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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골
저녁이 이슥해서 들어가면 모두가 시체가 되어서 나온다는 혼골(魂谷)은 영천시 북안면 내포리에 위치하여 있다.
어느 해인가 나라에서는 인재를 등용하기 위해 전국에 과거 실시의 방을 붙이게 되었다. 오랫동안 기다렸다는 듯 기뻐서 눈물까지 흘리던 영천 땅의 한 선비는 집안에서 대대로 가보로 전해오던 상아빛 연적 등을 싼 개나리봇짐을 짊어지고 한양으로 향했다.
몇 날이 걸려 경상도 땅의 끝 추풍령 아랫마을에 도착하게 되었는데 아직도 해가 조금 남아있는지라 마음이 급한 선비는 쉬어가라는 주모의 말을 뿌리치고서 혼자서 추풍령을 넘게 되었다. 산등성이에 올랐을 즈음에 날은 어두워지고 바람이 세차게 불어 길을 잃고 헤매고 있는데 비까지 내려 선비는 어찌 할 바를 몰랐다.
한참 정신을 잃고 허우적거리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반 마장 쯤 앞에 가물가물 불빛이 보이는 것이었다. 이제는 살았구나, 하는 마음에 즉시 찾아드니 웅장한 고가에서 가느다란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선비는 용기를 내어 문을 두드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아무런 기척도 없었다, 하는 수 없이 처마 끝에서 하룻밤 새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선비가 풀썩 주저앉으려 하는데 삐걱 문이 열리며 소복으로 곱게 단장한 여인의 아름다운 자태가 홀연히 나타났다.
“과거 보러가는 길손이 온데, 길을 헤매고 있사오니 잠시 비만 피할 수 있게 해주십시오.”
하고 애걸하는 선비에게 여인은 어쩔 수 없이 승낙하고서 사랑채로 안내 하였다. 잠시 후 진수성찬을 차려와,
“손님 시장 하실 테니 찬이 없음을 나무라지 마시고 맛있게 드십시오.”
“이 무슨 황송한 말씀. 제 생전에 이 같은 진수성찬은 처음이오. 자, 감사히 먹겠소.”
하며 걸신이 들린 사람처럼 먹어대는 선비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서 있던 여인의 눈에 이상한 광채가 돌았다. 이윽고 상을 물리고 숭늉을 떠가지고 온 여인을 바라본 선비는 깜짝 놀랐다. 자기 생전에 이처럼 아름다운 여인네를 본 적이 있던가. 이러한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 지 편히 주무시란 말만 남긴 채 안채로 사라졌다.
그러나 선비는 잠이 올 리가 만무하다. 이리 뒤척 저리 뒤척 삼경이 되었을 때 쯤 묘안이 떠올랐다. 갑자기 아픈 시늉을 하며 죽는다고 고함을 질러 됐다. 이에 놀란 여인이 달려 나와서 무슨 연유냐고 묻더니,
“이 깊은 산중에 더군다나 이 깊은 밤중에 어디 가서 약을 구하겠사옵니까.”
“여보시오 그렇다면 등이라도 좀 두드려 주시겠소. 체한 것 같아 죽을 것만 같소?”
여자 혼자 있는 집에 외간 남자를 들여 놓은 것도 난처한 일인데 이제 등까지 두드려 달라니, 그러나 죽어가는 사람은 외면할 수는 일이다. 또한 비록 옷은 허술할지라도 당당한 체구하며 빼어난 인물이 귀골풍이라 은근히 마음이 없는 것도 아니다. 마지못한 척 선비의 등을 두드리고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옳다구나, 이 기회를 놓치면......”
재빨리 돌아앉은 선비는 덥석 여인을 껴안았다.
“부인, 일찍이 부인처럼 아름다운 여인을 본 적이 없소. 아내로 삼고 싶소.”
“아니 되옵니다. 저는 상을 당한 몸이라......”
하면서 몸을 빼내려는 여인에게,
“내가 과거에 급제한 뒤에 우리 고향에 가서 살면 누가 알겠소.”
“그래도......”
그러나 그것은 마음뿐, 풍만한 육체는 어느 사이 선비의 몸속으로 파고들었다. 격정을 치르고 난 여인은,
“선비님, 부디 과거에 급제 하셔야 되옵니다. 그리고 돌아가는 길에 꼭 저를 데려가 주셔야 되고요.”
“부인 걱정 마시고. 남아일언 중천금인데 어찌 약속을 어기리오. 만약 약속을 어긴다면 후일 애 목숨을 앗아가도 좋소.”
하더니 개나리봇짐 속에서 연적을 꺼내
“이것을 정표로 드리겠소.”
“선비님 이게 없으면 과거는 어찌 치르겠사옵니까. 부디 가져가시고 약속만 지켜주십시오. 만약 저를 버리신다면 죽어서 여우가 될 것입니다.”
“그 무슨 방정맞은 소린가.”
하고 황홀한 웃음을 지었다. 드디어 닭 울음소리와 함께 과거 길로 떠나면서 선비는 다시 한 번 약속을 꼭 지키리라고 맹세하고 훌훌히 길을 떠났다.
과거장에 도착한 선비는 황망 중에 낙방을 하고 이를 상심하여 죽어 버릴까 생각해서나 문득 추풍령에서 만난 여인이 생각이 나서 10년이 걸리더라도 급제를 하여 돌아가리라 생각했다. 그리하여 선비는 우선 먹고 살아야 했기에 염치 불구하고 어느 대갓집 청지기 로 들어가게 되었다. 열심히 일을 한 덕분에 대감마님께서 많은 시간을 할애해 주셨고, 공수를 착실히 하였다. 그러는 사이 세월은 흘러 또 다시 과거 날이 다가왔다. 저번 과거에 실패한 것을 교훈삼아 열심히 공부한 보람이 있어, 급제를 하여 지방의 수령으로 금의환향하게 되었다. 그리고반가이 맞이하여 준 마을 사람들이 주선으로 참한 색시를 얻어 아들까지 낳아 행복한 생활을 누리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아침 관아로 향하는 선비 앞에 홀연히 한 여인이 나타나 잔뜩 노기 띤 얼굴로 선비를 노려보자,
“누구요 당신.”
떨리는 목소리로 선비가 묻자,
“그대는 진정 나를 모르겠는가. 그렇다면 이것을 보아라.”
하며 상아빛 그 연적을 땅바닥에 던져버렸다. 그제서야 정신이 번쩍 든 선비는 수년전의 일을 하나하나 머리 속에 그려졌다.
“오늘 밤 진시 동구 밖 고목나무 앞으로 나오시오.”
떨고 있는 선비에게 한 마디 던진 여인은 안개 속으로 사라졌다. 당황한 선비는 저녁을 드는 둥 마는 둥, 걱정하는 아내의 목소리도 들리지 않는 듯, 부랴부랴 동구 밖에 이르니 여인이 먼저와 기다리고 있었다. 자기를 따라오라고 이른 여인은 깊은 산속으로 걸어가다가 갑자기 꼬리가 아홉이나 달린 백여우로 돌변했다.
“당신을 믿고 기다리다가 지쳐서 목을 매어 죽은 뒤 원한 맺힌 혼이 갈 곳 없이 헤매 다 오늘 여우가 되어 그 원한을 풀고자 한다.”
변명할 새도 없이 선비의 목을 찍어 둘렀다. 그 후로 날이 어두워 이곳에 들어간 사람은모두 시체가 되어 나왔다 하며 한 많은 여우의 혼이 서려있다 하여 혼골이라 불렀다 한다.
출처 : 영천시 홈페이지 (전해오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