의 개입은 바로 크리세스의 기도에 응답한 아폴론의 역병이었다. 그는 한 사제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 활을 들었지만, 그 화살은 아킬레우스의 이탈과 트로이의 반격으로 이어지며 전쟁 전체의 방향을 바꾸는 운명의 사슬을 움직였다.
아테나의 제지를 받으며 칼을 거두는 아킬레우스
2.1 트로이 최고의 영웅
아폴론이 트로이의 수많은 전사 가운데 가장 깊은 관심을 기울인 인물은 프리아모스의 장남 헥토르였다. 헥토르는 개인의 명성과 전리품을 위해 싸우는 영웅이 아니라, 아내 안드로마케와 아들 아스티아낙스, 그리고 성벽 안에서 살아가는 백성을 지키기 위해 전장에 나서는 왕자였다. 예언의 눈으로 인간들의 마음을 바라보던 아폴론은 헥토르가 두려움을 느끼면서도 책임을 버리지 않는 인물임을 알고 있었다. 조국과 가족을 위해 자신의 생명까지 내놓는 그의 고결함은 질서와 절제를 중시하는 신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투가 거세질 때마다 아폴론은 헥토르의 곁을 지켰다. 헥토르가 아이아스가 던진 거대한 돌에 맞아 쓰러졌을 때에는 직접 다가가 그의 몸에 다시 숨과 힘을 불어넣었다. 트로이군이 그리스 군의 반격에 밀리자 제우스의 아이기스를 들고 적진을 향해 나아가 그들의 전열을 흔들었다. 때로는 인간의 모습을 빌려 트로이 전사들을 독려하였고, 헥토르에게는 자신의 정체를 밝힌 채 두려움을 버리고 다시 전장에 설 힘을 주었다.
아킬레우스가 전투를 거부하는 동안 헥토르는 아폴론의 도움을 받아 그리스 군을 해안까지 밀어붙였다. 불길은 그리스 함선 가까이 번졌고, 트로이 시민들은 성벽 위에서 마침내 전쟁이 끝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품었다. 그러나 아폴론은 헥토르의 눈부신 승리 뒤로 다가오는 어두운 운명까지 함께 보고 있었다. 예언의 신인 그는 영웅에게 허락된 시간이 영원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운명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헥토르가 트로이의 방패로 설 수 있도록 자신의 힘을 아끼지 않았다.
쓰러진 헥토르에게 다시 힘을 불어넣는 아폴론
2.2 파트로클로스의 운명
그리스 군이 궁지에 몰리자 파트로클로스는 아킬레우스의 갑옷을 빌려 입고 미르미돈 군대를 이끌어 전장으로 나섰다. 성벽 가까이에서 전쟁을 지켜보던 아폴론은 아킬레우스의 무구를 두른 젊은 영웅이 트로이군을 몰아붙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파트로클로스는 함선에 붙은 불을 끄고 적을 물리치는 데 그치지 않고, 전세를 뒤집은 기세를 멈추지 못하고 계속해서 트로이 성벽으로 돌진하였다. 그는 자신에게 맡겨진 임무를 넘어 도시 안으로 들어가려 했고, 그 순간 아폴론은 더 이상 지켜보기만 할 수 없었다.
아폴론은 성벽 앞에서 세 차례나 파트로클로스의 공격을 막아 냈다. 그가 네 번째로 돌진하자 신은 인간의 눈에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다가가 등과 어깨를 강하게 쳤다. 파트로클로스의 정신은 흐려지고 머리에 쓰고 있던 투구가 땅에 떨어졌으며, 긴 창은 부러지고 방패와 갑옷마저 몸에서 벗겨졌다. 신의 일격으로 무력해진 그에게 에우포르보스가 먼저 창을 찔렀고, 이어 헥토르가 마지막 일격을 가하였다. 인간의 무기가 그의 생명을 끊었지만, 운명의 문을 연 것은 아폴론의 손길이었다.
