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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리페모스 – 외눈박이 거인
트로이 전쟁을 마친 오디세우스는 고향 이타케를 향한 귀향길에서 키클롭스들이 사는 땅에 이른다. 그곳에서 바다의 신 포세이돈의 아들인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를 만나면서 그의 운명은 크게 바뀌기 시작한다. 오디세우스는 뛰어난 지혜와 침착한 판단으로 절체절명의 위기를 극복하지만, 승리한 뒤 자신의 이름을 밝힌 자만은 포세이돈의 분노를 불러와 귀향을 더욱 멀고 험난하게 만든다. 이 이야기는 힘보다 지혜가 강하다는 사실과 함께, 아무리 뛰어난 영웅이라도 자신의 감정과 명예욕을 절제하지 못하면 승리를 지켜 낼 수 없다는 교훈을 전하는 『오디세이아』의 대표적인 모험담이다.
1.1 바다 끝의 거인들
트로이 전쟁에서 승리한 오디세우스는 열두 척의 함대를 이끌고 오랫동안 그리워한 고향 이타케를 향해 항해를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의 귀향은 전쟁만큼이나 험난한 여정이었다. 폭풍과 거친 파도를 지나던 함대는 어느 날 키클롭스의 땅과 마주한 무인도에 도착하였다. 그곳에는 야생 염소가 가득했고 기름진 초원과 안전한 포구도 있었지만, 밭을 갈거나 가축을 돌보는 사람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오디세우스와 선원들은 섬에서 염소를 사냥하며 지친 몸을 쉬었다.
다음 날 오디세우스는 바다 건너편에 사는 존재들이 어떤 이들인지 직접 확인하기로 하였다. 그는 나머지 함대를 무인도에 남겨 둔 채 한 척의 배와 가장 믿음직한 부하 열두 명을 이끌고 키클롭스의 땅으로 향하였다. 해안에 배를 댄 일행은 내륙으로 들어가다가 젖을 짜는 커다란 그릇과 치즈, 새끼 양과 염소가 가득한 동굴을 발견하였다. 선원들은 주인이 돌아오기 전에 치즈와 가축을 챙겨 배로 돌아가자고 간청하였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낯선 땅의 주인을 직접 만나고 싶어 했다. 그는 동굴의 주인이 그리스인들이 신성하게 여기는 손님 대접의 관습을 지키며 선물을 내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였다. 호기심과 영웅으로서의 자신감은 동료들의 신중한 충고보다 앞섰다. 하지만 그들이 기다린 동굴의 주인은 인간의 법과 환대를 아는 목자가 아니었다. 그곳은 외눈박이 거인 폴리페모스의 거처였으며, 오디세우스의 선택은 귀향길을 바꾸는 운명의 시작이 되었다.
무인도 해안에서 키클롭스의 땅을 바라보는 오디세우스 일행
1.2 포세이돈의 아들
해가 서쪽 바다로 기울 무렵, 동굴 밖에서 거대한 발소리가 땅을 울리기 시작하였다. 이윽고 산처럼 커다란 몸집의 외눈박이 거인이 양 떼를 몰고 모습을 드러냈다. 그는 암양과 염소들을 동굴 안으로 들여보낸 뒤 사람 수십 명이 달라붙어도 움직이기 어려울 만큼 거대한 바위를 굴려 입구를 막았다. 그 거인은 바로 키클롭스 폴리페모스였다. 바다를 다스리는 신 포세이돈과 바다의 님프 토오사 사이에서 태어난 그는 인간이 힘으로 맞서기 어려운 존재였다.
폴리페모스는 불을 밝힌 뒤 동굴 안에 숨어 있던 낯선 인간들을 발견하고 정체를 물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들이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귀향하던 아카이아인이라고 밝히며, 제우스가 보호하는 손님 대접의 법에 따라 환대해 달라고 정중히 청하였다. 그리스인들에게 낯선 여행자를 보호하고 음식과 선물을 내어 주는 것은 신성한 의무였다. 이를 어기는 자는 손님과 나그네의 수호자인 제우스 크세니오스의 노여움을 받는다고 믿었다.
그러나 폴리페모스는 키클롭스들이 제우스나 올림포스의 신들을 두려워하지 않는다며 비웃었다. 그의 세계에는 공동체의 법도, 낯선 이를 보호하는 환대의 의무도 없었다. 그는 가장 가까이에 있던 선원 두 명을 붙잡아 바위에 내리친 뒤 그대로 먹어 치웠다. 오디세우스는 분노하여 칼을 뽑으려 했지만, 거인을 죽이면 입구를 막은 바위를 치울 방법이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감정에 따른 복수는 모두를 동굴에 가두어 죽게 할 뿐이었다. 살아남으려면 힘이 아니라 지혜가 필요했다.
