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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프톨레모스 – 바다를 버린 귀환
트로이 전쟁이 끝난 뒤 네오프톨레모스는 다른 그리스 영웅들과 달리 바닷길을 피하고 육로를 택한다. 피닉스와 헬레노스, 안드로마케와 함께 긴 길을 건넌 그는 몰로시아에 이르러 아킬레우스의 아들이라는 이름을 넘어 새로운 왕으로 자신의 삶을 시작한다.
1.1 전쟁이 끝나다
트로이는 마침내 무너졌다. 십 년 동안 그리스군을 막아 내던 성벽은 불길에 휩싸였고, 거리에는 무너진 집과 달아나는 사람들의 그림자가 뒤섞였다.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 스키로스에서 전쟁터로 불려온 네오프톨레모스도 목마 안에 숨어 성 안으로 들어간 전사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는 아버지가 남긴 갑옷을 입고 싸웠으며, 트로이의 마지막 밤까지 전장을 누볐다.
전쟁이 끝난 뒤 그리스 장수들은 전리품을 나누었다. 네오프톨레모스에게는 헥토르의 아내였던 안드로마케가 돌아갔다. 한때 트로이의 왕자비였던 그녀는 어린 아들의 죽음과 도시의 멸망을 뒤로한 채 승자의 일행을 따라 고향을 떠나야 했다. 네오프톨레모스에게도 승리는 화려하지만은 않았다. 그가 찾아온 트로이에는 아버지 아킬레우스가 없었고, 아버지의 옛 스승이었던 피닉스가 곁에 남아 있었다.
그리스군은 고향으로 돌아갈 준비를 서둘렀다. 해변에는 배들이 늘어서고 병사들은 전리품과 식량을 실었다. 그러나 승리의 기쁨 아래에는 불안이 남아 있었다. 예언자 칼카스는 로크리스의 아이아스가 아테나의 성소에서 저지른 불경 때문에 여신이 노했다고 알렸다. 네오프톨레모스에게 트로이의 함락은 끝이 아니었다. 전쟁에서 살아남은 그 앞에는 이제 어느 길을 택해 돌아갈 것인지 결정해야 하는 또 하나의 시간이 기다리고 있었다.
불타는 트로이를 바라보는 네오프톨레모스와 그리스군
1.2 테티스의 경고
그리스 장수들은 트로이를 떠나는 문제를 두고 갈라졌다. 메넬라오스는 하루라도 빨리 고향을 향해 출항하려 했고, 아가멤논은 노한 아테나에게 제사를 올리며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했다. 오랫동안 한 진영에서 싸웠던 군대는 승리를 거둔 바로 그 순간 서로 다른 길을 택하기 시작했다. 많은 배가 이미 돛을 올릴 채비를 마쳤고, 병사들의 마음은 전쟁터보다 멀리 있는 고향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때 바다의 여신 테티스가 손자 네오프톨레모스에게 경고를 전했다. 다른 군대와 함께 서둘러 바다로 나가지 말고, 테네도스에서 이틀 동안 머물며 신들에게 제사를 올리라는 것이었다. 아킬레우스의 어머니였던 테티스의 말을 네오프톨레모스는 가볍게 여기지 않았다. 그는 출항을 재촉하는 장수들을 따라가지 않고 테네도스에 머물며 신들에게 제사를 올렸다. 전쟁에서는 누구보다 빠르게 칼을 들었던 젊은 전사가 이번에는 발걸음을 멈추었다.
먼저 떠난 그리스 함대의 귀환길에는 폭풍과 재난이 이어졌다. 바다에서는 배들이 흩어지고, 어떤 영웅들은 오랫동안 고향에 이르지 못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그들과 다른 길을 택했다. 트로이에서는 칼과 창이 앞길을 열었다면, 귀환길에서는 서두르지 않고 테티스의 경고를 받아들인 선택이 그의 앞에 새로운 길을 열었다.