아폴론은 그날 트로이의 함락을 막았지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뒤에서 더 거대한 운명이 움직이는 것도 알고 있었다. 친구의 죽음을 전해 들은 아킬레우스는 다시 전장으로 돌아올 것이며, 그의 분노는 마침내 헥토르를 향할 터였다. 신은 한 인간을 쓰러뜨려 당장의 도시를 구했지만, 그 선택이 또 다른 파멸의 문을 열고 있음을 피할 수 없었다. 아폴론에게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은 승리의 순간이 아니라, 신의 개입마저 운명이 짜 놓은 비극의 사슬을 완전히 끊을 수 없음을 깨닫게 한 순간이었다.
파트로클로스의 무장을 벗겨 내는 아폴론의 일격
2.3 운명을 거스를 수 없는 신
파트로클로스의 죽음 뒤 아킬레우스가 전장으로 돌아오자 트로이군은 무서운 기세에 밀려 성벽으로 달아났다. 아폴론은 아킬레우스가 트로이의 전사 아게노르를 죽이려는 순간 짙은 안개로 그를 감싸 구해 냈다. 이어 자신이 아게노르의 모습을 취해 분노한 영웅을 성벽에서 멀리 유인하였다. 아킬레우스가 신의 환영을 뒤쫓는 동안 트로이 병사들은 열린 성문을 통해 안으로 피할 시간을 얻었다. 운명이 허락하는 마지막 순간까지 아폴론은 자신이 지켜 온 도시를 위해 움직였다.
그러나 모든 병사가 성안으로 들어간 뒤에도 헥토르만은 성문 밖에 남았다. 프리아모스와 헤카베가 성벽 위에서 눈물로 들어오라고 외쳤지만, 그는 백성을 이끌고 나갔다가 패배한 책임을 피해 혼자 숨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아킬레우스를 보고 두려움에 사로잡힌 헥토르가 성벽 주위를 달아나는 동안에도 아폴론은 마지막으로 그의 몸에 힘과 빠르기를 불어넣었다. 하지만 제우스가 황금 저울 위에 두 영웅의 죽음을 올렸을 때 저울은 헥토르의 운명 쪽으로 기울었다. 그 순간 아폴론은 더 이상 그를 지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아폴론은 헥토르를 버린 것이 아니라 신조차 넘어설 수 없는 질서 앞에서 물러났다. 아테나는 데이포보스의 모습으로 헥토르를 속여 아킬레우스와 맞서게 하였다. 헥토르는 창을 다시 받으려는 순간 데이포보스가 사라졌음을 깨닫고, 자신이 아테나의 계략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그는 죽음이 다가왔음을 인정하면서도 명예롭게 싸우기 위해 아킬레우스를 향해 마지막으로 돌진하였다. 미래를 볼 수 있으나 모든 미래를 바꿀 수 없는 아폴론에게 헥토르의 최후는 자신의 힘에도 끝이 있음을 알려 준 가장 깊은 비극이었다.
황금 저울 아래 헥토르에게서 물러나는 아폴론
2.4 마지막까지 지킨 명예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가라앉지 않았다. 그는 시신의 발목을 전차 뒤에 묶어 트로이 성벽 앞을 끌고 다니며 죽은 영웅을 모욕하였다. 성벽 위에서 프리아모스와 헤카베, 안드로마케와 시민들이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본 아폴론은 살아 있는 헥토르를 구하지 못한 슬픔보다 더 깊은 분노를 느꼈다. 죽음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지만, 죽은 자의 존엄을 짓밟는 행동까지 운명의 이름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아폴론은 검은 구름으로 헥토르의 시신을 덮어 뜨거운 태양이 피부를 마르게 하지 못하게 하였다. 거친 땅 위를 끌려 다니는 동안에도 신의 보호가 그의 몸을 감쌌고, 아프로디테 역시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 시신이 훼손되지 않도록 지켜 주었다. 올림포스의 신들이 아킬레우스의 행동을 바라보는 가운데 아폴론은 가장 강하게 그를 비판하였다. 헥토르는 늘 신들에게 제물을 바치고 가족과 백성을 지킨 인간이었으므로, 죽은 뒤에도 마땅한 예우를 받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침내 제우스는 프리아모스가 그리스 진영으로 가서 아들의 시신을 되찾도록 허락하였다. 늙은 왕은 헤르메스의 인도로 아킬레우스를 찾아가 그의 손에 입을 맞추고, 아버지의 마음에 호소하며 헥토르를 돌려 달라고 간청하였다. 아킬레우스도 자신의 아버지 펠레우스를 떠올리며 분노를 거두고 시신을 돌려주었다. 아폴론은 헥토르의 생명을 살리지는 못했지만, 그의 몸과 명예가 끝내 가족에게 돌아가도록 지켜 냈다. 운명 앞에서 물러났던 신은 죽음 이후에 남은 인간의 존엄만큼은 결코 포기하지 않았다.
