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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夷) 웅덩이와 어녀(魚女)
영천시 도동 고갯길에서 봉동에 이르는 국도 중간 지점에서 남쪽으로 쳐다보면 쪽지머리를 한 여인의 실눈썹 같은 아름다운 북안천이 흐른다. 이 강에는 명주실을 한 꾸러미를 드리워도 닿지 않는다는 커다란 웅덩이가 있엇다. 사실 그렇게 깊은 웅덩이였는지는 알 길이 없지만 30여년 전만해도 사람이 들어가면 발이 닿지 않을 정도로 깊은 곳이었다. 지금은 상류에서 밀려온 토석으로 묻혀 웅덩이는 형체도 없고 주위는 사과밭으로 변했거나 공장으로 변하여 있다.
옛날 이 부근에 어(魚)씨 성을 가진 여인이 남편과 함께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살았다고 한다. 비록 생활은 넉넉하지 못하였지만 두 사람의 금슬이 좋아 하루도 웃음이 끊일 날이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남편이 나라의 부름을 받고 변방의 수비병으로 떠나게 되었다. 그는 떠나면서 아내에게 무사히 군무를 마치고 꼭 돌아오겠다고 전제하고, 행여 불행하여 돌아오지 못할 경우에는 집 뒤 대나무가 빨갛게 말라 죽을 테니 기다리지 말라고 일렀다. 어녀(魚女)는 무슨 불길한 말을 그렇게 하느냐며, 당신이 돌아올 날만 기다리겠다고 약속하고 눈물을 흘리며 이별을 하였다.
세월이 흘러 일 년이 지나고 이 년이 지났다. 어녀는 매일같이 대밭에 나가 치성을 드렸다. 제발 제 남편이 오랑캐를 무찌르고 무사히 귀환을 하게 해달라고 기원을 하였다. 그러나 이게 웬일인가? 어느 날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사이 대나무는 모두 핏빛으로 말라 죽어있었다. 엊저녁 치성을 드릴 때만 해도 그처럼 푸르기만 하던 대나무들이 눈 깜짝할 사이에 이처럼 말라 있으니 심상찮은 일이 아닐 수 없었다. 어녀는 불현듯 남편이 떠나 갈 때 한 말이 상기되었다. 사실 그때는 귀담아 듣지 않았는데 지금 생각하니 무심히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이 실감이 났다. 그래서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보이는 것 모두가 캄캄하기만 했다.
몇 날을 두고 곰곰이 생각을 해보았다. 도저히 살고 싶은 마음이 아니었다. 남편이 살아있을 때에는 그래도 기다림이 있어 즐겁게 살았는데 이제 기다림마저 잃어버린 처지이니 세상에 혼자뿐이라는 절망감에 사로잡혔다.
결국 어녀는 남편의 뒤를 따르기로 결심하였다. 아침부터 가산을 정리하고 목욕재계하여 이승을 떠날 모든 준비를 하였다. 그런데 웬일일까! 갑자기 난 데 없는 까치 떼가 나뭇가지가 휘어지도록 몰려와서는 목이 터져라 울부짖는 것이었다. 어녀는 이상하게 생각하였다. 그러나 스스로 목숨을 끊어야 하는 한 여인의 처지를 불쌍히 생각하여 비록 미물이지만 안타까워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 고맙다. 말 못하는 짐승이지만 너희들이 그처럼 나를 아껴주니 죽으면 반드시 남편을 만날 수 있을 것이다.”
속으로 중얼거리며 미리 준비한 새끼줄에 목을 달았다. 또 한 번의 이변이 생겼다. 그토록 지저귀던 까치 떼가 일시에 달려들어 어녀가 매달린 새끼줄을 쪼아 끊어버리는 것이었다. 그리고는,
“여보! 억울하게 객사한 나의 원수를 그냥 두고 어찌 당신이 목숨을 끊으려하오. 기다리고 있으면 반드시 때가 올 것이오. 그때 내 원한을 풀어주시오. 그래야 내가 눈을 감을 수 있지, 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구천을 헤매는 원귀가 될 것이오.”