테네도스 해변에서 테티스의 경고를 듣는 네오프톨레모스
1.3 바다를 버리다
기다림을 마친 네오프톨레모스는 곧바로 그리스 함대를 뒤따르지 않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는 테티스의 경고를 받아 바닷길을 피하고 육로로 귀환하기로 했다. 그의 곁에는 아버지 아킬레우스를 오래 돌보았던 피닉스와 트로이의 예언자 헬레노스가 있었다. 전쟁의 승자와 패자가 한 무리가 되어, 불타 버린 트로이를 등지고 북쪽과 서쪽의 낯선 길을 향해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트라키아를 지나며 바닷가와 산길을 번갈아 걸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마로네이아 부근에서 먼저 귀향길에 오른 오디세우스를 만났다는 전승도 전한다. 그러나 두 영웅의 길은 오래 겹치지 않았다. 오디세우스는 다시 바다로 나가 수많은 섬과 괴물을 거쳐야 했지만, 네오프톨레모스는 사람과 말이 걸을 수 있는 땅을 따라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같은 트로이의 승자였지만 귀환의 모습은 처음부터 달랐다.
육로라고 해서 안전한 것은 아니었다. 전쟁으로 황폐해진 땅과 낯선 부족들의 영역을 지나야 했고, 낯선 길과 긴 행군은 누구에게도 쉽지 않았다. 그럼에도 네오프톨레모스는 배를 버리고 길 위에 남았다. 거센 바다를 피해 선택한 길은 더 느리고 고된 길이었지만, 그 길은 그를 아버지의 고향으로 곧장 데려가기보다 전혀 새로운 땅으로 이끌고 있었다.
트로이를 뒤로하고 육로로 떠나는 네오프톨레모스 일행
2.1 트로이의 예언자 헬레노스
네오프톨레모스의 일행 가운데 가장 기묘한 동행자는 헬레노스였다. 그는 프리아모스 왕과 헤카베의 아들이며 카산드라의 형제로, 트로이에서 이름난 예언자였다. 전쟁 막바지에 그리스군에게 붙잡힌 그는 트로이를 함락시키기 위해 무엇이 필요한지 알려 주었다. 그 예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오프톨레모스를 전쟁터로 데려오는 일이었다. 두 사람의 인연은 트로이가 무너지기 전부터 시작된 셈이었다.
트로이가 함락된 뒤 헬레노스에게는 돌아갈 왕궁도 나라도 없었다. 네오프톨레모스 역시 승자였지만 자신이 자란 스키로스로 곧장 돌아가지 않았다. 그는 테티스의 경고를 따라 육로를 택했고, 헬레노스도 그 길에 동행했다. 한 사람은 트로이를 무너뜨린 그리스의 전사였고, 다른 한 사람은 멸망한 트로이의 왕자였다. 전쟁터에서는 서로 다른 편에 섰던 두 사람이 이제 같은 길 위에서 서쪽을 향했다.
트로이를 떠난 뒤 두 사람의 처지는 전쟁 때와 달라져 있었다. 헬레노스는 자신이 지키려 했던 왕국을 잃었고, 네오프톨레모스는 승리를 거두었지만 돌아갈 삶을 아직 정하지 못했다. 서로 다른 이유로 트로이를 떠난 두 사람은 이제 같은 행렬 속에서 산길과 들판을 건넜다. 훗날 전승은 네오프톨레모스가 에페이로스에 자리 잡는 과정에도 헬레노스의 신탁이 이어졌다고 전한다. 트로이의 예언자는 전쟁의 끝에서 다시 네오프톨레모스의 새로운 삶과 연결되었다.
헬레노스
2.2 안드로마케와 함께한 길
안드로마케도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트로이를 떠났다. 그녀는 한때 헥토르의 아내이자 트로이 사람들이 존경하던 왕자비였다. 그러나 헥토르는 아킬레우스에게 죽었고, 트로이가 함락된 뒤에는 어린 아들 아스티아낙스마저 살아남지 못했다. 모든 것을 잃은 안드로마케는 전리품 분배에서 네오프톨레모스의 몫이 되었다. 아킬레우스에게 남편을 잃은 여인과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같은 길을 걷게 된 것이다.
안드로마케에게 이 길은 귀환이 아니었다. 돌아가야 할 트로이는 불타 사라졌고, 남편도 아들도 곁에 없었다. 이제 그녀는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승자의 일행을 따라 낯선 땅으로 향해야 했다. 네오프톨레모스 역시 그녀에게 과거를 잊으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트로이 최후의 밤에 프리아모스를 죽인 전사였고, 남편 헥토르를 죽인 아킬레우스의 아들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전쟁이 남긴 깊은 상처가 놓여 있었다.