검은 구름으로 헥토르의 시신을 지키는 아폴론
3.1 파리스의 화살
헥토르가 쓰러진 뒤에도 아킬레우스의 분노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트로이의 장수들과 젊은 전사들을 차례로 죽이며 도시의 마지막 힘을 꺾어 나갔다. 아폴론에게 아킬레우스는 단순한 적장이 아니었다. 그는 신이 지키려 한 트로이를 피로 물들였고, 일부 전승에서는 아폴론과 깊은 인연을 지닌 테네스와 트로일로스의 죽음에도 관여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폴론은 개인적인 원한만으로 그를 쓰러뜨리려 하지 않았다. 그는 아킬레우스에게 오래전부터 예고되어 있던 죽음의 때가 다가오고 있음을 알고 있었다.
마침내 파리스가 성벽 가까이에서 활을 들었을 때 아폴론은 그의 곁에 섰다. 파리스는 뛰어난 궁수였지만 아킬레우스를 정면으로 쓰러뜨릴 수 있는 전사는 아니었다. 여러 전승에서 그가 쏜 화살은 아폴론의 인도를 받아 아킬레우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고 전한다. 후대의 이야기에서는 그 화살이 영웅의 유일한 약점인 발뒤꿈치를 꿰뚫었다고 설명한다. 인간이 시위를 놓았지만, 화살이 운명의 자리에 닿도록 방향을 이끈 것은 멀리서 정확히 쏘는 은빛 활의 신이었다.
아킬레우스가 쓰러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아폴론은 승리의 기쁨보다 운명의 냉혹함을 느꼈다. 그리스 최고의 영웅조차 자신에게 정해진 죽음을 피할 수 없었고, 그를 쓰러뜨린 파리스 역시 트로이를 구할 수는 없었다. 아폴론은 한 영웅의 생을 끝내어 헥토르와 수많은 트로이인의 죽음에 응답했지만, 도시의 멸망까지 막지는 못하였다. 그의 화살은 복수와 심판의 무기인 동시에, 인간에게 오래전부터 예고된 운명을 완성하는 마지막 손길이었다.
파리스의 화살을 아킬레우스에게 이끄는 아폴론
3.2 미래를 위해 구한 영웅
전쟁이 한창이던 어느 날, 아폴론은 디오메데스의 공격에 쓰러진 아이네이아스를 바라보았다. 아프로디테가 아들을 구하려 했지만 인간 영웅의 공격에 상처를 입고 물러났고, 아이네이아스는 다시 죽음의 위기에 놓였다. 아폴론은 그가 수많은 트로이 장수 가운데 하나에 불과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그는 여신의 아들이자 다르다노스의 혈통을 이어 갈 인물이었으며, 트로이가 무너진 뒤에도 그 왕가의 계보를 남겨야 할 운명을 지니고 있었다.
아폴론은 짙은 구름으로 아이네이아스를 감싼 뒤 전장에서 들어 올려 페르가모스에 있는 자신의 신전으로 옮겼다. 그곳에서 레토와 아르테미스가 그의 상처를 씻고 잃어버린 힘을 되돌려 주었다. 아폴론은 전투가 갑자기 무너지지 않도록 아이네이아스의 모습을 닮은 환영까지 만들어 그리스 군과 트로이군이 계속 싸우게 하였다. 그는 한 인간의 생명을 구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 생존이 전쟁의 하루를 넘어 먼 미래까지 이어지도록 보호하였다.