꿈인 듯 생시인 듯 산울림처럼 은은한 목소리가 어렴풋이 들려왔다. 어녀는 소리가 나는 곳을 쫓아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러나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음성은 틀림없이 남편의 음성이었다. 분명히 꿈은 아닌가보다. 하늘은 파랗고 대밭에서 밀려오는 바람을 받으며 장승처럼 서 있으니 자고 있는 것도 아니다. 그렇다면 무슨 연유일까? 정녕 신의 조화일까? 아니면 혼미한 탓일까? 어녀는 다시 한 번 허벅지를 꼬집으며 자신을 확인해 보았다. 역시 꿈은 아닌 것 같다. 대나무가 마른 것이라든지. 까치 떼가 몰려와 새끼줄을 끊은 것이라든지,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이라든지, 지금까지 벌어진 일련의 사실이 결코 부질없는 것이 아니란 걸 느끼게 되었다. 어녀는 드디어 마음을 고쳐먹고 때를 기다리기로 하였다. 텅 빈 마음은 찢어질 것 같이 아팠지만 남편이 일러준 원수 갚을 날을 기다리기 위하여 참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날그날의 무료한 시간은 하루가 일년처럼 길고 어려웠다. 견딜 수가 없는 공허함에 스스로의 머리를 쥐어뜯기도 하고 미친 사람처럼 발을 동동 구르기도 하다가 강가로 뛰어나가 삽으로 무작정 자갈을 떠올리는 것이었다. 땀이 주르르 흐르고 온몸이 파김치가 되었다. 비록 몸은 고단했지만 한으로 응어리진 마음을 달랠 수 있어 좋았다. 이제 습관처럼 매일 자갈을 떠올리게 되었다. 어느새 웅덩이가 되고 그 웅덩이는 날이 갈수록 넓고 깊어졌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그 날도 웅덩이가 넓어지는 새로운 재미를 느끼며 종일 열심히 삽질을 하고 저녁에는 곤히 잠이 들었다. 잠결에 남편이 나타났다.
“여보 이제 때가 온 것 같소이다. 시간을 지체하지 말고 곡식이 있는 대로 술을 담그시오. 며칠이 지나면 나를 죽인 적의 무리들이 이곳으로 쳐들어 올 것이니 그들에게 양대로 취하게 먹이시오. 그 후에는 당신이 알아서 하시구료.”
꿈이지만 너무나 생생하였다. 어녀는 자리를 차고 일어나 시키는 대로 술을 담그었다. 며칠 후 신통하게도 오랑캐들이 쳐들어 왔다. 그들은 닥치는 대로 사람을 죽이고 재산을 불살라 온 마을을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어녀는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그들에게 예절을 갖춰 맞이하였다. 오랑캐들이 오히려 당황하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은 악을 쓰거나 아니면 당혹하여 도망질을 하는데 남자도 아닌 여자가 추호도 흩트리지 않고 침착하였으니 당황스러웠던 것이다. 그래서 오랑캐들은 숙연하게 어녀를 대하였다. 그럴수록 어녀는 더욱 당당한 품위로 음식상을 차리고 미리 담아두었던 술을 걸러 그들에게 정승으로 권하였다. 그들은 이제 침략자가 아니라 경사스런 잔치집의 손님이 된 기분이었다. 아예 칼을 놓고 흥겨워 덩실덩실 춤까지 추었다.
온종일 법석을 떨다가 밤이 으슥해서야 지칠 대로 지쳤다. 그도 그럴 것이 며칠을 두고 강행군을 한 데다 술까지 취했으니 온전할 리 없었다. 모두가 제멋대로 쓰러져 세상모르게 코를 골며 혼수상태가 되었다. 어녀는 비로소 한숨을 쉬며 올 것이 왔다고 생각했다. 그리고는 버둥거리며 죽어간 남편의 얼굴을 떠올리며 치를 떨었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즉시 산속으로 뛰어가 피신해 있던 마을 장정들을 불러왔다. 마치 물건을 나르듯 한 사람씩 들어다 웅덩이에 쳐 넣었다. 처음에는 버둥거렸으나 이미 힘이 풀린 오랑캐들은 반항을 할 수가 없었다. 칼이나 몽둥이로 싸움을 하지 않고 적을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으니 기쁘지 않을 수 없었다. 수백 명을 수장한 후 어녀는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심심풀이로 파놓은 웅덩이가 이렇게 훌륭하게 사용될 줄은 몰랐기 때문이다.
그리고는 이제 남편의 원한을 풀어주었으니 살아서 할 일이 없다고 생각하곤 조용히 치마를 뒤집어쓰고 자기도 웅덩이 속으로 뛰어 들었다. 훗날 사람들은 이 강에 어녀의 거룩한 혼이 잠들었다고 해서 어천(魚川)이라 불렀으며, 웅덩이는 오랑캐들을 무더기로 수장시켰다고 해서 이(夷) 웅덩이라 칭하여 오늘까지 전하고 있다.
출처 : 영천시 홈페이지 (전해오는 이야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