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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파리의 조선 유학생 4
1919년 파리 강화회의 당시 국외 한인(KOREA) 독립운동 단체들의 대표 파견은 대단히 까다롭고 난관이 많았다. 미주 한인 대표는 일본제국의 집요한 반대와 미국 정부의 우유부단한 대처로 여권 발급이 좌절되어 출국하지 못했다. 한편, 러시아 한인 대표는 러시아 혁명의 영향으로 발이 묶여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3개월이 지나 9월에 파리에 도착했다.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사진:동아일보)
독립투사 설산(雪山) 장덕수(張德秀, 1895~1947)는 1916년 일본 와세다대학 졸업 후 조선에 들어왔다가 상하이로 건너갔다. 그는 1918년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결성하고 김규식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 위해 극비리에 조선에 들어와 경비를 구해 상하이에서 김규식에게 전달했다. 이후에 장덕수는 조선에 귀국했다가 조선총독부 경찰에 체포되어 전라남도 하의도에 거주 제한(流配) 조치를 당했다.
일본제국의 초청을 받은 여운형이 1919년 11월 도쿄로 향하던 중, 일본 초청자 측에 “하의도에 있는 장덕수를 통역으로 꼭 데려가야 한다.”라는 조건을 제시하여 장덕수는 극적으로 하의도 섬을 벗어날 수 있었다. 그는 도쿄에서 통역 업무를 마친 후 일제의 삼엄한 감시를 뚫고 상하이로 탈출했다.
동아일보 창간호(사진:동아일보)
1919년 3월 1일 만세 독립투쟁에 큰 충격을 받은 조선총독부는 9월에 사이토 마코토 총독이 부임하자, 문화정치를 표방해 1920년 1월 동아일보, 조선일보, 시사신문 3개 일간지 발행을 허가했다. 일본 내 강경파들이 조선 총독에게 항의하자, 사이토 총독은 “동아일보는 조선 민족의 뱃속에서 끓어오르는 가스를 배출시키는 굴뚝이야! 가스를 제 때에 배출시키지 않으면 쌓이고 쌓여 끝내는 폭발하게 되거든.”이라고 대답했다. 일간지 허가 소식을 접한 중앙학교 교장 인촌 김성수(29세) 선생 등 창간 인사들은 3·1운동 1주년인 1920년 3월 1일 자로 신문을 창간하려 하였지만, 자금 부족으로 한 달 후인 4월 1일 타블로이드판 석간 4면의 창간호를 발행할 수 있었다. 발행 부수는 약 1만 부, 구독료는 3전으로 지금의 약 900원 정도였다.
동아일보는 민족주의, 민주주의, 문화주의를 사시(社是)로 내걸고 출범했다. 첫 사옥은 서울 종로구 화동에 있던 대한제국 학부대신 이용태의 기와집을 월세 120원(1원은 현재 약 3만 원 상당)에 임대해 사용했다. 동아일보 제호 디자인은 창간 약 보름 전 편집회의에서 논의가 시작되어 동아일보에 입사한 춘곡(春谷) 고희동(1886∼1965) 화백이 맡도록 결정했다.
고희동 미술기자는 곧바로 서울 종로구 광교에 있는 한국서화(書畵)협회(1918년 설립) 사무실로 달려가 협회장 성당(惺堂) 김돈희(1871∼1937) 선생 등 서화계 어른들과 제호 디자인을 의논했다. 원로들은 긴급회의를 개최해 제호 디자인을 고구려 강서대묘 벽화를 착상해 용(龍)틀임 문양 속에 하늘을 나는 두 선인(仙人)이 동아일보 제호를 떠받드는 형상으로 의견을 모았다. 김돈희 선생은 동아일보 제호를 예서(隸書)체로 썼다. 이는 동아일보의 비상하는 정신을 담은 것이다. 제호의 글자 꼬리가 위로 치솟아 전체적 비상(飛上) 이미지와 어울려 통일감을 주었다.
초기 동아일보 편집진은 20대 청년으로 구성되어 거침없는 글로 인해 창간된 첫해에 정간 처분을 받았다. 초대사장 박영효가 두 달 만에 물러나고, 장덕수는 초대 주필과 부사장을 맡았다가 1924년 5월에 홍명희에게 주필 자리를 넘겨주었다. 이후 동아일보는 사옥 자리를 옮겨 광화문 사거리에 새 사옥을 지어 1년 5개월의 공사 끝에 1926년 12월 3층으로 건축되었다.