거대한 바위로 동굴 입구를 막는 폴리페모스
1.3 동굴에 갇힌 영웅
밤이 깊어지자 동굴 안에는 죽음 같은 침묵이 내려앉았다. 선원들은 눈앞에서 동료들이 잡아먹히는 모습을 보고 절망에 빠졌고, 누구도 살아 돌아갈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못하였다. 오디세우스 역시 잠든 폴리페모스를 바라보며 허리에 찬 칼을 뽑고 싶은 충동에 사로잡혔다. 그러나 거인을 죽인 뒤에도 사람의 힘으로는 입구를 막은 거대한 바위를 옮길 수 없었다. 지금 칼을 휘두르는 것은 복수를 이루는 일이 아니라 살아남은 모두의 죽음을 앞당기는 선택이었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억누르고 탈출할 방법을 찾기 시작하였다.
다음 날 아침, 폴리페모스는 다시 선원 두 명을 잡아먹은 뒤 양 떼를 이끌고 들판으로 나갔다. 그는 인간들이 달아나지 못하도록 입구의 바위를 다시 굴려 놓았다. 동굴에 남겨진 오디세우스는 주위를 살피다가 거인이 지팡이로 사용하려고 잘라 둔 거대한 올리브나무 기둥을 발견하였다. 그는 부하들과 함께 나무를 적당한 길이로 자르고 한쪽 끝을 뾰족하게 깎았다. 이어 불에 그슬려 단단하게 만든 뒤 동굴 한쪽에 쌓인 가축의 깔짚 아래에 감추어 두었다. 거인을 죽이지 않으면서 저항할 힘을 빼앗을 방법을 준비한 것이다.
오디세우스는 자신과 함께 말뚝을 들어 올릴 네 명의 동료를 제비뽑기로 정하였다. 선택된 선원들은 두려움을 감춘 채 서로를 바라보며 다가올 순간을 기다렸다. 폴리페모스의 거대한 몸과 힘을 정면으로 꺾는 것은 불가능했지만, 그에게 하나뿐인 눈은 가장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트로이의 성벽을 무너뜨린 것도 무력만이 아니라 때를 기다리는 인내와 계략이었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한번 힘이 아닌 지혜로 운명을 바꾸기 위해 거인의 귀환을 기다렸다.
올리브나무 말뚝을 뾰족하게 깎는 오디세우스와 선원들
1.4 인간을 먹는 거인
해가 저물자 폴리페모스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양 떼를 몰고 동굴로 돌아왔다. 그는 거대한 바위로 입구를 막고 양들의 젖을 짜며 치즈를 만드는 평소의 일을 태연하게 이어 갔다. 그러고는 다시 선원 두 명을 붙잡아 목숨을 빼앗은 뒤 먹어 치웠다. 남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도 같은 죽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면서도 저항할 수 없었다. 동굴 안에는 공포와 절망이 짙게 내려앉았지만, 오디세우스는 준비해 둔 계략을 실행할 순간을 기다렸다.
오디세우스는 이스마로스에서 아폴론의 사제 마론에게 받은 진한 포도주를 꺼내 폴리페모스에게 권하였다. 그 술은 물을 여러 배 섞어 마셔야 할 만큼 강하고 향기로웠다. 인간이 만든 포도주의 맛을 알지 못하던 폴리페모스는 크게 만족하여 몇 번이고 더 달라고 요구하였다. 술에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하게 된 거인은 오디세우스에게 이름을 물었고, 그는 자신의 이름이 ‘아무도 아니다’라고 대답하였다. 폴리페모스는 그 말을 믿고 ‘아무도’에게 주는 선물로 가장 마지막에 잡아먹겠다고 웃었다.
마침내 거인이 깊은 잠에 빠지자 오디세우스는 동료들에게 신호를 보냈다. 그는 선택된 네 명의 선원과 함께 불 속에서 달군 올리브나무 말뚝을 들어 올려 폴리페모스의 하나뿐인 눈에 힘껏 찔러 넣었다. 거인은 천지를 뒤흔드는 비명을 지르며 몸부림쳤고, 동굴은 순식간에 혼란에 빠졌다. 그러나 눈을 멀게 하는 것만으로는 탈출할 수 없었다. 오디세우스가 미리 준비한 거짓 이름이 이제 다른 키클롭스들의 도움을 막고, 동료들의 생사를 가르는 두 번째 계략으로 작용할 순간이었다.
