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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레네 – 스파르타의 왕비
제우스의 딸로 태어난 헬레네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으로 이름을 떨치며 스파르타의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떠난 뒤 그녀의 삶은 십 년 전쟁의 한가운데 놓인다. 성벽 위에서 옛 고향의 영웅들을 바라보고, 파리스와 헥토르의 죽음을 겪은 헬레네는 마침내 무너지는 트로이에서 메넬라오스와 다시 만난다. 긴 표류 끝에 스파르타로 돌아온 헬레네는 다시 메넬라오스의 곁에서 왕비로 살아가며, 트로이에서 겪은 지난날을 이야기로 전한다.
1.1 제우스와 레다의 딸
스파르타 왕 튄다레오스의 아내 레다에게 어느 날 제우스가 백조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그 사이에서 헬레네가 태어났다고 전해지며, 그녀는 인간인 튄다레오스의 궁정에서 왕의 딸로 자랐다. 다른 전승에서는 제우스가 네메시스를 쫓아가 결합한 뒤 네메시스가 알을 낳았고, 한 목자가 그 알을 발견해 레다에게 가져다주었다고 한다. 레다는 알을 보관하다 그 안에서 태어난 헬레네를 자신의 딸처럼 길렀다. 전승은 달랐지만 헬레네가 제우스의 딸이라는 점은 같았다.
헬레네는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 클뤼타임네스트라와 함께 스파르타 왕궁에서 성장했다. 어린 시절부터 뛰어난 아름다움으로 사람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 소문은 펠로폰네소스를 넘어 그리스 여러 지역으로 퍼져나갔다. 아직 혼인할 나이가 되기 전부터 왕과 영웅들 사이에서 그녀의 이름이 오르내렸다. 아테나이의 영웅 테세우스도 그 소문을 듣고 제우스의 딸인 헬레네를 자신의 아내로 삼고 싶어 했다.
마침내 테세우스는 친구 페이리토오스와 함께 헬레네를 데려올 계획을 세웠다. 스파르타 왕궁에서 가족의 보호를 받으며 살아가던 어린 공주의 삶은 그렇게 뜻밖의 위기를 맞았다. 훗날 수많은 구혼자와 트로이 전쟁이 그녀의 이름을 둘러싸게 되지만, 헬레네가 고향을 떠나 다른 이들의 욕망과 선택 속에 놓이는 일은 이미 어린 시절부터 시작되고 있었다.
백조의 제우스와 어린 헬레네를 바라보는 레다
1.2 테세우스에게 납치되다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는 자신들이 각각 제우스의 딸을 아내로 삼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은 먼저 스파르타로 향해 어린 헬레네를 붙잡아 데려갔다. 추격을 피한 테세우스는 그녀를 아테나이 한복판에 두지 않고 아티카의 아피드나이에 숨겼다. 그리고 자신의 어머니 아이트라에게 헬레네를 맡겨 보호하도록 했다. 헬레네는 가족과 떨어진 채 낯선 땅에서 지내야 했다. 스파르타에서는 공주가 갑자기 사라진 일로 왕궁 전체가 뒤집혔다.
테세우스는 헬레네를 데려온 뒤 약속대로 페이리토오스의 신부를 구하는 일에 나섰다. 페이리토오스가 선택한 상대는 다름 아닌 명계의 왕비 페르세포네였다. 두 영웅은 살아 있는 몸으로 명계까지 내려갔지만, 하데스의 왕좌 앞에서 붙잡혀 돌아오지 못했다. 테세우스가 사라지자 헬레네를 지키던 힘도 함께 사라졌다. 아피드나이에 남은 아이트라는 어린 헬레네를 지키며 두 영웅의 귀환을 기다렸다.