동아일보 광화문 사옥(사진:동아일보)
김규식은 일제 경찰의 삼엄한 감시를 피하려고 1919년 2월 1일 중국인으로 가장하여 상하이에서 인도양으로 가는 선박을 이용해 3월 9일 파리에 도착했다. 일본제국은 파리 주재 일본대사관을 통해 프랑스 외교부에 일본제국 여권을 소지하지 않은 조선인의 입국을 철저하게 조사하고 거절하도록 집요하게 요청했지만, 당시 김규식은 중국 여권이라 무사히 입국했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파리 9구 샤토됭 거리 38번지에 7층 건물에 한국민대표단과 통신국을 설치하고 공식 활동에 나서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를 파리강화회의에 제출하였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김규식의 정당 대표 자격을 문제 삼아 청원서를 수용하지 않아 김규식은 상하이에 긴급 전문을 보냈다. 1919년 4월 11일에 수립된 ‘상하이 임시정부’는 4월 13일 김규식을 외무총장 겸 전권대사로 임명하고 공식 신임장을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로 발송했다. 김규식은 5월 10일 파리강화회의에 정식으로 ‘한국독립에 관한 청원서와 비망록’을 제출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직원(사진:국립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부 직원 사진을 앞줄 왼쪽부터 차례대로 살펴보면 여운형, 중앙에 한국민대표단 고문인 블레베 부부. 맨 오른쪽이 김규식이다. 뒷줄 왼쪽 두 번째는 이관용, 세 번째 조소앙, 맨 오른쪽은 황기환 선생이다. 김규식 전권대사는 스위스에 유학 중인 이관용과 프랑스에서 노동자로 일하던 황기환을 초청했다. 이후 상하이에 있던 김탕, 조소앙, 여운형 등이 파리에 도착해 대표단에 합류했다.
일제강점기 독립투쟁사와 해방 직후 현대사에서 가장 주목받는 인물 중 한 분이 바로 우사 김규식이다. 그는 임시정부에서 부주석을 지낸 위대한 독립투쟁가로 우리 후손들이 반드시 기억해서 모셔야 할 인물이지만, 사람들이 잘 모른다. 광복 80주년을 맞이한 2025년에 이화여자대학교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가 10년 가까운 집필 끝에 《김규식과 그의 시대》(1,842쪽, 3권)라는 한국 현대사 연구의 기념비적인 저작을 돌베개에서 발간했다.
《김규식과 그의 시대》(사진:독립기념관)
역사학자 정병준 교수는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현대사를 전공하고 《역사와 현실》 편집위원장, 이화사학연구소장, 한국문화연구원장, 국사편찬위원회 대한민국임시정부자료집 편찬위원, 대한민국임시정부기념관 건립자문위원 등을 지냈다.
정 교수는 한국현대사 자료를 발굴하여 새로운 자료에 기초해 여운형, 이승만, 김구, 김규식, 박헌영, 현앨리스, 염동진 등 한국현대사의 인물들의 삶을 추적하며 시대와 역사를 긴 호흡으로 이해하려 노력했다. 저서로 《몽양 여운형 평전》, 《우남 이승만 연구: 한국 근대국가의 형성과 우파의 길》(2010), 《한국전쟁》(2006), 《1945년 해방 직후사:현대 한국의 원형》(2023), 《광복 직전 독립운동세력의 동향》, 《독도 1947》,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 역사에 휩쓸려간 비극의 경계인》(2016), 《김규식과 그의 시대》 1~3권(2016), 《샌프란시스코평화조약의 한반도 관련 조항과 한국 정부의 대응》 등의 책을 저술하고, 《역사 앞에서: 한 사학자의 6·25일기》(김성칠 지음, 정병준 해제, 2010) 및 50여 권의 한국 현대사 자료집을 기획·해제했다.