훗날 아이네이아스가 아킬레우스와 맞섰을 때 죽음에서 그를 구한 신은 포세이돈이었다. 트로이를 미워하던 신조차 다르다노스의 혈통이 살아남아야 한다는 운명을 인정한 것이었다. 아폴론은 그 일을 통해 자신이 구해 낸 생명이 트로이의 마지막 희망임을 더욱 분명히 알게 되었다. 도시는 언젠가 무너질 수 있었지만, 그 안에서 이어진 혈통과 기억까지 사라져서는 안 되었다. 아이네이아스는 멸망 뒤의 시대를 위해 아폴론이 지켜 낸 마지막 불씨가 되었다.
전장에서 아이네이아스를 구해 드는 아폴론
3.3 경고받은 도시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에도 아폴론의 예언하는 눈에는 트로이의 구원이 보이지 않았다. 그리스 군이 진영을 불태우고 해안에서 사라진 뒤 거대한 목마만 남겼을 때, 카산드라는 그것이 승리의 선물이 아니라 멸망을 품은 함정임을 알아보았다. 라오콘 역시 목마를 성 안으로 들여서는 안 된다고 거듭 경고하였다. 진실은 이미 인간의 입을 통해 전해졌지만, 오랜 전쟁에 지친 시민들은 자신들이 듣고 싶은 말만을 믿으려 하였다.
아폴론은 예언의 신이었으나 인간의 마음까지 강제로 움직일 수는 없었다. 카산드라는 아폴론에게서 미래를 보는 능력을 받았지만, 두 존재 사이에 벌어진 오래된 갈등 끝에 누구도 그녀의 예언을 믿지 않는 운명을 짊어지게 되었다. 아폴론은 자신이 내린 가혹한 벌이 이제 그가 지키려는 도시의 멸망을 막을 마지막 경고마저 무력하게 만드는 모습을 바라보아야 했다. 그의 눈에는 이미 성벽 너머로 번질 불길과 무너질 궁전, 제단 앞에서 쓰러질 프리아모스의 모습이 비치고 있었다.
트로이인들은 카산드라와 라오콘의 경고를 외면한 채 목마를 성안으로 끌어들이고 승리를 축하하는 연회를 열었다. 굳게 닫혀 있던 성문은 열렸고, 오랫동안 도시를 지켜 온 경계심도 함께 풀어졌다. 아폴론은 자신이 보호해 온 사람들이 스스로 운명의 문을 여는 모습을 침묵 속에서 바라보았다. 그는 화살로 적을 쓰러뜨리고 역병으로 군대를 멈출 수 있었지만, 자신이 오래전 내린 벌도, 인간들이 스스로 택한 오만도 이제는 되돌릴 수 없었다. 트로이의 마지막 밤은 신과 인간이 함께 만든 비극의 결말로 다가오고 있었다.
목마를 경고하는 카산드라를 바라보는 아폴론
3.4 무너지는 트로이
깊은 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그리스 병사들이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고 해안의 함대에 신호를 보냈다. 곧 되돌아온 그리스 군이 성안으로 밀려들면서 트로이는 순식간에 전쟁의 불길에 휩싸였다. 아폴론은 한때 포세이돈과 함께 바라보았던 성벽 위로 불꽃이 번지고, 자신을 섬기던 제단과 신전이 무너지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미래를 알고 있었지만 실제로 도시가 사라지는 광경은 예언 속에 비친 그림자와는 다른 무게로 다가왔다. 시작부터 함께했던 장소의 마지막을 바라보는 일은 신에게도 견디기 어려운 슬픔이었다.
왕궁과 거리에서는 비명과 무기 부딪치는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프리아모스는 제우스의 제단 앞에서 목숨을 잃었고, 왕족과 시민들은 불길을 피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인간의 힘으로는 무너뜨리기 어려웠던 성벽도 이미 안으로 들어온 적을 막아 주지 못하였다. 아폴론은 자신이 지켜 온 도시가 외부의 창과 돌이 아니라, 스스로 열어 준 성문 때문에 무너지는 모습을 바라보며 신의 보호에도 끝이 있음을 받아들여야 했다.