한편 스파르타에서는 헬레네의 오빠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가 여동생의 행방을 찾아 나섰다. 디오스쿠로이라 불린 두 형제는 그녀가 아피드나이에 있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아직 어린 헬레네를 빼앗긴 스파르타 왕가는 가만히 있지 않았고, 이번에는 두 형제가 군사를 이끌고 아티카로 향했다. 헬레네를 둘러싼 첫 번째 싸움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어린 헬레네를 데리고 떠나는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
1.3 오빠들이 되찾아오다
아티카에 도착한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는 아피드나이로 군사를 이끌었다. 그때 테세우스와 페이리토오스는 페르세포네를 데려오려 명계로 내려간 뒤 돌아오지 못하고 있었다. 두 형제는 아피드나이를 공격해 함락시키고 마침내 헬레네를 찾아냈다. 가족과 떨어져 낯선 땅에서 지내던 헬레네는 오빠들과 함께 다시 스파르타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
디오스쿠로이는 헬레네만 데려간 것이 아니었다. 그녀를 맡아 돌보던 테세우스의 어머니 아이트라도 포로로 붙잡아 스파르타로 데려갔다. 아이트라는 이후 헬레네의 시종으로 오랫동안 곁에 머물렀고, 훗날 헬레네가 트로이로 건너갈 때에도 함께 따라갔다. 어린 시절 아피드나이에서 시작된 두 사람의 인연은 트로이 전쟁의 마지막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고향으로 돌아온 헬레네는 다시 스파르타 왕가의 공주로 살아갔다. 그러나 성장할수록 그녀의 아름다움에 관한 소문은 더 널리 퍼졌다. 마침내 혼인할 나이가 되자 그리스 각지의 왕과 왕자, 영웅들이 헬레네를 아내로 맞으려 스파르타로 몰려들었다. 어린 헬레네를 되찾기 위해 벌어진 싸움은 끝났지만, 이제 튄다레오스는 딸의 혼인을 둘러싸고 더 큰 다툼이 벌어질 것을 걱정해야 했다.
아피드나이에서 헬레네와 재회하는 디오스쿠로이
1.4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가 혼인할 나이가 되자 스파르타에는 그리스 각지에서 수많은 구혼자가 모여들었다. 튄다레오스는 누구를 사위로 선택하더라도 탈락한 자들이 원한을 품고 싸움을 벌일 것을 두려워했다. 결국 구혼자들은 선택된 신랑의 혼인을 모두 함께 지켜주고, 누군가 그 혼인을 침해하면 힘을 합쳐 맞서겠다고 맹세했다. 그 긴 구혼 경쟁 끝에 헬레네의 남편으로 정해진 사람은 아트레우스의 아들이자 아가멤논의 동생인 메넬라오스였다.
헬레네와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에서 가정을 이루었고 딸 헤르미오네를 두었다. 튄다레오스가 왕위를 물려준 뒤 메넬라오스는 스파르타의 왕이 되었으며, 헬레네도 왕비의 자리에 올랐다. 어린 시절 테세우스에게 납치되었던 기억과 수많은 구혼자가 모여들었던 소란은 이제 지나간 일처럼 보였다. 왕궁에는 손님과 재물이 넘쳤고 두 사람의 삶은 오랫동안 평온하게 이어질 듯했다.
그러나 바다 건너 트로이에서 프리아모스의 아들 파리스가 찾아오면서 그 평온은 흔들리기 시작했다. 파리스는 이다산에서 헤라와 아테나, 아프로디테 가운데 가장 아름다운 여신을 가렸고, 그 대가로 아프로디테에게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여인을 약속받은 뒤였다. 그가 스파르타 왕궁의 손님으로 들어왔을 때, 오래전 여신들이 맺은 약속은 마침내 헬레네의 삶과 맞닿게 되었다.
왕좌에 나란히 앉은 메넬라오스와 헬레네
2.1 파리스와 함께 트로이로
트로이의 왕자 파리스가 스파르타를 찾아오자 메넬라오스는 먼 나라에서 온 왕자를 손님으로 맞아 후하게 대접했다. 얼마 뒤 메넬라오스가 크레타로 떠나 왕궁을 비운 사이 파리스와 헬레네는 함께 스파르타를 떠났다. 헬레네가 스스로 파리스를 따랐는지, 아프로디테의 힘에 이끌렸는지, 아니면 강제로 납치되었는지는 전승마다 다르게 전해진다. 그러나 그녀가 파리스와 함께 바다를 건너 트로이에 도착했다는 것은 트로이 전쟁을 전하는 주요 이야기의 출발점이 되었다.
헬레네가 사라졌다는 소식을 들은 메넬라오스는 형 아가멤논에게 도움을 청했다. 파리스가 스파르타 왕궁의 재물까지 가지고 갔다는 소식도 전해졌다. 오래전 헬레네의 구혼자들이 맺었던 맹세가 다시 불려 나왔고, 한때 그녀와 혼인하려 했던 왕과 영웅들은 메넬라오스의 혼인을 지키기 위해 군사를 모았다. 여러 왕국의 함선이 아울리스에 집결하면서 헬레네를 되찾으려는 원정은 점차 그리스 여러 왕국이 참여하는 거대한 전쟁으로 커져갔다.