그는 활발한 저술 활동으로 제47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저술상(2006), 독도학술상(2010), 2011년에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한미일 3국의 독도 정책을 입체적으로 규명한 《독도 1947》로 제36회 ‘월봉저작상’을 수상했다. 2015년에는 남과 북 모두에게 버림받았던 현앨리스의 삶을 추적하여 저술한 《현앨리스와 그의 시대》로 제56회 한국출판문화상 학술 부문 저술상을 받았다. 높은 학술적 성과를 인정받아 제22회 이화학술상(2026)을 수상했으며, 《김규식과 그의 시대》를 저술한 저자는 제22회 독립기념관 학술상(2026) 수상자로 7월 30일 선정되어 ‘제81주년 광복절 경축식(2026.8.15.)’에서 수상하게 된다. 송파도서관에 정병준 교수의 책을 검색해 보니 읽지 못한 책이 여러 권 있어 글을 쓰다가 기쁜 마음에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파리위원회청사(1919-1920)(사진:궁인창)
정석해(鄭錫海, 1899~1996)는 평북 철산에서 출생하여 1904년 부친 정주언(鄭伷彦)이 화천(化川)에 세운 인화재(仁和齋)에서 《사략(史略)》과 《대학(大學)》을 배우고 1907년에 명흥(明興)소학교에 입학하였다. 1914년에 평북 선천의 민족 교육기관 신성학교(信聖學校)에서 수학했다. 1916년 교원 자격시험에 합격한 후 창성 대유동(大楡洞)에 있는 프랑스인이 경영하는 소학교 교원으로 부임하였다.
1919년에는 연희전문학교 Y.M.C.A. 회장으로서 3·1 운동에 동참하여 독립 선언서를 인쇄하여 각지에 배포하고 3월 5일 남대문에서 시위를 주동하였다. 그는 일제 형사들의 감시를 피해 3월 18일 만주 안동현으로 피신하여 망명하면서 본격적으로 독립투쟁의 길로 나섰다. 이후 1920년 베이징을 거쳐 상해로 이동해 흥사단(興士團)에 가입하였고, 서양 학문을 배우기 위해 유법검학회(留法儉學會)의 주선으로 프랑스 유학길에 올랐다.
대한민국 임시정부 신년 축하회(1920.1.1)(사진:독립기념관)
낯선 이국땅에서 살아갈 길이 막연했던 조선유학생 정석해와 이정섭은 파리위원부를 찾아가 황기환(1886~1923) 서기장을 만났다. 정석해는 황기환의 주선으로 보베(Beauvais)의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파리와 런던을 오가며 활동했던 황기환 서기장은 한국인 노동자의 일자리 알선에 나서고, 유럽에 온 유학생들도 후원했다. 정석해는 1922년 독일로 옮겨 뷔르츠부르크대학 정치경제학부에 입학하여 마르베의 심리학을 청강하고, 1923년에는 베를린대학에서 좀바르트(Sombart,W.)의 고도 자본주의론을 배웠다.
1924년 파리로 돌아와 파리대학 철학과에 입학하여 라랑드, 델라 끄루아, 레이 교수의 지도 아래 사회학과 경제학 등을 배웠다. 1930년 파리대학을 졸업하고 계속 연구생으로 남아 학업을 이어갔다. 1932년에는 제네바에 체류하는 이승만(李承晩)을 파리로 초청하여 독립운동을 의논했다. 1939년, 19년 만에 조국에 귀국하였으나 변절한 동지의 밀고로 체포되어 일본으로 압송되었고, 12월 조선으로 환송되어 일제의 삼엄한 감시 속에 오랜 기간 연금 생활을 감내하였다.
정석해(鄭錫海) 교수(사진:위키백과)
그는 1945년 광복을 맞이하여 연희전문학교의 교수로 부임하여 1961년 정년 퇴임까지 학생들에게 철학, 수학, 물리, 불어 등을 가르쳤다. 1960년 4·19 혁명 때는 4·25 전국대학교수단 시위를 전면에서 주도하였다. 그는 학문을 대학 안에서 단순하게 연구하는데 그치지 않고, 후학에게 전수하고 교육하는 일에 힘썼다. 연구 논문을 많이 발표하는 것보다 이(理)와 의(義)에 따라 올바르게 실천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1961년 연세대에서 정년 퇴임 후 미국으로 건너가 1996년 향년 97세를 일기로 타계했다.
(다음 회로 이어집니다.)
생활문화아카데미 대표 궁인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