그러나 긴 여정은 두 사람을 같은 미래로 데려갔다. 안드로마케는 네오프톨레모스와 함께 에페이로스까지 이동했다. 훗날 그녀는 그와의 사이에서 몰로소스를 비롯한 아들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트로이의 왕자비와 아킬레우스의 아들 사이에서 태어난 자손은 몰로시아 왕가의 전승으로 이어졌다. 전쟁 때문에 시작된 동행이 뜻밖에도 새로운 왕가의 시작과 연결된 것이다.
폐허가 된 트로이를 뒤로하고 떠나는 안드로마케와 네오프톨레모스
2.3 피닉스의 마지막 길
긴 육로 여행에서 네오프톨레모스의 곁을 지킨 사람 가운데 피닉스만큼 오래된 인연을 지닌 이는 없었다. 피닉스는 아킬레우스가 어린 시절부터 그를 돌본 스승이자 조언자였다. 아킬레우스가 트로이 전쟁에 나섰을 때에도 미르미돈족과 함께했고, 아킬레우스가 죽은 뒤에는 오디세우스와 함께 스키로스로 가서 어린 네오프톨레모스를 전쟁터로 데려왔다는 전승이 있다. 아버지와 아들을 모두 지켜본 사람이었다.
그러나 피닉스는 네오프톨레모스의 귀환을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육로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하던 중 피닉스는 세상을 떠났다. 네오프톨레모스는 길을 멈추고 그의 장례를 치르고 직접 묻어 주었다. 전쟁터에서 수많은 죽음을 보았던 그에게도 이 죽음은 달랐다. 피닉스는 이름 없는 병사가 아니라, 아버지의 젊은 시절을 기억하고 자신의 출정까지 지켜본 사람이었다.
무덤을 뒤로하고 다시 길을 떠날 때 네오프톨레모스의 곁에는 아킬레우스의 시대를 직접 기억하는 사람이 하나 줄어 있었다. 트로이에서는 그는 늘 ‘아킬레우스의 아들’로 불렸지만, 이제 아버지의 시대를 직접 기억하고 들려줄 사람도 사라지고 있었다. 네오프톨레모스는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 남은 일행을 이끌고 계속 서쪽으로 향했다. 귀환은 점차 아버지에게 돌아가는 길이 아니라 자신의 땅을 찾아가는 여행으로 바뀌고 있었다.
길가에 피닉스를 묻고 마지막 예를 올리는 네오프톨레모스
3.1 몰로시아에 이르다
네오프톨레모스의 일행은 긴 육로 여행 끝에 서북쪽의 에페이로스에 이르렀다. 그곳에는 몰로소이 사람들이 살고 있었다. 아폴로도로스의 전승에 따르면 네오프톨레모스는 몰로소이와 싸워 승리한 뒤 그들의 왕이 되었다. 또 다른 계통의 전승에서는 그의 에페이로스 정착을 헬레노스의 신탁과 연결하기도 한다. 세부는 서로 다르지만, 그의 귀환이 아버지 아킬레우스의 옛 고향으로 곧장 되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는 점은 같다.
트로이를 떠난 뒤 그는 오랫동안 낯선 길을 걸었다. 함께 출발한 피닉스는 도중에 세상을 떠났고,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는 여전히 그의 곁에 있었다. 몰로시아에 도착한 네오프톨레모스는 더 이상 지나가는 귀환병이 아니었다. 그는 이곳에서 자신의 무리를 이끌고 싸웠으며, 마침내 사람들을 다스리는 자리에 올랐다. 전쟁에서 얻은 힘이 이제 새로운 땅에서 왕권을 세우는 힘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다른 그리스 영웅들이 미케네와 필로스, 스파르타의 옛 왕궁을 향해 돌아갈 때 네오프톨레모스의 길은 달랐다. 그는 스키로스에서 자랐고, 아버지 아킬레우스의 프티아는 자신이 직접 다스려 본 적 없는 땅이었다. 그의 긴 귀환의 첫 종착지는 에페이로스가 되었다. 아킬레우스의 아들은 곧장 옛 왕국으로 돌아가는 대신 낯선 땅에서 자신이 다스릴 새로운 왕국을 얻었다.