그 사이 헬레네는 트로이 왕궁에서 파리스의 아내로 살아가기 시작했다. 프리아모스는 그녀를 따뜻하게 대했지만, 왕가와 백성들 가운데에는 전쟁을 불러온 외국 여인이라며 헬레네를 원망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리스 함대가 바다를 건너 트로이 앞에 진을 치자 그녀는 고향 사람들과 새롭게 맺어진 가족이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 한가운데 놓였다. 그렇게 시작된 싸움은 십 년 동안 트로이 성벽 아래에서 이어졌다.
배를 타고 트로이로 향하는 파리스와 헬레네
2.2 성벽 위에서 바라본 고향
전쟁이 이어지던 어느 날 헬레네는 트로이 왕궁에서 베를 짜고 있었다. 그녀가 짜는 커다란 자줏빛 천에는 자신을 두고 싸우는 트로이군과 그리스군의 전투가 새겨지고 있었다. 그때 이리스가 찾아와 양쪽 군대가 잠시 싸움을 멈추고 파리스와 메넬라오스의 결투를 지켜보게 되었다고 알렸다. 옛 남편과 고향 사람들을 보고 싶은 마음이 일어난 헬레네는 아이트라와 클뤼메네를 데리고 스카이아이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 위에는 늙은 프리아모스와 트로이의 원로들이 앉아 있었다. 프리아모스는 헬레네를 가까이 불러 자신은 그녀를 탓하지 않으며 전쟁을 일으킨 것은 신들이라고 위로했다. 그리고 성 밖에 늘어선 그리스 장수들이 누구인지 물었다. 헬레네는 가장 위엄 있게 보이는 아가멤논을 가리키고, 키는 크지 않지만 어깨가 넓은 오디세우스와 거대한 아이아스도 알아보았다. 한때 자신이 살던 세계의 사람들이 이제는 트로이를 포위한 적군으로 서 있었다.
헬레네는 군대 사이에서 오빠 카스토르와 폴뤼데우케스도 찾아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전장을 살펴도 두 사람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는 혹시 자신 때문에 일어난 전쟁이 부끄러워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헬레네는 알지 못했지만 두 형제는 이미 고향 라케다이몬의 땅 아래 잠들어 있었다. 성벽 아래에는 고향의 영웅들이 가득했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보고 싶었던 가족은 그곳에 없었다.
성벽 위에서 그리스 영웅들을 바라보는 헬레네
2.3 두 남편의 결투
파리스와 메넬라오스는 헬레네와 빼앗긴 재물을 걸고 결투를 벌였다. 싸움이 시작되자 메넬라오스가 빠르게 우세를 잡았다. 그는 파리스의 투구를 붙잡아 그리스군 쪽으로 끌고 갔고, 결투가 그대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아프로디테가 투구의 끈을 끊어 파리스를 구해냈다. 여신은 그를 짙은 안개로 감싸 전장에서 빼내고 트로이 왕궁의 침실로 옮겼다.
아프로디테는 늙은 시녀의 모습으로 헬레네에게 다가가 파리스가 방에서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헬레네는 곧 상대가 여신이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그녀는 자신을 또 다른 곳으로 데려가 다른 남자의 아내로 만들 셈이냐며 아프로디테에게 거칠게 맞섰다. 차라리 여신이 직접 파리스의 곁에 머물라고 말했지만, 분노한 아프로디테가 위협하자 끝내 뜻을 거스를 수 없었다.
침실에 들어간 헬레네는 파리스를 따뜻하게 맞지 않았다. 메넬라오스에게 패하고도 살아 돌아온 그를 비웃으며 차라리 다시 나가 싸워보라고 쏘아붙였다. 파리스는 결투의 패배보다 헬레네에게 향한 욕망을 말했고 그녀를 곁에 앉혔다. 성 밖에서는 두 군대가 결투의 결과를 두고 맞서고 있었지만, 승부를 끝낼 수 있었던 순간은 여신의 손에 사라지고 전쟁은 다시 이어졌다.
성벽에서 메넬라오스와 파리스의 결투를 보는 헬레네
2.4 헥토르를 애도하다
트로이 왕가에서 헬레네에게 가장 따뜻하게 대했던 사람 가운데 하나는 헥토르였다. 어느 날 전장에서 잠시 성 안으로 돌아온 헥토르가 파리스를 찾아왔을 때, 헬레네는 자신과 파리스 때문에 사람들이 고통받는다며 스스로를 책망했다. 그녀는 헥토르에게 잠시 앉아 쉬라고 권했지만, 그는 성 밖에서 자신을 기다리는 병사들을 생각하며 곧 다시 전장으로 향했다.