달군 말뚝으로 폴리페모스의 눈을 공격하는 오디세우스 일행
2.1 아무도 아니다
눈을 찔린 폴리페모스는 말뚝을 뽑아 던지고 산이 무너지는 듯한 비명을 질렀다. 그는 두 손으로 동굴 안을 마구 더듬으며 인간들을 붙잡으려 했지만, 앞을 볼 수 없어 허공만 휘저었다. 거인의 울음소리가 키클롭스의 땅에 울려 퍼지자 주변 동굴에 살던 다른 키클롭스들이 입구 밖으로 몰려왔다. 그들은 폴리페모스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으며, 누가 힘이나 속임수로 그를 해치고 있는지 물었다. 그들이 바위를 치우고 안으로 들어온다면 오디세우스 일행은 살아남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디세우스는 이미 이 순간을 내다보고 자신의 이름을 숨겨 두었다. 극심한 고통에 몸부림치던 폴리페모스는 동굴 밖을 향해 “아무도가 속임수로 나를 해치고 있다!”라고 외쳤다. 다른 키클롭스들은 그의 말을 사람의 이름이 아니라 평범한 대답으로 받아들였다. 아무도 그를 해치지 않는다면 인간의 공격이 아니라 신이 내린 병이나 피할 수 없는 고통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그들은 포세이돈에게 고통을 거두어 달라고 기도하라는 말만 남긴 채 각자의 동굴로 돌아갔다.
동료들의 도움을 받지 못한 폴리페모스는 남은 밤 동안 분노와 고통에 몸부림쳤다. 그는 입구의 바위를 치운 뒤 자신이 직접 동굴 문 앞에 앉아 인간들의 탈출을 막기로 하였다. 양들이 밖으로 나갈 때마다 등을 하나씩 손으로 만지면 그 사이에 숨어 나가는 인간을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다. 오디세우스는 거인의 눈을 멀게 하고 다른 키클롭스들의 도움까지 막았지만, 아직 동굴 밖으로 나갈 길은 찾지 못하였다. 살아서 빠져나가지 못한다면 포도주와 말뚝, 거짓 이름을 이용한 모든 계략은 완성될 수 없었다.
동굴 밖의 키클롭스들에게 아무도를 외치는 폴리페모스
2.2 양 떼 아래의 탈출
날이 밝자 폴리페모스는 양 떼를 들판으로 내보내기 위해 동굴 입구의 거대한 바위를 옮겼다. 그는 인간들이 양들 사이에 숨어 달아날 것을 염려하여 출입구에 몸을 웅크리고 앉았다. 그리고 양과 염소가 지나갈 때마다 한 마리씩 등을 손으로 더듬어 확인하였다. 눈을 잃었어도 양들 사이에 숨어 나가는 인간은 찾아낼 수 있다고 믿었던 것이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거인의 손이 양들의 배 아래까지는 닿지 않으리라는 사실을 이용하여 새로운 탈출 방법을 준비하였다.
오디세우스는 살아남은 선원마다 몸집이 큰 숫양 세 마리를 한 조로 묶었다. 그리고 가운데 숫양의 배 아래에 선원 한 명씩을 묶었다. 양옆의 숫양들이 사람의 몸을 가려 주도록 한 것이다. 오디세우스 자신은 양 떼 가운데 가장 크고 털이 무성한 숫양의 배 아래에 두 손과 다리로 단단히 매달렸다. 폴리페모스는 양들의 등을 하나씩 만졌지만, 배 아래 숨어 있는 인간들은 발견하지 못하였다. 마지막 숫양이 다가오자 그는 평소 가장 먼저 나가던 양이 오늘은 왜 뒤처졌느냐며 안타깝게 말을 걸었다.
폴리페모스는 그 숫양이 주인의 고통을 슬퍼한다고 생각하며 등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바로 그 아래에는 그의 눈을 멀게 한 오디세우스가 숨을 죽이고 매달려 있었다. 동굴을 벗어난 일행은 양들 아래에서 내려와 서둘러 해안으로 달려갔다. 그들은 폴리페모스의 양 떼까지 배에 싣고 힘껏 노를 저어 바다로 나아갔다. 선원들은 가까스로 죽음을 벗어났다는 사실에 안도했지만, 오디세우스의 마음에는 이름조차 남기지 않은 채 도망치고 싶지 않다는 영웅의 자존심이 점차 고개를 들고 있었다.