그는 더 이상 트로이의 멸망을 막을 수 없었지만, 아이네이아스를 통해 살아남을 혈통과 기억까지 사라지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불타는 거리 어딘가에서는 아이네이아스가 아버지와 아들을 이끌고 탈출할 길을 찾고 있었다. 아폴론이 전쟁 중 지켜 낸 그 생명은 이제 트로이의 이름을 폐허 밖으로 옮길 마지막 희망이었다. 아폴론에게 도시의 붕괴는 완전한 끝이 아니었다. 성벽과 궁전은 불길 속으로 사라질지라도 트로이의 혈통과 이름이 살아남는다면, 자신이 지켜 온 시간과 인간들의 삶까지 모두 사라지는 것은 아니었다.
불타는 트로이와 무너지는 성벽을 바라보는 아폴론
4.1 패배한 도시의 신
아침이 밝았을 때 트로이는 더 이상 예전의 도시가 아니었다. 성벽 안에는 연기와 재만 남았고, 왕궁과 신전은 무너진 돌무더기로 변해 있었다. 아폴론은 폐허 위에 서서 자신이 처음 이곳에 왔던 날을 떠올렸다. 라오메돈을 섬기며 성벽을 세우고, 왕의 배신에 분노하여 역병을 내렸으며, 세월이 흐른 뒤에는 다시 그 성벽을 지키기 위해 전쟁에 뛰어들었다. 도시의 시작과 끝을 모두 지켜본 신은 자신이 지켜 낸 것과 잃어버린 것을 하나씩 되돌아보았다.
아폴론은 트로이를 구하지 못하였다. 헥토르에게 힘을 주었지만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고, 파트로클로스를 쓰러뜨리고 아킬레우스의 운명을 완성했지만 전쟁의 결말까지 뒤집지는 못하였다. 예언의 신으로서 그는 언젠가 이런 날이 올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미래를 미리 안다는 사실이 슬픔을 줄여 주지는 않았다. 오히려 멸망을 미리 알고도 마지막까지 도시 곁에 남아야 했기에, 그가 감당한 고통은 더욱 깊었다.
그럼에도 아폴론은 자신의 선택을 실패라고 여기지 않았다. 신의 의무가 언제나 승리를 보장하는 데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지켜야 할 존재가 있는 동안 그 곁을 떠나지 않고,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며, 죽은 자의 명예를 지키는 것 또한 수호신의 역할이었다. 트로이는 패배했지만 헥토르의 존엄과 아이네이아스의 생명까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아폴론은 무너진 도시의 신이 되었지만, 끝까지 자신의 선택을 바꾸지 않은 수호신으로 남았다.
잿더미가 된 트로이 폐허 위에 홀로 선 아폴론
4.2 살아남은 아이네이아스
불길 속에서 아이네이아스는 늙은 아버지 안키세스를 등에 업고, 어린 아들 아스카니오스의 손을 잡은 채 무너진 도시를 빠져나왔다. 아폴론은 그 모습을 바라보며 오래전 디오메데스의 창에서 그를 구해 냈던 순간을 떠올렸다. 그때 자신이 지킨 생명은 우연히 살아남은 한 전사가 아니었다. 아이네이아스는 트로이의 혈통과 기억을 미래로 옮길 사람이었으며, 도시가 사라진 뒤에야 아폴론의 선택이 지닌 의미는 더욱 분명해졌다.
아이네이아스는 모든 것을 지켜 내지는 못했다. 아내 크레우사는 혼란 속에서 사라졌고, 고향의 궁전과 신전, 조상들의 무덤도 불길 뒤에 남겨야 했다. 그러나 그는 아버지와 아들, 살아남은 백성들을 이끌고 새로운 땅을 향해 떠났다. 아폴론은 그의 여정이 아직 끝나지 않았으며, 언젠가 자신의 신탁과 징조가 그에게 새로운 땅으로 향할 길을 보여 주게 되리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트로이에서 끝난 듯 보였던 왕가의 역사는 바다 너머에서 다시 이어질 운명이었다.