전쟁이 계속되면서 트로이 사람들의 원망은 더욱 깊어졌다. 헬레네는 왕궁 안에서도 자신을 달갑게 여기지 않는 시선을 피할 수 없었다. 그러나 헥토르는 다른 이들이 그녀에게 모진 말을 할 때마다 이를 말리고 부드럽게 대했다. 헬레네에게 그는 파리스의 형이기 전에 적대적인 도시 안에서 자신을 한 사람으로 대해준 드문 사람이었다.
마침내 헥토르가 아킬레우스에게 죽고 그의 시신이 트로이로 돌아오자 헬레네도 장례의 애도에 나섰다. 안드로마케와 헤카베에 이어 그녀는 헥토르가 자신에게 한 번도 모욕적인 말을 하지 않았으며, 누군가 자신을 비난할 때마다 오히려 달래주었다고 울었다. 헥토르가 사라지자 헬레네는 넓은 트로이에서 자신에게 친절한 사람이 더는 남지 않았다고 느꼈다.
돌아온 헥토르의 시신 앞에서 애도하는 헬레네
3.1 파리스가 죽은 뒤
헥토르가 죽은 뒤에도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아킬레우스와 대 아이아스마저 쓰러진 뒤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무너뜨릴 마지막 조건을 찾아 나섰다. 헤라클레스의 활을 가진 필록테테스가 전장으로 돌아왔고, 그의 화살은 마침내 파리스를 꿰뚫었다. 치명상을 입은 파리스는 옛 연인 오이노네를 찾아갔지만 치료받지 못한 채 죽었다. 헬레네의 두 번째 남편도 전쟁 속에서 사라졌다.
파리스의 죽음 뒤에는 곧 헬레네의 새 남편을 둘러싼 다툼이 벌어졌다. 프리아모스의 아들 헬레노스와 데이포보스가 서로 헬레네와 혼인하겠다고 맞섰고, 결국 데이포보스가 선택되었다. 헬레네는 다시 트로이 왕자의 아내가 되었다. 분노한 헬레노스는 도시를 떠나 이다산으로 물러났고, 그 일은 트로이의 운명을 또 한 번 바꾸었다.
그리스군은 트로이를 함락시키는 비밀을 알고 있다는 헬레노스를 붙잡았다. 그는 펠롭스의 뼈와 네오프톨레모스, 그리고 성 안의 팔라디온이 필요하다고 밝혔다. 하나씩 조건을 갖춘 그리스군은 마지막 계책을 준비했다. 파리스의 죽음 뒤에도 헬레네는 트로이를 떠나지 못했고, 이제 그녀가 머무는 도시는 성벽보다 먼저 그 도시를 지켜주던 비밀들을 잃어가고 있었다.
죽은 파리스 뒤에서 데이포보스와 마주한 헬레네
3.2 목마 주위를 돌다
트로이가 무너지기 전 헬레네는 뜻밖의 모습으로 오디세우스와 다시 마주했다. 오디세우스는 자신의 몸에 상처를 내고 누더기를 걸쳐 거지로 변장한 채 트로이 성 안으로 숨어들었다. 많은 사람이 그를 알아보지 못했지만 헬레네는 그의 정체를 눈치챘다. 그녀는 오디세우스를 목욕시키고 옷을 내어준 뒤 그의 정체를 트로이인들에게 밝히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그러자 오디세우스는 그리스군이 세운 계획을 그녀에게 들려주었다. 한 전승에서는 이때 오디세우스가 헬레네의 도움을 받아 트로이를 지키던 팔라디온까지 훔쳐냈으며, 디오메데스의 도움을 받아 그것을 그리스 함선으로 가져갔다고 한다.
얼마 뒤 그리스군은 진영을 불태운 뒤 거대한 목마 하나만 남겨두고 바다로 사라졌다. 트로이인들은 전쟁이 끝났다고 믿고 목마를 성 안으로 끌어들여 승리를 기뻐했다. 그때 헬레네는 데이포보스와 함께 목마 곁으로 다가갔다. 그녀는 거대한 목마 주위를 세 차례 돌며 손으로 표면을 더듬었고, 안에 숨어 있을지 모르는 그리스 장수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고향에 남겨둔 그들의 아내 목소리를 하나씩 흉내 냈다.
목마 안의 전사들은 너무나 익숙한 목소리에 크게 흔들렸다. 특히 안티클로스가 아내의 목소리를 듣고 대답하려 하자 오디세우스가 달려들어 그의 입을 막았다. 헬레네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는 전승에서도 분명하게 설명되지 않는다. 얼마 전에는 변장한 오디세우스를 알아보고도 숨겨주었던 그녀가 이번에는 목마 속 전사들을 찾아내려는 듯 행동했다. 그 알 수 없는 행동을 남긴 채 트로이의 마지막 밤이 다가오고 있었다.