숫양들의 배 아래에 매달려 동굴을 빠져나가는 선원들
2.3 오디세우스의 이름
배가 해안에서 사람의 외침이 닿을 만큼 떨어지자 오디세우스는 폴리페모스를 향해 큰 소리로 조롱하였다. 그는 힘없는 여행자들을 동굴에 가두고 잡아먹은 죄로 눈을 잃은 것이라며, 신들이 손님을 해친 악행에 마땅한 벌을 내렸다고 외쳤다. 목소리가 들려온 방향을 알아챈 폴리페모스는 산에서 거대한 바위를 뜯어 바다로 던졌다. 바위는 배 바로 앞에 떨어졌고, 그 충격으로 일어난 파도가 배를 다시 해안 가까이 밀어붙였다. 선원들은 공포에 질려 더는 거인을 자극하지 말라고 간청하였다.
간신히 배를 돌려 다시 먼바다로 나간 뒤에도 오디세우스의 자존심은 가라앉지 않았다. 동료들은 거인이 목소리를 따라 또다시 바위를 던질 수 있다며 침묵해 달라고 매달렸지만, 그는 자신의 승리를 이름 없는 속임수로 남겨 둘 수 없었다. 마침내 오디세우스는 자신이 이타케에 사는 라에르테스의 아들이며, 트로이에서 돌아가는 오디세우스라고 외쳤다. 폴리페모스의 눈을 멀게 한 자가 누구인지 묻는 이가 있다면 바로 그 이름을 말하라고 당당히 선언하였다.
그 순간 오디세우스의 뛰어난 계략은 완성되었지만, 그의 안전은 다시 무너졌다. 이름과 아버지, 고향까지 알게 된 폴리페모스는 이제 원수를 정확히 저주할 수 있게 되었다. 승리의 영광을 남기려는 외침은 자신의 귀향길을 신의 분노 앞에 드러낸 치명적인 실수가 되었다. 트로이를 함락시킨 지혜로운 영웅은 가장 위험한 순간에는 침착함을 지켰지만, 위기를 벗어난 뒤에는 자신을 다스리지 못하였다. 폴리페모스를 이긴 것은 오디세우스의 지혜였으나, 그 승리의 대가를 불러온 것은 그의 이름과 자만이었다.
배 위에서 폴리페모스에게 자신의 이름을 외치는 오디세우스
2.4 오래된 예언
오디세우스의 이름을 들은 폴리페모스는 오래전에 전해 들었던 예언을 떠올렸다. 키클롭스들 사이에 살았던 예언자 텔레모스는 언젠가 오디세우스라는 인간이 찾아와 그의 눈을 멀게 할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다. 폴리페모스는 그 예언을 기억하고 있었지만, 자신을 쓰러뜨릴 오디세우스는 거대한 체격과 압도적인 힘을 지닌 영웅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자신보다 훨씬 작은 인간이 술과 거짓 이름을 이용해 예언을 이루었다는 사실을 쉽게 받아들이지 못하였다.
그는 오디세우스를 향해 자신이 기다렸던 적은 훨씬 크고 강한 존재였다고 외쳤다. 그러나 실제로 그의 눈을 빼앗은 것은 정면에서 힘을 겨룬 전사가 아니라, 약점을 살피고 때를 기다린 지혜로운 인간이었다. 폴리페모스는 오디세우스에게 해안으로 돌아오라고 회유하며 손님 선물을 약속하고,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안전한 귀향을 부탁하겠다고 말하였다. 하지만 오디세우스는 그 말을 믿지 않았다. 그는 포세이돈이 직접 나선다 해도 잃어버린 눈을 되돌려 주지는 못할 것이라며 다시 거인을 조롱하였다.
오디세우스가 제안을 거절하자 폴리페모스의 분노는 더욱 커졌다. 거인은 인간의 지혜에 패배했다는 사실과 오래된 예언이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텔레모스의 예언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것이 어떤 모습으로 이루어질지는 폴리페모스조차 알지 못하였다. 거대한 힘만을 믿었던 그는 작은 인간의 계략을 경계하지 않았고,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이름을 감추어 승리한 뒤 다시 드러냄으로써 새로운 운명을 불러들였다. 예언의 완성은 곧 포세이돈에게 올릴 저주의 시작이 되었다.