몰로시아에 도착해 새로운 땅을 바라보는 네오프톨레모스
3.2 새로운 왕가의 시작
네오프톨레모스가 몰로시아에 자리 잡은 뒤 그의 삶에는 혈통이 이어졌다. 안드로마케는 불타는 트로이의 거리만을 뒤돌아보는 포로로 남지 않았다. 전승에 따르면 그녀는 네오프톨레모스와의 사이에서 몰로소스를 낳았고, 다른 전승에서는 피엘로스와 페르가모스도 그들의 아들로 전해진다. 그 가운데 몰로소스의 이름은 훗날 몰로시아 사람들과 왕가의 기원에 연결되었다. 트로이의 왕자비였던 안드로마케와 아킬레우스의 아들 사이에서 새로운 혈통이 에페이로스에 이어진 것이다.
헬레노스도 새로운 땅에 남았다. 멸망한 트로이의 왕자였던 그는 고향의 왕궁으로 돌아갈 수 없었지만, 에페이로스에서 자신의 삶을 이어 갔다. 네오프톨레모스에게도 몰로시아는 잠시 머무는 피난처가 아니었다. 그는 그곳에서 왕으로 자리 잡고 가족과 후손을 두었다. 트로이를 떠날 때 함께 길에 오른 사람들은 저마다 잃어버린 세계를 뒤로한 채 낯선 땅에서 다시 살아갈 자리를 마련했다.
아킬레우스는 트로이에서 짧고 찬란한 명성을 얻었지만 고향으로 돌아오지 못했다. 그의 아들은 전쟁이 끝난 뒤 살아남아 먼 길을 걸었고, 자신의 뒤를 이을 자손을 남겼다. 네오프톨레모스의 이름은 트로이 최후의 밤을 누빈 젊은 전사에게만 머물지 않았다. 그는 몰로시아의 왕이자 그 왕가의 선조로 기억되었고, 아킬레우스의 가문은 새로운 땅에서 다시 이어졌다.
안드로마케와 어린 몰로소스 곁에 선 네오프톨레모스
3.3 아킬레우스의 아들이 돌아온 곳
네오프톨레모스의 귀환에는 다른 영웅들과 다른 끝이 기다리고 있었다. 《노스토이》의 전승에서는 긴 육로 여행을 마친 그가 몰로소이의 땅에 이르렀을 때 할아버지 펠레우스가 그를 알아보았다고 한다. 펠레우스에게 눈앞의 젊은 전사는 단순한 귀환병이 아니었다. 트로이에서 돌아오지 못한 아킬레우스의 아들이며, 한 세대의 죽음 뒤에 살아 돌아온 아이아코스 가문의 후계자였다.
그 뒤의 이야기는 전승에 따라 달라진다. 아폴로도로스는 펠레우스가 아카스토스의 아들들에게 프티아에서 쫓겨난 뒤 죽었으며, 네오프톨레모스가 아버지의 왕국을 계승했다고 전한다. 그러나 그의 이름과 후손이 깊이 뿌리내린 곳은 에페이로스와 몰로시아였다. 스키로스에서 자라 트로이로 불려갔던 소년에게 귀환은 단순히 출발점으로 돌아가는 일이 아니었다. 그는 긴 여행 끝에 자신의 이름으로 다스릴 새로운 땅을 얻었다.
트로이의 해변에서 그는 바다 대신 육지를 선택했다. 그 길에서 피닉스를 묻었고, 헬레노스와 안드로마케를 데리고 낯선 땅을 지나 새로운 왕국에 도착했다. 아킬레우스가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한 영웅이었다면, 네오프톨레모스는 돌아가는 길 자체를 바꾸어 살아남은 아들이었다. 그의 귀환은 집으로 되돌아가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전쟁이 파괴한 세계의 바깥에서 새로운 삶과 왕가를 시작하는 것으로 끝났다.
몰로소이의 땅에서 손자 네오프톨레모스를 맞는 펠레우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