거대한 목마를 돌며 목소리를 흉내 내는 헬레네
3.3 메넬라오스와 다시 마주하다
밤이 깊자 시논이 신호를 보냈고 테네도스 뒤에 숨어 있던 그리스 함대가 트로이 해안으로 돌아왔다. 목마 속에 숨어 있던 전사들도 밖으로 나와 성문을 열었다. 기다리던 그리스군이 한꺼번에 성 안으로 밀려들면서 트로이는 불길과 비명에 휩싸였다. 프리아모스는 제단 앞에서 죽고 왕가의 사람들은 죽거나 포로가 되어 흩어졌다. 헬레네가 십 년 동안 살아온 도시는 단 하룻밤 사이에 무너져 내렸다.
메넬라오스는 데이포보스의 집으로 향해 그를 죽인 뒤 마침내 헬레네와 다시 마주했다. 십 년 전 스파르타 왕궁에서 헤어진 두 사람이 트로이의 폐허 속에서 재회한 순간이었다. 전승에 따르면 메넬라오스는 분노에 차 헬레네를 죽이려고 칼을 들었지만, 다시 마주한 그녀의 모습을 보고 끝내 손을 쓰지 못하고 칼을 내려놓았다. 헬레네는 죽음을 피했고, 다시 메넬라오스와 함께 그리스 함선으로 향하게 되었다.
그날 헬레네와 아이트라의 오랜 인연도 끝을 맞았다. 어린 헬레네가 테세우스에게 납치되었을 때부터 곁에 있었던 아이트라는 무너지는 트로이를 빠져나와 그리스 진영으로 향했다. 테세우스의 아들 데모폰과 아카마스가 할머니를 알아보았고, 데모폰은 아가멤논에게 그녀를 돌려달라고 청했다. 전승에 따르면 아가멤논은 헬레네의 뜻을 물었고, 헬레네가 이를 허락하면서 아이트라는 마침내 자유를 되찾았다. 아피드나이에서 시작된 두 여인의 긴 인연도 트로이의 함락과 함께 끝났다.
불타는 트로이에서 다시 만난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3.4 다시 스파르타의 왕비로
트로이를 떠났다고 해서 헬레네와 메넬라오스가 곧바로 고향으로 돌아간 것은 아니었다. 귀향길에 오른 그리스군은 신들의 분노와 폭풍으로 뿔뿔이 흩어졌고 두 사람도 오랫동안 바다를 떠돌았다. 메넬라오스는 키프로스와 페니키아, 이집트와 리비아 등 여러 땅을 거치며 많은 재물을 모았다. 마침내 고향으로 향하려 했지만 이집트 앞 파로스섬에서 바람이 끊겨 스무 날 동안 발이 묶였다. 그는 그곳에서 바다의 노인 프로테우스를 붙잡아 귀향의 방법을 알아냈다. 프로테우스의 지시에 따라 다시 이집트로 돌아가 신들에게 제사를 올린 뒤, 마침내 헬레네와 함께 스파르타로 돌아왔다.
세월이 흐른 뒤 스파르타 왕궁에 젊은 텔레마코스가 찾아왔다. 아버지 오디세우스의 행방을 찾아다니던 텔레마코스를 본 헬레네는 그의 얼굴과 모습에서 오디세우스를 떠올렸다. 그리고 이 젊은이가 오디세우스가 전쟁터로 떠날 때 갓난아이로 남겨두었던 아들 텔레마코스가 아니냐고 메넬라오스에게 말했다. 죽은 전우들을 떠올리며 왕궁 사람들이 눈물을 흘리자 헬레네는 이집트에서 얻은, 슬픔과 분노를 잊게 한다는 약을 포도주에 섞었다. 그리고 거지로 변장하여 트로이 성 안으로 들어왔던 오디세우스를 자신이 알아보았던 일과 목마를 둘러싼 마지막 밤의 기억을 들려주었다.
이제 트로이에서 벌어진 일은 왕궁에서 손님들에게 들려주는 오래된 이야기가 되어 있었다. 헬레네는 다시 메넬라오스의 곁에서 스파르타의 왕비로 살아갔다. 어린 시절의 납치에서 시작해 수많은 구혼자와 파리스, 십 년 전쟁과 트로이의 멸망까지 그녀의 삶에는 수많은 사람과 신들의 뜻이 얽혀 있었다. 긴 세월 동안 여러 번 고향을 떠나야 했던 헬레네는 마침내 처음 왕비가 되었던 스파르타에서 자신의 지난날을 이야기하며 살아갔다.
스파르타 왕궁에서 텔레마코스를 맞는 헬레네 |