텔레모스의 예언을 떠올리며 절규하는 폴리페모스
3.1 아버지에게 올린 기도
오디세우스의 배가 다시 먼바다를 향해 나아가자 폴리페모스는 해안을 향해 두 팔을 들어 올렸다. 그는 바다를 다스리는 아버지 포세이돈에게 자신의 기도를 들어 달라고 호소하였다. 자신이 진정 포세이돈의 아들이고 신이 자신을 아들로 인정한다면, 라에르테스의 아들인 이타케의 왕 오디세우스가 끝내 고향에 돌아가지 못하게 해 달라고 빌었다. 오디세우스가 자신의 이름과 혈통, 고향을 모두 밝혔기 때문에 거인의 저주는 더 이상 이름 없는 적을 향한 분노가 아니었다.
폴리페모스는 만약 운명이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허락한다면, 그가 오랜 세월을 떠돌다가 모든 동료를 잃고 홀로 돌아가게 해 달라고 기도하였다. 자신의 배가 아닌 낯선 이들의 배를 타고 뒤늦게 귀향하며, 고향에 도착한 뒤에도 커다란 고통과 마주하게 해 달라는 저주였다. 이는 훗날 오디세우스가 겪게 될 운명을 놀라울 만큼 정확하게 담고 있었다. 그의 함대와 동료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디세우스는 파이아케스인들의 도움을 받아서야 이타케에 돌아오게 된다.
포세이돈은 아들의 기도를 받아들였고, 이후 오디세우스의 귀향길을 끈질기게 방해하였다. 바다와 폭풍을 다스리는 그의 분노는 오디세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을 더욱 멀고 험난하게 만들었다. 폴리페모스는 다시 거대한 바위를 들어 목소리가 들려온 바다를 향해 던졌다. 바위는 배 뒤편에 떨어져 큰 파도를 일으켰지만, 이번에는 그 물결이 오히려 배를 맞은편 무인도 쪽으로 밀어 주었다. 오디세우스와 동료들은 가까스로 살아남았으나, 바다 위에는 이미 포세이돈의 분노가 길게 드리워지고 있었다.
해안에서 두 팔을 들어 포세이돈에게 기도하는 폴리페모스
3.2 저주받은 바닷길
오디세우스는 맞은편 섬으로 돌아가 기다리던 함대와 다시 합류하였다. 살아남은 선원들은 폴리페모스에게서 빼앗은 양들을 나누었고, 오디세우스는 가장 큰 숫양을 제우스에게 제물로 바쳤다. 그러나 제우스는 그 제사를 기쁘게 받아들이지 않았고, 함대와 동료들이 맞게 될 파멸도 거두지 않았다. 거인의 동굴에서는 지혜가 그들을 구했지만, 바다에서는 인간의 계략만으로 신의 뜻을 피할 수 없었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돛을 올렸지만 이타케로 향하는 길은 점점 멀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의 귀향에는 서로 다른 원인에서 비롯된 수많은 시련이 이어졌다. 아이올로스가 건넨 바람 자루는 동료들의 의심과 욕심으로 열렸고, 라이스트뤼고네스의 공격으로 대부분의 배가 파괴되었다. 키르케의 섬과 죽은 자들의 나라, 세이렌의 노래, 스킬라와 카리브디스의 해협도 차례로 나타났다. 헬리오스의 신성한 소를 잡아먹은 동료들은 제우스가 내린 벼락으로 목숨을 잃었다. 각각의 사건에는 인간의 잘못과 서로 다른 신들의 뜻이 작용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오디세우스가 좀처럼 고향에 이르지 못한 긴 귀향 전체에는 포세이돈의 분노가 드리워져 있었다. 바다의 신은 폭풍과 파도를 일으켜 그의 길을 막았고, 아테나를 비롯한 신들이 귀향을 돕고자 할 때에도 오디세우스를 쉽게 놓아주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에서 승리한 왕이었지만 바다에서는 신의 노여움을 견뎌야 하는 연약한 인간이었다. 폴리페모스에게 밝힌 단 하나의 이름은 거인의 저주를 불러왔고, 가까워 보였던 이타케는 다시 닿을 수 없는 먼 고향이 되었다.