아폴론이 지키려 한 것은 도시의 돌과 성벽만이 아니었다. 그 안에서 이어져 온 혈통과 기억, 신들과 인간이 함께 만든 시간까지 지키려 하였다. 아이네이아스가 폐허를 등지고 걸어가는 모습은 패배 속에서도 꺼지지 않은 마지막 불씨와 같았다. 트로이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지만, 트로이인이 살아 있고 자신의 기원을 기억하는 한 도시의 이름은 완전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었다. 아폴론은 아이네이아스의 생존을 통해 자신이 지킨 희망이 아직 끝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아버지와 아들을 이끌고 트로이를 떠나는 아이네이아스
4.3 신의 의리
아폴론이 트로이의 편에 선 선택은 단순한 애정만으로 설명되지 않았다. 그는 오래전 라오메돈에게 약속을 배신당했고, 그 모욕을 벌하기 위해 역병을 내린 적도 있었다. 포세이돈은 그 배신을 오래 기억하며 훗날 그리스 군의 편에서 트로이와 맞섰지만, 아폴론은 왕의 죄를 도시 전체의 죄로 돌리지 않았다. 라오메돈은 신과의 약속을 저버렸으나, 그 뒤에 살아간 백성과 헥토르, 아이네이아스까지 같은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아폴론에게 정의란 한 번 품은 원한을 영원히 되풀이하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을 섬긴 크리세스의 기도에 응답했고, 조국을 위해 싸운 헥토르를 보호했으며, 미래를 이어 갈 아이네이아스를 구하였다. 그가 지킨 것은 승리할 가능성이 높은 편이 아니라, 신의 보호를 받을 만한 경건함과 책임을 보여 준 인간들이었다. 전황이 불리해지고 도시의 멸망이 분명해진 뒤에도 그는 과거의 배신을 핑계로 트로이를 버리거나 승자의 편으로 돌아서지 않았다.
신의 의리는 반드시 도시를 구해 내는 기적만을 뜻하지 않았다. 살릴 수 있는 생명을 살리고, 죽은 자의 명예를 지키며, 자신이 선택한 자리에서 마지막까지 물러나지 않는 것도 의리였다. 아폴론의 활은 적을 쓰러뜨리는 무기였지만, 동시에 자신이 보호하기로 한 존재를 향한 책임의 상징이었다. 그는 트로이와 함께 승리하지는 못했지만, 패배가 다가온다는 이유로 자신의 선택을 버리지도 않았다. 아폴론이 보여 준 의리는 원한보다 정의를, 승패보다 책임을 선택한 신의 결단이었다.
패배한 트로이를 등지지 않고 끝까지 지키는 아폴론
4.4 영원한 트로이의 수호신
아폴론과 트로이의 인연은 성벽을 세우던 오래전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약속을 배신한 라오메돈에게 역병을 내렸지만, 그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도시를 영원히 미워하지는 않았다. 전쟁이 시작되자 크리세스의 기도에 응답하여 그리스 군을 벌하고, 헥토르에게 힘을 주었으며, 성벽을 넘으려는 파트로클로스의 진격을 막았다. 헥토르가 죽은 뒤에는 시신과 명예를 지켰고, 파리스의 화살을 이끌어 아킬레우스에게 예고된 운명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아폴론은 전능하지 않았다. 그는 미래를 볼 수 있었지만 모든 미래를 바꿀 수는 없었고, 사랑하는 영웅을 보호할 수는 있어도 모이라이가 정한 죽음까지 지울 수는 없었다. 헥토르의 최후와 트로이의 멸망 앞에서 그가 겪은 슬픔은 예언의 신이기에 피할 수 없는 비극이었다. 다가올 파멸을 누구보다 먼저 알면서도 도시를 버리지 않고 마지막까지 그 곁에 남는 것, 그것이 아폴론이 스스로 선택한 운명이었다.
트로이의 성벽은 무너졌지만 아폴론이 지킨 이름과 기억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도시를 구하지 못한 신이었으나 도시를 버리지 않은 신이었고, 승리를 가져오지 못했으나 죽은 영웅의 명예와 살아남은 트로이의 미래를 지켜 낸 신이었다. 그래서 아폴론은 트로이 전쟁에서 단순히 그리스 군과 맞선 올림포스 신으로 남지 않는다. 그는 멸망을 예견하면서도 끝까지 자신이 사랑한 도시의 곁을 떠나지 않은, 영원한 트로이의 수호신으로 기억된다.
트로이 폐허와 떠나는 생존자들을 지켜보는 아폴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