폭풍과 거친 파도 속에서 항해하는 오디세우스의 함대
3.3 홀로 돌아온 왕
폴리페모스의 땅을 떠난 오디세우스는 이어지는 항해에서 배와 동료들을 하나씩 잃었다. 마지막 배마저 헬리오스의 신성한 소를 잡아먹은 죄로 파괴되자 그는 홀로 바다를 떠돌다가 칼립소가 사는 오기기아 섬에 닿았다. 그곳에서 오랜 세월을 보낸 뒤에야 신들의 허락을 받아 다시 항해할 수 있었지만, 포세이돈은 마지막까지 폭풍을 일으켜 그의 뗏목을 부수었다. 오디세우스는 파이아케스인의 땅에 표류하였고, 그들의 도움을 받은 뒤에야 비로소 그토록 그리워하던 이타케로 돌아갈 수 있었다.
그의 귀향은 폴리페모스가 아버지에게 올린 기도와 닮아 있었다. 오디세우스는 트로이에서 함께 출발한 모든 동료를 잃었으며, 자신의 배가 아닌 파이아케스인들의 배에서 깊이 잠든 채 이타케의 해안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오랜 세월 그리워했던 왕국 역시 평온하지 않았다. 왕궁에는 수많은 구혼자가 들어앉아 오디세우스의 가축과 재산을 축내고 있었고, 페넬로페와 혼인하여 이타케의 왕권까지 차지하려 하였다. 고향에 돌아온 영웅에게는 자신의 집과 가족, 왕국을 되찾아야 하는 마지막 싸움이 남아 있었다.
폴리페모스의 저주는 오디세우스를 완전히 파멸시키지는 못했지만, 그의 귀향에서 동료와 함대, 전리품과 오랜 시간을 빼앗았다. 그는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는 정복자가 아니라, 아테나의 도움으로 늙은 걸인의 모습으로 변한 채 왕국에 들어섰다. 거인의 동굴에서 ‘아무도’라는 이름으로 살아남았던 그는 고향에서도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때를 기다려야 했다. 폴리페모스 앞에서 이름을 외쳐 불행을 불러온 영웅은 긴 방황 끝에 침묵과 인내가 지혜를 완성한다는 사실을 행동으로 보여 주었다.
파이아케스인의 배에서 잠든 채 이타케에 도착한 오디세우스
3.4 지혜와 오만 사이
폴리페모스 이야기는 힘으로 맞설 수 없는 거인을 인간의 지혜로 이긴 대표적인 모험담이다. 오디세우스는 정면으로 싸워서는 이길 수 없는 상대를 포도주와 거짓 이름, 올리브나무 말뚝과 숫양을 이용한 계략으로 물리쳤다. 동료들이 절망하거나 복수심에 흔들릴 때에도 그는 상황을 냉정하게 판단하였다. 거인을 즉시 죽이지 않은 인내와 탈출 방법을 준비한 지혜는 트로이 목마를 고안했던 계략가다운 면모를 보여 준다. 힘만을 믿었던 폴리페모스는 바로 그 지혜를 알아보지 못했기 때문에 패배하였다.
그러나 오디세우스의 승리는 완전하지 않았다. 그는 ‘아무도’라는 이름으로 목숨을 구했지만, 안전한 바다에 이르기도 전에 자신의 진짜 이름을 외쳤다. 자신이 이룬 승리를 적에게 알리고 영웅의 명예를 남기고 싶다는 욕망이 절제를 앞선 것이다. 그 결과 폴리페모스는 포세이돈에게 정확한 이름으로 저주를 내릴 수 있었고, 오디세우스의 귀향은 더욱 멀고 험난해졌다. 가장 뛰어난 지혜가 영웅을 구한 순간, 가장 인간적인 자만이 새로운 불행을 불러왔다.
이 이야기가 전하는 핵심은 힘보다 지혜가 강하다는 사실에만 머물지 않는다. 지혜로운 사람이라도 자신의 감정과 명예욕을 다스리지 못하면 승리를 지켜 낼 수 없다는 교훈까지 함께 보여 준다. 오디세우스의 가장 큰 적은 외눈박이 거인만이 아니라 승리 뒤에 고개를 든 자신의 오만이었다. 폴리페모스의 동굴은 그가 지혜로 죽음을 벗어난 장소인 동시에, 절제하지 못한 한마디로 오랜 시련을 시작한 장소였다. 그래서 폴리페모스와의 만남은 오디세우스의 모험 가운데 가장 눈부신 승리이자, 가장 값비싼 실수로 남아 있다.
멀어지는 배와 눈먼 폴리페모스 사이에 선 오디세우스의 운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